"저 제발 도와주세요.. 선배.. 저.. 임신했어요. 그 사람 애예요...
이 애를 도저히 지울 수 없어요... 그래서.. 그래서.."
전화를 받은 유성국 회장은 차마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다.
한지수와 유성국. 손지영, 그리고 한지수가 임신한 아이의 아빠 김준혁.
이 네 사람은 한국대학교 선후배간이었다.
지수를 사랑한 성국, 그런 성국을 늘 옆에서 지켜본 지영.
지수가 사랑한 사람은 준혁이었고.. 그는 정혼자가 있었다.
이 네사람에게서 시작된 뫼비우스의 띠.
"..꼭 낳아야만 하는거냐? 그 아이를 기를수 없다는건 누구보다 니가 잘 알잖아.. "
"오빠.. 제발요..제발 부탁이예요. 이 아이를 길러주세요.
저와 그 사람 아이가 아닌, 유성집안의 자식으로요..지영언니가..직접..길러주었으면 해요..
언니라면 난.. 안심할 수 있으니깐.. "
거의 흐느끼면 말하는 그녀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다.
"알았다. 내가 연락할테니.."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긴 성국이다.
지영이라면 물론 찬성할테다. 지수는 지영이 친동생처럼 아꼈던 동생이니...
지수와 준혁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자신의 일인것 처럼 진심으로 슬퍼했고..
집안끼리 정략결혼을 해야 할 성국과 지영이었지만..
지수를 생각해.. 성국을 사랑하면서 절레절레 거절했던 지영이었다.
꼬여버린 운명의 실타래에 한가운데서..
그는 결국 지영에게 전화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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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유성고등학교가 겨울방학식을 했다.
삼삼오오 무리지어서 나오는 학생들 중에 단연 눈에 띄는 이안과 이경이 있다.
"야! 유이경~ 같이가자. 자식 의리없게 먼저가다니! 흑흑흑"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시늉까지하면서 이경의 어째를 툭치는 이안.
"너땜에 난 여자친구들과 즐겁게 하교하는 그런건 죽어도 못할거다. 바보야!"
눈을 흘기며 이안을 바라보는 이경.
"많이컸다? 오빠한테 바보라니! 떽!"
"미쳤구나 미쳤어. 꼴랑 11개월 차이나면서 오빠 생색은 헹!"
남매지만 그다지 닮지 않은 두사람.
투덜대면서 걸어가는 이안과 이경이 교문을 막 나서려는데..
꽤 고급스런 차가 그들앞에 끼익 선다.
창이 열리고 이경이 열려진 창안에 사람을 보고 말을건다.
"기사아저씨.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봐요. 애들 다 쳐다보잖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도련님하고 아가씨를 급히 모시고 오라는 사모님의 분부때문에.."
"으이구~ 아저씨 경어체 쓰지 말라니깐요! 우린 아저씨보다 훨씬 어리니깐 말놔도 괜찮아요!! 야! 이안아 빨랑타자."
부잣짓 자녀들 답지않게..
마음 씀씀이가 좋은 이경을 바라보면서 미소짓는 기사아저씨..
뒷좌석에 이경과 이안을 태우고 불과 5분거리의 그들의 집에 간다.
으리으리한 저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만큼.. 커다란 3층집.
높은 벽과 둘러 쌓인 나무들 때문에..잘 보이진 않지만..
세련되고 멋진 집.
대문을 지나.. 잘다듬어진 잔디정원을 걸쳐서 중간문을 열고 들어선다.
서양화가 전공이었던 그들의 어머니 지영이 그린 작품들이 전시된 복도를 통과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들의 집에 누군가 와 있다.
"안녕?"
막 들어선 이안과 이경을 바라보며 인사하는 낯선 또래 남자.
"...엄마.. 얘 누구야?"
"강준이란다. 강준. 아빠친구 알지? 강무혁아저씨.
왜.. 그 아저씨 아들이 호주에 유학 가 있다고 했잖아.
그 애야. 너네보다 나이는 한살 많아 86년 생이거든.
근데 유성고등학교 2학년에 복학할거야. 그 쪽 학교에서 졸업을 안하고 왔는데..
아무래도.. 바로 3학년 들어가기는 좀 힘들잖니.
그리고 당분간은 우리집에서 지낼거란다. 아저씨가 급하게 미국에 가셨거든."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아래위로 강준을 훑어본다.
꽤 커다란 키에 약간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
렌즈를 낀건지.. 참 신기한 회갈색 눈동자.
약간 태워서 구리빛이지만 피부가 좋다.
작은 얼굴인데도 오목조목 잘생겼다.
딱 벌어진 어깨에.. 근육도 좀 있어보이는 몸.
청바지에 그냥 평범한 후드티 하나 걸쳤을뿐인데도 귀티가 자르르 흐른다.
"오케이~ 반갑다. 난 유이안이다. 외국서 살다왔으니 존칭같은건 필요없겠지?
같은학년인데 말도 놓구 이름도 그냥 부르고 그러는거지 뭐"
싱긋웃으며.. 이안이 말한다.
젖살때문인지 웃을때 깨물어지고 싶을정도로 도톰해지는 양볼을 가진 이안.
살짝 쌍꺼풀이 진, 웃으면 눈가의 주름과 함께 휘어지는 눈.
소년의 이미지와 남성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얼굴이다.
강준보다야 키가 약간 작지만.. 180정도는 되어보인다. 통통한 볼과는 다르게 몸은 꽤 말라서..
왠지 젓가락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안이는 1살차이 난다고 하지만 난 엄연히 2살차이 나는데 말 놔도 될까?
오빠라고 불러야되나?'
별 거리낌 없이 할말 다하는 이완과 다르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낯을 많이 가리는 이경은
강준을 바라보며 얼굴을 살짝 찡그린다.
"그래 나도 반갑다. 중학교 2학년때 호주에가서 한국말을 익숙해. 잘부탁한다.
넌 유이경이지? 내가 이집에서 지내는게 별론가보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게 그렇게 밉지만 않다.
그제서야 얼굴을 붉히며 꽤 수줍게 이경이 말을 건넨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불쾌했다면 죄송하구요. 유이경이라고 해요.
전 오빠라고 부를게요. 2살 차이니깐.."
"너 왜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혀? 푸하하하 얘 원래 안이래. 나보다 더 터프하고..
막 날라다녀. 학교 같이 다니다 보면 알겠지만."
"아~ 또 왜 시비야?"
"봐봐.. 지금 표정봤지? 이게 얘 본모습이라니깐~"
"하하하.. 너네랑 있으면 진짜 즐겁겠다. 근데 이경아..오빠라고 부르는건 좋은데 말은 놔라"
존댓말이 불편했는지 빙긋 웃으며 말하는 강준을 보면 이경이 활짝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커다란 눈에 오똑한 코..약간은 토톰한 입술을 가진..
볼에 살이 없어 계란형의 윤곽이 여실히 드러나는 예쁘장한 외모에
키도 크고 늘씬해서..모델몸매라며 다른 애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남매지만 이안과는 상당히 다른 이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