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구모 기동 부대는 하와이습격을 목전에 두고 진주만에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있었다. 항공모함 6척이 2줄로 나란히 항진하고 이것을 감싸는 전함과 순양함, 구축함의 진형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급유선 8척이 따르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전방에 3척의 잠수함이 초긴장상태로 항해하고 있었다. 개전일을 알리는 "니이가따야마 노보레(니가타산을 올라라) 1208"의 암호는 이미 2일에 수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나구모 기동 부대의 편성은 제 1항공모함 전대 "아까기(赤城)", "카가(加賀)"와 제 2항공모함 전대 "소류(蒼龍)", "히류(飛龍)", 그리고 제 5항공모함 전대 "즈이가꾸(瑞鶴)", "쇼가꾸(翔鶴)"를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 이날 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도쿄의 아까사까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는 자동차 한 대가 후문으로 빠져나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이 자동차 안에는 루즈벨트가 히로히또에게 보내는 친서를 휴대한 그루 주일대사가 타고 있었다. 외상관저에서 도고 외상의 마중을 받은 그루 대사는 이 친서를 자신이 직접 일왕에게 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은 일본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는 동남아시아 각 국의 국민과 미국 국민에겐 폭탄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므로 곧 철병 하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위기를 헤쳐갈 수 있는 방법도 고려해 달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같은 시간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에서는 하룻밤 동안 방치해둔 최후 통첩을 부랴부랴 작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쿄에서 급전이 입전되었다.
"도쿄발 제 907호. 극히 중대한 훈령. 우리측 전신 제 901호에 관해 양 대사는 대미회담을 귀지 시간 7일 하오 1시, 합중국 정부(될 수 있는 대로 국무장관)에게 직접 수교하기 바람."
이 훈령에는 암호기계 및 암호서 전부와 일체의 기밀서류를 파기하라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었다. 훈령을 읽고 난 노무라 일본 대사는 곧 헐 장관에게 오후 1시에 회견할 것을 요청했다.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오후 1시인 것이다.
일본 시각 12월 8일 01시.
그러나 이미 일본측의 모든 전보는 미국 측에 의해 캐치되고 있었다. 01시 25분에 일본 측의 전보를 도청한 마셜 참모 총장은 곧 극동방면의 미육군과 카리브징겨의 육군사령부, 하와이 방면 육군사령부 및 제 4군의 각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타전했다.
"일본측은 오늘 동부시간 하오 1시까지 최후통첩과 같은 것을 제출하려 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암호기계를 파기하라는 명령도 내리고 있다. 그들이 지정한 시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적절한 경계태세를 취하라. 이상"
마셜 대장은 그 전보를 해군 부대에도 송신하여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그 전보는 곧 암호화되어 RCA 전보회사의 무전으로 호눌룰루에 송신되었다. 그러나, 하와이의 사령부에 이 전보가 도착된 것은 일본군 기습 6시간 후였다. 기밀유지를 위해서 직통전화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한순간의 행동이 하와이의 일요일 아침을 비극으로 바꿔놓았다.
일본 시각 12월 8일 01시 30분(하와이 시각 06시).
일본기동부대는 이미 전투배치를 끝내고 후지다 중좌가 인솔하는 제 1파 183대는 6척의 항공모함으로부터 날아올라갔다. 공격기 89, 폭격기 51, 전투기 43대의 편성이었다. 그곳에서 진주만까지의 거리는 불과 1시간 50분의 거리였다. 이 무렵 일본육군의 선봉인 다꾸미지대가 해군의 협력 아래 말레이의 코다발에 상륙을 감행하고 있었다. 스기야마 참모총장에게 보낸 기밀전보에는 "12월 8일 01시 30분 코다발 상륙에 성공함."이라고 씌어 있었다.
일본육군은 해군의 진주만 공격보다 1시간 50분 빨리 영국령 말레이에 상륙한 것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이 시간이 바로 태평양전쟁 개전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일본 시각 12월 8일 02시(하와이 시각 06시 30분).
워싱턴의 일본대사관에서는 오꾸무라 1등 서기관이 아직도 최후통첩의 타이프를 치고 있었다. 만일 이것이 지연되면 일본은 무통고 개전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암호의 해독과 타이프에 의한 정서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미 정식 복장으로 갈아입은 노무라 대사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노무라는 헐 장관과의 회견을 45분 늦추자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하와이 시간으로는 상오 7시. 호눌룰루 시가는 일요일의 단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무렵, 오아후섬의 북단에 있는 오파나 육군 레이더 기지에서는 선명한 오실로스코프 반응을 확인하였고, 이를 서둘러 정보센터에 통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군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 날에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하와이로 B-17 폭격기가 배치되었고, B-17들은 캘리포니아의 해밀턴 공군기지를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별 대수롭게 여기고 있지 않은 사이, 레이더 화면의 광점은 돌연 꺼져버렸다. 주위의 산들이 만들어 놓은 레이더 사각에 일본기가 돌입한 것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이다.
일본 시각 12월 8일 03시(하와이 시각 07시 40분).
태평양 상공에서는 138대의 대편대로 이루어진 제 1파 공격대가 고도 3000m의 구름 위를 비행하고 있었다. 해상엔 파도가 거칠었다. 선두의 1대에 탑승한 지휘관 후찌다 중좌는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으며 아래쪽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름 사이를 통해서 섬의 그림자를 찾으려는 것이다. 차츰차츰 목적지에 다다를 시간이 되어갔다.
제 1파 공격대의 선두에서 흰 선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꼬리를 길게 끌었다. 후찌다가 발사한 신호탄이었다. 후찌다는 신호탄을 발사하고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서해안방면으로 향했다. 후찌다의 왼쪽에는 쇼가꾸의 비행대장 다까하시 소좌가 인솔하는 51대의 급강하 폭격기대가 날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48대의 수평 폭격기대, 그리고 수평 폭격기대의 오른쪽 아래에 40대의 뇌격기가 따르고 있었다. 이들 3편대의 상공에는 아까기 소속의 제로 전투기 43대가 엄호하고 있었다.
<진주만 포드섬의 전경>
진주만 상공에 들어선 후찌다 중좌는 쌍안경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수많은 미국함선들이 떼를 지어 정박해 있었다. 전함 네바다, 애리조나, 테네시, 웨스트 버지니아, 메릴랜드, 오클라호마, 캘리포니아, 펜실바니아가 눈에 띄었으나, 기대하고 있던 항공모함은 눈에 띄지 않았다. 3시 15분, 후찌다 중좌는 뒷자리에 앉은 전신원 미즈끼 병조를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전원 돌격의 명령을 내렸다.
"도도도도도‥‥‥." 미즈끼 병조의 손가락이 열심히 키를 두드렸다.
뇌격기대가 반짝이는 햇빛을 받으며 급강하를 시작했다. 급강하 폭격기대는 고도를 높여 돌격 준비에 들어간 모양으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며, 수평 폭격기대는 마지막에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섬의 남서쪽으로 우회했다. 이 하와이 공습의 순서는 미리부터 치밀하게 짜여져 있었다.
제 1파 공격대
①뇌격기대 - 함선 공격
②수평 폭격기대 - 함선 공격
③급강하 폭격기대
㉮포드 섬, 피캄 비행장의 격납고와 지상기를 공격 <다까하시 소좌 지휘하의 26대>
㉯포일러 비행장의 격납고와 지상기를 공격 <사까모도 대위 지휘하의 25대>
④전투기대 - 미군기와 전투, 공중에 미군기가 없을 경우엔 지상기를 총격
제 2파 공격대
①수평 폭격기대 - 함선 공격
②급강하 폭격기대
㉮카노오에, 포드비행장을 공격 <이찌하라 대위 지휘의 27대>
㉯피캄 비행장을 공격 <시마자끼 소좌 지휘의 27대>
③전투기대
㉮피캄 비행장을 공격 <진도오 대위 지휘의 9대>
㉯포드, 포일러 비행장을 공격 <니까이도 대위 지휘의 9대>
㉰카네오레, 베로즈비행장을 공격 <이이다, 구마노 대위 지휘의 17대>
제 1파 공격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급강하 폭격기대가 진주만에 내리꽂히는 것을 시작으로 뇌격기 편대가 맹연습한 대로 초저공으로 날아 들어가 신형 어뢰를 발사한다. 원래 진주만은 수심이 얕기 때문에 통상적인 뇌격기의 공격 방식으로는 어뢰를 발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일본 해군의 노련한 조종사들은 고도 6m의 초저공 비행을 감행하여 신형 어뢰의 운용에 성공한 것이다.
이때까지도 진주만에서는 단 한 대의 요격기도 날아오르지 않았고 지상포화도 침묵하고 있었다. 공습부대의 공격 솜씨는 냉정 침착한 것이었다. 비행장에 줄지어 있는 항공기에는 연기로 인해 목표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바람을 등지고 공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전투기대는 명중률을 올리기 위해 지상 5∼6m의 저공으로 내려와 기관총을 퍼붓고 있었다. 그 중에는 너무 저공으로 날아서 활주로에 프로펠러가 닿은 것이 있었는가 하면, 꼬리날개에 전화선이 걸린 채로 걸고 날아가는 있는 기체도 있었다. 지휘관인 후찌다중좌는 다시 뒷자리의 미즈끼 병조를 돌아보았다. 미즈끼 병조의 손가락이 다시 키를 두드렸다.
"도라 도라 도라.(아군 기습에 성공)."
<미군 공군 기지 폭격 장면>
제 1항공함대 지휘관 나구모 중장은 기함 아까기의 함교에서 기습성공의 보고를 받았다. 일본 시간의 상오 3시 22분, 대본영과 히로시마에 있는 연합함대 사령부도 아까기로부터 이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야마모도 사령관은 무표정한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연이어 이때까지 무전금지령을 받고 있던 각 공격기로부터 속속 공격성공의 보고가 날아들었다.
한편 진주만의 미군은 처음엔 우군기의 연습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자신들이 정말로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혼란에 빠졌다. 일본기의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태평양함대 94척의 대공포는 780문이었으나 병력이 배치된 것은 겨우 1/4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육군은 전 고사포 31문중 포수가 자기 위치에 선 것은 4문에 지나지 않았고 더구나 포탄은 단 1발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진주만의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빈센트 머피 중령이 통신장교를 불러 긴급타전을 명했다.
"진주만 공습. 연습이 아니다."
그것은 해군 작전부장, 대서양함대 사령관, 동양함대 사령관, 기타 전 해상에 있는 모든 부대에 보내지는 것이었다. 이 전신은 미국 서해안 기지의 메이 아일랜드 해군기지를 경유하여 워싱턴에 통보되었다. 또한 이 전파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도 캐치되었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의 통신실에서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연이어 들어온 전문은 모두 그들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것들 뿐 이었기 때문이다.
평화스러운 호눌룰루는 수라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잇따른 폭음과 함께 진주만과 그 부근 진지에서 대공포화가 하늘에 탄막을 쳤다. 그리고 일본기의 공격과 미군의 포탄 파편에 의해 시민들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재산 손해는 무려 50만 달러에 달했다.
"육군정보국에서의 명령을 전합니다. 시민들은 일체 밖으로 나오지 말아주십시오. 전화도 사용해선 안 됩니다. 지금 이 하와이는 적기의 공습을 받고 있습니다. 전화를 쓰지 말 것, 바깥으로 나오지 말 것, 그리고 라디오 뉴스를 잘 들어주십시오."
라디오는 비상사태를 되풀이하여 경고하고 있었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그제서야 타이프를 끝낸 최후통고를 손에 든 노무라와 구루스가 일본대사관을 나서고 있었다. 시각은 하오 1시 50분, 일본 시간으론 상오 3시 50분이다. 그러나 국무성에 도착한 이들은 그곳 대기실에서 약 20분간 기다려야 했다. 이 동안 헐 장관은 진주만 공격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헐 장관이 두 대사와 만나려 했을 때 백악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진주만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보고를 헐 장관에게 되물었다. 헐 장관 역시 잘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일본의 태도로 보아 공격소식은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화기를 놓은 헐 장관은 일본 대사들을 만나야 했다. 그들은 보나마나 루즈벨트의 각서를 거절하러 온 것이거나, 선전통고를 휴대하고 왔을 것이다. 갑자기 장관은 그들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다. 하지만, 진주만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보고가 오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노무라와 구루스가 들고 들어온 것은 역시 일본정부의 통고였다. 그런데 최후통고에서 일본은 여태까지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미일교섭을 계속해도 그 타결의 전망이 없다는 말을 했을 뿐 국교 단절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 일본은 1907년의 `개전에 관한 조약`에 가입하고 있었다. 이것은 개전 절차에 관한 국제 간의 조약으로서 그 제 1조에는 "체약국은 이유를 첨부한 개전선언의 형식 또는 조건부 개전 선언을 포함한 최후통첩의 성질을 가진 뚜렷한 사전통고 없이는 상호간에 전쟁을 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승인한다." 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최후통고에는 이런 것들이 일체 없었으므로 만일 이것이 진주만 공격 이전에 전달되었다 해도 무통고 개전이 되는 것이다.
일본 시각 12월 8일 상오 4시 20분(하와이 시간 상오 8시 20분).
진주만의 하늘에서는 제 1파 공격에 이어 즈이가꾸에서 발진한 제 2파 공격이 개시되고 있었다. 이제 제 1파 공격을 당하기 전에 당당하게 떠 있던 군함들과 지상시설들은 이제 상처투성이가 되어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포화는 이제야 서서히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소류 소속의 급강하 폭격기대가 동해안으로부터 산을 넘어와 침입하기 시작했다. 제 5항공대의 수평폭격대원 고미 일등병은 리시버에서 들려오는 돌격 준비 신호를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도는 800m. 예광탄이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고 있다. 다음 순간 폭격대원들은 일제히 250㎏폭탄을 떨어뜨렸다. 순간 폭풍으로 인해 기체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800m상공에서 250㎏폭탄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기체의 동요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는 동료의 목소리에 정신을 회복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버어버스 만과 산 부근 일대가 온통 검은 연기로 휩싸여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꺼내들고 이 광경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한편 아까기 소속의 야마다 대위는 대공포화가 가장 치열한 곳으로 급강하했다. 포화가 심한 곳에 가장 중요한 목표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급강하하고 있는 곳이 육상포대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기수를 돌려 태평양함대의 기함 펜실바니아를 습격했다. 그가 폭탄을 투하하자 엄청난 폭음과 함께 검붉은 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진주만에는 애리조나, 네바다, 메릴랜드, 테네시,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웨스트 버지니아, 펜실바니아 8척의 전함을 중심으로 유조선과 예인선을 포함한 94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2회에 걸친 공격으로 애리조나는 대폭발을 일으켜 선체가 두 동강이 났고 오클라호마, 웨스트 버지니아, 캘리포니아는 침몰, 네바다, 테네시, 펜실바니아도 침몰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대파되었다. 이밖에도 순양함, 구축함 등의 피해가 많았으며 약 300대에 달하는 비행기를 잃었고 비행장을 비롯한 여러 군사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것은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태평양함대 94척의 18%였으며 전함은 100%손상을 입었다. 그리고 비행기는 88%가 피해를 입었다. 이것은 1차 대전 당시 미해군이 입은 손실을 훨씬 상회하는 숫자였다. 그리고 폭격으로 전사하거나 불타는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등 전사자는 2,403명, 부상자는 1,178명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측의 손해는 전투기 8, 함상 폭격기 15, 함상 공격기 5대등 도합 28대의 항공기를 상실했고 55명이 전사했다. 제 2파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아까기에서는 공격의 지속 여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의 결과 이미 만족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는 이유로 공격부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시간 8시 30분부터 북북서 방향으로 퇴피행을 개시했다. 약 2시간에 걸친 세기의 대기습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결정타를 안 날린 것은 일본 측의 최대 실수였다. 만일 미국이 진주만에 있던 유류 저장창고를 피격당했다면, 그들은 6개월에서 1년까지도 함정을 운용할 수 없을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일본이 제 3파 공격을 안 펼친 덕에 그 위기는 비껴갔으니, 이것은 미국의 행운인가? 일본의 실수인가? 오히려 진주만 기습은 미국 국민의 저력을 발동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기습에서 대파하였던 함정들은 불과 몇 일만에 수리를 끝내 피해가 없었던 태평양 함대와 함께 반격의 칼날을 갈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
진주만 기습당시의 미일 함정 병력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특수잠항정
미 3 9 27 59 0 0
일 6 2 3 11 12 5
진주만 기습 후 미국 손해
침몰
전함 오클라호마,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웨스트 버지니아
부설함 오글라
표적함 유다
손상
전함: 네바다, 펜실바니아, 테네시, 메릴랜드
순양함: 럴리, 호눌룰루, 헬레나
구축함: 케신, 쇼, 다운즈
기타: 커티스, 베스털
오클라호마, 아리조나, 유다 이외에는 모두 수리를 끝내고 다시 전투에 참가
항공기 손해
188대
인적 손실
전사·행방불명 : 해군=2,004명 , 육군=222명 , 해병대=108명
부상자 : 해군 = 912명 , 육군 = 360명 , 해병대 = 7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