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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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이제 코앞이다!
음력개념인 갑오년을 생각하면
나는 갑오경장이라 불리는 1894년 갑오개혁이 먼저 떠오른다.
120년전 갑오년은 말 많고..다사다난하여 갑오개혁,동학혁명,청일전쟁등 큰사건들이 이땅에서 발생했다.
당시 정황을 보면 아주 어수선..하여 열강들이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형국에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얼마나 취약했으면 남의나라 땅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을 벌였겠는가!
안타깝게도 이런 나라같지도 않은 나라에 우리 선대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300년전 1594년 갑오년에도 유사한 상황이 이땅에서 있었으니~~
당시는 임진왜란 전쟁중이었는데..구원군이라는 이여송의 명군과 침략자 일본 사이에 한반도는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었다.
박종화의 "임진왜란"을 보면.. 당시 참상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는데..(중학시절 읽었기에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침략군이라는 일본은 얼레빗질로 약탈해가고..
원군이라는 명군은 한술 더떠 참빗질로 약탈을 자행하고 있으니.."
이처럼 우리나라 땅에서 중국과 일본군대가 300년을 사이로 자기들끼리 제멋대로 전쟁하고 노략질도 하고 ..
그러니~변화에 우물쭈물하다~한번 약소국으로 전락하면 이리 농락 당해도 헤어날 길이 없나 보다.
아뭏든 이런 주변 정세에 조선은 김홍집을 내세워 갑오개혁이라고 뭔가 다른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썻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언발에 오줌누기 사후약방문격!
사실 갑오개혁보다는 그보다 10년전 있었던 김옥균을 중심으로한 갑신정변이 더 위력적이었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김옥균 같은 파괴력있는 인물이 그 중심에 있었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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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평소 자주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한 김옥균 묘소를 찾았다.
김옥균!
난세에 꿈을 못 이룬 풍운아
그 김옥균이 고향 공주가 아닌 이웃땅 아산에 묻혔다.
영인산 휴양림 산자락 아래 비탈에 조성된 김옥균 묘..
그의 묘소를 돌아보며 한때 자주부강 근대국가을 꿈꾸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일으킨 갑신정변과 그 역사적의미를 생각해본다.
비록 정변은 삼일천하 실패로 끝났지만..
그후 일본 망명,중국 상해에서 암살당하기까지
10년동안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
일본 절해고도 오가사와라로 유배되었음에도
당시 일본 최대 바둑가문 본인방의 수장 슈에이와의 친교라든가
정계,외교계의 거물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수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던 그 능력
심지어 그가 죽었을때 무려 7명의 여인들이 서로 그의 위패를 모시겠다고 나섯다하니~~ㅎㅎㅎ
이러니~그의 친화력은 전대미문이다!
유능하고 매력이 넘치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불과 10년동안..고종에게 상소올리랴~ 일본정부와 싸우랴
본국에서 온 자객 피하랴 ~그의 사상 설파하랴 ~~유배다니랴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많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친교할수 있었는지~~~
부러진 개혁의 깃발이 아쉬운 이유이기도하다!
* 금년 한해 갑오년 말해..
발생한 일들에 비해 말이 넘쳤던 한해로 기억한다.
그 와중에 중국의 시진핑이 방한..임진왜란때 이여송을 파병하여 한중이 함께 왜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의 협력을 말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중국과 일본이 지난세월 수없이 우리를 침략하면서 괴롭혔던 과거를 생각하고 그냥 웃는다.
* 내년이면 마그나 카르타 800년이 된다.
영국의 시민혁명은 1688년 ,,일본 메이지유신은 1868년
한국에서도 1811년 홍경래의 시민혁명이 성공했더라면..
1884년 갑신정변,1894년 갑오경장이 성공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도 많이 달라졌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 김옥균 묘소 인근에는 이순신장군 묘소와
명문가인 아산의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그리고 명당중 명당이라는 그분의 선영도 있다.
아산온천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는데
시간되시는 분들은 새해를 앞두고 온천욕도 하고
역사적 인물의 묘소도 순방하는 뜻있는 시간 경험해 보시길 권한다.
첫댓글 승엽아! 전화 좀 하자! 배유현 010-4353-3349
그래..알았다,,잘지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