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김민자
스레트지붕 사이로 구멍을 뚫고 솟아오른 감나무 한 그루가 의연
한 모습으로 서 있다.
감나무의 일년 나기를 보면서 내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하니 더
욱 애착이 간다. 봄이 되면 연초록 감잎이 은은한 사랑을 피우며,
떨어진 감 꽃은 아들의 놀이감이 되어 여자친구에게 목걸이를 만들
어 주기도 한다. 봄바람에 떨어진 감 꽃 하나에도 나는 이렇게 사
랑을 느낀다.
여름이 오면 따사로운 햇살로 살이 오르고 가을은 오색 단풍과
탐스러운 열매를 안겨 주는 감나무.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은
내게 희망이며 꿈이다.
겨울이 되어 무성했던 옷을 벗고 나목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저리도 나의 인생과도 같을까 하는 생
각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홀로 서있는 나목이 쓸쓸
하여 몇 개의 까치 밥을 남겨두면 참새가 먼지 와서 쪼아먹어도 불
평을 하지 않는 감나무.
지금은 초록의 오월 푸르름은 짙어만 가고 부드러운 연녹색의 감 꽃에
옹기종기 매달린 조그만 열매들은 옛날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정겨웁다.
감나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내가 시집을 오던 해였다. 외출했다
돌아오던 중 길모퉁이에서 할아버지가 묘목을 팔고 계셨다. 유난
감을 좋아하던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 그루 사들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대문 옆에 구덩이를 파고 묘목을 심었다.
어린 감나무는 자리 탓으로 몸살을 앓으며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아
앞 뜰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더니 다행히도 잘 자라 주었다.
올해로 감나무는 열 살이 된다. 결혼 연 수와 같아서인지 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햇살이 뜨거우면 말라버릴까 염려했
고 비가 오지 않아 가므르면 목이 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오늘 저녁은 달빛이 유난히 고와 창문을 열고 감나무를 바라다본
다. 고요한 달빛에 비추이는 감나무는 나의 삶 만큼이나 많은 사
연을 담고 있다. 여름이면 거센 태풍으로 가지가 부러지고 줄기가
꺾이며 어둠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애정을 더욱 기울였다. 이제
감나무는 보호를 받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는 듬직한 어른이 되어
이렇게 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결혼생활 남편의 역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던가.
회사 부도로 온 가족이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열심히 노력하면 살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려움의 연속이
었다. 경리 직원을 둘 형편이 되지 않아서 주부인 내가 숙녀처럼
주문 전화를 받을 때면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러내린 적이 한두 번
이 아니었다.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정성을 다해야만 했다.
아기를 업고 전화를 받다가 “엄마 우유 주세요”하는 투정을 부리
면 당황하여 한 손으로 아이의 입을 막아야만 했던 아슬아슬한 지
난 일들을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감나무는 그 시절의 아픈
마음을 잘 알고 있으리라.
다행히 사업은 번창하여 큰 창고를 지어야 할 형편이었다. 마땅
한 장소가 없어서 정원에 짓기로 했을 때 많은 나무들이 문제가 되
었다. 다른 나무는 몰라도 감나무를 베어내야 하는 것은 내게 큰
아픔이었다. 여러 번 감나무를 베어야 한다고 했으나 남편은 어쩔
수 없었는지 나의 끈질긴 부탁을 들어주었다.
감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창고를 짓기 위해 가지 두 개를 모두 살
리려고 아무리 설계를 해 보아도 어려운 일 이었다. 살을 에이는
심정으로 가지 한 개를 베어낼 때 나는 마음이 아파 눈시울을 적시
고 말았다.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지붕에 뚫어준 구멍을 통해 뻗
어 오른 감나무, 그때의 고통을 기억조차 하기 싫었으리라. 그런
아픔을 겪은 탓인지 더욱더 강한 모습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감
나무는 나의 결혼 생활과 더블어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어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십 여년 살아온 사연들이 감 꽃 되어 나의 작은 뜰을 따스하게
밝혀준다.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감 잎 속으로 지나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시어머님은 내가 시집을 오기 두 달 전에 돌아 가셨고 가족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막내로 태어나 곱게 자란 나는 그러한
시집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시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내는
일은 너무나 어렵고 힘겨웠다. 형님은 분가를 하셨기에 모든 일은
내 차지가 되어 시누이를 결혼시키고 시동생 대학 뒷바라지 와 혼
사도 치러 냈다. 시어머님이 없는 자리에 철없는 내가 집안의 큰
일을 처리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상한 남편의 사랑
이 없었다면 그 어려운 시절을 어찌 이겨 낼 수 있었을까. 감나무
가 나의 집 뜰에서 고통을 이기며 거목이 되었듯이 나 또한 어려움
을 잘 극복하여 시집이라는 넓은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었다.
요즈음 시누이에게서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결혼생활을 하다보
니 언니와 함께 했던 시절이 그립다며 자신은 언니처럼 살 수 없다
는 말을 한다. 어려운 여건에도 정성껏 마련해서 주었던 살림살이
를 볼 때마다 언니의 사랑이 생각나 그립고 고맙다는 시누이. 무
엇을 더 이상 바랄 것인가. 시누이의 말 한 마디에 지난 아픔은
눈 녹듯이 녹아 내리는 것을
어느 듯 세월은 흘러 어미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자식 같
은 감나무 싹 두 줄기가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이제는
그 감나무 싹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감나무 가지가 잘려지는 아픔을 겪지 않기를 기원하며
거목이 된 감나무처럼 지나온 세월을 끓어 안고 의연하게 살고 싶다.
1999.
첫댓글 세월은 흘러 어미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자식 같은 감나무 싹 두 줄기가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이제는 그 감나무 싹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감나무 가지가 잘려지는 아픔을 겪지 않기를 기원하며 거목이 된 감나무처럼 지나온 세월을 끓어 안고 의연하게 살고 싶다.
어느 듯 세월은 흘러 어미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자식 같
은 감나무 싹 두 줄기가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이제는
그 감나무 싹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감나무 가지가 잘려지는 아픔을 겪지 않기를 기원하며
거목이 된 감나무처럼 지나온 세월을 끓어 안고 의연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