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역모사건 기축옥사 세미나가 7월 30일 열립니다.
조선 역사 5백 년 중에 가장 많은 별들이 솟아났던 16세기, 바로 그 시대가 정여립의 시대였다. 폭군으로 밀려난 연산군을 필두로 중종․인종․명종․선조로 이어지는 16세기는 혼란의 시대였지만,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을 발했던 뛰어난 인물들이 태어나고 사라져간 시대였다. 또한 그때는 마치 밤하늘에 운석이 쏟아지듯 한국사상사와 역사 속에 자취를 남긴 천재들이 나타났던 시대였다.
왕도정치를 실현시키려다 실패한 조광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자리에는, 숲속의 대학자라 불리는 화담 서경덕이 자리를 잡았다.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킨 서경덕은,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일컬어졌다. 그의 수제자 이구는 기일원론을 철저히 지키고 발전시켰으며 박순은 기축옥사로 희생된 곤재 정개청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서경덕이 개성 일대에서 그의 사상을 펼치고 있을 때 희재 이언적은 영남 사림을 이끌면서 조선조의 성리학을 정립한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스승도 없이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퇴계의 성리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퇴계는 이언적의 학설을 “이단의 사설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고 평가하였다.
뒤를 이어 퇴계 이황과 더불어 도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이 경상도 산청에서 실천유학의 장을 열었다. 동서 양당으로 갈리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김효원과 덕계 오건. 기축옥사 당시 희생당한 수우당 최영경과 곽재우, 정구 그리고 내암 정인홍 등이 그의 제자였다.
한편 경상도 안동에서는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세웠고 동방의 주자라고 일컬어진 퇴계 이황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의 제자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등이 있다. 이황은 ‘인(仁)’ 곧 어짐을 받드는 학문을 하였고 남명은 의(義), 곧 의로움을 받드는 학문을 하였다.
경상도에서 남명과 퇴계가 그들의 사상을 펼치고 있을 때 전라도 장성에서는 하서 김인후와 일재 이항 그리고 고봉 기대승이 학풍을 크게 떨쳤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라는 시조를 지었던 김인후는 태극도설이라는 독자적인 학설을 내세웠던 빼어난 성리학자였고, 일재 이항은 태극과 무극. 인심과 도심에 이르기까지 이기의 학문을 강론하였다. 퇴계 이황은 일재를 가리켜 호남 성리학의 비조라 하였다.
그와 더불어 호남 학문을 널리 알린 고봉 기대승은 과거에 급제한 서른두 살에 서울에서 퇴계를 만나 8년 간의 논쟁을 시작했다. 인간 감정의 양상인 사단과 칠정을, 이기 개념으로 분석하고 선악의 계기를 검토했던 이 논쟁을 후세 사람들은 조선 시대 사상사의 빅뱅이라 일컬기도 한다.
퇴계가 고봉을 얼마나 아꼈는가는 선조와 나누었던 한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퇴계에게 선조가 물었다. “지금 나라 안의 학자 중 어떤 사람이 으뜸이요?” 이때 퇴계는 “기대승은 학식이 깊어 그와 견줄 자가 드뭅니다. 내성하는 공부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이라고 말했다. 내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기대승의 평생 신념이었던 정(正) 즉 일(一) 즉 옳은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신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 무렵 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를 대표하는 학자였던 율곡 이이가 사림의 정치화를 이끌면서 활동하였다.
기호학파로 분류된 이이와 성혼․박순 등이 서인이 되었고, 영남학파로 분류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동인으로 분류되면서 동서 양파로 갈리게 되었다.
이외에도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과 행주산성 싸움의 명장 권율, 진주성 싸움의 김천일, 청사에 길이 빛날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조헌․곽재우․고경명․김시민 등 기라성 같은 별들이 찬연히 빛을 발하였다. 또한 승병으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영규와 처영 등이 있고, 백사 이항복과 이덕형 그리고 기축옥사 당시 서인 모주로서 종횡무진 활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이름을 날린 구봉 송익필과 불세출의 시인이자 동인 백정이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송강 정철이 그 시대의 인물이었다.
이산해․정언신․남언경․양사언․김장생과 동서분당의 핵심 인물인 심의겸과 김효원․정인홍․김우홍․정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살아간 별들이었고, 이발․정여립 등은 그 중에서도 빼어난 빛을 발한 별 중의 별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사 속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던 시대는 대부분 혼란과 암흑의 시대였다. 16세기 조선 역시 그러했다.
정여립이 살았던 16세기의 조선은 불확실성의 시대였고, 조선 5백년 역사 속에서도 비극의 시대였다. 4번의 사화가 연이어 일어났고 훈구파가 물러나면서 사림파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16세기에는 지배체제가 동요하는 가운데에서도, 지배계급으로서의 양반계층은 사회변화의 흐름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고자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10월 호남 선비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비밀장계가 올라오면서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 기축옥사가 시작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기축옥사 때문에 다시 편찬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과 기축옥사 때문에 인조, 효종 연간에 수정 보완해서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그리고, 유성룡이 지은 <운암잡록>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선전관 이용준(李用濬)·내관(內官) 김양보(金良輔) 등이 정여립을 수토(搜討)하기 위하여 급히 전주(全州)에 내려갔다가, 정여립이 그 아들 옥남(玉男) 및 같은 무리 두 사람이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 군관들을 동원시켜 포위 체포하려 하자, 정여립이 손수 그 무리 변사(邊涘)를 죽이고 아들을 찔렀으나 죽지 않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므로, 그 아들 옥남(玉男)만을 잡아 왔다.”
정여립과 죽도,<선조실록23권,> 선조 22년 10월 17일 신묘 2/2 기사 / 1589년 명 만력(萬曆) 17년 <선전관 이용준 등이 정여립이 숨은 죽도를 포위하자 정여립이 자결하다.>에 실린 글이다.
그렇다면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누구이며 역사 속에는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
“정여립(鄭汝立 ?~1589<?~선조22>) 조선 중기의 모반자.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이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으나 성격이 포악 잔인하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성혼의 문인.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퇴관하였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에 아부,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김제 금구 제비산 자락에서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중 의연(依然)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선조 22) 거사(巨事)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여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 군수 이축(移築)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잡히자,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천여 명의 지식인이 희생되었고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에 일어난 기축옥사는 조선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조선왕국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 뒤 호남인의 벼슬 참여가 막혔고, 타 지역 사람들이 지방 수령으로 와서 마음껏 탐학을 일삼았기 때문에 참다 참다 못 참은 농민들이 일으킨 혁명이 1894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유비의 촉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위를 정통으로 삼아 기년한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요․순․우가 임금 자리를 서로 전한 것이 성인이 아닌가? 충신은 불사이군이라고 왕촉이 말한 것은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일 뿐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기축옥사의 주인공인 정여립이 남긴 유일한 어록인데, <정여립 사건>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기축옥사의 재조명>을 위하여 2026년 7월 30일(목)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전북 김제시 김제문화원에서 세미나를 개최합니다.
대동사상기념사업회 신정일 이사장,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 칼럼니스트이자 강호동양학자인 조용헌 선생이 주제발표를 하고, 전주대학교 최영기 교수가 좌장을 맡고, 사회는 신귀백 작가, 토론은 전 전주문인협회회장을 지낸 김현조시인과 동래정씨에서 참여할 것입니다.
기축옥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이 행사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2026년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