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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짖는 자의 샘이 터지게 하소서. (렘2-29)
2026년 10월 18일 (주일)
찬양 : 목마른 사슴
본문 : 예레미야 29:1-32절
☞ https://youtu.be/rdz3d30h4so?si=EEtbg20r8Svq-lOw
오늘은 새벽 일찍 지방에 있는 교회를 섬기기 위해 떠나는 날이다. 새벽에 떠나야 하기에 빨리 묵상을 마쳐야 한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이 내 삶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기를 소망하며 겸손히 말씀 앞에 바쁨을 멈추고 선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포로들에게 보내는 목회적인 편지가 주된 내용이다. 오늘 본문은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절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이때는 제2차 포로 압송으로, B.C. 597년, 느부갓네살의 2차 침공 때 여고냐(여호야긴) 왕을 비롯해 에스겔, 귀족들, 기술자 등 유다의 핵심 인재들이 대거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때이다. 예레미야의 편지는 바로 이렇게 끌려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나라의 주역으로 일하던 이들이 포로로 끌려가 할 일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낙심하고 있었겠는가? 바로 이런 때 예레미야는 인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5-6절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한 마디로 속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헛된 희망에 속지 말고, 아예 바벨론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밭을 일구고 생육하며 번성하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요청을 덧붙인다. 7절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자신들을 짓밟고 가족을 앗아간 원수의 나라, 바벨론 성읍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좋아서가 아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정하신 '정화와 연단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당장의 징계와 고통스러운 현실을 도피하려 하지 말고, 그 고난의 자리 한복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오늘이라는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라는 엄중한 부르심이다.
믿음이란 평안하고 순탄한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절망의 순간에도 동일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진짜 믿음은 나를 짓누르는 원수의 땅 한가운데서도 도리어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기도로 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가능할까? 비록 내가 서 있는 곳이 포로지라 할지라도, 그 고난의 자리조차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철저한 통치 아래 진행되고 있음을 온전히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놀라운 희망을 약속하신다. 10-11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는 종종 이 말씀에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는 달콤한 구절에만 주목하곤 한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십자가의 징계는 쏙 빼버린 채, 내 욕망을 투영하여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기복적인 축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이 찬란한 약속 앞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엄중한 전제가 있다. 바로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이라는 조건이다. 이 '70년'은 인간적인 꼼수로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이다. 포로지라는 고통의 현실 한복판에서 철저한 자기 부인과 눈물의 회개를 거치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재조정하는 연단의 과정을 통과한 자만이 비로소 주님이 예비하신 참된 '미래와 희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묵직한 선언이다.
이 참된 희망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70년의 연단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영적 반응을 가르쳐 주신다. 12-13절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거짓 선지자들의 헛된 희망에 들뜨거나 비참한 삶의 현실에 절망하여 주저앉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징계의 자리,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죄악을 가슴 깊이 회개하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라는 부르심이다.
비록 그곳이 성전이 다 무너져 내린 이방의 땅, 고난의 유배지라 할지라도,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엎드리는 자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대목에서 문득, 사사기 15장에 등장하는 삼손의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이 생각나며 묵상의 주제가 된다.
당시 삼손이 있던 '레히'는 본래 약속의 땅 유다의 영토였지만, 블레셋 군대에게 완전히 짓밟히고 포위당한 절망의 자리였다. 삼손은 나귀 턱뼈로 천 명을 물리치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직후 극심한 갈증으로 죽음의 문턱에 쓰러지고 만다.
이때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라며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메마른 땅을 쪼개어 생수를 터뜨려 주셨다. 그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터진 샘이 바로 '엔학고레'다.
지금 바벨론에 끌려와 있는 유다 포로들의 처지가 바로 목말라 죽어가는 삼손과 같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성전도 나라도 다 잃어버리고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압제 아래 던져진 그들은 극심한 영적, 육적 갈증에 시달리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비록 그곳이 숨 막히는 바벨론의 포로지일지라도, 너희가 그 절망의 자리에서 나를 향해 전심으로 부르짖는다면 내가 그곳을 '엔학고레'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다.
내 삶의 자리가 아무리 사방이 원수들로 우겨쌈을 당한 척박한 땅이라 할지라도, 온 마음으로 부르짖는 자의 외침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은 기꺼이 찾아오시며 영혼을 살리는 은혜의 샘물을 터뜨려 주시는 분임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이후 본문 15-32절에 걸쳐서는, 바벨론 현지에서 거짓 평안을 팔며 백성들을 타락시킨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무서운 심판이 기록된다. 특히 거짓 편지를 보내 예레미야를 당장 감옥에 가두라고 압박했던 거짓 선지자 스마야의 대를 완전히 끊어버리시겠다는 준엄한 선언이 이어진다.
전심으로 부르짖고 회개해야 할 백성들에게 진리를 가리고 거짓된 위로를 전한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지를 서늘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은 여기서 묵상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주일 예배를 위해 새벽 일찍 먼 길을 출발해야 하는 내게, 주님은 '부르짖는 자의 샘, 엔학고레'를 마음 깊이 생각나게 하신다.
내게 주어진 상황과 육신의 피로가 어떠하든, 스스로 얄팍한 위안을 만들어내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 온 마음으로 부르짖어 하늘의 생수를 경험하는 참된 예배자로 서기를 다짐한다.
새벽부터 달려가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도 영혼을 살리는 이 엔학고레의 샘물이 성령안에서 충만하게 터져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 모든 가고 오는 일정을 주님께 맡깁니다. 운전대를 붙잡아 주시고 섬기는 교회안에 부르짖는 자의 샘이 터지는 은혜를 베푸사 모두가 참된 신앙으로 새롭게 되는 날 되게 하소서.
한줄 묵상 :
<참된 평안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부르짖을 때 터져 나오는 '엔학고레'의 은혜입니다.>
적용 질문 :
1. 내가 지금 만난 고난의 자리에서, 현실을 도피할 거짓 희망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묻고 순종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2.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미래'임을 믿고, 지금의 십자가를 달게 짊어질 용기가 있습니까?
3. 목말라 죽어가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내가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 부르짖어야 할 나의 '엔학고레'의 기도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