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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나 예언서의 말씀 3,1-5.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7,29-31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오늘은 연중 제 3 주일입니다.
한편 3월 21일인 오늘은 성녀 아녜스 축일입니다.
저희 올리베따노수도회에 있어 오늘은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1313년, 지금으로부터 710년 전에 이탈리아의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도시 시에나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심오한 열정에 사로잡혀' 늦깎이 40대 귀족 청년들 3명이
고대의 수도승들이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아 사막으로 떠났던 것처럼 약 35km 떨어진 아꼬나 계곡으로 떠나와
기도와 고독 속에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습니다.'
(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
그로부터 6년 후에는 감명을 받은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교황으로부터 파견된 조사관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레쪼 교구장의 인가를 받아
1313년 3월 26일에 <몬떼 올리베또의 성 마리아 수도원>이 창설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급속도로 성장하여 31년 후에는 15개의 공동체가 창설되었고,
그리하여 1344년에 1월 21일 교종 클레멘스 6세에 의해
<베네딕도회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congregatio)>로 인준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703년 전,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그래서 미사 후에는 마침성가 대신 '사은찬미가'(떼데움)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제2독서 말씀도 바로 이 하늘나라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회개와 믿음에 대한 요청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바로 이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셋째는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시고 줄곧 준비해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이요, 목표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이 '나라'는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와 있다’는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루가 11,20 참조).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회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곧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바꾸되,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곧 ‘~ 어디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와 함께 ‘~ 어디에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회개'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 역시 '하늘나라'라는 '복음'을 ‘믿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임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마르 1,17)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듯이, 이제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당신께로 부르신 이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당신께 '오너라.'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서 '떠나' 당신께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가는 길을 '따라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함께 데리고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데리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을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 있던 것, 의지하고 있던 것, 배도, 그물도, 삯꾼도, 아버지도, 모두 버려두고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바로 이 ‘따라나서는 것’이 회개의 실천적인 모습이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 '버림'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큰 가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위한 배나 그물보다도, 또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아버지보다도, 더 값지고 중요한 '그분'을 향하여 믿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려야 하는 이유, 곧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버리는가?’ 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향하여 있고,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따라 나선 ‘자신을 따르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지’,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때가 찼습니까, 아직 덜 찼습니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저에게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복음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즉시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 기쁜 소식이 아닌 사람도 즉시 회개하라!"
사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그 생활을 그대로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죄입니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어떻게 그 생활을 하는 겁니까?
자기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사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는 행복 정도를 삽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행복을 사는 이유가 불행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정말 불행하기에 불행하지 않다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행복이란 만족 상태이기에, 행복하지 않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만족하는 것도 궁색하지만 행복의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지 않은 것이 행복입니까?
이 정도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현명이지만, 불행하지 않은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고,
그래서 현명하고 자기 인생에 책임감이 큰 사람은 즉시 ‘행복 회개’, 다시 말해서 불행한 삶을 회개하고 행복을 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일반 사람도 이러해야 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더 그래야 합니다.
일반 사람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 것이면서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일반 사람처럼 살았을 땐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행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믿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태중 교우였지만 한동안 다른 철학과 다른 종교를 기웃거린 사람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왜 굳이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방황하고 편력을 한 십 년 하다가 그리스도에게서 답을 찾았고,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교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저의 인생철학은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가 아닙니까?
왜 행복하지 못하고 왜 행복에 조건이 있습니까?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만 내게 있다면.
하느님 나라가 없는 것이 불행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하느님 나라가 자기에게 아무리 가까이 왔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시 얘기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닌 사람, 그래서 복음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주님께서 부르셔도 즉시 따라나서지 않는 사람은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의 니네베 사람들은 즉시 회개한 사람들이고,
복음의 첫 제자들도 주님의 초대에 즉시 응답하여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미뤄서는 안 되고 즉시 뭔가 해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행복의 때가 찼습니까?
나의 행복의 때는 아직 덜 찼습니까?
행복을 미루겠습니까?
즉시 행복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부르시면>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은 일상 안에서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시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부르시면‘나’ 달려가지요.
하던 것 멈추고, 있는 것 버리고…
님께서 부르셨으니 ‘나’ 응답하지요.
두려움 버리고, 망설임 없이,
임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예’하며…
- 홍요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마르1,18-19)
소중한 생계 수단인 배와 그물을 선뜻 버리고 심지어 아버지를 남겨둔 채 따라나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가진 바를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친교를 나누었던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습니다(사도 2,47).
아마도 그들의 발목을 잡는 복잡한 계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따라보자! 그들은 따름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기쁨,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버렸기 때문에, 낚인 것이 아니라 낚였기 때문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사람에게 '성당 가자' 할 때 어떤 매력을 줄 수 있을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것이 바로 ‘기쁜소식’, 복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임금이 되시어 당신의 주권을 펼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주권은 권력을 마구 휘두르거나 군사적, 물리적 강력한 힘과는 다릅니다.
그분의 강력한 힘은 자비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한 상태, 곧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고통을 없애주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시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그 사실을 알리는 것 또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병고와 악령과 같은 악한 세력의 속박에서 해방해 주심으로써
강력한 하느님의 자비가 이미 당신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데,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생각을 바꿔라.', '불의한 기존 질서를 따르지 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태의연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 통독을 통해 가르침을 듣고, 성체 조배를 하며 그분 안에 머무르고, 신앙의 기쁨을 선포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은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남겨두는 것은 편안함과 안전, 기득권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앞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사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루카 9,6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 19,26).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그물을 버리듯, 아버지와 삯꾼과 관계를 끊어버리듯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페 4,23-24)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것은 좁은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더운 여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래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를 모르는 것은 그 한 가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 갇히면 다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예수님의 잣대로 나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내려놓는 만큼 주님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삶의 현장에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믿음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실천하길 원하시며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그분 마음에 드는 답을 해야 하겠습니다.
“일단은 따라보자!”
매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이웃의 행복을 위해 멈추지 않고 도전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도대체 ‘복음’은 무엇이고 ‘회개’는 무엇일까요?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행복하여지려면 회개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회개는 이전의 행복에서 새로운 행복으로의 선회를 의미합니다.
그 예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첫 제자로 뽑으십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라고 하십니다.
‘자이언 클라크’는 하반신 없이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당뇨였고 감옥에서 아이를 배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보육원에 맡겼고 아이는 멸시와 학대, 절망과 우울증에서 커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보육원에서도 자이언을 원하지 않아 열 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의 삶을 바꿔준 한 권의 책을 만납니다.
‘카일 메이나드’의 『핑계는 없다』(No Excuses)입니다.
카일은 손발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매우 엄하게 키웠습니다.
무언가 할 수 없다고 여기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 하는 걸 다 시켰습니다.
카일은 모든 스포츠를 섭렵했고 심지어 격투기 대회에도 출전하였습니다.
레슬링으로 고등학교 4학년 졸업반 때 36승을 기록하고 전국 12등을 달성했습니다.
이에 멈추지 않고 킬리만자로와 아콩카과와 같은 높은 산을 오르며 손발이 없어도 끈기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은 자이언 클라크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초등부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둬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레슬링부를 찾아갔습니다.
훌륭한 코치를 만나 생애 첫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실력 차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등 뒤에 ‘No Excuses’(핑계는 없다)를 새기고 지금까지 하던 운동량의 두 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첫 2년 동안 치른 경기에서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러다 3학년부터 자이언은 다시 승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회개하면 뒤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패배자로 자기 연민에 빠져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 살던 삶이 지옥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처음에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와 교회에서 키울 때, 한 달 정도 지나면 그 아이들이 다시 길거리로 나가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박 목사는 그들이 몇 년 동안 갈아입지 않고 입고 있었던 냄새 나는 옷을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들은 토악질하며 옷을 입고는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박보영 목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회개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뒤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돈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고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부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삶을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참 행복이 나를 행복하게 함이 아니라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함으로써 내가 행복해지는 삶임을 알았습니다.
이웃의 영혼을 구하고 성장시키는 것보다 더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는 바로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따라나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혼다 그룹 창립자 소이치로 혼다는 “꿈을 가져라. 끊임없이 도전하라.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마라.”라고 권합니다.
그 꿈이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회개한 사람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점점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 작은 풍파나 고통에도 일희일비하고 울부짖는 오늘 우리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 7,29~31)
요약하니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것들 다 지나가고 다 떠나가니, 그러려니 하고 마음 크게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엄청 대단해 보이는 것들,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니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작아지는 것에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외로워지고 허망해지는 것도 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점점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겠습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한쪽 발은 지상에 두지만, 다른 한쪽 발은 천상으로 옮겨가야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이미지를 놓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고수해온 정치적·사상적 성향 역시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만의 영역, 나만의 틀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참함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수십 년 전에 받은 상처와 수모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말이 쉽지 놓아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좀 더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때,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할 때,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서로 다투며 소송을 걸게 되지요.
소유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매우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悔改)의 여정, 귀가(歸家)의 여정 - ‘하느님의 나라’ 꿈과 실현>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자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20일에 매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낼 것을 선포하였고,
교회는 이날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1월18일부터 1월25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 우리 가톨릭교회는 일치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일치주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고백하지 않습니까?
바로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가난도 아닌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빛인, 영원한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말씀공부와 실천뿐임을, 평생 주님의 학인이, 말씀의 학인이 되어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정의하면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오늘 말씀의 주제도 회개가 중심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꿈도 실현되며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꿈이 없으면 살아있다 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이 있어야 힘도 샘솟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꿈을 희망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꿈 중의 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꿈이요, 예수님이 평생 추구했던 바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하느님의 꿈쟁이였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꿈은 예수님의 평생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겨울철 1월이 되면 생각나는 26년전 써놨던 “봄꿈”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화장실에 들렸다가 창문밖 하얀 눈덮인 언덕을 보며 떠올라 쓴 글입니다.
이 시를 써놓고 그해 겨울은 참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
-1998.1.22.
봄꿈이 상징하는 바 파스카의 꿈,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와 더불어 24년 전 “별꿈”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꾸며 잠못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
-2000.10.1.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을 상징하는 별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화두이자 평생꿈이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회개를 통해 실현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예수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현재성을 띄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오늘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될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 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란 말마디입니다.
하늘 높이 나뭇가지들 올라갈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참으로 진짜 꿈과 희망의 이상주의자일수록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시한 참된 영성가들은 모두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 나라가, 결코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 또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심으로 현실화됩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 나라 꿈의 현실화입니다.
복음의 네 제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공동체인 여기 수도공동체도, 우리 신자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도 역시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의 내적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이들 형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이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 중심의 제자공동체, 하느님 나라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예수님의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바야흐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할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제1독서의 요나입니다.
요나의 회개에 선포에 즉각 응답하여 살아난 니네베 주민들입니다.
이들의 전격적 회개가 회개의 모범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부였다가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이들이 전격적으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이 그대로 니네베 사람들을 연상케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응답보다 더 좋은 회개의 표현도 없습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갈릴레아 호숫가에 살던 네 어부들이,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삼 부르심의 은총은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만약 세례로 부르심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은 정말 부질없는 상상인 것이지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회개는 바로 전격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 전환을 뜻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여정중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충실히 한결같이 따를 때 하느님의 나라 꿈도 더욱 현실화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제가 즐겨 일컫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회개의 시스템같은 하루 일과표의 중요성 강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의 시스템 같은 기도와 일이 균형을 이룬 일과표에 충실함이 우리의 성소를 굳건히 하면서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하는지 요즘 깊이 깨닫습니다.
비단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공동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기도와 일이 균형잡힌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의 준수입니다.
참으로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꿈의 현실화에 이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가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여기 지상의 장소가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잠정적으로 지상에 머무르는 순례여정 중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보면 회개의 여정이자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중인 순례자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실현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와 더불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고맙습니다.
회개의 여정에,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지상 삶에 집착하지 말고 참으로 초연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래야 참으로 너그럽고 관대하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처럼” 살자는 것입니다.
솔직한 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니 담아둘 것은 담아둬야 합니다.
이건 위선이 아니라 고귀하고 품위있는 삶의 절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아파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슬퍼도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자취없이, 흔적없이, 가볍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매임없이 자유롭게 무공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쓰레기도 훨씬 적게 내고 살 것입니다.
바로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것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라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맑은 의식으로 깨어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수렁에,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니 지상의 순례자로서 회개의 여정에, 귀가의 여정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 나라의 꿈을 현실화하며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뉴욕에서 한국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습니다.
자막은 영어로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았는데 미국에서 한국영화를 영어자막으로 보니 조금은 생소했습니다.
한국영화 ‘노량’도 곧 개봉한다고 합니다.
서울의 봄도, 노량도 역사적인 사건에 재미를 더한 영화입니다.
서울의 봄은 45년 전의 사건이고, 노량은 426년 전의 사건입니다.
서울의 봄에 저는 서울에 있었지만 노량해전은 제가 태어나지 않았던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봄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과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권력을 얻으려고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이 승리했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얻어 호사를 누린 사람들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부당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애국심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생 갈 것 같았던 권력도 10년이 못 되어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백담사로 유배를 가야 했고, 내란 음모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서울의 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몰입감이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봄’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칼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고, 중풍병자는 일어나 걸었고, 눈먼 소경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치유되었고, 죄인들은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자비를 베풀면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쉽게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의 봄은 오지 않았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와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없앨 음모를 꾸몄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인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끝났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삼일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는 놀라운 소문이 돌았습니다.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군인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들풀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두려움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제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에페소, 고린토, 갈라디아로 봄은 퍼져나갔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도 봄이 시작되었고, 240년 전에 조선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봄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내 마음의 봄에는 꽃이 핍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화사한 봄이 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렸을 때, 종종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빌려 보곤 했습니다.
형제가 육 남매나 되기에 만화가게에서 책을 보는 것보다 빌려 보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화책을 보다가 화날 때가 있습니다.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긴장하며 만화책을 보게 되는데, 누군가가 어느 인물의 얼굴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범인’이라고 적어 놓은 것입니다.
소위 ‘스포일러’를 한 것입니다.
결과를 알고 나면 이 만화책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습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만화책을 긴장하며 읽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찢어져 있는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으니 만화책 보는 재미가 역시 떨어집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미래를 미리 알면 어떨까요?
사실 우리는 미래를 미리 알면 행복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오늘의 운세’ 같은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드는 삶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삶이라면 과연 재미가 있을까요?
또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일 때, 이 시간이 훌쩍 지나갔으면 하지요.
이렇게 시간이 지나간다면, 이 역시 재미없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알려는 노력보다는 지금에 충실하도록 더 힘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고통과 시련 역시 나에게 중요한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임을 기억하면서 피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시간이 나의 삶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삶도 사랑해야 할 삶이며, 지금에 충실할 때 멋진 미래가 내게 주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때가 찼고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주 ‘나중에~~’라고 말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아직도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뒤로 미루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결정적인 순간 역시도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시간이 가까이 왔기에 우리 모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지금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기쁜 소식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보다 더 깨끗한 상태, 바로 회개해서 주님의 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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