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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마카 1,10-15.41-43.54-57.62-64
복 음 : 루카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는
아마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알파고의 일방적인 승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실제 그런 내용의 영화도 등장했습니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몫을 많은 부분에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인간을 대신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알파고가 바둑만 잘 두지, 요리하거나 또 특별한 운동을 아주 많이 잘하지 못합니다.
이 영역까지 담당하기 위해서는 더 엄청난 데이터와 메모리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전원 스위치가 꺼지면 잘하는 바둑까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인공지능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고귀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인간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없는데,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 어떤 것도 인간을 대신할 수 없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께 더 굳센 믿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 믿음 없이는 자신의 존재에 감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소경이 보여준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길 바라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곧바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먼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진찰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무조건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분명히 자신의 눈도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고 있지만, 그 방해에 굴하지 않습니다.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할 뿐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내 믿음의 정도를 따져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방해에도 상관없이 꿋꿋하게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온전하게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처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삶의 도전과 난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9)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리코의 눈 먼 이가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하자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로서는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
군중에게는 그저 소음처럼 들렸나 봅니다.
군중의 꾸짖음에도 그는 지치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고 계속 외칩니다.
자기 목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전달될 때까지,
자기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예수님 마음에 닿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태세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예수님이 그를 데려오라고 하셔서 무엇을 바라는지 물으시자 그가 즉시 대답합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갈망이었겠지요.
많은 경우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정확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바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제대로 내면화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예리코의 눈 먼 이는 장애를 안고 구걸하며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지요.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 원의, 갈망이 결정적인 때에 그의 뼛속을 뚫고 나와
예수님 앞에 펼쳐졌고 예수님은 즉시 그의 청을 들어 주십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닥친 암울한 역사를 들려줍니다.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1마카 1,41-42)
마카베오기는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이 헬레니즘 시대에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들려줍니다.
당시 유다 지방에 그리스 문화를 강요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과 그들에 맞선 민족적 항쟁이 줄거리지요.
이스라엘은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한 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분만을 섬기라고 불리운 신앙의 민족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점령당한 왕국들에게 모두 한 백성이 되라 하고
각 민족마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도록 한 칙령은
그들에겐 날벼락과 같은 도전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더욱 슬픈 일은 이를 찬성하고 자청하여 끌어들인 이들이
동족 안에서 나왔다는 점이었지요.
"그들은 음식으로 더렵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갔다."(1마카 1,63)
오늘 독서의 대목에서도 드러나지만, 대부분의 전쟁사가 그렇듯
마카베오기 안에는 수월히 읽어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격심한 전쟁과 잔인한 박해, 처절한 죽음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중요하고 또 소중한 이유는
민족적 정체성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라고 시시각각 조여 오는 악의 폭력 앞에서
목숨을 던져 신의를 지킨 이들의 존재를 통해,
지금 이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권력과 재물의 드센 유혹에 맞서
하느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다종교사회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이런 결의가 많이 생소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과의 관계와 율법은 자기들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생명이었지요.
민족의 생명인 정체성을 생명을 바쳐 지켜내는 것이 신앙의 정당한 표현이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과 박해, 죽음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일어섭니다.
죽음도 그들을 막지 못했지요. 자신이 바라는 바를 정확히 알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내면화한 이는 어떠한 거센 저항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일이니까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때때로 세상은 장애물과 걸림돌을 던집니다.
모두가 열광하고 추구하는 물질주의가 경쟁과 약육강식의 폭력을 부추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낡은 종교적 관념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로 신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마카베오 시대 못지않게 어렵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각자 희생과 결단을 마냥 미룰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꾸짖음과 저지에도 자신의 갈망을 존중하고 예수님을 불렀던 예리코의 눈 먼 이나,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신앙의 항쟁사를 이어간 순교자들처럼
충실함과 용기를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 안에서 바라는 바를
그분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 믿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능으로서만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절).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그들은 눈먼 거지가 시끄럽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다시 믿게 하시려고
빛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 누가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가?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 한다.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뿐 아니라, 마음의 눈먼 상태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나 다가오기 쉬운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미사 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모태가 되는 내용입니다.
예리코의 한 소경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군중에게 듣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좀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보시고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의 믿음이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주님은 내가 청하기만 하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상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에 흔들렸다면 그는 그만한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이 소경은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모녀가 자신에게 찾아와 상담하였답니다.
어머니도 우울증 증세가 있으시고,
딸도 대인기피증이 있어 사회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딸의 무의식 세계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딸이 청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더니
급기야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의 기억까지 이야기하였습니다.
“아 답답해. 아 답답해. 너무 비좁아…. 그런데 어떤 여자의 음성이 들리는데,
‘넌 죽으면 안 돼.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해. 넌 살아야 해.’ 이런 음성이 반복해서 들려요.”
이 말을 듣자 함께 있던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딸을 잉태하고 있을 때 자신이 배를 어루만지며 자주 했던 말이랍니다.
당시 남편은 외도하고 있었고 아내의 임신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리라 의심하여 낙태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해.”라고 하며 아기를 낳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자 청년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내면의 상처가 생겼고
그로 인해 당당히 사람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없어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게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서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가 곧 세상의 이미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두려운 존재가 되면 세상도 그렇게 됩니다.
『벼랑 끝, 상담』에 ‘분노조절장애와 망상으로 학교 선생님을 아빠라고 믿는 딸’의 내용이 나옵니다.
집도 부유했고 아이도 행복했습니다.
아이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자신의 성이 왜 아빠가 아닌 엄마 성을 따르는가가 궁금했었습니다.
결국, 중3 때 엄마에게 이 사정을 물었고
엄마는 언젠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빠는 본래 미국에 살림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한국에서 사업을 하다 엄마를 만나 다은이를 낳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은이는 아빠를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여겼습니다.
아빠가 미국에 갈 때 왜 엄마가 그리 불안해했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아빠는 점차 사업이 실패하자 다단계를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단계에서 만난 여자와 또 바람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다은이는 친구들이 이 사정을 알까 두려웠고
그래서 친구들을 멀리했으며 조금씩 아버지에게 막말을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분노조절장애로 사고를 치는 다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은
유일하게 역사 선생님이었고 다은이는 역사 선생님을 자기 아버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아버지는 가짜라고 여겼습니다.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다은이는 급기야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부모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은이에게 더 큰 상처를 입혔고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칼로 찌르겠다며 설쳤습니다.
딸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아버지는 집을 나와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미국 집에도 이 사실이 알려져 미국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딸은 청년이 되어서도 폐인이 되어 어머니가 더는 볼 수 없어서 상담소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최고야 원장은 우선 역사 선생님이 다은이의 친아버지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 선생님을 설득하여 DNA 검사를 진행했고 그제야 다은이는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가라앉혀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사과를 받도록 했으며 최면 명상을 이용하여
과거의 일들을 잊고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서른 번이 넘는 이 과정을 통해 다은이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은이 아버지도 외도를 멈추고 다단계에서 나와 직장에 취직하여
다은이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주 친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용서를 청했고
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자 다은이도 다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결국 좋은 대학에 들어가 과학자가 되는 꿈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미지는 분명 아버지에게 얻습니다.
어머니는 어차피 아이와 하나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는 다리라면, 아버지는 세상으로 가는 다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누가 형성해 주어야 할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주님께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자비로워야 하는 이유는
그 성직자들을 보고 신자들이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어린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단상에 올라와도 모자를 달라고 해도 다 받아줍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교황님에게 다가오기를 꺼리고
왜 어떤 아이들은 교황님의 모자도 받고 교황님 자리에 앉아보기도 할까요?
교황님이 좋으신 분이란 믿음은 어디서 얻은 것일까요?
저는 아버지에게서 얻은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예수님도 그런 자비로운 분일 것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님께 모든 것을 청할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키워줄 아버지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편안하게 여겨질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예수님께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가올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원숭이들에게 한 가지 실험을 하였습니다.
5마리의 원숭이가 우리에 있습니다.
가운데에 사다리가 있고, 그 위에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가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원숭이가 사다리를 올라가서 바나나를 먹으려 했는데 위에서 물이 쏟아졌습니다.
다섯 마리의 원숭이는 모두 시도했지만 물만 뒤집어썼습니다.
그래서 이제 원숭이들은 사다리에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숭이 한마리가 빠지고 다른 원숭이가 들어왔습니다.
원숭이가 사다리를 오르려 하자 4마리의 원숭이가 말렸습니다.
사다리를 오르려는 원숭이는 4마리의 완력에 밀려서 사다리를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마리씩 빠져서 사다리를 올라가면
물을 맞는다는 경험을 한 원숭이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 원숭이가 들어오면 모두들 새로 들어온 원숭이를 때렸습니다.
그것이 원숭이들의 규칙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원숭이를 때리는지 이유도 몰랐습니다.
사다리 끝에 맛있는 바나나가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다리를 올라가면 물을 맞는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원숭이들은 새로 들어온 원숭이를 때리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원숭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가끔 그런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편견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합니다.
운전하면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험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고,
피해자도 받아들이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별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면,
피해를 입은 사람은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그러면서 나이를 이야기하고, 젊은 사람이 왜 그러냐고 합니다.
나이를 먹는 것이 벼슬이냐고 합니다.
그러다가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서로의 태도와 나이를 들먹이며 다투게 됩니다.
부부 사이에도 서로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해하고, 양보하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부부의 다툼이 커지는 경우는 예전의 일들을 꺼내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약속 시간에 일이 생겨서 늦은 것입니다.
예전에도 늦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시댁에 갈 때는 안 늦더니, 친정에 가려니 늦는다고 합니다.
사과하고, 이해하면 기분 좋게 갈 수 있는 여행이 감정이 상해서 가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은 달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달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은 원숭이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게 됩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려고 했을 때,
달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예전에 승강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자비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주님께 간절하게 외칩니다.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질서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