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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명의 남자와 할렘을 만든 '여왕벌',
'아나타한 섬의 여왕'
-The Last Japanese Surrender
of World War II -
Anatahan Island -
'Queen Bee'
실존했던 '인간 여왕벌'로
일세를 풍미했던 일본여성
'히가 카즈꼬(比嘉 和子)' 이야기
그녀에게는
"여왕벌",
"아나타한의 독부(毒婦)",
"아나타한 섬의 여왕"
그리고 "32명의 남자와
할렘을 만든 여자" 등
수많은 타이틀이 붙어 다닌다.
이 이야기는 '인류 문화학'이나
'동물 실험'도 아니며
실제 있었던 실화이다.
인간, 아니 숫컷들의 추잡한 광란
그리고 ♂ 32 + ♀ 1 = 7년 간에 걸쳐
동거한 결과를 전부 소개한다.
이 사건은
"아나타한 섬
(Anatahan Island)
여왕 사건"이라고
일본에서 불린다.
'여왕벌'의 무대는,
태평양 미크로네시아 북서부의
열도 마리아나 제도
(Mariana Islands)의 일부로
아나타한 섬
(Anatahan Island)이라고
불리는 작은 섬에서 시작된다.
사이판(Saipan Island)에서
북쪽으로 약 117km에 위치한,
섬 길이 약 9km,
폭 3.7km,
섬 최고점은 787m로
섬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섬 면적 약 32.4 ㎢의 작은 고도이다.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의
아나타한 섬(Anatahan Island)
기묘한 이야기는
이 섬에서 이렇게 시작된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昭和 19年),
32톤짜리 다랑어잡이 어선
헤이스케 마루(兵助丸)가
해군으로부터 징용된 것은
1945년(昭和 19年) 1월의 일이었다.
5월 24일 보급물자를 싣고
16척의 다른 동료어선과
선단을 형성하여
요코하마항을 출항하여
마리아나 제도로 향한다.
선단이라고 해야
고작 30톤 정도의 목조선들로
전부해야 500톤 정도였다.
일본 해군에 징용된
어선 몇 척에 각각 해군 2명,
징용어부(군속) 8~9명이 승선하여
사이판 부근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으나,
이날 아침 이들의 어선은
미군 전투기에 발견되어
공중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아나타한 섬(Anatahan Island) 전경
이 때문에 헤이스케 마루(兵助丸)와
아케보노 마루(曙丸)의
두 척이 침몰했다.
승무원들은 필사적으로 헤엄쳐
구사일생으로 섬에 표착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섬이 '여왕벌'의 무대가 된
아나타한 섬
(Anatahan Island)이었다.
또 이때 거의 같은 시기에
공격을 받아 침몰한
에비스 마루(えびす丸)의
생존자를 태운
카이호우 마루(海鳳丸)도
아나타한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유일한 교통수단인
카이호우 마루는
다음 날의 공습으로
소실해 버려,
군인 10명과
임시 징용선원(군속) 21명,
총 31명의 남자들이
아나타한 섬에
남게되는 운명이 되었다.
전쟁발발 전부터
일본 기업에 의해
야자재배(椰子, Coconut)를 하던
아나타한 섬에는,
약 70명 정도의 원주민이
생활하고 있었으나,
이 외에도 농원 기술자
(주임 日下部正美)의 남성 1명과
그의 부하직원(南洋興發 직원)의
처 히가 카즈꼬
(比嘉 和子, 24세)와
2명의 일본인이
섬에 살고 있었다.
'Queen Bee'
히가 카즈꼬(比嘉 和子)
히가 카즈꼬(比嘉 和子)는
원래 오키나와 출신으로
파간 섬(Pagan Island,
마리아나 제도의 일부 섬)의
카페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던
18세 때에 결혼하여,
22세 때 남편
(南洋興發 직원)을 따라
아나타한 섬에 왔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여동생을 데리러 간다며
파간 섬으로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
무인고도의 초조한 상황 속에서,
농원 기술자와 카즈꼬는
자연스럽게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현 시점에서 생존자 수:
남자 32명, 여자 1명>
Queen Bee
이때부터 서바이벌(Survival) 게임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농원 기술자와 카즈꼬는
농원이 있었으나,
30여 명의 남자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1개월도 못 버티고
식량은 바닥났기 때문에,
남자들은 각 그룹으로 나누어
토란 등의 농작물 재배를 시작했다.
그들은 살아 남기 위해
도마뱀이나 박쥐 그리고
야자집게(Coconut Crab) 등을
잡아 먹었다.
다들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
섬 구석구석 찾아
헤메는 매일이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 날 폭풍우 속에
파도에 휩쓸려
1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현 시점에서 생존자 수:
남자 31명, 여자 1명>
Queen Bee
그들이 상륙한지 1년이 지난
1945년(昭和 20年),
7월 중순에서 약 1개월 사이에,
아나타한 섬은
거의 매일 공습을 받고 있었다.
섬에 있던 원주민들은
미군이 데리고 가거나
탈출하여
언젠가부터 섬에는
한 명도 안 남게 되었다.
이 해 8월 15일
전쟁이 끝났다는 뉴스와 같은
것을 알 수 없었던 이들은,
이전과 같이
미군의 모습을 보면
도망다니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9월 중순 무렵
미 해군 보트가
해안에 접근,
확성기를 통해,
"일본은 항복했다.
섬에 잔류하고 있는 사람은
신속히 항복하여
미군 배에 승선하라!"고
종용했으나,
이때 누구 한 사람
곧이 곧대로
패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고도의 남자 31명과 여자 1명은,
섬 서쪽에 있는
"손손"이라는 야자 농원→
섬 남쪽의 공장부지
그리고 해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섬에서 생활을 계속했다.
그들의 주식은
바나나, 토란, 사탕수수 그리고
원주민이 남기고 떠난
농작물 종자를 뿌려 키운
과일,
바다에서 잡은 생선과
해초를 먹었다.
이 외에도 도마뱀, 뱀
그리고 쥐 등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었다.
초기의 섬 생활이란
매일 먹을 거리를 찾아
섬 구석구석을 전전해야 하는
원시적 생활의 연속이었다.
취사 중에 연기가 나면
미군 눈에 띄어
공습을 받을 것을 염려해,
취사는 아침에
하루 세끼분을 한꺼번에
준비했다.
무엇을 하던
미군의 눈에 안 띄도록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고 있었다.
때때로 미군이 보트를 타고
섬에 상륙하기도 했으나
언제나 금방 철수했다.
미군이 사라지고 난 다음
미군이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를 줍는 것이
당시의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즐거움에 하나였다.
당시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남는 것 만이
최대 목표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파도에 휩쓸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종전까지
무사히 살아 남은 것으로 되어있다.
--- 만약,
이때 미군에 투항했었다면,
전원이 무사히
일본 본토에
발을 디뎠을 것이었으나...
---섬의 풍부한 자연 환경 덕택에
차츰 굶주림으로부터
해방과
갑짜기 줄어 들기 시작한
공습이 없어지자,
섬의 생활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나타한 섬(Anatahan Island)에는
먹을 것이 풍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재배한
코코넛으로 술을 만들어,
달빛이 비치는 밤에는
파티를 열어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고부터,
그들의 사이에서는
기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아나타한 섬
(Anatahan Island)의
유일한 "홍일점 여성"인
카즈코(和子)를 둘러싸고,
남자들이 서로 은밀하면서도
맹렬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농원 기술자와
카즈꼬(和子)가
지금까지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카즈꼬(和子)는
도움을 청하는 형태로
농원 기술자와
동거하기 시작했으나,
독점욕이 강하고
질투심 깊은 농원 기술자는,
카즈꼬(和子)가
다른 남자와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는
자주 폭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때로는 술을 만들어 마시기도 하며
기분전환
전쟁이 끝나고 반년이 지난
1946년(昭和 21年) 2월,
헤이스케 마루(兵助丸)의
선장이 급사했다.
같은 해 8월,
미군의 배가
섬으로 접근해 오자
산속으로 피신한 기술자와
카즈꼬(和子)는,
추락한 B-29 폭격기의
잔해를 발견하여
낙하산과 통조림을 회수했다.
돌이켜 보면
이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 전원이
비행기 추락현장으로 가서
낙하산 6개와
휘발유 탱크 7개 등을 회수했다.
낙하산 원단으로는
옷을 만들기도 하고,
휘발유 탱크는
반으로 쪼개어
냄비를 만들기도 했으나,
이때 기체의 강철
두랄루민(Duralumin-
구리 4%,
마그네슘 0.5%를
알루미늄에 넣은 합금)으로
나이프를 만든 사람도 있었다.
미군용 휘발유 통을 쪼개 만든
냄비와 섬에서의 부엌 생활도구들
또 A남자와 B남자라는
2인조는,
B-29 폭격기의 잔해 속에서
고장난 피스톨 3정과
실탄 70발을 발견했다.
이 2인조는
그것을 해체수리하여
2정의 피스톨을 완성시켰다.
남자들이 무기를 손에 넣은 순간
비극의 막은 본격적으로 올랐다.
<현 시점에서 생존자 수:
남자 30명, 여자 1명>
Queen Bee
얼마 지나지 않아,
2인조의 한쪽과
사이가 나뻤던 C남자가
결국 변사했다.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
원인"이라고 했으나,
2인조 이외의 목격자는 없었다.
이 뒤로 농원 기술자의
질투심에 질린 카즈꼬(和子)는
D남자와 눈이 맞아
산속으로 도망하기는 했으나,
워낙 너무 좁은 섬이라
결국 간단히 발견되어
농원 기술자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로 남자들의
카즈꼬(和子) 쟁탈전이
격화된다.
어느덧 사이가 벌어진
피스톨 2인조의 한 사람
A남자는,
노골적으로 카즈꼬(和子)에게
끈적끈적하게 되었다.
드디어 어느 날
A남자는 카즈꼬에게
"너, 내 여자가 되라.
싫다고 한다면
농원 기술자를 죽이겠다"라고
협박했다.
카즈꼬가 이 사실을
원 기술자에 전하자,
그는 공포심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질투심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죽고 싶지 않으니깐.
그 놈 곁으로 가 버려라!"라고
카즈꼬에게 말했다.
그리고 어찌 되었는지
농원 기술자, A남자, B남자
그리고 카즈꼬 4명이
같이 살게되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즉 홍일점 카즈꼬는
동시에 3명의 남편을
거느리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일그러진 생활이
오래 지속될 턱이 없었다.
결과는 뻔했다.
섬 생활은 원시적 생활에 가까웠으며
집신을 자신들이 만들어 신었다.
1947년(昭和 22年)의 가을,
드디어 피스톨 2인조의
사이가 벌어져,
B남자가 피스톨로
A남자를 사살했다.
다음 해 1948년,
이대로는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쳐오는 것을 느꼈는지,
농원 기술자는
마치 물건을 취급하듯이
선듯 카즈꼬(和子)를
B남자에게 선물하고
자기는 여기서 몸을 뺐다.
그런데 그 뒤의
3개월이 지나서
B남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B남자의 실종에 대해,
농원 기술자와 카즈꼬는
"B남자는 낚시하던 중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라고 했으나,
사실 수영의 프로였던
B남자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현재까지도
B남자의 사인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둘이서 B남자를 죽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목격자가 둘밖에 없는 점,
B남자의 사후
곧 농원 기술자와
카즈꼬의 사이가
급속히 좋아진 점 등
의심스러운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다른 남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남자가 한 사람 한 사람
줄어 든다는 사실은,
반듯이 나쁜 일 만은
아니었으므로,
끈질긴 책임 추궁은
필요없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재판권도 없었으므로...
<현 시점에서 생존자 수:
남자 27명, 여자 1명>
Queen Bee
이런 일이 있은 뒤
반년 정도 지나,
이번에는 농원 기술자가
급사했다.
카즈꼬와 E남자에 말에 의하면,
"농원 기술자는
식중독으로 죽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매일 같은 밥솟,
같은 냄비로 끓인 음식을
다 같이 먹고
이 한 사람만이
식중독(?)으로 죽었다.
그러나 A남자와 B남자의 사후,
그들의 피스톨을 소지하고 있던
E남자가
농원 기술자를 사살했다는
용의가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피스톨을 소지한 인간이
카즈꼬를 소유하는
권리를 갖는다"라고 하는
절대적인 불문률이
암묵의 가운데
섬을 지배하게 되었다.
죽느냐 사느냐!,
이 명언과 같이
일촉즉발의 공기가
섬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
그 뒤 1948년(昭和 23年) 2월까지
카이호우 마루(海鳳丸) 갑판장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뒤를 이어 아케보노 마루(曙丸)
갑판장이 식중독으로 죽었다.
어느 것이나
의문 투성이의 죽음이었으나,
사고였던 살인이었던
그들에게는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피스톨 소유의 E남자도
의문의 익사를 했다.
"큰 파도에 휩쓸리어
행방불명이 되었다"라고 하는
사건이었으나,
시체의 발견은 없었다.
<현 시점에서 생존자 수:
남자 23명, 여자 1명>
Queen Bee
좁은 섬에서 일어나는
이상적인 사건의 사태를
수습을 위해
최고 연장자인 F남자가
이런 제안을 했다.
"카즈꼬씨에게
정식으로 남편을 선택하게 해,
남은 사람들은 이것을 축복해 주고
더 이상 간섭하지 않도록
약속하자"라고,
카즈꼬는 내심,
남자라면 더 이상
지긋지긋 지겨울 정도라고
생각했었으나,
F남자의 제안을 받아 들여,
하는 수 없이
최초로 눈이 맞아 도망했었던
상대인 D남자를 선택하여
결혼(?)하기로 했다.
살아 남은 동료 남자들은,
남태평양 마리아나 제도
(Mariana Islands)의
아나타한 섬
(Anatahan Island)에서
전대미문의
'Wedding Ceremony'를
올려 두 사람의 장래를 축복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던 피스톨은,
서로가 상의한 결과
두 정 모두 부수어
바다 속에 버리기로
합의하고 실행했다.
섬 생활의 필수적인 것은 작물재배
1949년(昭和 24年)의 가을,
미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를 뿌렸으나,
여전히 이들은 패전을 믿지 않고,
삐라를 뿌리고
가끔 상륙하는 모든 일이
미군의 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110km 이상 떨어진
사이판에서는
불발탄 처리로,
이 때의 폭음이
아나타한 섬까지 들려와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었다.
다음 해 1950년(昭和 25年) 6월,
사이판에서 폭발음이 딱 멈추었다.
이것을 모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확인할 용기도 수단도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에
또 미해군의 배가
섬에 다가왔다.
이 때, 언제나 같이 도망가는
일행과는 반대로,
카즈꼬는 혼자서
배 곁으로 접근하여
섬으로부터 탈출하였다.
그 배는 틀림없이
미군이 수배한 배였으나,
일본인도 타고 있었으며,
아나타한 섬의 잔류 일본인
구출을 목적으로 왔었다.
구출되었을 때
카즈꼬의 나이는 28살이
되어 있었다.
"여왕벌"의 아나타한 섬
(Anatahan Island) 탈출 성공
구조대원들과 함께 찍은 기록사진
"아나타한 섬의 여왕"이
아나타한 섬(Anatahan Island)
탈출 성공 뒤로,
6년 만에 처음으로 보는
같은 여성
오른쪽의 여성은
사이판 민생담당 부장
Elouise Johnson 소위의 부인
아나타한 섬을 순회하고 있던
미 해군의 커터(Cutter) 순시선
'미스 스지 호'는
섬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허리에 바나나 잎을 둘르고,
흰천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는
여성을 발견했다.
종전과 함께
이 섬에 살던 원주민들은
이미 미군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왜 아직 이 섬에
사람이 살고 있는가?
피곤하여 지칠대로 지친
카즈꼬의 사정을 들은
미군은 경악했다.
그리고 이 뉴스는
전 세계에 알려져
그녀는 비극의 히로인으로
일약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구출선의 일본인들과 카즈꼬는
편지와 일본 신문 등을
남겨 두고 갔으나,
그래도 섬에 남은 남자들은
종전의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2개월 뒤인 8월,
카즈꼬와 결혼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혼자 섬에 남아
외톨이가 된 D남자가 병사했다.
1951년(昭和 26年) 1월,
카즈꼬가 지난 해 7월
사이판에서 D남자 앞으로
보낸 편지가
해안에 도착해 있었다.
같은 달,
아케보노 마루(曙丸)의 선장이
손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죽었다.
<현 시점에서 생존자 수:
남자 21명, 여자 0명>
Queen Bee
6월에는
미국 비행기가
삐라를 살포하고 있었다.
삐라에는 "2~3일 중에
가족으로부터
여러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라고
쓰여있고,
섬에 남아있는 전원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수일이 지나서
남자들 앞으로
진짜 편지가 도착했다.
1945년 9월 27일
일본 천황이
미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과
회견 때의 사진
(훼레이스가 찍은 3장 가운데
한 장의 사진)
맥아더 장군과
쇼우와 천황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있는 신문과 함께였다.
남자들은 이제서야
겨우 현실로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싣고 온 배에
군인 출신 한 남자가
승선하기로 하고
섬을 떠났다.
6월 14일
남자들은,
다음에 미군이 오면
항복하자고 의논했다.
<현 시점에서 생존자 수:
남자 21명 중 섬 잔류 남자 20명,
여자 0명>
Queen Bee
잔류자들이 실제로
미군에 투항했을 때에 찍은 보도사진
The Last Surrender
of World War II -
Anatahan, June 30, 1951
백기든 사진 섬 잔류자들이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마중나온 미군에게 감사하고 있다.
드디어 7년 만에
미군의 보트를 타고
추억의 "아나타한 섬"을 떠나는
잔류자들의
상당히 즐거운 듯한 표정.
사요나라!
6월 26일
미군 비행기가
다시 삐라를 뿌렸다.
남자들은 흰색 천을 흔들면서
비행기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 삐라에는
"6월 30일
영접하러 배를 보내겠다"라고
쓰여있었다.
6월 30일 귀국 당일,
생존자들은 다들 머리를 깎고,
수염을 깎고하여
신변 정리를 마치고
영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대로 15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배가 정박해 있고,
보트 한척이
해안으로 다가왔다.
섬에 남은 20명의 남자들은,
만 7년 간 동안을 살아 온
정든(?) "아나타한 섬"
(Anatahan Island)과
작별을 고했다.
그 동안 많은 신세를 진
"아나타한 섬"
(Anatahan Island)과 작별
각자가 섬에서 생활하던
전 재산을 등에 짊어지고
섬을 향해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미해군 선상에서
7년만에 먹어 보는
쌀밥 쌀밥 흰 쌀밥
Queen Bee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겨우 귀국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일은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존자 전원이 구조된
미 해군의 배에서 찍은 기념사진
카즈꼬의 본래의 신랑은,
몇 년이고 행방불명이 된
카즈꼬를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재혼해 있었다.
어선 승무원의
어부 남자의 처도 재혼했다.
또 이 남자 동료의 처는,
이 남자의 동생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살고있었다.
이 외에 또 2 사람의
귀국자의 처가
이미 재혼한 몸이었다.
귀국의 기쁨도 한 순간,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자들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이 사건의 후일담
이들이 귀국 뒤
1952년(昭和 27年),
아나타한 섬에서의
기묘한 생활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일본 국내는 공전의
"아나타한 붐"이 일어,
카즈꼬의 브로마이드
(bromide,
① 브롬화물,
② 브롬화칼륨,
③ 진부한 이야기)는
팔리고 팔려 나갔다.
한편 남자들은
그다지 소문없이 조용했으나,
왠지 카즈꼬 만이
남자를 유혹하는
악녀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7년간 무인도에서 발생한
이러한 이야기는
호기심 왕성한 일본 남성을 물론
여성에게도
욕구를 만족시키기기에
충분했다.
매스컴은 카즈꼬를
"여왕벌"이라고 부르며,
"아나타한의 독부(毒婦)"로서
엽기적으로 다루어졌다.
1953년(昭和 28年),
카즈꼬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B급 엽기영화
'아나타한 섬의 진상은 이렇다'
(1953년/64분/35mm/
감독 盛野二郞)가 공개 되었다.
그녀는 왜곡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영화 사상 엽기적으로 각본한
영화에 본인이 직접 출연한 예는
이 영화가 유일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여왕벌"
"아나타한의 독부(毒婦)"
"아나타한 섬의 여왕"
"32명의 남자와 할렘을 만든 여자"
"히가 카즈꼬(比嘉 和子)"의
젊었을 때의 모습
그녀는 "여왕벌",
"아나타한의 독부(毒婦)",
"아나타한 섬의 여왕",
"32명의 남자와 할렘을 만든 여자"
그리고 "본능이라는
이름의 섬 아나타한" 등
갖은 소문에 괴로워 했다.
인내의 한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그녀는
동경에 가서,
"나는 여왕벌이 아니다"라고
매스컴을 상대로 폭발했다.
매스컴도 카즈꼬를 비난했으며,
카즈꼬도 또 경솔한 발언을
자주 반복했다.
이때 돈 벌이를 위해
카즈꼬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나타났으며,
그녀는 이것을 이용하여
'아나타한 섬의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었다.
영화 「아나타한」의 포스터
The Saga of Anatahan, 1953
'아나타한의 진실은 이렇다'라는
영화가 상영되어
인기를 얻어 성공하는 듯했다.
붐이란 곧 지나가게 마련이며
매스컴이나 흥행주로부터
이용당할 만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사회 습성에 질린
그녀는 전국을 전전하며
차츰 세간으로부터
잊혀가고 있었다.
전쟁, 무인고도, 굶주림
그리고 본능을 드러낸 남자들,
살아 가는 데 필사적이었던
카즈꼬.
"저게 저 여왕벌인가?"라고 하는
남자들의 흥미와
비웃음의 속에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은 측은하기도 한,
"알 못 낳는 비운"의
"여왕벌"이 전락되는
최후의 모습이었다.
Queen Bee
이 B급 엽기영화는
해외의 거장 감독의 눈에 띄었다.
일본 엽기영화
'아나타한 섬의 진상은 이렇다'에
자극받아,
미국 영화 감독
요셉 스턴버그
(Josef von Sternberg,
1894~1969)에 의해
'The Saga of Anatahan(1953)'으로
영화화되었다.
The Sage of Anatahan, 1953
Credits:
Directed, written, narrated
and photographed
by Josef von Sternberg
Produced
by Kazuo Takimura
Music by Akira Ifukube
Starring: Akemi Negishi,
Suganume,
Ikio Sawamura,
Jun Fujikawa
1953년
이탈리아판 영화
「아나타한」의 포스터
Titre Original: ANATAHAN
Realisateur: Josef VON STERNBERG
Acteurs Principaux:
Tsuruemon BANDO,
Jun FUJIKAWA,
Hiroshi KONDO
Shozo MIYASHITA,
Shoji NAKAYAMA,
Akemi NEGISHI
(the 'Queen Bee')
Kikuji Onoe,
Kisaburo SAWAMURA,
Tadashi SUGANUMA.
Akemi Negishi
(the 'Queen Bee',
根岸明美, 1934~2008)
'아나타한 섬의 여왕'의 최후
히가 카즈꼬(比嘉 和子)는
영화 출연 뒤로
'아나타한의 여왕'이란
연극의 주연으로
전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다니다,
1958년(昭和 33年)
고향 오키나와로 돌아가
결혼.
1974년(昭和 49年)
뇌종양으로
52세로 별세했다.
아나타한 섬 일본군 잔류병에게 뿌린
투항 권고 비라의 내용
5~6분간
막대기로 비벼
불을 일으킨 다음에
이것을 숯에 옮겨
불씨를 만들었다.
미군의 낙하산 원단은
그들에게 있어 귀중한 섬유였다.
미 군함에 승선하여
오끼나와까지 이동한 다음
여기서는 비행기로
본토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기념촬영했다.
Photos Source:
Anatahan Island 19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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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노승렬 | 아나타한(Antahan) - Daum 카페
옮겨 온 글 편집
첫댓글 만물의 영장으로서 체면이 아닌 글이나 영화는 눈이 더렵혀질까 봐 가까이 하지 않지만 청산님이 올린 글이라 슬쩍 봐도
여왕벌도 여왕도 아니고 착취당한 노예거나 흥미위주로 엮은 엽기사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