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남문 밖 정여립의 집터를 숯불로 지니고 파가지고 소(쏘)를 만들다.
전주 남문밖에서 태어났다는 정여립의 집터가 <한글학회>에서 펴낸《한국지명총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전주시와 완주군의 경계에 있는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었다.
파소: 아랫대건네와 웃대건네 사이에 있는 소. 정여립의 집터를 파서 만들었다고 함. 파소 들: 파소 북쪽에 있는 들. 파소 봉: 파소 동쪽에 있는 산. 파소 모랭이: 아랫대건네와 웃대건네 사이에 있는 모롱이,
왜 파쏘인가? 역적의 집터를 그대로 두면 곳에서 나는 나무와 풀잎을 노새나 말이 먹어도 역적 질을 한다고, 그런 연유로 역사가 시작된 이래 나라에 반역을 꾀했던 사람들이 태어난 곳이나 살고 있던 그 땅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게 해서는 안 되었다. 행여 고삐 풀린 망아지라도 염소라도, 아니 병아리라도 뜯어먹으면 역모를 한다는 것이었다. 숯불로 지지고 파 가지고 쏘를 만들었다. 말 그대로 발본색원을 한 것이다.
해마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빠져 죽었고, 기축옥사 때 죽음 당했다는 뜻인지 건너편 마을들 이름은 상죽음리 하죽음리라고 부르고 있다,. 한자로야 대나무 죽(竹)에 그늘 음(陰)이니 대 그늘이다. 그래서 ‘웃대건네,’ 아랫대건네로 부르지만, 아무래도 그 말은 사람의 운명이 끝나는 죽음리라고 불렸던지, 자동차 사고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결국 마을에서는 마을 이름을 바꿔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전주시에서는 전주부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부남府南리로 개명을 해줬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만 해도 달을 맞는 바위라는 뜻으로 월암月巖으로 불리었을 자그마한 산 이름이 7~80년대에는 부르기도 섬찟했던 파쑈가 아닌 파쏘봉이 되었고, 파쏘봉 앞에 펼쳐진 들판은 파쏘들이라 불리게 되었다.
정여립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축옥사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집터가 파쏘가 되었다.
정여립의 최후를 지켜 본 진안현감 민인백이 지은 <토역일기>에는 정여립의 아내에 대한 글도 나온다.
“정여립이 평소 그의 본처를 박대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혹시라도 말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그를 문지방에 앉혀 놓고 장작개비로 마구 때렸다. 정여립이 도망한 뒤에 그의 아내를 전주에서 체포하여 그의 중의를 벗기니 한 기생이 보고는 그를 불쌍히 여겨 입고 있던 중의를 그에게 입혀 주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몹시 슬퍼하였다.” 그의 가족들 뿐만 아니라 먼 일가친지도 모두 노비가 되거나 귀양을 보냈다. 정여립과 친족이었거나 아는 사이었던 사람 그리고 동인 당원으로서 평소에 송강 정철이나 배후의 구봉 송익필에게 감정을 샀던 사람들 중 3년 동안 죽고, 귀양 가고, 투옥된 사람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 오익창이 상소문에서 “간교한 무리들이 그 기회를 타 토벌한다는 구실을 빌어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날조를 다하여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은 모조리 다 죽이고야 말았습니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의 목숨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조선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영조 시대의 학자인 남하정이 지은 《동소만록》에는 “처형 또는 고문사한 사람이 정여립․이발․정개청․최영경을 비롯 53명 이상이고, 유배자가 20여 명이었으며 옥에 갇힌 사람이 400여 명이 넘었다“ 고 실려 있고 이건창李建昌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그 때 사방에서 고변하는 사람들이 서로 잇달아 끊어지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옥사가 시작된 지 1년 동안에 동인東人의 연루자가 실로 천명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배동수는 <정여립연구>라는 그의 논문에서 ”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 중 이름이 사서史書에서 확인된 사람은 사망자 115명, 찬배자 29명, 피수자 54명, 파직인 34명으로 도합 232명이다. 사망자는 이 외에도 전주부윤 윤우신尹友莘이 70여명을 처형한 적이 있고, 임지林地 일가와 성희등 30여인과 주민 20여명을 나포한 사실, 기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하층민들을 포함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짐작되나 사망자가 천 여 명 내지는 수천 명이라는 설은 무리라고 본다.
다만 전주 일대의 정여립의 친인척과 문도들이 대부분 희생을 당하였고, 정개청 한 사람으로 인해 “50명이 죽었고, 20명이 유배되었으며, 400여명이 과거에 나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동소만록>의 기록과 당시 관학의 유생으로 조금 이름이 있는 자는 모두 금고 되었다는 기록 그리고 이름 없이 죽어간 하층민들 등을 고려한다면 사망자, 찬배자, 파수자, 파직인 그리고 과거 길이 막힌 사람들까지를 생각한다면 1천 여명이 훨씬 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
기린봉에 남아 있는 동래정씨의 묘소,.
한편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발의 광산 이씨 문중과 화순의 조대중 가문은 멸문지경에 이르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에 있던 그들의 인맥도 끊어지고 말았으니, 기축옥사의 진원지 전주․김제 일대 사람들이나 정여립과 성씨가 같았던 동래 정씨들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동래 정씨의 족보에서도 지워졌고(그 족보가 kbs, 역사스페셜에 실려 있음), 전주에 살고 있던 동래정씨들은 동래정씨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들은 이 고을 저 고을로 더러는 성씨마저 바꾼 채 뿔뿔이 흩어져갔다.
20여 년 전 kbs<역사스페셜>을 촬영하고 있는데 동래정씨 화수회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전주 기린봉에 정여립과 11촌간이라는 사람의 묘소가 있는데 그의 후손은 그때 충청도 증평으로 쫓겨 갔고 1979년에야 없어졌던 묘를 다시 복원했다는 것이었다,
취재진과 더불어 그 묘에 가서보니, 봉분은 새로 만들어 파묘의 흔적은 찾을 길 없었지만 묘 앞을 지키는 문인석 중 하나는 목이 잘린 채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캐내어 복원하였다는데, 얼굴은 시멘트로 다시 만들어 붙어 있었고 또 하나의 문인석은 귀가 잘려서 시멘트로 만들어 붙어 있었다. 더 참혹했던 것은 익산 출신의 문장가로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황진이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비문이 조각조각 난 채 묻혀 있다가 묘 앞에 상석으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김제에 있던 정여립의 조상 묘는 어느 것 하나 성한 곳이 없이 모조리 파헤쳐져 유골을 갈아서 바람에 날려 보냈다. 이처럼 기축옥사 이후 호남과 영남(지리산 쪽)일대는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그 지역에 가면 기축옥사의 쓰라린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후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불행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행운이었다.
그런 역사를 간직한 기축옥사를 재조명하는 세미나가 오늘 2시부터 5시까지 김제시의 김제문화원에서 열립니다.
2026년 7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