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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5,1-7.10
그 무렵
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2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4 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 해 동안 다스렸다.
5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유다를 다스린 다음,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6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7 그러나 다윗은 시온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
10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이 아닌 피조물, 곧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가기 자신을 앞세우다 자칫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 당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9)
주님!
제 완고함을 꺾으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무시와 악시의 죄에서 구하소서>
지난 토요일과 오늘의 마르코 복음의 얘기를 보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고, 예수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사람들이 보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는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친척들이 찾아오고,
오늘은 예루살렘에서 율법 학자들이 와서 베엘제벨의 힘을 빌려 악령들을 쫓아낸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것이 하늘에서 온 힘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하느님을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엘제벨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율법 학자들도 있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들의 비뚤어진 시선을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단죄하십니다.
이런 비뚤어진 시선 중에 선입견이라는 표현이 있지요.
똑바로 조사해보고, 식별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이미 안에 들어와 형성되어 있는 견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잘못 보고 안 좋게 보게 하는 내적 기제가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개와 같은 관점이 안에 있어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욕심이 안에 있으면 욕심내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보게 되고,
자기 안에 악이 가득하면 모든 것을 다 악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색안경을 끼면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도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의 안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어서 성령에 의한 주님의 악령추방을 악령에 의한 것이라고 보게 하는 것일까요?
이들에게 악령이 들어가 있어서 성령을 악령이라고 보는 걸까요?
아닐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악령이나 더러운 영들도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있는 것은 성령이든 악령이든 영적인 것이 아닐 겁니다.
그런 것이기보다는 교만과 악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도 보통 사람의 교만 정도가 아니라 주님마저도 무시하고 악시할 정도의 교만일 겁니다.
제가 무시와 악시를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무시라는 말은 있어도 악시라는 말은 없지요.
제가 만들어낸 말로서 악으로 보는 눈이라는 뜻입니다.
교만의 눈은 어떤 것입니까?
교만은 분명히 있는 것인데도, 없는 것으로 본다는 뜻이지요.
우리말의 업신여김, 곧 ‘없이 여기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은 선한 것도, 악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조리 악한 것으로 보는 눈이요, 하느님의 선한 업적도 악한 것으로 보는 눈이며,
한 달란트 받는 자가 주님을 모진 분으로 보는 것과 같은 눈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독한 교만은 무시를 넘어 죄악시하게 합니다.
특히 성령을 악령으로 모독하게 하는 죄악시인데, 이런 죄악시를 가진 자는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죄에 매이게 하는 무서운 교만을 경계하고, 이 죄악에서 구해주십사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거짓은 밝혀진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활동하고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봉사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경제적인 출혈을 낳으면서 일했다고 생각하는데, 인정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비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들리는 여러 말 때문에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마르 3,21)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서기도 하였고,
율법학자들은“예수는 베엘제불에 들렸다.”,“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고도 하였으며,
사람들은“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 3,30)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반대자가 상대하기 거북하고 비겁하다고 해서 그를 악령에 사로잡힌 정신 이상자로 몰아붙여 매장하는 것은 아주 비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풍문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상대방의 속을 환히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길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 3,30).
물론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어떤 특정한 죄라기보다는 마음이 비뚤어져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선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선물하시는데,
이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합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결코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평생 전사 - 주님과 함께 영적승리의 삶을 삽시다>
어제 ‘하느님의 말씀 주일’ 교황님의 두 강론 주제 머릿글이 새로웠습니다.
늘 읽어도 깊고 새롭고 아름다운 교황님의 강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희망과 사랑안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라.”
문득 이 말마디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라.”
아름다운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수도자들에게 하루중 가장 해방감을 느끼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은 아마도 끝기도 후 잠자리에 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전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찬미가와 강복은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지 평생 삶을 요약하는 하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 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 찬미가2절
“전능하신 하느님, 이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날마다 평생 끝기도후의 강복의 은혜로 선종의 죽음도 맞게 되리라는 예감도 듭니다.
어제 하느님의 말씀 주일 강론시,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말씀이라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부득이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전쟁이라고 말입니다.
어디선가 읽은 구절도 잊지 못합니다.
‘청년기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기에는 일하고 싸우고, 노년기에는 병마(病魔)와 싸운다.’는 말마디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인류의 염원과는 역설적으로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된 전쟁이요 흡사 인류사는 전쟁사같습니다.
지금도 안팎으로 계속되는 다양한 전쟁입니다.
어느때 보다 한반도는 전쟁위기라 합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치는 만세육창중 세 번째 만세가 “대한민국-한반도 만세!”입니다.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전쟁이요, 일상의 모두가 정지되고 상처의 치유와 회복도 요원케하는 전쟁의 폐해입니다.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이구동성 말합니다.
우리 수도승 영성에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영적전쟁입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부터 참 많이 주의깊게 다뤘던 주제이며 강론 중에도 다음 같은 요지로 얼마나 많이 나눴는지 모릅니다.
“우리 수도자는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적전투를 치러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말씀의 전사, 기도의 전사, 평화의 전사, 찬미의 전사이다.”
얼마나 멋진 주님의 평생 전사들인 우리 수도자들의 신원인지요!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이 전사들입니다.
그래서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의 영적훈련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요 온갖 수행들입니다.
특히 하루의 영적전투에서 영적승리를 위한 매일미사은총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문득 요한복음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ㄴ)
더불어 우리를 격려하는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아래 바위판 글자도 생각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4,27)
주님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전사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이 영적전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적수들인 율법학자들의 집요한 공격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영적승리를 폄훼하여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왜곡합니다.
말그대로 가짜뉴스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들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을 밝힙니다.
악의 동맹이 얼마나 강고한데 영리한 사탄들이 결코 갈라서는 분열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바로 여기 힘센 자, 사탄을 제압하는 더 힘센 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불세출(不世出)의 영적 전사인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지 강조합니다.
너무나 자명하고 뚜렷한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 악의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고의적, 악의적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래서 성령께 마음을 열고, 성령에 따라 겸손하고 유연하게 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닫아거는 완고함 앞에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 자기감옥에 갇힌 무지의 수인(囚人)들이 바로 성령을 모독한 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은 하느님의 전사로서 다윗의 최종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평생 전쟁터에서 지낸 다윗은 마침내 모두를 평정하고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니 온전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이런 평생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결정적인 분은 하느님이심을 마지막 구절이 분명히 합니다.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사무하 5,10)
다윗이나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참으로 천하무적 주님의 전사가 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사로서 다윗과 예수님은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평생 전투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피를 흘렸는지요!
반면 예수님은 아무의 피도 흘리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온전히 사랑과 섬김, 겸손과 평화의 영성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믿음과 사랑,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 말씀과 기도로 일치를 이룬 주님의 전사들의 공동체라면 부패도 분열도 없을 것이니, 바로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공동체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무장시켜 당신 성령의 전사, 평화의 전사, 복음의 전사로 세상 삶의 전쟁터에 파견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ㄴ)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성격상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편입니다.
물건을 주문했을 때, 좀 크면 큰 대로, 좀 작으면 작은 대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너무 작아서 불편하면 남을 주기도 합니다.
요즘 반품을 하면 다 받아준다는데 그렇게 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인지, 재능이 없어서인지 세심히 살피지 못하고, 틀린 부분을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편입니다.
방 안의 물건들도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진중한 편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게으른 편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전문가보다 더 세심하게 잘못된 부분을 찾아낸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문가들이 그분의 말을 수긍은 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인지 고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남들은 그냥 넘어가는 것들도 본인의 눈에는 잘 보이는 것이 때로 힘들다고 합니다.
그것을 말했을 때 상대방이 수긍을 하기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감정이 상하는 것을 볼 때가 힘들다고 합니다.
본인의 성격과 본인이 하는 일의 특성 때문에 그리 된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격이신지요?
예전에 직장인들이 좋아하는 상급자의 유형을 읽었습니다.
가장 힘든 상급자는 똑똑한데, 부지런한 상급자라고 합니다.
그분들을 따라가려면 쉴 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성인 밑에 있으면 순교자가 된다.”
본당 신부님이 성인처럼 지내면 보좌 신부님과 신자들은 거의 순교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좋은 상급자는 똑똑한데 게으른 상급자라고 합니다.
똑똑하기에 일에 실수는 없고, 업적도 낼 수 있지만, 회식도 자주하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대로 좋은 상급자는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급자라고 합니다.
멍청하기에 문제는 생기지만 그런 대로 뒷감당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지만 걱정이 되는 상급자는 멍청한데 게으른 상급자라고 합니다.
아주 편하기는 한데 부서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년 동안 신문사에 있으면서 저는 어떤 유형의 상급자였는지 돌아봅니다.
팬데믹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으니 아주 멍청한 상급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실적과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니 아주 부지런한 상급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상급자인지요?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상급자를 좋아하시는지요?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자였습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이길 정도로 싸움에 능한 군인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이 하느님께 축복 받은 왕이라는 이유로 몇 번씩이나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를 탐하였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나탄 예언자의 말을 듣고 뉘우치던 왕이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는 왕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했던 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완벽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솔로몬은 하느님께 재물보다, 권력보다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은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하느님 앞에 겸손하지 못했기에 이스라엘은 분열의 길을 걷게 됩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잘못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칠 수 있는 겸손함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걷겠다는 다짐으로 아서 휴 클러프 시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투쟁이 소용없다고 말하지 마라.’입니다.
“투쟁이 소용없다고 말하지 마라.
노력과 상처가 부질없고, 적은 약해지지도, 패배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지 마라.
희망이 멍청하다면, 두려움은 거짓을 말한 것이리라.
보이지 않는 저 연기 속에서, 네 전우들은 지금도 도망치는 적군을 뒤쫓고 있다.
그리고, 너 없이도, 승리를 거두리라.
지친 파도들이 헛되이 해변에 부서지며
안간힘을 쓰며 한 치 앞을 못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먼 뒤쪽으로, 개울과 작은 만을 이루며,
바다가 소리 없이 밀려들고 있지 않은가.
동이 틀 때, 햇빛은 동쪽 창으로만 들어오지 않으며,
태양은 앞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오르지만,
하나 서쪽을 보라.
온 대지가 밝게 빛나지 않는가.”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정신과 전문의 고백을 책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전문의는 마음이 아픈 사람을 만나 상담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부 간 갈등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말처럼, 다른 사람 마음의 병은 고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정말로 맞지 않는 관계일까를 수도 없이 고민하면서 이혼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부부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 부부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가 운전하고 자신은 보조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친구 아내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과속 방지턱을 지나갈 때 친구가 브레이크를 늦게 밟아서 차가 덜컹거린 것입니다.
뒷좌석의 친구 아내는 크지는 않지만 “아이쿠”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때 친구가 아내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더랍니다.
정신과 전문의인 자신은 아내에게 “괜찮아?”라는 말 대신 평소에 “왜 놀라? 뭐 이런 걸 가지고 놀라? 이게 놀랄 일이야?” 등의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로 상대의 감정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판단적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감정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기 감정만이 아닌 상대 감정을 존중하고 헤아리며 말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배려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정작 감정을 외면할 때가 많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 감정만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자주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즉, 제일 먼저 보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당신의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율법 학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옳다는 기준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메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이렇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고, 자기감정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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