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면 연화도로 떠나는 배가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등산객이 아니라 해도, 가벼운 등산복에 배낭을 멘 여행객들로 배 안이 소란스럽다. 이때 이 작은 섬에 여행객들이 몰리는 이유는 무얼까?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는 섬이다. 여행객들 사이에 수다와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떠나도 이렇게까지 들뜰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15일 아침, 기대와 흥분으로 술렁이는 여행객들을 따라서 연화도행 배에 몸을 싣는다. 앞서 한산도에 자전거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이틀만이다. 연화도는 통영시 앞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섬들 중에 하나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네다섯 차례 욕지도-연화도행 배가 뜬다. 이 배가 연화도를 거쳐 욕지도까지 들어갔다 다시 되돌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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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도 항구에 닿기 직전, 하선을 기다리는 사람들. |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작은 섬, 연화도
이날 아침, 여객선터미널 주차장에서 잠시 고민에 빠진다. 여객선터미널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기는 했는데, 그때까지 배에 자전거를 실을지 말지 채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산도 전체 면적이 14.7㎢, 연화도 전체 면적이 1.7㎢. 연화도는 섬 전역을 자전거로 둘러봤던 한산도에 비해 면적이 9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연결된 도로 길이가 약 3km에 불과하다. 걸어서 약 45분 거리. 자전거로 돌아보기에는 너무 작은 섬이다. 게다가 중간에 도로를 벗어나 수시로 등산로나 도보여행 길을 오르내릴 일이 있어, 자칫 자전거가 애물단지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결국 이날 자전거는 여객선터미널 주차장 구석에 세워두는 걸로 결론을 내린다.
여객선터미널에서 연화도까지는 배로 1시간가량 걸린다. 바다 위, 오갈 데 없는 배 안에서 보내기에는 제법 긴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배가 지나가는 바닷길 옆으로 무수히 많은 섬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일일이 그 이름을 열거하기도 힘들다.
그 섬들 중에 조가비 같은 작은 집들이 비좁은 해안가 언덕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정겨운 섬들이 있는가 하면, 높게 솟은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여 사람 사는 흔적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인도들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섬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 섬들과 반갑게 눈인사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연화도다.
다른 여행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배 안에서 한껏 들떠 있던 분위기와 달리, 연화도에 발을 내려놓자마자 등산객들 사이에서 작은 실랑이가 인다. 배에서 내려 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누군가 이날의 여행 일정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연화도를 여행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섬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연화봉을 넘어가는 등산로를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화봉 중턱을 지나가는 도보여행 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두 길의 차이는 연화봉을 오르느냐 마느냐에 있다. 그런데 도보여행 길을 택한 사람들 중에,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산 정상은 한 번 밟아 봐야 하지 않느냐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유로 갈림길 앞에서 갑자기 말다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실랑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등산을 고집하는 사람이 워낙 소수이기 때문이다. 이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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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봉 오르는 길. 나뭇가지로 뒤덮인 등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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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머리 가는 길, 능선 위 등산로에 핀 찔레꽃. 등산로 한가운데 피어 있는데도 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
연화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선착장 오른쪽 길 끝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등산로를 향해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덩달아 나까지 등산로 앞에서 망설인다. 연화봉 등산로는 확실히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은 아니다. 인적이 드물다. 길 위로 잡초가 무성하다. 길이 제법 가파른 데다 흙길이어서 잘못하면 미끄러질 염려도 있다.
어쩐 일인지 머리 위에서는 까마귀들이 계속 울어댄다. 이 길에서는 까마귀들조차 인간의 발길을 낯설어하는 게 분명하다. 머리 위에서 까마귀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른 지 40여 분, 드디어 나 홀로 연화봉 정상에 오른다. 해발 200m.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드문 데다 까마귀 떼에 쫓기듯 올라와서 그렇지, 연화봉 등산이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많은 여행객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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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봉에서 바라다본 용머리. 용이 대양을 향해 힘차게 헤엄쳐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
연화봉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절경
연화봉 정상에 오르자마자 '아미타대불'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불상 앞에 방석 몇 개가 깔려 있다. 누군가 기도를 올리기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다. 연화도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섬이다. 산 정상에서 대불을 만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불교 신자가 아닌 일반인이 연화봉에 오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연화봉 정상에서 연화도 해안 절경인 '용머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풍경이 마치 거대한 백룡 한 마리가 먼바다를 향해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는 연화도라는 이름을 두고 섬이 연꽃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연화봉 위에서 내려다보는 섬은 실제로는 '용'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연화봉은 용의 몸통이고, 거기에서 바다로 길게 쭉 뻗어 나간 날카로운 바위들이 용머리에 해당한다. 연화봉 정상에 올라서서 멀리 바다 한가운데를 내달리고 있는 용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실제 용의 등에 올라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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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머리 위에서 뒤를 돌아다본 풍경. 바위 절벽이 장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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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머리 가는 길, 용의 비늘과도 같은 바위들. |
사람들이 연화도를 찾는 이유는 이런 풍경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6월에 사람들이 연화도를 찾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에 반드시 들르게 되어 있는 '보덕암'에 가면 알게 된다. 일단 연화봉에 올랐으면 연화도에서는 사실상 어렵고 힘든 길은 다 지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후에도 용머리가 나올 때까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된다. 하지만 연화봉을 오를 때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야 하는 길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등산로를 내려가면 바로 도보여행 길로 이어진다. 산길을 어느 정도 내려가다 보면, 갑자기 산 중턱에 너른 공터가 나오고 그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보덕암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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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암 가는 길, 활짝 핀 수국 너머로 얼핏 용머리가 보인다. |
수국, 그리고 사람들 얼굴에 피는 웃음꽃
연화봉 정상에서는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죄 모여 있다. 그들이 모두 보덕암 들어가는 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법석이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사람들이 이때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 알게 된다. 보덕암 들어가는 길로 '수국'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보덕암 들어가는 길은 S자 형태의 내리막길이다. 길이 꽤 길다. 웬만하면 끝까지 내려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수국을 따라 걷다 보면 끝까지 내려가지 않을 수 없다. 수국은 보덕암뿐만 아니라,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연화사 가는 길에도 빼곡히 피어 있다. 그 풍경이 장관이다. 수국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인 줄은 미처 몰랐다. 수국이 필 때가 되면, 연화도는 완전히 다른 섬으로 변한다. 수국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풍성하고 소담스러운 것으로는 결코 다른 꽃에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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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암으로 내려가는 길가를 따라서 죽 늘어선 수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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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사 가는 길, 마을 담벽에 그려진 수국 정원. |
연화도에서는 이때가 땅 위에서는 수국이,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 위에서는 웃음꽃이 피는 시기다. 그 꽃들이 동화 속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평화롭다. 수국은 절 마당에서 자주 보는 나무 꽃 중에 하나다. 6월부터 7월까지 꽃이 핀다. 물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인지 꽃이 피는 시기가 장마철과 겹친다. 올해는 벚꽃을 비롯해 거의 모든 꽃들이 시기를 앞당겨 피고 있다. 연화도 수국도 올해 보름가량 앞당겨 꽃이 피었다고 한다.
보덕암을 떠나면서부터 다시 용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길을 따라서 용머리가 나올 때까지 좁은 산길을 걷는다. 마지막으로 '출렁다리'를 건너면 곧 용머리다. 용머리 위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이 아찔하다. 앞은 망망대해고, 옆으로는 눈이 닿는 곳 모두 수직으로 서 있는 기암절벽이다. 용머리는 통영 8경 중에 하나로 꼽힌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비경이다. 용머리를 빼놓고 연화도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연화도를 대표하는 풍경이 용머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6월, 연화도에는 수국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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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도 출렁다리. 이 다리를 넘어서 조금만 더 가면 곧 용머리가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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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머리 근처 갯마을인 동두마을, 용머리 가는 산길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