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사랑 (외 1편)
권경애
사랑은 연필로 쓰라 해서
연필 하나 샀네
예쁘게 깎고 조심조심 끝을 다듬어
너를 사랑한다고 쓰다
아, 그만 부러지고 말았네
다시 깎아도
부러진 사랑, 자꾸 접질리는
발목으로 어딜 갈 수 있을까
너에게로 가는 길
동강 난 연필심처럼
서성이듯 드문드문 날리는 눈발 맞으며
절룩절룩 돌아서고 말았네
사랑을 연필로 쓰면 지우기 쉽다지만
쓰지도 못한
내 사랑
지울 수도 없네.
✼ 전영록 노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에서 발상.
AI
맘에 꼭 맞는 애인
하나 만들어서 날마다 갖고 놀아야지
입춘 지나 귓가에 봄바람 스칠 때쯤
포플린 블라우스에 플레어스커트 받쳐 입고
심야 극장 가자 팔당에 드라이브 가자
복사꽃 흩날리는 강원도 산골이나
남해 푸른 섬으로 날아가자
꽃밥 먹고 파도 소리 마시며 유행처럼 한 달살이 해보자
잠 못 드는 밤이면 토닥토닥 자장가에
못 견디게 쓸쓸해지면 따뜻이 안아주고
이도 저도 귀찮을 땐 고요히 바라만 보자
그러다 그러다 싫증 나면 알아서 변신하는,
에이, 그런 게 어딨냐고?
아이, 참, 이미 왔다니까!
—시집 『그곳에는 달그락이 산다』 2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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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에 / 1998년 《수필문학》 추천 완료 등단. 2000년 《심상》 신인상으로 시 등단. 시집으로 『누군가 나를』 『러브 버그』 『그곳에는 달그락이 산다』, 수필집 『아주 특별한 사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