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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6,12ㄴ-15.17-19
그 무렵
12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3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4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7 그들은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18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19 그는 온 백성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모든 군중에게 빵 과자 하나와 대추야자 과자 하나, 그리고 건포도 과자 한 뭉치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 뒤 온 백성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4-35)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받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엄청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시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 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앞에서>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다윗의 기도.
오늘 다윗은 온 힘을 다해 주님 앞에서 춤을 춥니다.
이것이 실은 춤추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은 다 기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면 잠도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서 화내면 화도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서 싸우면 싸움도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서 원망하면 원망도 기도입니다.
반대로 성당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주님 앞에 있지 않으면 기도가 아닙니다.
성무일도를 아무리 정성 드려 바쳐도 주님 앞에서 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닙니다.
묵상을 아무리 잘해도 주님 앞에서 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니라 명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 현전(現前)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기도의 모범입니다.
이어지는 독서에서 다윗의 아내 미칼이 다윗을 맹비난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과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참 볼 만 하더군요!”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 대신 나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무엇을 하든 현전 의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하면 그것이 기도임을, 다윗에게서 배우고 다윗처럼 기도하기 시작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참 가족>
한번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간혹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부자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핏줄로 맺어진 연결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더니,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핏줄로 맺어지는 관계를 무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참된 가족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태어난 모든 이와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부모 형제, 자매의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무늬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태양이 형님이요, 달이 누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다하였을 때 그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면 서로 통합니다.
하느님과 통하면 이웃과도 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마음도 몸도 하늘을 향하여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영이시니 영적인 분을 만나려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관계가 먼저입니다.
어떤 외적인 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혈연을 먼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탓에 “예수님께서 미쳤다”, “악령이 들렸다”(마르 3,22) 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회당으로 왔습니다.
결국 육친의 가족은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눈뜬 가족은 예수님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7)
가끔 어떤 사람은 “가족을 먼저 챙겨야지 성당을 우선하면 되겠느냐?” 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당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 가족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시 가족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더더욱 성당에 나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면 그다음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오늘은 나의 가족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이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한마음 한뜻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핑계로 가족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뒤로 밀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 구절은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짚고 넘어 가야 할 대목이 두 군데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어떤 분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반문합니다.
“아니, 성모님께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아들이?”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대목을 물고 늘어지며 성모님의 평생 동정과 관련된 가톨릭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교부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형제’란 표현은 광의(廣義)의 의미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형제라는 표현 안에는 친형제뿐 아니라 사촌 형제, 팔촌 형제, 더 나아가서 그 이상의 존재들까지도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칭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가 강조하는 예수님의 형제는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 정도로 바라보면 무방할 것입니다.
눈여겨 봐야 할 또 다른 대목이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당혹해합니다.
애써 찾아오신 어머니를 홀대하는 듯한 그분의 태도에서 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인 효도에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집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혈육이나 지연 같은 사사로운 정을 끊겠다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인류 역사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있어 가장 충실했던 사람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홀대하거나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성모님을 극도로 칭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헤아려 보는 데 있어서는 프로요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의 구체적인 실생활 안에서 실행하는 데는 왜 그리 굼뜬지 모르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한가정, 참가족, 참사람 - “하느님의 뜻을 실행합시다”>
어제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저를 감동하게 한 것은 따뜻한 친절이었습니다.
서비스업, 섬김의 직무는 우리 믿는 이들의 공통적 직무입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최우선적 조건은 친절한 환대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법정스님의 책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나의 종교는 친절함이다.
가능할 때마다 친절하도록 하라.
그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씀입니다.
“친절하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플라톤의 말입니다.
“친절함이란 작은 행동은 ‘사소함이 만드는 위대한 성공 법칙’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알려줄 것이다.”
톰피터스 말입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입니다.
종교의 진수는 친절로써 표현됩니다.
친절한 인품 자체가 치유의 시작입니다.
어제 만났던 두 분의 의사가 참 친절했습니다.
한분은 순환기 내과 여의사로 거의 10년을 치료해주는 분이고, 한분은 26년 동안 치과치료를 해주는 치과의사로 두분다 한결같이 친절하고 실력 좋은 분들입니다.
“약 먹으면 됩니다. 하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양호합니다. 몇년전보다 콩팥기능도 아주 좋아졌습니다.”
혈액검사의 결과와 더불어 순환기 내과의사의 칭찬과 친절한 말에 순간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약으로 산다는 것은 은총으로 산다는 것이니 약먹고 죄짓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새로이 합니다.
새삼 병의 치유에 약보다도 더 좋은 우선적 치유제는 친절, 희망, 기쁨, 감사임을 깨닫습니다.
치과병원에서는 의사와 더불어 네 분의 간호원들이 신들린 듯 일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복음선포의 현장이요 영적전투 치열한 전쟁터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서비스업, 섬김의 직무에 열심한 아름다운 모습들은 늘 감동을 선사합니다.
월요일이라 이렇게 환자분들이 많으냐 물으니 늘 그렇다 했습니다.
참으로 1.사람 좋고, 2.실력 좋고, 3. 환경 좋은 서비스업의 3대 요소를 지닌 분으로, 매일 제 강론을 읽으며 꼭 답글의 메시지를 보내는 하느님의 뜻을 한결같이 실행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서비스업에 충실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하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종교 유무에 관계 없이 온힘을 다해 이웃을 배려하며 한결같이 친절히 사는 분들,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어제 저녁식사 전 뜻밖에 보여준 수도형제들의 형제애가 저를 감동케했습니다.
제 오른쪽 볼 옆에 있는 검은 둥근 반점에 세 분의 형제가 동시에 병원에 가보라고 했고, 한 형제는 ‘오상’이라 하며 웃었습니다.
“오상인 줄 몰랐습니다.”
대답하면서 혹시 오상일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쨌든 저에게는 순간적 형제애의 진한 체험이었습니다.
어제 강론시 원고에 없던 서두에 나눴던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제입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입니다.
저는 말을 바꿔, “미사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제입니다.” 단연코 말하고 싶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웬만한 병은 “하느님 이름을 간절히 부름으로 나았다”는 일화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부의 다음 말씀도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큰 위로였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입니다.”
여기에다 성 치프리아누스의 한 말씀도 추가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래서 교부학이 소중합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성염 전 교황청 대사의 설명에 의하면,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서사시인 성경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붙여 들려주는 것이 교부학, 성전’이라 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문가인 성염 대사의 업적 역시 불가사의입니다.
지난 30년간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열다섯 권을 라틴어-한글 대조본으로 분도출판사의 교부문헌 총서로 편찬했고, 열권 가량을 더 펴낼 계획이라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83세의 노령인 지금도 하루 열시간 번역하며 공부한다 하니 말 그대로 하느님에 취해 사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이란 말마디도 떠오릅니다.
10여년전 성염부부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교수님이 좋다하여 써드렸던 시도 생각납니다.
“새벽 숲
온갖 새들 맑은 소리
임의 찬미에
밝아오는 아침, 잠깨는 숲
새로 시작하는 하루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
-2001.5.29
오늘 마르코 복음의 장면이 그대로 미사를 연상케하는 분위기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닌 세례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공적 사명은 참으로 유일하게 하느님의 뜻에 인도되었음을 봅니다.
시편 40장을 인용한 히브리서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전 삶을 요약합니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복음의 주고 받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문답이 너무 생생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신후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또 참사람이 되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수행자로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가?
아주 단순명료합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한결같이 따르고 섬기고 닮아가는 분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고 우리는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은혜로운 미사전례를 통해 통감하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한가족’을 이뤄주는 미사보다 더 큰 하느님의 선물은 없습니다.
1인가구가 날로 늘어나는 위기의 시대에 이제 많은 외로운 이들이 하느님의 한가족을 이루는 미사전례를 찾을 거란 예감이 듭니다.
하느님의 인류를 위한 사랑의 대 서사시가 성경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최고의 시인이라 할 수 있고, 우리가 늘 노래하는 시편 성무일도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시이자 노래이자 기도인 시편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고백할 때 우리는 최고의 시인인 하느님을 닮아 저절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시, 노래, 기도에다가 춤까지 결합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니 바로 제1독서의 샘솟는 열정의 다윗이 그 모범입니다.
다윗은 싸움도 잘하고, 시도 잘짓고, 기도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또 여기에다 오늘 제1독에서 보다시피 춤도 잘 춥니다.
주님의 궤를 모시니 너무 좋아 춤을 추는 모두를 갖춘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주님을 위해 온힘을 다해 춤을 추었듯이 온힘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실행했을 다윗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사랑이란 시입니다.
“사랑을
글로 써내면 시가 되고,
사랑을
색깔로 그리면 그림이 되고,
사랑을
소리로 부르면 노래가 되고,
사랑을
몸으로 풀면 춤이 됩니다.”
-1998.5.5
기도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그대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됩니다.
온힘과 온마음의 사랑으로 봉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한가족 공동체를,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통신호등이 있습니다.
파란불에서는 이동하고, 빨간불에서는 멈추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에도 두 가지 색이 있습니다.
전화가 오면 두 가지 색이 표시됩니다.
파란색을 누르면 통화가 되고, 빨간색을 누르면 거부가 됩니다.
친한 사람, 보고 싶은 사람, 꼭 받아야 할 전화는 당연히 파란색을 누릅니다.
모르는 사람, 받고 싶지 않은 사람, 귀찮은 사람의 전화는 빨간색을 누르게 됩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전화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찮다는 이유로, 지금이 편하다는 이유로, 미안한 마음에 빨간색을 누르는 것은 아닌지!
날씨가 추워서, 비가 와서, 너무 더워서, 다른 할 일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전화를 하시는데도 외면한 적은 없는지요?
젊은 신부님이 가끔씩 어머니의 전화를 빨간색을 누르면서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어머니가 늘 귀찮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부님께는 어머니의 사랑이 귀찮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집안 어르신들이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은 이제 집안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사제가 되면 말씀도 높여서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을 축성하기 때문입니다.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을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목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을 통해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또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직을 그만 두게 될 경우에는 세상에서 잘 살면 안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평생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보속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의 헌신과 기도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사랑과 기대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일이 그리 녹녹치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의 의도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면 밭을 제대로 갈 수 없으니 오직 사제직에 충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안의 경조사나, 부모님의 생일이나, 경제적인 문제를 신경 쓰기보다는 맡겨진 일을 먼저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휴가 때도, 쉬는 날에도 집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을 따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제 동료들과 지내는 것이 더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동생 수녀님은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도 휴가 때면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쉬는 날에는 멀리 있어도 찾아뵙곤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효도를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제직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니 유혹이 다가와도 굳건하게 이겨내라는 의미였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하기보다는 사제직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나태한 삶을 살아간다면 사제직에 머물러 있어도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준비를 소홀히 하고, 권위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고, 공동체에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33년간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참 많은 시간들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저 자신의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외로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가족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믿어주었던 친구를 배반하고, 거짓과 모략으로 출세라는 허황된 꿈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얻는 것은 화려한 집이고, 비싼 옷이고, 맛있는 음식이지만 그 안에는 참된 기쁨과 행복이 함께 하지 못합니다.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속았다”라고 말하는 어느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연애한 지 석 달 만에 서로 ‘내 남자, 내 여자’라고 생각했고, 곧바로 결혼까지 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은 황홀감이 있었지만, 결혼과 동시에 하나씩 깨졌습니다.
‘내 사랑’이 아니라 ‘내 원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누군가 ‘결혼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면서, 이상과 현실은 완전히 다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기에, 나와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것입니다.
치약 짜는 것도, 빨래를 벗어두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모두 달랐고,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연애할 때의 그 감정이 이렇게 쉽게 사라졌을까요?
사랑이란 신기루 같은 것일까요?
사실 사랑에만 빠져 있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 잘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성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적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니,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었지요.
사랑은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는 다른 곳에 신경 쓰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오로지 상대방에게 맞춰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이제는 불타는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나만을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 가정을 만드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생활도 잘해야 하고, 배우자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신경 써야 합니다.
이 밖에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많아집니다.
따라서 사랑이 식은 것도 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익어갈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혈연에 따른 가족이니 그 사랑이 더 지극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뛰어넘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하시면서, 믿음을 가지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르시지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제까지 다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혈연관계처럼 가까운 사람에게만 행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로써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로 새로운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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