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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주의를 주창한 유홍기(劉鴻基, 1831년∼1884년)
유홍기(劉鴻基, 1831년∼1884년)는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이자 학자이자 정치인이였다. 오경석과 동갑으로 한의사이다. 초기 개화사상가의 한 사람이며, 오경석, 박규수 등과 함께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백의정승, 산림정승이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호는 대치로 따라서 유대치로도 불린다. 본관은 한양으로, 자는 성규, 호는 대치 또는 대치, 여여 등이 있다.
유홍기는 중인 출신으로 개항 이전에 이미 개화에 대한 확고한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여러 서양의 서적을 탐독하고 개화 사상에 눈을 떴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정계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문호 개방과 정치 혁신을 주장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추사 김정희 문인이다.
유홍기는 1831년 한성의 무관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직업은 한의사이었다.
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그로부터 금석문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 이후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을 탐독, 개화에 눈을 떴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이 그의 무하에 출입하며 오경석, 박규수 등과 문인들을 길러냈다. 그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교 사상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본 그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으며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 지식도 해박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고 한다.
이웃에 살던 친구이자 역관 개화사상가 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보고 탐독,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어 점차 개화사상 을 형성하게 되었다.
유홍기는 1882년 11월 11일자 승정원일기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은 양반인 유학(幼學] 유대치를 부사용(副司勇)이라는 종9품의 관직을 내린다.
개화인사 양성 노력
유대치는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뒤에 서세동점의 위기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급박해졌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머지않아 외세가 조선으로도 침입해올 것이며 그에 대비하여 우리가 먼저 개항과 개화를 시도하여 저들과 손잡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장을 하였다. 유홍기의 주장에 위정척사파나 조정의 수구파는 모두 터무늬없는 생각으로 치부하였다.
한편 유홍기는 오경석과 상의해 한성부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뽑아 그들의 개화사상과 오경석이 중국 청나라 여행길로부터 구입해 온 신문물을 소개한 서적들을 젊은이들에게 소개하고, 이를 가르치고 새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을 규합해서 나라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는 정치를 실행하게 하자고 합의하였다. 유홍기의 제의에 오경석은 적극 동조하였다. 한편 1869년(고종 6년) 지방관으로 나가있던 박규수(朴珪壽)가 평안도관찰사에서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어 오자, 유대치와 오경석은 이 방안을 박규수에게 제안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개화파 양성, 교육 활동
유홍기의 교제 범위는 넓고 대단히 신축성이 있었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개화승 이동인을 비롯한 탁정식, 환속한 차홍식과 김정모 같은 불교계 인사와도 접촉이 많았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 뿐 아니라 각계각층 사람들을 만나 담론할 때마다 세계의 신지식 즉 역사, 지리, 풍속, 외교, 국방, 과학기술, 국제정세 등을 전달했다. 개화사상을 주입시키거나 그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당시 중인들이 많이 살던 관철동 그의 집 사랑방은 개화혁신 사상의 온상이며 담론의 장소였다.
1877년 초기개화파 형성에 참여했던 박규수가 병으로 죽자, 오경석을 통하여 박규수의 영향 아래 있던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백춘배, 유길준, 오세창, 윤치호, 정병하, 이종원, 이정환, 박제경, 이동인, 탁정식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게 되었다. 1879년 오경석이 병으로 죽게 된 뒤로는 혼자서 이들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연고로 세간에서는 그를 백의정승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유대치는 개화파 인사들과의 연락행동 책임자로 이동인을 일본 본원사 승려의 도움으로 1879년 8월 일본에 밀항케 했다. 이동인이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 서울에 있던 유대치는 부산에 가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 때 이동인이 대원군계열의 동래부사에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을 때 유대치가 백방으로 주선하여 석방했다.
유홍기는 일찍이 백의정승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지며 그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882년(고종 19년) 감생청의 참봉으로 출사하여 감생청 직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개항 후 개화파들이 정계에 진출하고 정부에서도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행정기구를 미국 혹은 일본식으로 본딴 새 기관으로 행정조직을 개편 정리하기 위한 임시기관으로 감생청을 설치할 때 직원으로 임명된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특채로 관직에 올랐으며 그는 말단 실무관료의 직책에 있었지만 감생청 제조 어윤중의 자문역을 겸하였다. 어윤중은 유대치로부터 지도를 받고 일본과 중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유대치를 방문하여 그의 견문사항을 이야기하며 논의했다.
유홍기는 감생청 직원들을 지도 국가 제도 전반에 걸친 정리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정리 안이 시행되지 못했다. 유대치는 감생청 직원이 된지 1개월 만에 감생청부사용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사용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감생청이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들의 반대와 규탄 상소로 결국 6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고, 그는 타 직책을 주선해 주겠다는 어윤중, 김옥균의 제의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후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있던 윤치호(尹致昊) 등 개화파 인사들이 고종에게 여러 번에 걸쳐 그를 등용할 것을 상주했으나 등용되지는 못했다. 개화파 인사들은 고종에게 유대치의 인품과 식견을 이야기하면서 그를 등용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끝내 등용되지 못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유홍기는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吳世昌)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피신하였다가 12월 8일(음력 10월 21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혹시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로 수구파가 급진 개화파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행할 때 암살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1908년(융희 2년) 개화파 인사들이 주동이 되어 경성에서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열었을 때, 유대치 역시 순국한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 추도되었다. 그는 1910년(순조3년) 8월에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 규장각 부제학"이란 벼슬이 특증되었다.
한때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과 관련된 인물들의 복권이 이루어진 뒤에도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1884년(고종 21년) 12월 8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최후를 두고는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있다.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에는 ‘유대치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의환이 지은 ❮조선개화당의 막후 지도자 유대치의 활약과 그의 최후❯라는 논문에서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경기도 용문산에 토굴을 짓고 살면서 1890년 경 임종할 때까지 좌선으로 일관하며 살았다’고 쓰여 있다.
개화당의 개혁정치를 뒤에서 조종했다고 하여 ‘백의정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유대치. 의원으로 알려졌던 그는 역관 출신인 친구 오경석(1831∼1879)과 더불어 대표적 중인층 개화파 지도자로 꼽혔다. 그런 그가 양반 출신일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한 논문이 발표됐다.
지난해 상한(常漢·상놈) 계층이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을 규명한 ‘갑신정변 연구’를 펴낸 박은숙 서울시사연구소 연구원이 ‘한국인물사연구’ 제4호의 ‘유대치의 신분과 정세인식’에서 밝힌 내용이다.
개화당 연구의 대가인 고 이광린 서강대 명예교수는 ‘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1973년)에서 유대치의 본명으로 알려진 유홍기(劉鴻基)가 역관을 많이 배출한 한양 유씨의 족보에 1831년생으로 등장하는 점에 주목했다. 유대치는 김옥균의 ‘갑신일록’과 윤치호의 ‘윤치호일기’에 자주 등장하다가 1884년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뒤 행적이 묘연해진다. 신뢰할 만한 기록은 그가 오경석의 아들이자 제자인 위창 오세창을 데리고 경기도 광주와 가평으로 피신 중 변소에 간다며 나간 뒤 사라졌다는 위창의 회고가 마지막이다. 이 때문에 이 교수의 ‘유홍기=유대치’ 추정은 학계의 정설이 됐다.
박 연구원은 이를 반증하는 자료를 제기했다. 우선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된 강릉 유씨 유홍규(劉洪奎·1814∼1884)의 묘비명이 있다. 묘비명에는 유홍규가 백의정승으로 불린 유대치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박 연구원은 이 묘비가 1924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주민 증언도 채록했다. 1911년 발행된 강릉 유씨 족보에 ‘유홍규가 대치로 개명했으며 개화당을 지도한 백의정승’이라는 가필된 기록도 발견됐다.
1882년 11월 11일자 승정원일기에 유대치가 벼슬을 하지 않은 양반인 유학(幼學)이어서 부사용(副司勇)이라는 종9품의 관직을 내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1869년 발간된 한양 유씨 족보에는 유홍기가 이미 사용(司勇)이란 관직을 받았다는 모순된 기록이 나온다.
박 연구원은 “유대치 중인설은 그가 역관의 집에서 태어나 의(醫)를 업으로 했다는 후대의 기록(1944년 발간된 김옥균 전)과 중인의 집단거주지였던 광교 부근 관철동에서 살았다는 정황 증거에 근거한다”며 “김옥균 박영효 등 최고 문벌 양반과 교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히려 양반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서방에서 한국으로 정조때 전해온 해부학서적 『태서인신설개』, 최한기의 일본으로부터 가져온 해부학서적 『전체신론』, 그리고 서양의서 번역판 등의 한국으로 전래와 실학파 최한기와 김정희 그리고 의역관 집안의 유대치로 이어지는 계보를 보던 중에 유대치에 관한 잘못된 역사고증을 바로 잡기위해 글을 써 보려고 한다. 먼저 자료를 제공해주신 한의계 집안 후손인 유태균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유대치 집안은 강릉유씨 좌랑공파의 의역관 출신 300여명의 이름을 열거하지 않아도 『漢陽劉氏世譜』와 조선시대 과거와 관련된 『사마방목』에 남겨져 있다. 먼저 그가 ‘한의사’란 내용은 그의 친구인 亦梅 오경석이 죽기직전 중풍에 걸렸을 때 그를 치료한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일본어판 『김옥균전』에 한의사로 쓰여 있으며 개화파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인 만나 직접 무역을 하며 막대한 이윤을 남긴 것으로 도움을 준 일본인 승려 奧村円心과 『조선국포교일지』에 나와 있다. 또, 그의 부인도 의역관 집안으로 혜민서에서 의업을 했던 처조부 최기환이 있고, 형의 부인 집안에도 醫科正 최계진이 있으며 그의 집안 내력은 대대로 의역관 집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홍기에 대한 오류의 교정과 바른 역사인식
먼저, 『승정원일기』에 유홍기를 1882년 11월 副司勇으로 기용할 때 “幼學 유홍기”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중인이 아닌 양반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당시 임오군란 이후에는 중인의 신분이지만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였고 용어도 幼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전에 기용된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은 1886년 박문국주사로 처음 기용되면서 “幼學 오세창”으로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홍기는 減省廳 副司勇, 司勇으로 기록되어 있다.
둘째, 『김옥균전』과 여러 논문에서 나이가 오경석과 유대치가 동갑인데 ‘稍少’라고 하여 오경석을 나이가 많다고 표현한 부분이다. 오경석은 1831년 1월 21일생이며 유홍기는 1831년 10월 14일이다. 이는 같은 중인출신으로 아는 집안의 경우 동갑에도 서열을 따지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그의 가족관계이다. 『한양유씨세보』에는 사위가 2명(이승준, 김효철)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옥균전』과 『서재필 서신』에 기록된 김영찬이 없다. 그래서 혼란을 주는데 三和府尹을 지내고 청일전쟁때 3년간 투옥된 김영찬은 그의 외손녀의 남편인 秦學(구한말 여성운동가)의 ‘풍기진씨 산음공파’ 족보에 진학주의 부인의 外祖를 “司勇 漢陽劉氏 劉鴻基’라고 되어 있고 경숙교수의 박사학위(89년) “대한제국 말기의 여성운동의 성격연구”에 밝혀져 있다.
또, 아들에 관한 문제는 손자를 형의 집안에서 系子하였고 아들의 생년이 없고 며느리도 기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찍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1948년 그의 종손 유문식이 서재필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시대 예방주사를 놓았던 한의사들은 현재는 왜 못하나?
조선 후기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는데 공헌을 하였던 의역관들은 천주교 聖人(유진길)의 의역관 집안인 한양유씨 집안처럼 처음에는 중국을 통해 서양의학을 전래 받았지만 ‘황사영 백서사건’이후 책들은 불태워지고 일본을 통해 서양의학 서적을 전래했음을 최한기와 이규경의 책을 통해 볼 수 있다.
유대치는 불교에 해박하였고 승려 이동인, 탁정식과 개화파의 도서관 역할을 한 봉은사는 쇄국정책 당시 일본으로부터 서양문물을 몰래 가져오는 산파의 역할을 하였다.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그의 죽음에 관한 여러 학설처럼 200여년 전에 서양의학을 받아들여 사용한 한의사들과 다른 현실에서 서양의학적 내용과 서양기구를 한의학적 시각에서 응용하고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