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여행] 사랑의 원자탄 주인공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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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여행]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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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을 나온 유랑자는 이제 애양원에서 500여m쯤 떨어져 있는 손양원목사 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지난
번 여수 여행을 하면서 언뜻 보았던 손양원목사님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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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가 활동한 애양원이 있는 여수시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여수공항 뒤편 아늑
한 곳에 도성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암튼 이 손목사 때문일까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권 지역은 전남 지역 내
에서도 개신교 성향이 비교적 강한 편으로 유랑자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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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은 1993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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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손양원목사 기념관 앞에 주차를 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생면부지 (生面不知)의 인물이 다
가와 어서 오시라며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러면서 건넨 명함 한장. 즉 자신을 소개해 주는데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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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손양원순교기념관에서 손양원 목사의 유복자인 막내아들 손동길 목사가 2015년부터 기념관에서 직접
안내를 맡고 있다. 유랑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먼저 밖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역시 기념관의 봄도
화려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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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봄은 시작되고 매화꽃 향기는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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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한켠에 자리 잡은 매화 밭에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매화꽃 향기가 꿀벌들을 유혹 하면서 여수의 봄날
을 한층 더 화려함으로 수를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남쪽 여수엔 지금 봄이 찾아왔다. 따스한 바람이 불
고 각종 생명이 움트는 희망의 계절 봄. 포근한 날씨에 나른해진다. 코로나19 라는 큰 벽이 버티고 있지만 어디
라도 떠나고 싶어 싱숭생숭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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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는 햇살에 깨어나 새싹을 밀어올리고 봄기운이 가득 찬 나물은 우리 입맛을 자극하는 봄이다. 조금 더 있
으면 각종 벌레와 개구리가 합창을 하겠지요.gg 이러한 봄기운을 가슴에 가득 안고 유랑자는 조심스럽게 기념
관 안으로 들어선다. 역시 셀프절차를, 혼자 체온재고. 소독하고. 이름과 주소지를 적고 그리고 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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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동백도 붉은 빛을 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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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역시 손목사의 기념관답게 온통 손목사의 발자취를 그린 사진과 업적들로 가득하다. 본시 손목사는 경
상남도 함안군 칠원 읍에서 손종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종일 씨가 개신교 장로인 독실한 개신교 집
안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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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신앙의 정신으로 불복종하다가 간신히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
하고 같은 해인 1919년에 서울 안국동에 있던 중동학교(지금의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손양원은 이 중동학교에서 낮에는 학업에 열중하고 밤에는 만두를 팔면서 고학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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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여순사건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민간인의 수는 모두 1만5천650명에 달한다. 군경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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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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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1운동 이후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운동으로 징역을 살게 돼 손 목사는 심적인 고통은 물론 경제적 어
려움까지 겪게 되었고, 결국 손양원 목사는 중동학교에서 키워가던 꿈을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손 목사의 최종 학력은 중동학교 입학(1919년 4월)과 자퇴(1920년 4월 3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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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그는 우여곡절 끝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애국정신(愛國精神)
이 투철했던 손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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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사는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
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개신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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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일화 중 하나로 환자들 중 상태가 심한 환자들만 격리해 놓은 방이 있었다. 간호사들조차 신문지를
깔고 들어가니 그런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환자 중 하나가 "우리가 짐승이냐?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라고 외
치면서 간호사들 중 하나를 목침으로 때려죽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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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손양원 목사는 맨발로 그 방에 들어가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기도를 올리던 손 목사
는 상처를 직접 입으로 빨아 고름을 빼냈다! 한센병이 전염병인지라 이 사실을 알게 된 애양원에서 크게 걱정
을 하며 수차례 손 목사에게 검사를 시행했지만 다행히 손 목사는 전염되지 않았는데 이에 손 목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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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내가 나병에 걸리면 그들과 똑같아질 거고 그러면 환자들이 나에게 더 거부감 없이 대
할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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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기도 함으로 불처럼 뜨거운 손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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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사 생전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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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
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고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 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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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1943년 5월 17일, 출옥
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
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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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와 손양원의 기념사진.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남자가 손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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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그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
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으며. 당시 수감 생활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서 실명 위기까지 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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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손양원의 두 아들인 손동인
씨와 손동신 씨는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좋게 보던 좌익 반
란군 세력이 반란 당시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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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자신이 세우려고 계획하던 학교의 교장으로 손 목사가 적임이라 생각하고 손 목사를 직접
찾아가 교장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는 나병환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고 말하며
김구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고 이에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은 김구는 손 목사에게 친필 휘호를 적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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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손목사는 여순사건이 진압된 뒤에 좌익으로 체포되어 사형의 위기에 처한 아들의 학살자인 안재선을 살
려내어 양아들로 삼는 놀라운 신앙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해방 후 5년여가 흐른 뒤 피터지는 동족상쟁 (同族相
爭)인 6.25가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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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이 남침 중에 교회 장로들이 배를 준비하고 손목사에게 피난을 권유 하였으나 손목사는 교인들을 두고
혼자 떠날 수 없다고 끝내 거절하였다. 공산군 점령 이후에도 후퇴 직전 많은 기독교인, 우익인사들과 모진 고
문을 받은 끝에, 같이 갇혀있던 사람들과 함께 여수에서 가까운 미평 과수원에서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해 생
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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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는 성화 7점, 사진 액자 98점, 옥중편지 등 8점, 기타유품 5종 100점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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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 온 사람인 손양원 목사의 애양병원이 지난 100년간
의 역사의 재조명으로 오늘날 성지순례로 부상되고 있다. 신풍의 애양교회는 여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돌
로 지어진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1939년 부임한 손양원 목사의 행적은 현재까지 길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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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손양원 목사 유적지 테마파크 개발구상에 따라 손목사 순교기념
관 안에 테마전시관과 기념광장, 편의시설 등이 건축되어 매월 만 오천에서 2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와 손 목사
의 진정한 휴머니즘을 느끼며 간절하게 경애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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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더 고귀하게 여겼던 손양원 목사의 깊은 신앙심과 끝없
는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순교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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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의 생애를 다룬 책으로는 딸인 손동희 씨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와 소설 <사랑의 원자탄
>이 있다. 2012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창작 오페라 '손양원'이 제작되기도 했다. 다만 오페라의 경우엔 개신
교 색채가 너무나 강해서 종교적 입장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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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013년 12월 25일 성탄 특집으로 KBS가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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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LKz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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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 율촌면 산돌길 70-62
(지번)율촌면 신풍리 13-207
휴무일: 일요일
소개[등록문화재제32호]: 손 목사의 순교 신앙을 계승하고 그가 남긴 순교 자료를 보관하기 위해
세워진 순교기념관은 1997년 4월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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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몇년전에 다녀 왔어요
맘이 아팠습니다
그러시군요.
암튼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목사니밍 아니낙 싶습니다.
영화로도 나왔다는데 전 보지를 못했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