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제국
성향숙 다정에 다정을 더해도 결국 빙점이지 찬 서리가 뿌리를 내리는 중이야 혈관을 따라 온몸에 퍼지고 나는 투명해졌어 너무 환하지 않아? 뼈가 비치는 열대어처럼 불안의 눈알을 굴리는 창가 루피너스와 책상 위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무질서들 매일 같은 못에 걸리는 구겨진 외출 나는 감시 당하는 중이야 외로움은 틀에 따라 모양을 바꾸더군 아파트 그릇에 담겨 사각이 된 사소하지만 듬성듬성 하얀 녹이 슨 것도 같아 누구도 나를 구타하지 않아 굶기지도 않았어 아무도 내게 침을 뱉지 않고 다만 삶의 방식이 사각의 고독으로 굳어버리는 것 투명한 질서의 견고함 몸속에 웃음이 있고 울음이 있고 커튼 칠 자유와 방문을 잠글 자유 배고플 자유와 침묵할 자유, 비명을 지를 자유가 선 채로 결빙된 내 말, 말의 얼룩까지 나는 유서 깊은 얼음 가문의 일원이 된다 —계간 《시와 함께》 2024. 겨울호 -------------------- 성향숙 / 경기 화성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 시집 『엄마, 엄마들』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무중력에서 할 수 있는 일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