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기행 14 – 조선 선비 최부(崔溥)의 눈에 비친 강동, 그리고 비극적 최후
추가분이라 며칠 묵힐 필요가 없어 그대로 올립니다.
표류 당시(1488) 최부(崔溥)의 나이는 35세입니다. 그가 중국 관리에게 말한 것인데 한국식 나이계산법에 따른 거군요. 15세기 말이면 명이나 조선이 비교적 평안한 시기입니다. 명과 조선 사이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최부가 몸은 고달팠겠지만 중국 관리들로부터 별다른 곤욕을 치루지 않고 대접받으면서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배경일 겁니다. 물론 영파(寧波) 부근 해안에 당도하여 중국 관헌에게 인도되기 전에는 민간인들로부터 곤욕을 치릅니다. 가진 것 빼앗기고 왜구로 오인 받아 얻어맞아 걷지 못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중국인들은 최부 일행의 목을 베어 왜구라고 공을 세우려고도 하죠. 그러나 전체 여정에서 보면 첫 보름 정도에 불과합니다.
최부의 초기 경력 중에는 과거에 두 번 합격한 것이 눈에 띠군요. 중국관헌들의 심문과정에서 ‘자랑스럽게(?)’ 몇 차례 말한 겁니다. 그는 명의 8대 황제 성화제(成化帝, 1464-1487)의 연호를 대면서 1477년 예비시험격인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했고 1482년 문과 을과(乙科)에 2등으로 합격하여 교서관저작(著作), 박사, 사헌부감찰 등등 벼슬을 하고 1486년 문과 중시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교리 등을 거쳤다고 합니다. 중국 관리들이 최부를 심문하면서 ‘점잖게’ 시를 짓을 수 있느냐고 묻는데 어떤 시를 남겼는지 알 수 없어 아쉽군요.
<표해록>을 관통하는 한 가지 흐름이라면 유교에 대한 맹신적인 추종이라 할 것 입니다. 좋게 말해 꼬장꼬장한 조선선비의 자세이겠지요. 옷이 물에 젖어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말립니다. 문호개방 이후 사절들을 따라 일본에 간 궁녀들이 옷을 입은 채 목욕탕에 들어갔다는 건 보았지만 남자가 젖은 옷을 입은 채 말렸다는 건 처음이군요. 배에 아낙네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여자는 타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속살을 들어내지 않은 겁니다. 주변 사람들이 관복을 입으면 중국인들이 잘 대접할 것이라고 권유하지만 최부는 조선의 신하로서 국경을 넘었다고 나라의 풍습을 저버리고 효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상복 벗기를 끝까지 거부하죠.
‘상복 입기’의 하이라이트는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입니다. 명 조정은 최부에게 상으로 길복/평복을 내리면서 상복 대신 관복이나 평복을 입고 나오라고 합니다. 최부는 거듭 ‘상제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 ‘화려한 옷을 입는다면 효가 아니다’면서 상복을 고집합니다. 중국 관리는 재상이 친상을 당했을 때 황제가 부의를 보내면 비록 초상 중이라도 길복을 입고 대궐로 들어가 배사하고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는다고 하면서 황제에게 사은할 때는 상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최부는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상을 받을 때 상복을 입은 수 없다하여 동료가 대신 받았는데 사은할 때도 동료가 대신할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이런 최부가 안타까웠는지 가상했는지 ‘은근히’ 나무라면서 억지로 상복을 벗기고 상으로 내린 길복으로 갈아입고 사은하게 합니다. 대궐의 여러 문 중 한 곳에서 절만하고 나왔겠죠. 당연히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유교적 방식에 젖은 중국인들도 일상생활에서는 유연성을 보이는데 조선인들은 왜 공자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추종할까요? 효는 근본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과 존경을 바탕으로 한 유대관계입니다.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상복입고 곡하며 시묘 사는 의식이나 의례(rite, ritual)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요? 의례는 상황에 맞추어 변해야 하는데 최부는 그런 걸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기야 개항기 천주교도가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목을 벤 세상이었으니까요. 도그마에 찌들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겠지요. 임진왜란 이후의 예법논쟁이 당쟁의 핵심이 된 것도 유교적 원칙을 지키는 것이 왕권의 정통성과 연결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지요.
최부는 한 달 만에 절강성 영파 관아에 닿아 북으로 향합니다. 보름 동안 절강성 여기저기로 표류하고 민간인들에게 곤욕을 치루면서 죽을 고비를 맞은 시간은 지났다는 말입니다. 1월 29일 영파부를 지나는데 이곳이 옛날 명주이며 고려가 중국과 ‘교통’한 곳이라는 정도만 회상하군요. 쇄국으로 외국과 교류가 없던 조선시대 사람이 고려시대 해상무역의 중요성을 이해할 리 없겠지요. 항주에서는 고려사신이 송나라에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고려사’라는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는 ‘지금 조선은 이단을 물리치고 유도를 높이 받든다’고 대답하군요. 불교를 이단이라 배척하니 절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진 1. 고려사관에 있는 고려사신의 관복)
중국 관리들의 신문이나 대담 중 최부의 말에서 조선 지식인의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을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연도를 중국의 연호에 맞추어 설명합니다. ‘단군이 당요(唐堯, 중국의 요임금)와 같은 시대에 즉위하고’로 시작하여 기자-위만조선으로 이어집니다. 삼국시대의 유명 인사로는 신라의 김유신, 김양, 최치원, 설총, 백제의 계백, 고구려의 을지문덕 등을 말하네요. 이중 김양(金陽, 808-857)은 생소합니다. 신라 후기 장보고와 44대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의 권력투쟁 때 활약했는데 대인배의 풍모를 보인 인물이라 하군요. 죽은 뒤 무열왕 능렬(陵列)에 안장되었다니 당시는 유명인사가 분명한 듯합니다. 지금은 무열왕릉 15m 앞에 있다고 하군요. 고성군수도 역임했구요. 최부가 김양을 한국사의 인물로 꼽은 것은 당시 일반적인 평가인지 개인적 선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소주(蘇州)에서 중국 관리들이 ‘당신 나라는 무슨 장기(長技)가 있기에 수와 당의 대군을 물리쳤느냐’고 묻습니다. 최부는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잘 부리고 병졸들은 모두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따르고 죽는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이지만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은 많고 땅은 크며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성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이 수없이 많다.’고 대답하군요. 조선이 고려만이 아니라 3국을 계승했다는 말입니다.
최부의 이 말은 한국과 중국관계에서 상당히 함축적 의미를 가집니다.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한국을 우습게보지 않은 것은 통일제국인 수-당이 고구려에 혼났다는 기억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한말이 되면 그 후예들이 왜 이렇게 찌들어들었느냐는 비웃지요. 우리사회에서도 한국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 합니다. 단제 신채호의 말대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로 국토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최부는 조선이 고구려보다 영토가 더 넓고 강대하니 중국이 조선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고 말합니다. 구한말의 조선은 국토가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유교와 주자학이란 도그마에 찌들고 이에 기초한 사대의식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쌓였기 때문일 겁니다. (사진 2, 고려 사신의 방)
여행 중 최부는 중국의 역사에 관련된 지명들을 곧 잘 언급합니다. 처음 보는 곳이지만 문헌상으로 중국 역사와 관련된 지역들이죠. 회음역(淮陰驛) 표모사(漂母祠)를 지나면서 여기가 한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이 국밥집 할머니에게 밥을 얻어먹고 무뢰배들 가랑이 밑으로 기어 욕을 당한 곳이라고 하군요. 월왕 구천의 도읍지인 회계군과 회계산(會稽山)을 지나고, 고소역에서는 오왕 합려가 오자서에게 성을 쌓게 한 곳이라고 설명하고 궁궐 고소대(姑蘇臺)는 이제 폐허가 되었다고 아쉬운 듯 회상합니다. 쉬어가는 기분으로 오왕 부차(夫差)와 중국 4대 미인 중 하나로 꼽히는 서시(西施), 그리고 고소대가 얽힌 이백의 시 구호오왕미인반취(口號吳王美人半醉)-‘오왕을 부르며 미인이 취하다’를 감상해 보시죠. 여기서 오왕은 부차입니다.
風動荷花水殿香 풍동하화수전향
姑蘇臺上見吳王 고소대상견오왕
西施醉舞嬌無力 서시취무교무력
笑倚東窓白玉牀 소의동창백옥상
바람에 흔들리는 연꽃은 수전(水殿)에 향기를 뿌리는데,
고소대 위에 있는 오왕을 바라보고,
서시는 취하여 하느적 흐느적 춤추다가
웃으며 동쪽 창가의 백옥 침상에 쓰러지다.
여기에 나오는 교무력(嬌無力)이 중국 시어(詩語) 중 가장 육감적인, 요새말로 ‘섹시’한 게 아닌가 합니다. 백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에도 나오죠.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시녀들 부축에 힘없이 교태롭게 일어서는 그 모습,
그 때부터 황제의 사랑 받기 시작하였네.
양귀비가 화청지(華淸池)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 땔 시녀들에게 몸을 기대어 맡기면서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리곤 양주에 이릅니다. 최부는 이곳이 ‘옛날 수나라 강도(江都)’라고 하면 ‘양주춘사(楊洲春詞)’ 중 한 구절을 읊습니다. ‘강동기행 8 황음무도(荒淫無道) 수양제((隋煬帝)’ 편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당 시대 요합(姚合, 779-855)의 ‘양주춘사’를 읽다가 이 부분이 멋지다고 기행기 8편에 올린 것인데 최부도 24행 중 이 구절을 뽑은 것 보면 500년이 지나도 한국인의 시심(詩心)은 비슷하다는 걸 느낍니다.
春風蕩城郭(춘풍탕성곽)
滿耳是笙歌(만이시생가)
봄바람이 성곽을 흔들고,
노래 소리는 귓전에 가득 울리네.
최부는 배를 타고 지나 양주 구경에는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항우와 유방의 마지막 전투지인 해하(垓下) 구리산(九里山)을 지나 황가갑(黃家閘)이란 곳에서 최부는 30년 전에 세워졌다는 미산만익비(眉山萬翼碑)이라는 비석을 보자고 중국 인솔자에게 조릅니다. 인솔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허락하죠. 내용을 보니 당시 홍수와 수운관리에 관한 것인데 최부가 이 비석을 어떻게 알고 보자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내용을 베껴 오군요. 그런데 이 비석은 최부가 본 뒤 얼마 뒤 홍수로 유실되어 그 내용은 <표해록>에만 전한다고 하네요. 당시 농촌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것이라 하군요.
최부가 북경-요동을 거쳐 귀국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귀국 후 그의 운명은 너무 기구하고 비극적입니다. 그는 바로 나주 향리로 내려가 부친의 빈소를 찾으려 하지만 성종의 엄명으로 서울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걸 앞에서 말했지요. 그러나 조정의 일부 관리들은 최부가 부친상을 외면하고 8일이나 서울에서 유유자작하게 지냈다고 끈질기게 탄핵합니다. 중국에서 상복을 벗지 않은 최부의 행적을 보면 미치고 폴짝 뛸 만큼 가당찮은 비난이지요. 요즘 정치판을 보면 뭔가 비슷한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성종은 최부의 벼슬을 여기 저기 옮기면서 끝까지 최부를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최부는 비극적 최후를 맞습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에서 김종직의 문하라는 죄명으로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 갑니다. 6년 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그의 죄는 재론되어 참형에 처해지고 그의 머리는 다음 날 백관들 앞에 효시됩니다. 연산군 10년(1504) 3월에 내관과 백관들에게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설신참신도(舌是斬身刀)’라는 팻말을 목에 걸게 했던 시기입니다.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목을 자르는 칼이라’는 말입니다. 당 말기 여러 임금을 섬기면서 살아남은 풍도(馮道)가 말을 함부로 하는 걸 경계한 시의 첫 구절입니다. 뒤 구절은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 안신처처뢰(安身處處牢)’라, ‘입을 다물고 혀를 숨기면 몸을 편안하게 간직할 수 있다’고 하네요. 처세의 달인다운 시라고 하겠습니다.
최부는 황해의 험한 파도에도 끈질기게 버텨내고 중국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생명줄을 놓지 않고 돌아왔으나 한 미치광이의 어처구니없는 칼부림에 목이 잘린 겁니다. 그의 나이 51세. 2년 뒤 중종반정으로 곧 바로 복권되며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추존됩니다. <실록>에는 ‘공정, 청렴, 정직하고 경사에 널리 통하였으며 문사(文詞)에 능하였다. 간관이 되어서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이에 죽음에 이르니 조야가 모두 애석해하였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최부의 여행기를 따라가다 보니 히데요시의 절명시 ‘꿈속의 꿈’이나 Edgar Allan Poe의 시 ‘A Dream Within A Dream’과 같이 여행기 속의 여행기가 되어버렸네요.
후기를 하나 붙입니다. <중앙 Sunday>에서 2016년 8월 최부의 표류지 절강성 삼문(三門)을 찾은 르포를 2회에 걸쳐 연재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위 번역/해설본에 의존하면서도 한 마디 언급이 없다고 하군요. 인용이란 책임성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말이죠. 신문에 쓰는 글을 논문같이 쪽수까지 정확하게 표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전면 2회 연재라면 간단히 ‘xxx라는 책이 도움이 되었다’ 정도는 언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기자 선후배님들 한번 쯤 생각해 봅시다.(2017.12.23.)
사진 1. 고려사관에 있는 고려사신의 관복
사진 2, 고려 사신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