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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하루 전(2010년 3월25일), 북한이 서해함대사령부와 4군단의 병력을 증강하고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라는 비밀지시를 내렸다고 대북 민간 라디오 방송인 열린북한방송이 지난 4월 29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북한 통신원을 인용해, “천안함 사건이 북한 매체를 통해 발표(17일)된 이후에는,
장병들 사이에서 ‘천안함 격침 때문에 전투준비태세 지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선일보 2010. 4. 30). 천안함 침몰 하루 전에 북한군 서해함대사령부와 4군단이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천안함 침몰 사건에 북한이 개입되어 있었는지의 여부를
판명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천안함 격침 때문에 전투준비태세 지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은 북한 내부의 시각, 즉 북한군 장병들의 시각이다.
만약 여러 해 후 그 장병들 중에서 탈북자가 생긴다면 무어라고 증언하겠는가? 천안함
침몰
하루 전에 북한군은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리고 그 증언이 무엇을
시사하겠는가? 천안함 침몰 하루 전에 북한군이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천안함 침몰
사건은 북괴의 준비된 소행이었음을 시사한다.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은 누구나
전쟁의 긴박성을 느끼기 마련이다. 군인에게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라는 명령은 싸우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으라는 명령이다. 누구든 자신의 생사가 달린 문제에는 깊은 관심을 가진다.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 경비병들이 미군에게 도끼를 휘두른 이른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던 군인들에게는 지금도 그 경험이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출동대기 중이던 우리에게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결코 강건너 불이거나 남의 문제일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도 그 사건의
일부라고 느꼈다. 그런 경험은 천안함 침몰 사고를 전후로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던 북한군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던 북한군 장병들은 천안함 침몰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나 확전될 경우 바로 그들이 전투요원 당사자들이므로 그들의 인생에서는 일대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지금의 그 북한군이 여러 해 후 탈북하여 천안함 침몰 사건에 북한의 개입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증언한다면 그들이 경험으로 아는 사실, 즉 그때 그들은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할 것이다. 우리는 광주사태에 대한 탈북자들의 증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은 집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전 북한군 항공사령부 소속 여성고사포중대 중대장은 이렇게 증언한다:
"이 시기에 북한은 인민군대와 민간교도대, 노동적위대와 심지어 중·고등학생들의 비 군사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를 비롯해서 전 국민에게 준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전쟁준비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155).
1976년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전방에서 우리는 군화 끈을 묶은 상태로 병영 안에서
생활하며 출동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라고 있었다. 일단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고향으로 보낼 머리카락과
손톱만 남긴채 전투지로 부대 전체가 이동한다고 들었던 우리는 곧 전쟁이 터지는 줄만 알았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똑같이 겪은 사건이었다. 그때 우리는 부대 안에는 신문이나
라디오가 없었기에 대중매체로는 전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 대해 듣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전쟁이
우리가 군복무하는 중에 일어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사회 나와 물어보니 사회에서는
그 사건을 그저 하나의 뉴스거리로만 여기고 있었을 뿐 평상시와 다름없는 평온한 나날이었다고 한다.
동시대에 똑같은 사건을 겪었으되 이처럼 그 사건에 대한 전방의 군인들과 후방의 국민들의 경험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자, 동시대에 남한사람들과 북한사람들이 천안함 침몰 사건을 겪었지만 사건 하루 전의 경험은 남북한에서 전혀 달랐다. 북한에서는 군인들이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나, 남한사람들은 여느날과 다름없는 날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광주사태 전야에도 비슷했다. 단지 중국이 미국과의 경제 외교에 국운을 걸고 있었던 1980년 5월에는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중국이 일본정부에 사전 통보하여 주어 한국 정부와 군 수뇌부에서는 북한의 군사동향을 조금 알고 있었다는 것이 다를뿐 민간사회에서는 여느날과 다름없는 평온한 날이었다. 그러나 2010년의 천암함 침몰 전야 때처럼 1980년 광주사태 전야 때도 북한군은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광주사태에 대한 탈북자들의 증언이 정확하다는 사실은 '전투준비상태'라는 용어는 군복무를 했던 우리도 처음 들어보는 용어이다. '전투준비상태'란 광주사테 전야에 북한에서 사용된 북한군사용어이다. 그리고 실제로 북한에 그런 군사용어가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4월 29일자 열린북한방송과 4월 30일자의 조선일보 보도로 확인된 것이다. 광주사태 전야의 전투준비상태에 대하여 위의 전 북한군 여성군관은 이렇게 증언한다:
북한인민군 주력전투부대의 해당부서와 단위들은 광주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부터 상급지휘부대로부터 광주라는 정확한 지역까지는 통보를 받지 못했지만 남조선에서 조만간 대규모의 사건이 터진다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 받고 전투준비상태에 만반을 기하고 있었다. 우리부대에서도 미그19~21전투기들에 대한 특별정비는 물론 훈련반경을 일상적인 훈련지역보다 남쪽방향으로 더 내려간 군사분계선 상공으로 확대했고 4대로 편성된 전투기 편대가 주야로 항상 관할지역에 대한 비행전투근무를 감당하게 조치했다. 격납고 안에서 대기상태에 있는 전투기들도 명령이 떨어지면 신속히 출격하여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완전무장상태로 전투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부대지휘관들과 전투기 조종사들, 정비사들과 민간노무자들까지도 집에서의 출퇴근이 금지되고 신발 끈을 묶은 상태로 병영 안에서 생활하며 지휘부로부터 출격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라고 있었다 (상게서 p. 156).
'진투준비상태'라는 북한군사용어는 우리말로 쉽게 표현하면 '남침준비'이다. 남한에서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와 광주운동권이 전국적인 민중봉기 거사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바로 그때 북한에서는
전군적인 진투준비상태에 돌입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위의 북한군 여성군관은 이렇게 증언한다:
"상급지휘부에서 내려온 기밀문서에 대한 내용은 해당 중요부서의 고급지휘관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대대지휘부 군관들과 중대, 소대급 지휘관들은 물론 심지어 전투기를 직접
조종하는 비행사들도 긴장하게 돌아가는 부대상황과 분위기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기고 있다는 정도로만
눈치 채고 있었지 남조선에서 금방 터질 대형사건과 관련되는 전군적인 진투준비상태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p. 156).
만약 우리가 천안함 침몰 사고 전날 북한이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라는 비밀지시를" 내렸다는 위의 조선일보 기사 한 줄만 읽는다면 그 긴박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 전문을 본다면 전쟁상황이 임박할 수 있다는 그 긴박성이 상당히 진하게 느껴질 것이다. 2010년 3월에 북한의 비밀지시가 있었듯이 1980년 5월에도 북한의 비밀지시가 있었다. 여기서 광주사태 직전의 비밀지시란 고급 군관들만 볼 수 있었던 명령서였다는 의미에서의 비밀지시이다. 당시 고급 군관들만 볼 수 있었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서 내용을 발췌 인용하면 이러하다:
...남조선의 혁명적인 인민들과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탄광과 광산 및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반정부투쟁은 우리의 공화국인민들과 그들의 통일열기가 얼마나 뜨겁고 최고의 시기에 도달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위대한 통일국면은 우리의 눈앞에 현실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 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투명령을 하달한다.
1. 인민군무력부 산하 각 군단, 사여단 전투부대들은 만단의 전투동원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준전시 상태에 돌입할 것.
2. 교도지도국 산한 각 저격 및 경보병 여단들은 남조선의 후방을 신속히 장악하고 배후를 교란하여 제 2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작전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
3. 공군부대 산한 전투비행단들은 적진에 구축되어 있는 중요군사시설물에 대한 선제타격과 함께 공중작전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의 작전이 원만히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의 전투준비태세에 임할 것.
4. 해군부대 산하 전투함대들은 선제타격으로 해상공격권을 장악하여 신속한 기동력으로 해상육전부대들의 남한침투를 보장하며 육·해·공군 전반 무력이 입체작전으로 단시일에 남조선을 공략할 수 있도록 비상전투태세에 돌입할 것.
5. 노동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원들을 비롯한 영웅적인 전체 조선인민들은 조국통일의 대사변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예비전쟁연습에 성실히 참가하며 공화국을 내부적으로 파괴하려는 간첩 및 암해분자들의 준동에 경각성을 높이고 자기의 일터를 철옹성같이 지킬 것. (p. 157-158).
전투동원준비 태세, 전투준비태세 등 위의 다섯 개의 행동강령이 모두 전투준비태세에 관한
것들이다. 광주사태 전야에 북한군에 전투준비태세로 대기히라는 비밀지시가 내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북한군이 남침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천안함 침몰 전야에
북한군에 전투준비태세로 대기히라는 비밀지시가 내려져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북한이 전쟁 도발을 원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오늘(2010년 5월 4일) 갑자기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하고
국가안보총괄점검기구를 신설하는 등 안보시스템 쇄신 방향을 제시한 것도 지금 한국의 안보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은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탈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증언한다. 전 북한 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도 "천마산에 시체도 없이 만들어진 광주 영웅들의 묘지"란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진지에 나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떼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다"고 증언한다
(p. 379). 한 탈북자는 "광주사태에 대한 당시 북한의 선전"이라는 제목의 증언록에서 "80년
당시 인민군은 비상전시태세에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반도의 남단 아래쪽에서
일어난 봉기에 왜 괜히 북쪽에서 신발 끈을 조여매고 대기 태세로 돌입했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반증이다"고 말한다.
1975년 3월 월남 중부지방에서 광주사태와 비슷한 민중봉기가 일어났을 때 월맹군은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갔는데도 월남 국민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똑같은 상황이 1980년
한반도에서도 있었다. 북한은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하면서 남한 운동권들로 하여금 '계엄 해제' 요구사항을
내건 폭력시위를 하게 하였다. 윤한봉이 지휘하던 운동권은 4월에 '계엄 해제'를 명분으로 전국적인
민중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5월부터 실행에 옮겼다. '계엄 해제'는 명분이었고, 목표는
폭력시위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에서 전군이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한
그 때에 윤한봉 등 남한의 종북 운동권이 '계엄 해제'를 시위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아무래도
수상하지 아니한가!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하시어 국가원수 유고 상황이었기에
최규하 권한대행이 선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비상계엄은 5공화국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는 지속되어야
했다. 새해 1980년 1월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출범하였으나, 5공화국 대통령 선출을 위한 약
1년 임기의 과도 정부로서 출범하였던 것이며, 여당조차 없었던 과도정부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유능한
행정 관료였다. 그는 단 한번도 정당에 소속된 적이 없었기에 충직한 관료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 소속이 없었던 그에게 여당이 없었다. 그의 정부는 여당 의원이 단 한 명도 없는 정부였다.
그 어느 대통령이 여당 의원이 단 한 명도 없이 국정을 이끌어나갈 수 있겠는가?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하루속히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과도기 정부로서 출범하였으며, 따라서 5공화국
대통령이 선출되는 그 날까지는 비상계엄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했다.
의회민주주의는 양당정치라는 사실을 1980년 봄의 3김씨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당은
존재하지 않고 야당들만 여러 개 있는 의회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 김종필씨도 김영삼씨도 공화당과
신민당 중 하나는 여당이 되 주어야 할 책임을 외면하였으며, 김대중은 여당 없는 정부를 뒤흔들고
괴롭히며 국정운영을 사사건건 방해하였다. 이런 정치적 혼란기는 북한이 놓칠 수 없는 남침의
기회였다. 따라서 최 대통령은 북한에 남침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선거법을 개정하고 선거법이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려면 비상계엄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은 계엄 해제 요구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였으며,
북한은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와 광주운동권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그 날을 배후교란작전 및 남침의
기회로 보고 전군에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북한군이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때에 천안함 침몰 사고가 일어났다. 즉, 천안함 침몰
사고는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광주사태 역시 북한군이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때에 일어났다. 전 북한 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매일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정치상학 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원들이 남조선 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며 많은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 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p. 379). 그런데 이와 아주 유사한
정치 강연이 최근에도 천안함 침몰 사고 직후에 있었음이 주목된다. 지난 4월 24일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진행된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에서 한 간부(당세포 비서)가 “최근 영웅적인 조선인민군이
원수들에게 통쾌한 보복을 안겨 우리 자위적 군사력에 대해 남조선이 국가적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조선일보 2010. 4. 27).
당시 강원도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던 한 탈북자는 5월 21일 북한군 전 부대가 완전무장 상태로 비상대기에 들어간다는 명령이 군단참모부로부터 불시에 내려온 사유를 이렇게 서술한다: "남조선의 전라도 전 지역(남한에 와서 확안한데 의하면 당시 광주시내만 시민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고 했다)이 시민군들에 의해서 장악되었고 조만간에 남조선의 전반지역으로 무장폭동이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남조선 봉기군 측에서 북한에 무력지원을 요청하여 오면 인민군 각 부대들은 일시에 군사분계선을 뚫고 밀고 내려가서 최전선지역을 무력화 시키는 동시에 봉기군과 합세해서 남조선의 전 지역을 해방한다는 계획이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281).
그런데 광주사태가 시작되기 사흘 전에 이미 북한군은 사분계선을 뚫을 시도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동아일보』 1980년 5월 16일자 신문은 "북괴군, 비무장지대 침투 -- 미군과 교전 --'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한다:
15일 새벽 1시 30분경 판문점 동쪽 800m 지점의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장병들과 수를 알 수 없는 북괴군이 교전했다고 발리 풀러튼 유엔군 사령부 공보과장이 이 날 오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북괴병들은 이 날 아군 ○○○GP 전방 20 m 지점까지 침투했으나, 조명지뢰 폭발로 그들의 침투기도가 폭로되자 도주하면서 아군을 향하여 자동화기 40여 발을 발사하고 북으로 달아났다. 이 교전으로 아군측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북괴가 최근 국내소요 등에 의한 취약기를 이용, 남침 가능성을 확인해 보려고 최전방 경계태세를 시험하려는 의도에서 이같은 도발행위를 저지른 것 같다고 말했다. 북괴는 지난 3월 17일 밤 이 공동경비구역에 침투한 것을 비롯, 금년 들어 여섯 차례나 침투를 시도했으나 아군에 의해 모두 격퇴됐다.
최근에는 지난 12일 밤에도 이 지역에서 총격전이 있었다.
광주사태 발발 직전 북한군만 전투준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5월 16일
북한군이 비무장지대에 침투하였을 바로 그 무렵에 북한에서는 공장들도 전시체제로 돌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음을 전 북한 공장 지배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무장폭동이 전개되기 바로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그 책에는 광주라고 정확히 대상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인민항쟁이 일어난다는 내용과 함께 전당, 전국, 전민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만단의 태세를 갖추며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라인을 군사지휘체계로 긴장하게 운영할
데 대해서 지시하였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207).
[사진설명] '계엄 해제' 구호가 일으킨 광주사태 25주년의 구호 '미국은 이땅을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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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아래 목차에서 <I. F. 1. 5·18
과
천안함 침몰 전의 북한군 전투준비상태>입니다.
윤한봉이 회고록에 남긴 5·18
비밀열쇠
I. 1980년 봄 광주운동의 두 주체
A. 윤한봉과 탈북자 회고록의 일치점
B.
서울대 대자보에 박힌 북한말 구호
C. 광주사태 주동세력 광주운동권
D.
광주사태 선동한 황석영의 극단 광대
E. 광주사태 배후세력 남민전
1.
한명숙의 용공서클과 간첩 서경원
F. 광주사태 지원세력 북한군
1. 5·18과
천안함 침몰 전의 북한군 전투준비상태
II. 김대중의 내란으로서의 광주사태
A.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
B. 김대중의 홍위병과 유언비어 대자보
C. 무장봉기 기획한 5.18 비밀문서
D.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
E. 무기탈취 특공대 중의 김대중의 사조직
III. 도시 게릴라 전으로서의 광주사태
A.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무장봉기
B. 무기탈취 이전의 도시 게릴라전 무기들
C. 경찰저지선 돌파를 위한 도시 게릴라 전술
D. 폭동강령 유인물과 북한군의 교란작전
E. 20일 등장한 정체불명의 무장단체
IV. 통일운동으로서의 광주사태
A. 5·18 광주의 영웅과 만난 문익환 목사
B. 북한에 먼저 알려진 무장봉기 음모
C.
주객이 전도된 광주방송과 평양방송
D. 시민군 도청 점거의 상징적 의미
E.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광주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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