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
최용규
서울에 사는 조카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체험을 하겠다며 내 집을 찾아왔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면소재지에 위치해 있고, 그 아이들 또한 기차를 타고 왔으니, 내 집은 분명 ‘시골집’이다. 그런데, 이 서울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또 무엇을 하게 해 주어야 그 애들 나름의 시골체험을 일기장에 빼곡하게 적을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농촌지역에 살고 있으나 농사일과 무관한 직업을 갖고 살고 있는 나와 아내에게 아이들의 급작스런 방문은 본의 아니게 어려운 숙제거리를 안겨 주었다.
고심 끝에 아내는 자연의 먹을거리에서 시골체험의 단서를 찾은 듯 했다. 옥수수와 감자를 쪄내고 아파트 옆 밭고랑에 재미삼아 가꾼 가지며 고추, 상추, 토마토를 식탁에 올려 이것이 진정한 유기농 농산물임을 자랑할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조카들의 3박4일 시골체험을 기억에 남도록 만들어 줄 것인가?
이리저리 궁리하는 중에 50여 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종이배 놀이가 생각났다.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간 뒤, 마을 안 골목길에서 동구 밖 시냇물까지 새로 난 물길을 놓치지 않고 종이배를 띄워 보냈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마침 연일 비가 내리니, 옳다구나 싶었다. 비록 날렵한 솜씨를 보여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나마 잊지 않고 있는 종이배 접기 방법을 녀석들에게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동안 마음이 종이배에 머무르는 사이 문득 ‘깊은 물’이라는 시 한 구절이 기억의 물살 위로 떠올랐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에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내 마음에 배어든 이 시구는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뜰 수 있고, 얕은 물은 술잔하나 띄울 수 없는데, 그대의 마음은 과연 종이배 하나라도 띄울 수 있을 만큼의 깊이가 되느냐고 묻고 있다. 시인은 물의 깊이에 견주어 세상 사람들의 마음 깊이를 보고자 했으나, 나는 그보다는 종이배의 가벼움과 비어있음을 보고 싶었다. 종이배에 무엇을 실어야만 한다면, 그 무게로 인해 종이배가 가라않지 않을 만큼의 가벼움과 비어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초등학생 시절 사내아이들은 비 온 뒤 불어난 실개천의 물길위에 종이배를 띄워 놓고 빠른 물살을 타고 흘러가는 종이배를 뒤따라 열심히 달렸었다. 내가 띄운 종이배가 도중에 좌초되거나 전복되지 않은 채 멀리 항해해 주기를 바라며 한참 동안이나 종이배와 함께 내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 시절 나와 동무들이 종이배에 실어 띄워 보냈던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소망, 혹은 그 먼 어떤 곳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꿈과 소망 이외에 아무런 욕심도 싣지 않아 가벼워진 종이배는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갈망하고 모으고 채워나간 모든 것의 무거움으로 인해 얼마나 깊이 가라앉고 말았을까?
종이배의 추억으로 시작된 상념이 줄기를 이루고 가지를 뻗어가고 있는데, 서울서 온 두 사내 녀석들의 한마디 주문이 나를 현실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이모, 치킨 시켜줘요”
우리 내외의 고심은 안중에도 없는 듯, 두 녀석은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알맞게 익은 옥수수와 감자를 접시에 담아내고 있는 아내에게 기름에 튀기고 매운 양념을 입힌 통닭이 먹고 싶다고 조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 아이들 또래였을 무렵, 나와 동무들은 마을을 벗어나 시내와 산과 들녘에서 뛰놀고, 마냥 놀다가 배가 고프면 손이 닿는 어디에서나 먹을거리를 찾아내어 시장기를 달랬다. 그러나 오늘의 서울내기 녀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TV, 컴퓨터와 함께 놀고,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열거나 전화로 주문해가며 습관적인 공복감을 채우는데 익숙해져 있다. 컴퓨터 오락에 빠져 자연 속 재미를 알지 못하고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져 자연의 먹을거리가 지닌 진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 아이들만의 유별남이랴.
아이들에게 종이배 접기를 가르쳐 주려 했던 나의 순진한 생각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현대의 디지털 문명과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져 있는 아이들에겐 놀이터와 먹을거리로서의 자연은 오히려 낮선 세계일 것이다. 급변하는 디지털 정보화의 물결에 멀미를 느껴 밀려났으면서 아날로그의 세계를 지키며 살겠다고 자위해 온 나는 서울서 온 디지털 아이들의 놀이를 멀찍이 바라만 볼 뿐이다.
두 조카들은 사흘 밤 나절 동안 연일 계속되는 비를 핑계 삼아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은 채 게임과 TV시청으로 시간을 보내더니 마침내 나흘째가 되는 날, 진정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도시로 훌쩍 떠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질문하나가 솟아오른다.
“나와 이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매개로 소통할 수 있을까?”
서울 아이들이 원했던 것은 어쩌면 이모와 이모부의 시골다운 소박한 삶과 푸근한 인정이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 내외는 그들의 과연 그런 기대를 얼마만큼이라도 채워 주었을까 자문해 본다. 호미 한번, 낫 한번 제대로 쥐어 본 적 없는 나의 존재는 이 지역 농민들에게 낯선 이방인일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는 자연을 이해한다고, 자연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산다고 생각해왔지 않은가. 또, 자연을 닮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며 살겠노라 다짐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정녕 나의 삶은 버리고 비우는 삶과는 아득한 거리에 놓여 있다.
이제는 다시 50여 년 전 소년의 손에 의해 물길 위에 띄워진 종이배처럼 가벼워지고, 비워진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누구라도 삶의 끝에 서면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가야 하련만 비우고 가벼워지는 삶을 말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나를 향해 깊은 물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이 밤, 그대의 종이배는 얼마나 가볍게 비워져있는가?”
(2007. 9. 21.)
첫댓글 역시 평소에 다져 놓으신 교육의 연륜은 속일 수가 없네요. 문장이 편안하며 감동의 수필입니다. 한 두곳 오타가 발견됩니다. 다음에 수정하셔요.
최교수님 글을 읽으면서 가벼운 종이 배도 띄우지 못할 깊이의 가슴으로 살았음을 반성하게 되는군요.이제 여생은 종이배 입장으로 돌아가 많이 비우고 가벼워져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동동 떠가는 종이배가 되어야할텐데. 아직 편견으로 채워져 있으니 언제 뜨려는지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세요.
감상 잘 했습니다
장마때 종이배 띄우던 추억도 떠올리며 ... 교수님의 좋은 수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수필의 참 맛을 느끼고 갑니다.
글 읽어보니 다시 수정하여 놓으셨네요.
도시 보다 놀이공간도 넓으며 놀이감이 많은 시골에 취하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감동을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비워서 가벼워지는 삶을 꿈꾸지만 누구도 실행하기란 쉽지않은 듯 합니다. 최교수님의 작품을 읽고 내 마음속의 종이배 하나를 띄워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