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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3:1-7
빌라도 법정
(눅 23:1, 개역)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눅 23:2, 개역)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눅 23:3, 개역)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눅 23:4, 개역)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눅 23:5, 개역)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눅 23:6, 개역)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눅 23:7, 개역)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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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지금 어떤 예수를 보고있습니까?
본문에 보니
‘빌라도의 뜰에 선’ 예수입니다.
‘빌라도의 뜰’에 서기가 주저된다면
우리는 필히 다른 예수를 만들어 낼
소지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우리는
그 당시의 인간들을 대표하는 쟁쟁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요즈음말로 하면
국회의원들입니다.
여기서 산헤드린이 뭔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산헤드린은 포로기 후기에
예루살렘에 있던
71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최고의 유대교적 평의회를 말합니다.
이 기원은
출애굽기 24장,
민수기 11:10-24에 나오는
70인 장로 모임에서부터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
에스라에 의해 인정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이라는 일종의 귀족 계급은
나름대로 막강해서
헤롯 왕 조차도
대제사장직 자격이 없다고
고소한 적이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었고
세금도 그들이 직접 거두었습니다.
지방 통치는
이들에 의해서 다스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법적인 문제에 있어
산헤드린의 권위는
많이 행사들 되었습니다.
(마 5:22/막 14:55/요 11:47/행 9:2, 4:15,22:30)
대제사장은 산헤드린의 의장이자 회의소집자였습니다.
(막 14:53/행 24:1)
시리아 특사나 총독은
이 대제사장을 임명하고 파면시키는 권한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의 명령에 따라
체포되었지만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처형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산헤드린은 총독의 동의가 없이는
사형을 부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 18:31)
쉽게 말해서 이 산헤드린은
사람들의 의견과 의사를
대변해주고 있는 자들입니다.
자 이 재판의 현장에
우리 자신들이 택시를 타고
시간 속으로 달려 끼어 있다면
예수님의 처형에 대해서
우리가 찬송표를 던질까요
아니면 반대표를 던질까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 종교인들에게 일임하고
단지 비용만 그들에게 댑니다.
이 전문종교인들이
바로 산헤드린(공회)입니다.
이들이 지금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출생을 무효화하겠다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아예 공연히 태어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 공동체에
하등 필요치 않는 인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에는 분명
확실한 종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대교라는 겁니다.
그 종교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존재하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교리가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의 제 1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는 겁니다.
누가 봐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완벽한 구호이지만
문제는 그 안에서 여전히 자기 챙기기는
고스라니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긍정하면서
이러이러한 식으로
자기 자신을 영원히 살아남게 하겠다는 의지는
여전한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즉 천국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기존의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가 봐도 자신을
인간으로 간주합니다.
짐승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달랑 사람만 만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은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용설명서를 첨부시키신 겁니다.
이 사묭설명서가 사라진 겁니다.
그대로 인간들은 자기 몸이 이끄는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잘못되게
자기 몸을 사용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사라진 이 사용설명서를
‘언약’ 혹은 ‘약속’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들은 약속대로 살아야 하고
언약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찬송가 344장 1절 가사를 보면.
“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믿음만은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고 되어 있습니다.
눈이나 귀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믿음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 실적이 없고
자신의 기대한 식으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는
차질없음을 믿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빌라도의 뜰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이
바로 우리 성도가 믿어야 될
내용이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실적으로 믿게 되면
이는 새로운 피조물이 못된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서,
자신은 아무런 파에도 속해있지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어도
어두운 세상 권력 밑에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서
“나는 베드로파다 바울파다 예수파다 아볼로파다”
는 파벌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진정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런 파들은 의미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죽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란 ‘죽음’을 말하는 사건입니다.
죽음 사건이 성도를 살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산 사람은 모두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4:15-17에 보면,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는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산 자들은
실은 곧 죽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살고자하면서 살아서는 아니되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산 자들이 아무리 발바둥쳐 봤자
죽은 자의 운명을
비켜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살아있음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음에 주도권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의롭게 하시는 이유는,
더 이상 우리를 산 자로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 취급하심이
동기로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기 자신을 죽은 인간으로 내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복음이 찾아들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로 구원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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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강-눅23장 1-7(빌라도법정)120722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7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3:1-7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교회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어떤 면을 가지고 믿을까요, 예수가 믿을 만큼 이용가치가 있던가요? 빌라도의 재판 석에 서 있는 그 예수가 과연 믿을 가치가 있는 분입니까? 여러분은 재판정에 어떤 죄수가 서 있으면 다 믿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알맹이는 다 날라 가버리고 교회에서 유포한 예수, 왜곡된 예수, 사람들이 속에서 조작하고 상상한 예수……, 예수는 사실은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자기 자신의 확대된 모습이지 진짜 이 땅에 계셨고 지금은 부활해서 살아계신 그 예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예수입니다.
사도바울 당시에 종교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엄청 많았습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도 파벌이 있었습니다.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예수파, 파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파벌이 있다는 말은 자기의 입맛에 맞는 예수를 골라서 믿었다는 뜻이에요. 그 파벌이 다 엉터리일수도 있고 하나 맞는 수도 있고 그렇지만 만약에 그 파벌을 믿는다고 내세워버리면 일단 그 사람은 가짜입니다. 나는 장로교를 믿는다, 나는 침례교를 믿는다, 나는 순 복음을 믿는다, 이렇게 나오면 일단 그것은 가짜에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런 파벌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절대 거기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이라는 것은 힘 자랑 하는 거거든요. 우리 편 맞다, 그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진짜 종 사도바울이 전했던 이야기,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결정적으로 단정 지었던 그 내용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내용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뜻이 뭐냐, 누군가 여기서 죽었다 그 말이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치장이나 장식용 십자가가 아니고, 차에 달아놓으라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차 앞에 달아놓는 십자가는 무슨 뜻이냐 하면 차타고 십자가에 죽겠다는 결심 아니면 달아놓으면 안돼요. 십자가 달아놓으면 재수 좋아서 차사고 면한다, 이런 식으로 달아놓으면 안되고 달랑달랑 십자가 달면 ‘차타고 죽게 하옵소서.’ 이런 것, ‘박아서 죽게 하옵소서.’ 이런 의지가 아니면 십자가를 달지 마세요.
사도바울에게 십자가를 전한다는 말은 평소에 네가 얼마나 권력에 몸이 달아 있다는 것을, 어떤 권력에 소속됨으로서 구원의 안심을 하고자 하는 시도들, 어느 파나 어느 교회, 어떤 큰 교회 같은 한 곳에 소속되고 몸이 매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확정하겠다는 그 심보를 죽여 버려라, 그 말입니다.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도 십자가를 안 믿으니까 그래서 허전하고 뭔가 서늘하니까 그 십자가 안 믿는 그것을 남한테 들키지 않도록 대행해서 믿는 것이 ‘나는 어느 교회 다닌다, 나는 어느 교파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안식교만 이단이고 통일교만 이단이 아니에요. 대한예수교장로회도 이단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이렇게 파벌과 나만 생각했습니다, 라는 것이 십자가 바라볼 때 그것이 다 헛발질이고 아무 소용없는 놀이기구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교회 한 50년 다녔다는 말은 50년 동안 교회에서 놀았다는 거예요. 소꿉놀이 하고 놀았다는 겁니다. 그게 목사나 장로한테는 통하지만 우리 주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설교 다시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데 어느 지점에 있던 예수를 믿는 겁니까? 교회 앞에 모자이크로 장식된, 쾰른 대성당에 보면 아주 멋지게 장식되어 있는 그 예수, 그림으로 혹은 조각으로 나오는 그 예수를 믿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재판 석에, 법원에 체포되어 있는 예수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천국으로 통하는 길은 오직 저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앞장서서 먼저 시범조로 보여준 것에 대해서 저는 동의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종교가 있었어요. 아주 빡센, 아주 단단한 종교, 북한의 김일성 종교보다 더 확고한 종교, 감시체제가 더 명백하고 확실하게 다져진 종교가 있었습니다. 종교가 없어서 자기가 예수님 종교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확고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 종교는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자, 그 말을 우리가 입에서 내 뱉는다면 누가 시비를 걸겠습니까? 믿음가운데 최상급의 믿음, 최상급의 믿음이 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된다. 인간됨의 목적이 뭐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교회에 몇 년 다닌 사람은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신조라 해서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모토고 멋진 명제입니까?
그런 것보다 더 확실한 구호가 예수님 당시에 이미 유대교라는 이름으로 있었습니다. 여호와에 의해서 살기에 여호와를 위해서 살아야 될 민족이고 우리 민족은 선택받았다, 온갖 교리들, 교조들, 신앙고백들이 가득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네가 뭔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 그 말은 여전히 그 안에 하나님을 끝까지 이용해서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는 자기 구원욕구, 심보가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을 이야기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여기 있는 내가 하나님을 한껏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그 가운데서 주님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새로운 사람이라 하는 것은 뭘 인정하지 않느냐 하면, 여기 있는 나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그러한 다짐, 그런 신앙적인 결단과 각오, 모든 것은 죄입니다, 라는 회개는 하늘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나와야 그것이 신앙이에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각오나 열심은 얼추 누구나 다 합니다. 분위기 자체가 기독교 가정 같으면 모태신앙 됩니다. 모태 신앙되면 그 분위기 자체가 불교집안이고 기독교집안이기 때문에 부모 눈치 봐서 반 강제로 교회 다녀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다니면서 들은 풍월이나 멘트가 있거든요. 그것이 사도신경이고, 교회에 나와서 찬송 부를 때 박수는 이렇게 쳐야 되고, 기도는 눈 감고 해야 되고, 기도 끝날 때는 예수 이름으로 해야 되고, 이런 것들, 한 달에 한 번씩 제직회를 해야 되고 제직회를 할 때는 누가 기도해야 되고 누가 좋은 말 할 때는 아멘, 이게 우리의 말도 아닌데도 추임새 얼씨구, 하고 붙이듯이 붙여야 되고……, 이런 것은 교회 놀이, 게임에서 손 있고 입 있으면 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것은 일종의 오락이라 그 말이지요.
이렇게 뭐든지 누가 보더라도 얼추 백성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얼토당토 않는 생뚱맞은 이야기가 나와 버리면 우리보고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수천 년 기독교역사의 전통, 정통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써 왔는데 그게 무효가 되고 전부 다 소용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사람의 행동이나 버릇이나 습관은 그 주변에 둘러싸여 있는 이미 존속하고 있는 문화의 산물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고 소위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소망, 죽어서 천국 간다는 그런 소망이 그 당시 유대교에는 없었던 줄 아십니까? 다 있었던 거예요. 이미 우리가 상상하는 것, 예수님 당시 거기에 이미 완성 단계로 다 있었던 겁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재판에 넘긴 거예요. 우리하고 안 맞더라 그 말이거든요. 우리하고 안 맞더라 하는 그 예수라는 존재를 재판에 넘겼는데 우리가 이 시간 택시를 타고, 시간을 넘나드는 그 택시를 타고 그 현장에 가보자는 겁니다. 가서 방청객으로 그 재판에 참석해 봅시다. 우리한테 선택권이 있다면, 예수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로마 황제가 하는 것처럼 우리가 배심원이 되어서. ‘자, 예수가 이런 죄를 범했다.’ 옆에 있던 제사장부터 해서 선언을 합니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우리한테 묻는다면 우리가 ‘살립시다!’라고 외친다면 적막, 고요해요.
‘눈치도 없는 인간이네, 저거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인간이네. 저거 예수와 한편 아냐?’ 우리가 그 시대에 가 보면 우리가 그렇게 돼요. 거기 예수님을 고소하는 사람을 성경에는 산헤드린이라고 나와요. 우리말로는 ‘공회’라고 하고 요새 식으로는 국회정도로 보면 되는데 그 당시로 보면 신분상 귀족계급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당시에 귀족계급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사두개인이라 해서 성전에서 종사하는 귀족과 또 하나는 성경을 가르친다는 바리새인인데 그 사람들 71명이 모여서 산헤드린이라는 공회가 조성되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중에 에스라시대에 그것을 행정단체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에서 뭘 했느냐, 세금을 거두었어요.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자치기구로서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뭐냐, 사람들, 백성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의 정치구조에 고개 숙이고 굴복하면서 살게 되어 있어요. 북한에 가서 김일성 욕해 보세요. 당장 잡혀서 죽거나 아오지탄광 가지요. 왜 그렇습니까? 한국에서는 김일성 욕해도 괜찮은데 북한에 가면 왜 체포되는 거예요?
사람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힘 속에 사람이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힘을 유대인은 어디서 모았느냐하면 구약성경을 통해서 조립한 거예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독대해서 만났던 유일한 사람 모세가 이 지상에 내려와서 어떤 정치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산헤드린, 71명의 귀족계급에 의해서 성경 말씀에 전념하는 사람들로 국회를 만들었고 그 국회의원들의 결정에 따라서 하나의 나라가 이루어졌으니 그 나라 이름이 이스라엘이라, 지금 그 나라에 하늘나라 메시아가 들어오신 거예요.
일개 백성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고 지상의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말씀을 받았다는 그 사람에 의해서 말씀대로 구축한 그 정치단체이기 때문에 그 둘의 만남은 원할 해서 하자가 없고 잘 소통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소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소통이 아니고 죽자고 달려든다는 말이지요. 그 산헤드린, 그 귀족계급은 누굴 대표하느냐,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대표하는 대변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대변자에요. 거기에 대든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대들었을 때 그 당시의 헤롯정권은 본때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감 잡았습니다. 일종의 정치적인 센스지요. 세례요한이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많으니 대중들의 힘을 이렇게 입었다는 것은 나중에 그 힘이 솟구쳐 올라올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전에 제거를 함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인 반란의 싹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죽을 때도 곱게 몰래 죽은 것이 아니에요. 돼지 머리 받치듯이 쟁반에 잘린 머리를 받쳐 놓는 식으로 죽었습니다. 가족들이 보기에 어땠겠습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세례요한 추종자들은 각지로 퍼져서 피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터키나 그리스, 로마 전역으로 다 도망쳤습니다. 잡히면 죽습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일반 사람들은 뭐했는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뭐라고 했는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의 안일함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날, 심판의 날이 곧 닥쳐온다.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그 스피커를, 그 목소리를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잘라버렸습니다.
자른 이유가 뭐냐, 네가 누구 허락을 받고 이렇게 하느냐, 너는 노선이 어느 노선이냐, 왜 우리 허락도 맡지 않는 다른 노선을 가지고 하느냐, 이단의 종말은 그냥 잘라서 끝장내 버리는 거지요. 그게 하나님 뜻이니까. 자, 이제 마음속에 묻습니다. 그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자기들은 사형권이 없고 그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만 사형권이 있기에 그 법정에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아까 부른 찬송가 510장에 나오지요. 그 찬송가사가 기억나십니까? ‘빌라도의 뜰에선 주를 생각할 때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기에 바쁜데, 석유 값은 오르고 물가는 오르고 장사는 다들 안 된다고 하는 판국인데 빌라도의 뜰에 선 예수를 우리가 언제 생각합니까? 왜 생각을 못하느냐 하면 내 생각을 하기에 바쁘기 때문에 나와 관련된 생각이 아니면 우리는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택시를 타고 그 빌라도 현장까지 안갑니다. 택시 값이 얼마나 비싸게 나오겠어요. 여기서 시내 가는 것도 만원이 나오는데 시간을 초월해서 타임택시를 탄다면 요금이 얼마나 많이 나오겠습니까? 가서 뭐해요, 가서 얻을 것이 있어야 가는데 갈 이유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진짜 천국과 통하는 이 지상의 유일한 작은 바늘 구멍 같은 통로를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보여준 이유는 인간은 재구성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재구성되어야 된다는 이 말은 기존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를 제가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기계를 사게 되면 그 기계에 반드시 사용설명서가 따라오지요. 저는 이것보다 더 쉬운 설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피조물로 만들 때는 그 피조물을 이렇게 사용해야 된다는 사용설명서가 따라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마귀가 그 사용설명서를 찢고 없애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피조물만 남고 사용설명서가 없어요. 그 사용설명서는 없고 자기 몸만 남아 있으니까 그때부터 내 몸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그것은 자기 몸에 대한 사용설명을 스스로 작성을 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이 기계가 어떻게, 어디에 사용되어야 하는지 전혀 아는바가 없습니다. 누가 없애버렸어요. 그래서 다 같이 사용설명서가 없는 입장에서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 거기서 나오는 것은 뭐냐, 종교라는 것밖에 안 나옵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천주교, 이런 종교밖에 나오지를 않아요.
그리고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빼내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무엇을 제공해서 교인들의 지갑을 연다는 수법들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선교 가고 싶지요? 가고 싶어도 못하지요? 선교 가는 대신 선교 비를 우리한테 주시면 됩니다.’ 이런 것. ‘여러분, 이웃사랑 하고 싶지요? 이웃사랑 해야 하늘나라 상급이 많습니다. 이웃사랑 못하는 대신 돈을 내면 그 돈으로 교회가 이웃사랑을 대행해 주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중간커미션을 챙기겠습니다.’ 하는 그런 아이디어들, 그게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간편한 거예요.
왜, 자기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거기에만 전념하면 되니까. 빌라도의 뜰에 선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속에 없어요. 그런 것은 중간에 있는 대행업체가 있는 겁니다. 대행업체로 있는 교회가 내 기도와 내 신앙을 대신 다 해줘요. 의인의 기도는 효과 있다 했잖아요. 내 기도보다 목사의 기도가 더 효과 있으니까 목사한테 뇌물 좀 주고 목사가 내 대신 기도해주면 그 효과가 자기에게 넘어오지 않겠느냐, 이런 발상들을 할 수 있다 그 말이지요. 사용설명서가 없기 때문에 그런 아이디어들이 예수님 때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진리로써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경우에 미사 할 때 향을 피웁니다. 그 향을 피우는 이유가 귀신,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 향을 피운다는 겁니다. 그것을 천주교 신자가 멀뚱하게 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 향을 피우는 저것이 귀신을 쫒아낸다는 그것이 과연 우리 피조물에게 합당한 사용설명서인가, 라고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마 없을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연기에 쫓겨 날 그런 귀신, 마귀가 있습니까? 정말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귀신 쫓아낸다면서 촛불 피우고 향 피우고, 성찬식 한다면서 교인들이 자기 손으로 떡을 직접 집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세속인은 더럽고 예수님의 육체를 집는 것은 깨끗한 손가락으로 집어야 되니까, 신부 자신이 그것을 집어서 신자의 입에 넣어준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피조물의 사용설명서에 합당한 겁니까? 거기에 대해서 누가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까?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돼지숯불갈비 집에서 쓰는 집게 있잖아요. 그걸로 집어서 넣어주지. 종교라는 것이 왜 그런 식으로 진화하고 발전했느냐 하면 귀찮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 가는 것도 귀찮고 이제는 말씀 지키는 것도 귀찮고 그냥 돈 벌어서 교회에 넣어주면 교회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안하는 나를 대행해서 마이카(차가 고장 나면 와서 서비스 혼자 다 해주는)처럼 다 알아서 구원해주는, 돈만 내시면 우리 교회가 다 알아서 해 주겠습니다, 라는 일종의 묵계, 약조가 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말씀을 직접 보셔야 돼요. 직접 봐서 과연 그런가 하여, 이것을 조사를 해 봐야 됩니다. 기존 인간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용설명서에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사용설명서에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그것을 찢어 없애버렸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나오는 현상은 뭐냐, 어떤 인간도 예외 없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어요.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내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기존의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지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마치 의사가 어린애의 가슴팍을 열고 청진기를 대거나 엉덩이에 주사를 놓으면 애가 우는 것처럼 왜 외부의 것이 내 안에 허락 없이 들어오느냐고 하잖아요. 우는 그것이 바로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손을 대는 그 자체가 무서운 겁니다. 왜냐, 지금의 나를 이정도 가꾸어 온 것도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여기에 누가 손을 타버리면 나는 깨지잖아요. 주님의 뜻은 그겁니다. 깨지라는 거예요. 깨질 만하니까 깨져야 된다는 겁니다. 깨지는데 그러면 새로운 사용설명서가 와야 되지 않겠느냐, 왔습니다. 중간 중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왔어요.
그게 뭐냐, 노아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삽입해 들어왔는데 그 언약가지고 언급한 사람은 족족 다 죽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아름다운 세상은 반 언약,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이 이미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 겁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안보이지요. 아까 찬송가 344장을 불렀는데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말을 할 때는 앞에 뭔가 전제로 깔려야 약속을 약속이라고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약속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앞에 뭐가 깔려야 되느냐 하면,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가 깔려 있어야 돼요. 그런데 교회라는 것이 기도 빡세게 하고 금요 철야하고 새벽기도 하는데 그야말로 그렇게 기도했으면 기도발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백날 기도해 봐도 눈에 아무 증거도 없고 귀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이러면 장사가 안 되지요. 장사가 될 리가 있습니까?
지금도 그런 교회가 있는지 모르지만 한 번 가보세요. 김 아무개 장로 아들 사법고시 합격, 이것이 교회 앞에 써 있다는 것, 아무개 집사 남편 경찰 서장 취임, 이런 것, 우리 교회 출신 25명 서울대학교 합격, 이래야 장사가 되는 거예요. 이래야 손님들이 오는 거예요. 돈을 낼 만 해야 온다는 거지요. 이것 챙겼으니까, 혹은 30배, 60배, 100배, 이런 식으로 뭔가 돈 놓고 돈 먹기인데, 오랜 만에 바른 소리 합니다, 돈 놓고 돈 먹기인데 바쳐야 뭐가 나올 것이 아닙니까, 바쳐야. 취직도 잘되고 공부도 잘하고, 돈 놓고 돈 먹기, 지성이면 감천, 이런 것이 있어야 장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찬송가를 보니까 ‘아무 증거도 없다, 눈에 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미쳤나, 내가 그런 교회를 왜 가는데. 빌라도의 뜰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겁니다. 빌라도의 뜰에 선 예수 그리스도. 우리보고 인간도 아니라고 지적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네가 안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 겁나는 겁니다. 우리 옛 사람은 죽어가도록 만들어진 거예요. 왜, 태어날 때부터 사용설명서를 받은 적이 없어요. 부모가 애 낳으면서 방금 해산한 애 엄마가 뭘 써놓고 ‘아가야, 네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사용설명서를 옆에 놓습니까?
아들 낳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이거잖아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잖아요.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나님께서 ‘이 저주받을 존재가 또 저주받을 자식을 하나 더 깔아 놓았구나. 이 약속의 땅에서.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할래? 애를 낳았다는 그 죄 때문에 양을 잡고 비둘기를 잡아라.’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용설명서입니다. 웃기지요, 사용설명서가. 사용설명서가 이런 겁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있어서 그 다음에 나쁜 생각을 먹고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겨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네가 거기 있나?’ ‘있습니다.’ ‘죄가 거기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있음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있는 나라를 천국까지 가면 안 되겠습니까, 하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것이 종교라는 이름의, 기독교나 천주교나 불교 같은 종교를 자꾸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유대교, 그 종교를 헤쳐 보니까 그 안에 모든 말씀이 다 담겨 있는 겁니다. 지금부터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할 테니까 참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3장 2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유대교라는 종교의 내막, 이것을 잘 들어야 되는 이유는 오늘날의 교회하고 똑같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들은 모세한테서 하나님의 법을 받았잖아요. 이 모세의 법이 하나님의 법이니까 이것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고 지켜야, 삶의 열매가 맺혀야 구원받는다고 생각 한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지키고 자기만 구원받으면 안 되고 백성들도 구원을 받아야 되니까 일단 자기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되겠지요. 목사가 뭔가 모범을 보여야 ‘여러분들이 나처럼 되면 구원 될 수 있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그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고자 나섰기 때문에 그들이 모세의 율법의 자리에 앉았는데 모세의 율법의 자리에는 어느 인간도 앉지를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다 그 말이지요.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겁니다. 어느 인간도 모세의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처럼 그들은 모세의 율법은 쥐고 있는데 그게 감당이 안돼요.
탐내지 말라, 이것을 지킬 위인이 누가 있습니까? 눈만 뜨면 탐이 나는데. ‘양악수술을 해 봐? 얼굴을 뜯어고쳐 봐?’ 눈만 뜨면 탐이 나는데. ‘어떤 사람은 뱃살이 쏙 빠졌는데 나는 똥배가 이렇게 나오고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걸 언제 빼나’ 하고 눈만 열만 탐을 내는데. 또 교인 많은 교회 봐도 탐이 나고, 이렇게 눈만 뜨면 탐을 내는데 어느 인간이 십계명의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킵니까? 백화점 앞으로 지나가지도 못해요. 작년에 산 것도 그 앞에 지나가다 보면 바꿔야 돼요. 유행에 뒤떨어진 것은 입기도 싫어! 차라리 선글라스를 끼든지 조치를 취해야지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왜 모세의 자리에 앉을 수가 없느냐 하면 말씀을 실천에 옮긴다고 하는 그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네 속에 나오는 것들이 이미 더러운데 더러운 것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껍데기만 교회에서 신앙한다, 성경 공부했다, 제자훈련 했다는 식으로 백날 입혀 봐야 목욕탕에서 때 밀기 밖에 안 되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것이 어떻게 모세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 그 말이지요. 그야말로 안 돼! 되지도 않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대책이 뭐냐, 데살로니가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도 약간 어려운데 좀 보세요. 15절에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아 있는 자가 이미 죽은 자보다 앞서지 못한다, ‘살아 있습니까, 그러면 다 죽음을 경험하도록 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끌려가는 상태에서 잠시 일시적으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방향성을 우리에게 부여하면 돼요.
동창생 만나서 오랜만이다, 할 때 ‘그래, 나 지금 죽어가고 있어.’ 이렇게 이야기 하라는 말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정된 것이 뭔가 속도를 내면서 달려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디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죽음 자리에 가게 되면 그 죽음 자리로 가는 방향에서 비로소 귀에 들려오는 것이 뭐냐 하면, 절대로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앞서지 못한다. 선배에게 먼저 술잔도 드리는 것처럼 죽은 선배가 먼저 살아나고 후배 너는 참았다가 나중에 부활해라, 그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요. 선배를 보고 내 자신을 파악하라, 우리보다 먼저 산 사람들도 이미 다 죽었어요. 뭐가 어렵습니까? 어렵다, 어렵다 했는데 어렵지 않지요?
바로 그들이 20년 전에, 30년 전에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큰 소리 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들 살아 있을 때 보면 반갑다, 했는데 그 분들 돌아가고 난 뒤에 우리는 6개월, 8개월, 1년도 안 지나서 ‘누구 말인데? 아, 이제야 생각이 나네. 지난번에 돌아가신 분.’ 죽고 나면 갈수록 점점 더 기억이 안나요. 예수님께서 말씀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일단 너를 죽이고 보자, 그 말입니다. 일단 너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그 다음 작업에 대해서는 너를 사용설명서대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겠다는 겁니다.
일단 너를 죽은 자로 간주하겠다, 그래서 너는 토 달지 말라, 그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은 자가 되어버리면 죽은 자가 하는 헌금이나 전도 선교 예배참석,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의미가 없어요. 죽은 자가 했기에. 죽은 자가 하는 예배참석이나 헌금 기도 전도 십계명 지키기 부모 공경하기 부부간에 사랑하기,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전도하라, 헌금하라, 이 모든 의미를 죽은 나에게서 찾지 않고 어디서 찾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게서만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행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인이라고 규정해 주는 거예요.
이것이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천기누설입니다. 함부로 말할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냥 예수 믿습니다, 가 아니라 나의 기도와 헌금과 예배참석과 나의 성경공부나 어떤 것도 의미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예수 믿을 때만 예수 믿는 거예요. 삼위일체 외우기, 신앙고백하기, 이것도 의미 없고 자식 키우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이것도 의미 없고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아까 말한 ‘내 귀에 아무소리 안 들려도 아무 증거 없어도’, 기계가 고장 나서 내 귀에 들리면 문제 있어요. 내 귀에 들리고 보이면 또 탐심을 유발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이 몸을 여전히 갖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만들어내고 조작해 내고 만들어 내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홀로 빌라도의 뜰에 서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남은 몸 가지고 남은 평생 빡세게 안 죽고 버티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살면 살수록 그동안 나도 미처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이기심과 자존심, 위신에 대한 집착과 애착, 남 욕할 것도 없다는 것, 우리 자신이……, 우리가 북한에 납북되어서 가면 거기서 김정은이 좋다고 고개 숙일 거예요. 김정은이 좋아서 좋다고 고개 숙이겠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먹고 살려고 그저 비는 것, 이처럼 우리 자신은 예수고 하나님이고 거론은 하지만 사실은 교회 다닐 때부터도 아예 그런 것은 관심도 없었고 오직 처음이요 나중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백을 해야 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부처 말이 맞다니까요? 부처 말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다 맞는 말이에요.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의 부처를 믿고 있는 거예요. 부처는 빌라도의 뜰에 서 본적이 없습니다. 그게 문제에요. 죽어서 부활한 적이 없어요. 개나 소나 다 가짜니까. 가짜가 가짜의 말을 듣고 얼추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사도의 눈에 보이는 어떤 사생활 이라든지 훌륭한 어떤 목사의 사생활이라든지, 그런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실제로 믿어야 될 분을 놓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흉내 내면 따라붙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것은 가능서이지요. 이미 죽은 자에게는 가능성 같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일말의 우리의 의로 구원받을 어떤 공로도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집사가 아니라 권사 장로 목사 신학 박사가 되어도 안 나옵니다. 그 애매한 것 제가 정해 드리겠습니다. 안 나옵니다. 앞으로 딴 소리 하지 마세요. 안 나옵니다. 전도하러 다니고 목회하고 별 것 해도 안 나옵니다. 안 나오면 어떻게 하는가? 안 나오면 그냥 안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안 나옴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면서 부부간에 살면서 그것을 파악을 하세요. 그것을 찾아보세요. 왜 나는 하나님의 뜻을 지켜 낼 수 없는 위인인가를, 홀로 도 닦으면서 하지 마시고 교회 좀 많이 나와서 부딪히면서 파악 하세요. 식사당번이라고 해 보면 뒤에서 짜니 싱겁니 해 가면서 구시렁거리면 ‘나는 두 번 다시 식사당번 안한다.’ 하고 삐지죠. 인간은 삐질 수밖에 없어요. 식사당번을 해 봐야 내가 얼마나 잘 삐지는가를 파악할 것 아닙니까? 어떤 아내는 남편이 자기보고 코끼리 같은 몸매라고 했다고 이혼했습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부부가 된 거예요.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겁니다. 그런 인간들끼리 모여서 교회 한 거예요.
이게 죄인들의 집단이고 사용설명서대로 살지 않는 몸치들의 집합이지 사람을 볼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이 시간 성령을 통해서 택시 타고 갈 곳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돈도 안 받아요, 가보면 예수님께서 아무도 없이 홀로 빌라도의 재판에 서서 거기 있는 우리의 대변자한테 ‘당신은 사형’이라는 선고를 받습니다. 사형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의 출생은 무효입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렇습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우리 출생은 다 유효합니다. 우리는 주민등록증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큼은 다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은 우리와 섞일 수 없는, 당신은 출생하지 말아야 될 분’이라고 선언 받은 분이에요.
당신의 출생은 무효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출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이 뭐냐, 성령, 주님의 영이 임하면 ‘당신의 출생은 무효가 아니고 유일하게 참된 인간, 참된 하나님의 피조물, 유일한 메시아로서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당시 사람이나 지금이나 강도나 세리나 창기나 천국갈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했던 십자가 복음이라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