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밤 1
목숨을 건 투쟁을 코앞에 두고 백수웅은 한동안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목적지까지 오는 데 큰 저항을
받지 않았고, 회담장으로 침투하여 은밀한 창고에 숨도록 하늘은 알뜰히 보살펴 주었다.
수면제에 의해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미라를 바라보며, 이번에는 테러 이후의 세계를 생각했다.
그는 참으로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무난히 침투할 수 있었다면 미라를 데려오지 않았어도
되는데 하고 후회도 해 보았지만, 이제 지나간 시간에 얽매일 수는 없다.
이후락과 박성철의 죽음-. 그것이 하루아침에 조국이 통일되는 계기가 되리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것은 자신의 대 국민 성명서를 통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언제나 꿈꾸던 '유토피아의 세계'
전쟁의 위험도, 동족 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추악한 싸움도, 잘난 권력을 위한 투쟁도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경각심이 일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죽음은 값을 다할 것이다.
가능하면 자신이 이번 테러에서 살아 남기를 원한다. 그래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선봉장이 되고 싶다.
그러나 살아 남기를 바란다는 것은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요행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들과 함께 목숨을 버려, 남북한 의 추잡한 싸움을 끝내게 하고 싶다.
언잰가 우이동 산기슭에서 허열과 단둘이 만났을 때, 함께 손잡고 새 조국 건설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허열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비겁한 놈이다.
백수웅은 정신을 잃고 늘어진 미라를 측은한 듯 다시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라를 데려온 것은 잘못인 것 같다. 그런데 왜 데려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미라를 품 속에 안고 오토바이로, 열차로 달려오면서 왜 그렇게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던가? 테러를 위해 달음박질치는 기분이 아니라, 마치 딸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는 듯한 즐거움을 느졌는데,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아아, 허열의 딸.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아이. 지금도 주머니에는 칼에 찍힌 이 아이의
사진이 들어 있지. 그 사진을 왜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일까? 노옥진은 또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미라가 여기까지 납치되어 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2층 미라의 방에서 혼자 잠든 것으로 알고
그냥 밤을 보내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미라의 실종을 알고 지금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미라를 여기까지 데려왔으며, 노옥진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모래처럼 메마른 감정에 사랑을 담을 만한 그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백수웅은 비로소, 왜 미라를 데려왔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잘못 채워진 단추였다.
미라를 데려온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는 실수가 된 셈이다.
그는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미라는 자신의 거친 감정이나 분노 같은 것을 편안하게 잠재워 주었던 것이다.
'어린것에게서 위로를 받으려 하다니'
미라는 늘어진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운명도, 엄마와 아빠의 애타는 마음도,
실제 자신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 채 편안한 잠을 자고 있었다.
백수웅은 잠든 미라를 번쩍 들어 가슴에 끌어안았다. 노옥진의 피가 흐르는 어린 미라.
이번에도 그는 따뜻한 미라의 살결에 감동을 받고 있었다.
이 때다. 유리창을 한 줄기 불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백수웅은 소스라치게 놀라 미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불빛이 스쳐 간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지금 밖에는 노옥진이 도착해 있다.
미라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미라를 넘겨 준 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이다.
만일 기관이나 허열에게 자신의 잠복 사실을 통보하면, 어떻게든 살아 남아 일가족을 몰살하겠다고
협박하여 쫓아낼 것이다. 백수웅은 미라를 안고 창고에서 거실로 나갔다. 미라를 푹신한 소파에 뉘어 놓고
그녀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불을 켜지 않아 캄캄했다. 백수웅은 어둠 속에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아무튼 지루하고 답답한 오랜 시간이었다.
"잘그락."
아래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한참 후에 들려 왔다. 그리고 고양이 걸음으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열려져 있는 현관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노옥진은 백수웅이 들어 왔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미라도 여기 있을 것이다. 숨을 죽이며 문을 열었지만,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아 쉽사리 뛰어들 수가 없었다.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어디 숨어 있을까?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앉아 있을 백수웅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낮같이 불을 켜 놓을 수도 없다.
지금부터 할 일은, 백수웅을 찾아 내 미라를 돌려 받고 날이 밝기 전에 그를 설득하여
일본으로 돌려 보내는 일이다. 살려야 한다. 백수웅도 미라도 살려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누구든 피를 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생명 보존을 바라고 있었다.
이 곳 별장의 구조는 누구보다도 노옥진이 잘 안다.
아래층에는 백수웅이 숨어 있을 곳이 없다. 만일 그가 숨는다면 2층이 제격이다.
소리를 죽이며 그녀는 2층 계단에 첫 발을 내디뎠다. 백수웅은 소파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옆에 누워 있는 미라는 몸 한 번 뒤채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백수웅은 발목의 칼을 몇 번이나 만져 보았다.
노옥진이 아니라면, 지금 올라오는 인물은 심장에서 피를 흘릴 것이다.
백수웅은 마른 침을 삼키며, 올라오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나타난 그림자가 계단을 밟고 천천히 걸어 올라와, 그 윤곽이 천천히 드러났다.
그림자가 소파에 앉은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 우뚝 멈추어 섰다.
"소리치지 마!"
사내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치렁치령한 머릿결과 가날픈 몸매. 이곳을 찾아을 수 있는 여자는 노옥진뿐이다.
어둠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백 백수웅 씨."
옆에 전기 스위치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노옥진은 스위치를 지나쳐 한 칸 더 올라섰다.
"수웅 씨, 미라를 돌려 주세요. 그리고 떠나세요. 생명은 두 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제부터 백수웅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불행한 사내는 여기서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남편 허열이 언제 뒤쫓아와 불쑥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미라는 돌려 준다. 어린것 목숨 빼앗을 백수웅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 곳이 회담장이라는 확신이 설 때까지는
보류하겠어.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
지금까지 백수웅은 이 곳 분위기에 대해 짙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북한 최고위층
회담장으로는 경비가 너무나 소홀하기 때문이었다. 상식을 벗어난 시골 별장 회담장이지만,
이건 지나칠 만큼 허술하다. 하긴, 그래서 미라의 생명을 담보로 잡았는지도 모르지만
"시간 없어요. 날이 밝기 전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노옥진은, 앉아 있는 백수웅에게로 한 발 더 다가갔다.
"어서 이 곳을 빠져나가세요. 부탁이에요. 백수웅 씨, 이렇게 죽는건 너무 억울하지 않아요?"
"억울할 거 하나도 없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가져 본 건 아무것도 없었지. 부모를 잃고, 조국을 잃고,
그리고 노옥진, 너마저 살기 싫은 사내야. 하지만 그래서 억울할 게 없다는 건 아니야. 나는 나의 목표가 있어,
조국의 장래와 내 목숨을 맞바꾸는 거지. 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도대채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다 끝났어요. 빨리 이 자리를 피하세요."
"나는 피하지 않아. 석 달 동안, 지난 석 달 동안 이 자리에 앉아있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투쟁을 해 왔는지 알기나 해?"
"제발, 정치는 정치가들에게 맡기세요. 우리는 아직 젊어요. 수웅씨가 여기서 개죽음당하는 건
국가로서도 손해예요. 좀더 오래 살아 보면 반드시 때가 올 거예요. 도망치세요. 빨리요. 미라는 제게
주시고요. 남편이 올 거예요. 제발 여기를 빨리 떠나세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분명히 말하지만, 미라는 돌려 준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듣고 싶은 게 있다.
회담은 몇 시부터 하는지 그게 알고 싶다."
"회담 회담요?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나요? 여긴 회담장이 아니에요."
"뭐라구?"
앉아 있던 백수웅이 스프링 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수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목숨을 걸고 뛰어든 불구덩이가 회담장이 아니란 것이다.
"정말이야? 이 곳이 이 곳이 회담장이 아니란 게?"
한 손으로 벽을 짚어 몸을 의지하고 서 있는 노옥진이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 곳에 위장 회담장을 만든 사람은 저예요. 백수웅 씨를 끌어들이기 위해,제발 일본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숨겨 드릴게요. 있을 곳을 마련해 드릴 테니, 조용히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세요."
"왜, 여기가 내 나라 내 조국인데 왜 일본으로 돌아가? 안 돼 시간 없다. 빨리 말해 줘, 진짜 회담장이 어딘지."
"그걸 말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어디가 회담장이 되든 수웅씨는 결코 성공하지 못해요. 이
후락 부장을 그렇게 쉽게 보았나요? 그건 자살 행위예요."
"시간 없어!"
백수웅의 움켜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 마주 서서 목숨이 걸린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백수웅은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정말 이 곳이 회담장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달려가야 한다.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가야 한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거예요."
백수웅이 칼을 뽑아 들었다. 칼날의 시퍼런 광채가 어둠 속에서도 노옥진의 시야를 스쳐 갔다.
"말하지 않으면 미라를 죽인다!"
"미라를 미라를 정말 왜 이러세요? 잠에서 깨면 소리치며 울 거예요. 밖에 순경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말하란 말이야. 말하지 않으면 미라를 죽여 허열과 노 범호에게 보내겠다."
"안 안 돼요. 미라를 제게"
두 사람은 잠시 석고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안타깝고 초조한 시간이 자꾸만 흐르고 있었다.
노옥진은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이번에도 설득에 실패하면, 이 남자는 미라를 살해하고 자신도 죽게 될 것이다.
너무나 절박한 위기였다. 그 사이, 노범호에게 보고를 마친 허열이 별장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별장은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쥐죽은듯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별다른 상황은 없었나?"
"네, 검사님 그런데 사모님이 들어가신 지 꽤 오래 되었는데 왜 불을 켜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사에서 차출된 경비원의 이유 있는 질문이었다.
"아무튼 처음상태 그대로입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최일우가 말했다.
이 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밝은 빛들이 일제히 쏟아지고, 자동차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 왔다.
허열이 깜짝 놀라 자동차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뭐야? 어디서들 온 거야?"
맨 앞의 지프에서 전투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뛰어내렸다.
역시 전투복 차림의 순경들이 석 대의 트럭에서 칼빈 소총을 들고 우르르 뛰어내렸다.
지프에서 내린 남자가 허열에게 다가왔다.
"허 검사, 이 곳 온양 경찰서 서장입니다."
"불 꺼! 헤드라이트부터 끄라구!"
허열이 고함을 지르며 트럭 사이를 뛰어다녔다.
병력을 태우고 온 트럭들의 불들은 꺼졌지만, 허열은 기절할 듯 놀랐다.
별장 안의 백수웅이 병력 동원을 눈치채 버렸을 것이다.
어둠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가 기습으로 녀석을 해치울 작정이었는데, 이제 그런 작전이 틀려져 버린 것이다.
"누가 보내서 왔나?"
"서울 노 회장님의 지시입니다. 괴한에게 사모님과 따님이 납치되어 있다고 해서 달려왔습니다.
노 회장님께서도 곧 도착하실 거랍니다."
허열은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미라가 막바지 위기에 몰려있다.
미라를 구해 내고 백수웅을 사살하든 생포하든 해야 한다. 무엇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좋다! 계획을 바꾸자!"
허열은 병력을 태우고 온 트럭 석 대로 별장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일제히 해드라이트를 켜게 했다.
"자수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방송을 하시오. 그 사이, 내가 별장 안으로 들어가겠소."
서장이 손에 들고 있던 소형 스피커를 입에 댔다.
"범인은 투항하라! 인질을 풀어 주면 목숨을 보장해 주겠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인질을 풀어 주면 책임지고 살려 주겠다! 즉시 인질을 풀고 자수하라!"
쩌렁쩌렁, 서장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별장 창문에 갑자기 불빛이 스쳐 가고, 뒤이어 요란한 트럭 소리가 들려 왔을 때에야,
백수웅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알게되었다.
"경찰을 불렀구나. 여기는 회담장이 아니고 네가 나를 이렇게 배신해?"
놀란 사람은 백수웅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무장 병력이 별장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노옥진도 알 수 있었다. 걱정했던 대로 남편이나 아버지가 추적해 온 것이다. 그러나 해명을 해주어야 한다.
"아네요. 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늦지 않았어요. 빨리요."
갑자기 실내가 밝아졌다. 사방에서 자동차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스피커 소리가 들려 왔다.
인질을 내놓고 자수하라는 것이었다. 백수웅은 미라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별장 정면 유리창의 유리를 두들겨 깨고 몸을 내밀었다.
"나다! 나 백수웅이다! 허열은 어디 있는가? 내 손으로 네 딸의 목숨을 빼앗는 걸 구경하겠는가?"
노옥진이 질겁하여 비명을 질러 댔다.
"안 돼! 미라는 안 돼!"
백수웅이 몸을 뒤틀어, 달려오는 노옥진에게로 향했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면 미라가 죽어!"
그리고 다시 깨진 유리창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뒤쪽 논두렁에 오토바이가 있다. 그걸 가져오면 인질을 풀어 주겠다."
백수웅은 미라를 한 손으로 허리에 껴안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두 눈이 붉게 층혈되고,
무서운 살기가 감돌았다. 목이 터지게 고함을 질러 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수웅 씨 수웅 씨, 제발 진정하세요. 제가 나갈 길을 뚫어 볼게요."
"듣기 싫어! 난 가야 돼, 가야 된다구!"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토록 많은 시간을 들여 찾아온 이 곳이 겨우 함정에 지나지 않은가. 나오너라, 허열아.
네 가슴에도 못이 박힐 것이다. 이번에는 너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줄 것이다.
백수웅은 허열이 보는 앞에서 미라를 살해할 작정이었다. 눈이 뒤집힌 백수웅의 머리는 복수심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허열은 조금 더 침착했다. 서장이 스피커를 입에 대고 자수를 권할 때, 그는 트럭 뒤에서 권총을 꺼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수없이 손질을 해 두어 이상이 없었다. 이후락 부장이 선물한 고성능 소형 권총이었다.
허열은 권총을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살금살금 별장으로 침투해 들어갈 것이다.
이 때다. 갑자기 시끄러운 금속성 소리가 들려 왔다.
"쨍그렁 !"
유리창이 깨지며 창문에 불쑥 백수웅의 얼굴이 나타났다.
"개자식!"
허열은, 얼굴을 내민 백수웅을 향해 욕을 했다.
"아니, 저자식이?"
백수웅이 한 손으로, 늘어진 미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함을 질러댔다.
"나다! 나 백수웅이다! 허열은 어디 있는가? 내 손으로 네 딸의 목숨을 빼앗는 걸 구경하겠는가?"
미라는 늘어져 있었다. 꼭 죽어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도대체 아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말, 아내는 함께 도주하려다 포위된 것일까?
아니면, 미라를 납치한 백수웅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온 것일까?
허열은 반사적으로 백수웅을 향해 총구를 내밀었다. 그러나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명사수라고 해도 상황이 좋지 않다. 녀석이 미라를 방패로 삼아, 탄환이 조금만 빗나가도
미라가 희생 당하게 된다. 허열은 들어올렸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서장에게 달려가 스피커를 빼앗았다.
"나, 허열이다! 백수웅, 마지막 기회다! 아이와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러면 관대히 처리해 주겠다!"
잠시 후 백수웅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미라는 여전히 왼손에 잡혀 있고, 가날픈 목을 백수웅의 칼날이 겨누고 있었다.
"으하하하, 허열!"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나도 마지막 기회를 준다. 20분의 여유를 주겠다! 내 오토바이를 갖다 놓아라!"
"오토바이? 좋다. 20분 후에 찾아다 현관에 놓겠다."
백수웅이 다시 몸을 감추었다.
허열은 모든 트럭의 라이트를 끄도록 지시했다. 별장은 다시 짙은 어둠에 묻혀 버렸다.
허열은 땅에 잔뜩 몸을 밀착시켰다. 별장을 향해 뛰어들려는 것이다.
최일우가 달려왔다.
"허 검사님,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가"
"아니다. 나는 권총이 있고, 저 녀석은 칼을 가지고 있다. 녀석에겐 아내와 미라의 목숨이 담보로 잡혀 있다.
10분이 지나면 다시 차의 불을 켜고 방송으로 그의 주의를 끌어라. 나의 침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차의 헤드라이트들이 또 일제히 켜졌다. 허열은 열린 현관문을 향해 뱀처럼 기어가기 시작했다.
장인 어른 노범호가 경찰의 출동을 조금만 더 늦추었더라도 침투하여 백수웅에게 접근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편했을 것이다. 허열은 호흡까지 멈춘 채 낮은 포복 자세로 접근해 갔다.
노옥진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백수웅이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설득도 먹혀 들지 않았다.
더구나 백수웅은 미라를 방패로 탈출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안타깝고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 소란 속에서도 미라가 전혀 깨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미라가 미동도 하지않는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챈 것이다.
"수 수웅 씨, 당신이 미라를 미라를 죽였나요? 왜 저렇게 늘어져 있죠?"
백수웅이 예의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옥진을 바라보았다.
"아직 죽이진 않았어. 미라의 생명은 나보다도 허열에게 달려있지. 오토바이를 가져오고 길을 터 준다면 몰라도,
그러지 않으면 죽게 돼. 옥진이는 나를 실망시켰어. 나를 이 곳으로 유인하여 죽이려 했지?
하지만 미라가 내 손에 있는 한 그렇게는 못 해."
"오 오해예요. 전 전"
"빨리 말해. 회담장이 어디야? 가서 자폭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한다구."
"늦었어요."
"말하라니까! 미라가 죽는 것을 꼭 보겠어?"
"아니에요. 수웅 씨 수웅 씨, 말할게요. 제발 제발"
백수웅이 미라를 들어 깨진 유리창 밖으로 내밀었던 것이다.
손을 놓기만 하면 아이는 떨어져 숨을 거둘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라 하지 않았어!"
"네. 마, 말할게요. 제발 미라만은"
" "
미라는 여전히 창 밖에 매달려 있었다.
"회, 회담장은 , 영빈관이에요. 내일 아침 10시에....평양에서 도착한 박성철이 그 곳으로 가요.
그 이상은 저도 몰라요."
"영빈관?"
영빈관, 그 곳이 회담장이란다. 회담장이 영빈관으로 결정된 것은 알았지만, 지금 이 곳을 탈출하여
회담장을 테러하기에는 모든 것이 늦어 버렸다. 그러나 할 일이 있다. 가슴 속에 심장처럼 묻어 놓은
대 국민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이다. 미라가 있다. 이 아이를 이용하여 이곳을 탈출,
신문사나 방송국으로 뛰어들어가, 날이 밝으면 이후락과 박성철이 회담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폭로할 것이다.
그리고 이 회담은, 통일을 위한 회담이 아니라, 서로 짜고 집권을 계속하려는 음모임을 밝힐 것이다.
그들이 누구를 위하여, 무슨 목적으로 만나는가를 분명히 밝힐 것이다.
백수웅은 불꽃 튀는 눈으로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노옥진은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백수웅이 손가락에 힘만 주어도 미라는 질식해 죽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의식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손에서
미라만 빼앗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것이다. 핸드백에 권총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꺼낼 시간이 없다.
더구나 방아쇠를 당겨 본 경험이 없어, 자칫 미라가 다칠지도 모른다.
노옥진은 바보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돌아가. 어서 돌아가. 미라를 다치게 하지 마. 돌아가.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어떻게 돌아가라는 것인지, 그녀는 고장난 테이프처럼 그 말만 되풀이해 대고 있었다.
약속된 20분이 흘러갔다. 밖에서의 소리도 멈추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만일 허열이 오토바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미라는 불쌍하지만 허열이 보는 앞에서 살해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허열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것이다. 백수웅은 미라와 함께 다시 소파에 앉았다. 캄캄한 거실에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이 때다. 앉아 있던 백수웅의 귀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간간이 흐느끼는 노옥진의 울음소리 사이사이에 그 소리가 들려 왔다.
백수웅은 다시 칼끝을 잠에 취한 미라의 목에 댔다.
번쩍! 갑자기 거실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벽력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오토바이를 가져오라고 20분의 여유를 준 사이에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움직이지 마!"
"드디어 허 검사께서 오셨군. 오토바이는 어떻게 되었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칼 솜씨가 뛰어나다고 해도 총알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거 하나 믿고 달려든 것이다.
그러나 백수웅은 어리석지않았다. 시퍼런 칼끝이 미라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허열은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미라 미라를"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아내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무엇인가를 중얼대고 있었다.
허열은 다시 백수웅을 노려보았다. 백수웅도 허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허열, 돌아가라. 내가 이 곳을 떠날 수 있도록 길을 터 준다면 미라를 돌려 주겠다."
"늦었다. 이미 경찰이 포위하고 있다. 네 손으로 미라를 내놓고 자수하는 형태를 갖춘다면,
미라와 미라 엄마를 보아서라도 최대한 관용을 베풀겠다."
"하하하 허열, 자수하라고? 누구한테 누가 자수하라는 거냐? 난 이 땅의 국민이며,
국가를 위해 이러고 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나와 합류하자. 이 참에 아주 국가의 운명을 바꿔 놓자.
기회는 이번뿐이다. 다시 한 번 설명한다. 나라를 통일시키자. 남북한 모두 피 흘리지 않고 통일시키자.
박성철과 이후락의 회담이 국민을 기만하고 조국을 속이는 회담이란 것을 세상에 알려 주자.
우리 젊은이들의 끓는 피로 이 땅을 유토피아로 만들자, 이번이 가장 확실한 기회다.
나를 돌려 보내라. 영빈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첫댓글 즐감하고 있습니다
잘봤읍니다~
다음글이 기대됩니다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