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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답성 및 연계유적지 탐방3(해설)
5. 구간별 답성코스
[일제강점기 순성기록]
(1) 1구간 : 충무로역~예장동~남산
필동 충무로역 5번 출구-극동빌딩(균역청터,주자소터)-진고개-중부경찰서(영희전터)-남대문세무서(양향청터)-고당기념관-명보아트홀(이순신집터)-대림빌딩(양성지집터)-건천동-인현빌딩어린이놀이터(동평관터)-중구청-SK주유소(유성룡집터)-한국의집(박팽년집터)-매일경제사옥(남학당터)-남산골공원,한옥마을,타임캡슐광장,(안기부터,남별영터,남소영터)-후문-청학동(조씨노기,귀록정터,노인정터,남산사터,녹천정터-권람집터-박원영별장-이등박문정자)-구름다리-서울시청남산별관(안기부제5별관터)-남산창작센터-서울유스호스텔-문학의집(안기부장공관터)-서울종합방제(박승종집터,건설안전본부)-남산빌딩(전KBS방송국터-대한민청-동봉신사터)-남산예술센터(서울예대드라마센터터)-서울애니매이션센터남관(전KBS라디오방송국터, 왜성대, 통감부, 일본영사관)-서울애니매이션센터북관앞(통감부터)-리라초교앞(김익상의사의거터)-숭의여대(교서관터,외교구락부)-반공건국청년운동기념비-남산케이블카-회현시범아파트-힐튼호텔-남산공원 김유신장군상-백범광장.김구.이시영(이승만동상터)-서울특별시교육연구원,지구촌민속교육박물관(어린이회관터)-안중근의사기념관,남산분수대,남산도서관-다산,퇴계,소월-팔각정,봉수대,N서울타워(국사당터,목멱산봉수대터)-국립중앙극장-호텔신라-장충단공원-동국대학교
1) 충무로(忠武路)
서울의 안산인 남산의 안산용이 어디로 뻗어내려 명당을 이루고 있는 곳은 남산 밑 필동에서 마르내(乾川)를 따라 안산용이 뻗어, 그 냇가에 대추알처럼 명당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풍수가들의 통설이다. 지금 남산 제1호 터널에서 시작되는 마르내는 필동을 가로질러 백병원앞 로터리→명보극장앞→애오개(仁峴洞:인현동)1가를 꿰뚫고 흐른다. 지금은 마르내가 말끔히 콘크리트로 밀폐(복개)되어 그 위로 길이 나있다. 마르내는 물이 많지 않아 항상 바닥이 말라 있었기에 마른내란 이름이 붙은 것이라 하나, 어원적으로 보건데, 남산에서 산줄기 하나가 불쑥 나온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를테면 ‘불쑥나온 골’이 「붓골→필동(筆洞)」또는 「북골→고동(鼓洞)」으로, ‘불쑥나온고개’가 「북고개→북달재→현고현(縣鼓峴)」으로, ‘불쑥나온 고개 마루의 내’가 「마루내→마르내→건천(乾川)」으로의 한자로 뜻빌림(意譯)이 됐다. 불쑥나온 작은고개가 「애오개→아현(阿峴)」, 「배오개→이현(梨峴)→인현(仁峴)」으로 한자화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 마르내와 배오개(仁峴)의 기슭 따라 단종 때, 영의정이던 정인지(鄭麟趾)가 살았고,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면서 곁에 가까이 두고 놓질 않았던 양성지(梁誠之), 세조 때 청빈한 대학자 김수온(金守溫), 선조 때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그리고 홍길동전으로 이름이 더 잘 알려진 반체제의 풍운아 허균(許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하늘이 내리신 정승」이라 우러렀던 유성룡(柳成龍) 등이 이 마르내 냇가에서 살았으니 안산용이 마르내로 흘렀다하여 누구라 반론의 여지가 없다.
▲ 균역청터(均役廳址)-충무로3가60-1(남학동 1,12번지 일대. 현 극동B/D)
균역청은 1750년(영조 26)에 창설된 병역세를 관장하던 관아로 중구 남학동 1, 12번지 일대에 있었다. 영조는 이전에 매년 2필씩 내던 병역세를 1필로 줄이고 부족분은 어·염·선세와 선무군관포, 結作 등의 징수로 보충하였다. 이에 따라 양민들의 부담이 경감되고 국가 재정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1753년(영조 29) 균역청은 선혜청에 합병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후 일본인 교육을 위한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가 있다가 광복 후 일신국민학교가 들어서게 되었고, 현재는 극동빌딩이 들어서 있다. 균역청은 조선 후기 균역법 시행에 따른 재정업무를 관할하던 관청으로 균청(均廳)이라고도 한다. 균역법 시행에 따라 재정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결전(結錢)과 군관포(軍官布)·은여결세(隱餘結稅)를 신설하고, 어염세(漁鹽稅)·선세(船稅)도 새로 책정하여 균역청에서 관리하게 했다. 균역청에서는 이를 징수·관리하고, 각 관청에 급대(給代:관청의 재정결손을 보충해주는 것)하는 업무를 맡았다. 1750년 균역절목청을 설치하여 영의정 조현명(趙顯明) 이하 예조판서 신만(申晩)·이조판서 김상로(金尙魯)·김상성(金商星)·사직(司直) 조영국(趙榮國)·홍계희(洪啓禧)를 당상(堂上)으로 임명하여 균역법 시행을 위한 사안을 마련하게 했다. 다음해 9월 균역법을 시행하면서 정식 관청으로 승격하여 옛 수어청 자리에 설치하였다. 〈균역청사목〉에 따르면 직제는 도제조 3명(3공이 겸함), 제조 3명(1명은 호조판서가 겸함), 낭청 3명(실직 무신에서 차출하며 1명은 비변사낭청이 겸함)을 두었다. 1753년(영조 29) 홍계희의 건의로 선혜청에 흡수통합 시켜 선혜청 도제조와 제조가 겸하여 관장하게 했다. 처음에 재정규모는 약 60만 냥이었는데, 이후 1755년 노비신공의 감필분과 기타 관청의 다른 비용 등 각종 비용을 지원해주어 지출규모는 계속 증가하였다.〈만기요람〉에서는 60만 냥을 넘어 호조의 예산안을 웃돌고 있다.
▲ 주자소터(鑄字所址)-충무로3가 60-1(극동빌딩앞 화단)
조선시대에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의 인쇄를 담당했던 중앙관서로서 1403년(태종 3)에 승정원의 직속기관으로 설치되어, 1451년(문종1) 7월부터 12월까지 잠깐 폐지된 적이 있으며 1460년(세조6) 5월에 교서관(校書館)에 이속시켜 전교서(典校署)로 개칭되었다. 1782년(정조6) 교서관이 규장각에 예속되면서 규장각 소속이 되었으나 후에 다시 분리되었다. 잠시 감인소(監印所)라 불리기도 했지만, 주자소의 이름을 되찾아 조선말까지 주자와 서적의 인쇄를 맡았다. 태종은 우문정책(右文政策)을 펴기 위해 책을 널리 보급하려 했는데, 당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서적이 필요했으므로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고려 말부터 서적포(書籍鋪)에서 주자와 인쇄를 했고 조선은 이를 계승했으나, 개국 초기에는 활자의 주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 서책 간행에 많은 불편이 야기되어 독립된 전문기구로서 주자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설치 후 몇 개월에 걸쳐 활자를 주조하여 수십만 개를 완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이다. 그런데 만든 시기에 대한 문헌과 실물의 고증이 확실한 것은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이다. 이후의 많은 금속활자의 주조가 대부분 여기서 이루어졌다. 주자소의 위치는 초기에는 서울의 남쪽 훈도방(薰陶坊)에 있었으나 다른 기관과의 업무연계 때문에 경복궁·창경궁 등의 궐내로 옮겨졌다. 주자소의 직제는 초기에는 승지 2명이 주관하고 2품 이상의 문신 1명과 승지 1명을 제조로 삼았으며, 교서(校書), 교리(校理) 등을 두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야장(冶匠)·균자장(均字匠)·주장(鑄匠)·조각장(雕刻匠)·목장(木匠)·지장(紙匠) 등의 공장(工匠)을 두었다. 또 <대전회통>에 의하면, 수장원(守欌員)·장책원(粧冊員)·사준(司準)·사감(司勘) 등을 두었다. 현재 주자소에서 주조되고 사용되었던 활자의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405년(태종5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이곳 주자동에 주자소를 두었는데, 지금도 충무로 일대에 인쇄소와 출판사가 많은 것은 오랜 전통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 진고개-충무로1가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충무로5가 206번지에 이르는 길
진고개[泥峴]는 지금의 충무로2가에 붙었던 지명으로 배수불량으로 땅이 몹시 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1906년 8척 가량의 토사를 파내어 길을 닦고 배수관을 묻음으로 도로상태가 좋아졌으며, 8·15해방 이후 서울의 도심지역으로 꾸준히 발전, 현재는 유흥 및 상업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충무로는 총연장 1,900m, 도로 폭 10~20m이다. 이 일대는 남산의 북쪽 사면에 해당하여 일조는 좋지 못하나 지하수가 풍부해 일찍부터 잔반(殘班)과 하급관리 및 중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상가가 밀집한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변모했다. 이 길이 지나는 중국대사관 자리는 대원군 집권시 포도대장 이경하의 집이었으나 1885년 주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온 위안스카이[袁世凱]가 10년 동안 머물면서, 이 일대를 비롯해 관철동·북창동 등의 땅을 매입해 중국인 전용거리로 만들었다. 그 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청국세력을 몰아내고 일본세력을 확장시켜 본정통(本町通)이라고 부르던 것을, 8·15해방 후 왜식동명 정리에 따라 이순신 장군의 시호인 충무공을 인용, 충무로라 명명했다.
※ 이경하(李景夏.1811~1891)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 자는 여회(汝會). 아버지는 경력(經歷) 인달(寅達)이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훈련대장 겸 좌포도대장이 되었으며, 그 뒤 금위대장·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866년(고종 3) 한성부판윤·강화부유수·어영대장·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해 낙동(駱洞)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천주교도들을 취조하고 많은 신도들을 살해하여, 낙동염라(駱洞閻羅)라는 별칭을 얻었다. 프랑스 신부 살해를 보복하기 위해, 프랑스 군대가 침입해오자, 기보연해순무사(畿輔沿海巡撫使)가 되어 작전을 지휘했다. 1882년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있을 때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어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1884년 풀려나와 다시 좌포도대장이 되고 후영사(後營使)를 지냈다. 그해 12월 갑신정변 때 조대비·민비·세자 등을 아들 범진(範晋)의 집에 피신시켰다. 대원군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주로 군사·경찰권을 장악했다. 관계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 진고개와 정수동(鄭壽銅;1808~1858)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안(景顔), 호는 하원(夏園), 별호는 수동(壽銅). 수동이라는 별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주인공인 것처럼 일생을 살았지만, 대표적인 위항시인으로 성령론(性靈論)을 구현한 사람이다. 왜어역관(倭語譯官)의 집안에 태어났으나 생업은 돌보지 않고, 기이한 행동을 하며 떠돌아다녔다. 사회의 모순에 불만을 느끼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으나 날카로운 풍자를 잃지 않았다. 어려운 문장도 한 번 보면 뜻을 알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시를 짓는 것은 구속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홀로 가는 길을 택하면 그만이고, 울타리에서 더부살이를 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기발하고 품격을 잃지 않아,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을 듣는다. 정수동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발한 익살꾼'이라 불렀다. 그는 흐르는 물과 같이 세상에 매달리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살았던 인물이다. 정수동은 돈과 벼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술만 마시면 기이한 행동과 해학을 연출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풍류객이었다. 술을 매우 즐겨 마셨으며 술 한두 잔 마신 후면, 세상을 향한 비판과 풍자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곤 하였다. 술을 너무나 좋아해서 죽을 때 저승에서도 외상술을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김정희·조두순 등이 그의 재주를 아껴 도우려 했으나, 자유분방하게 지내다가 50세에 과음으로 죽었다. 민간전승에서는 그를 평양의 김선달, 경주의 정만서 같은 인물들처럼, 기발한 술책으로 남을 골탕 먹이는 건달로 다루었다. 문헌설화는 <일사유사(逸士遺事)>에 전하며, 구전설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수원·의정부 등 중부지방에 퍼져 있다.
[술안주 얻어먹는 재치]
정수동이 하루는 목이 칼칼하여 친구를 찾아가 술을 청했다. 주인이 곧 술상을 들여왔는데, 안주가 시원치 않았다. 정수동은 심술이 났다. 그래서 곧 주인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안주 없이 어찌 술을 먹을 수 있겠나? 내가 타고 온 나귀를 잡게.”
그러자 주인이 놀라며 물었다. “아니, 자네 갈 적엔 뭘 타고 가려나?”
“저 뜰에 노니는 닭을 타고 가지.” 그 주인은 닭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영희전(永禧殿)터-저동2가 62-1(중부경찰서터)
영희전은 원래 세조의 맏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의 저택이 있었고, 1506년(중종 원년)에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가 폐위 후에 거처한 곳이기도 하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왕의 생모인 공빈 손씨(恭嬪金氏)의 영정과 신위를 모시고 봉자전(奉慈殿)이라 하였다. 1619년(광해군 11)에는 태조의 어진과 세조의 어진을 이곳에 봉안하고 남별전(南別殿)이라고 불렀다. 1637년(인조 15)에는 숭은전(崇恩殿)에 있던 세조와 원종의 어진을 봉안하고, 1677년(숙종 3)에는 본전을 증축하여 세조와 원종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추가로 경기전(慶基殿)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1690년(숙종 16)에는 영희전(永禧殿)으로 고쳐 불렀고, 1748년(영조 24)에 준원전(璿源殿)에 있던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중종의 첫째 부인이자 폐비 신씨(연산군)의 질녀이다. 본관은 거창이며, 성은 신(愼)이다. 조선의 왕비 가운데 최단 재위 기간을 보유하고 있으며,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주 한씨 한충인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그녀는, 1499년(연산군 5년) 12살의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에 봉해져 있던 중종과 결혼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에 올랐으나 그녀의 아버지인 거창부원군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인데다가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관계로, 1506년(중종 원년) 음력 9월 9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앉힌 반정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폐위된 후 새로이 중종의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등이 그녀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에 의해 복위되지 못하였고, 훗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녀는 폐위된 이후 쓸쓸히 지내다가 1557년(명종 12년) 음력 12월 7일에 71살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로 불리다가,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1739년(영조 15년) 음력 3월 28일 김태남 등의 건의로 복위되었고 그녀의 아버지도 익창부원군이라는 정식적인 부원군으로 격상되었고 어머니 역시 익창부부인으로 격상되었다. 그 때 단경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능호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온릉(溫陵)이다.
▲ 양향청(糧餉廳)터-저동1가1-1(남대문세무서)
조선후기 중앙 군부대의 하나인 훈련도감에 속한 재정기관으로, 1593년(선조26) 훈련도감의 발족과 함께 설립되었다. 훈련도감 군대의 의복, 무기, 비품 등 군수물자 및 하급관료들의 급료를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관원으로는 도제조 1인, 제조 3인, 낭청 1인을 두었다. 도제조는 훈련도감 도제조가 맡았고, 제조는 호조, 병조판서 및 훈련대장이 겸하였다. 이후 1666년(현종7) 호조에 소속되었다가 독립하였고, 낭청은 호조 별영색(別營色)의 낭청이 겸직하였는데, 1745년(영조21) 종사관(從事官)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며, 1894년(고종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양향청은 여기에 9개의 창고를 두어 돈, 쌀, 귀중품, 문서 등을 보관하고 나머지 5개의 창고는 비워두었다. 황무지를 절수(折受)하여 개간한 토지 및 죄인에게서 몰수한 토지를 둔전(屯田)으로 지급받아 여기서 거둔 세금으로 재정을 조달하였다. 청사는 일제강점기에 전매국 소속 인쇄부로 사용되다가, 경성세무서가 위치했으며, 현재는 세무서 본관을 포함하여 당시 세워진 근대건축물이 잔존하여 중부세무서로 이용되었다가, 1997년 6월 남학동으로 이전하고, 2008년 7월 남대문세무서(나라키움빌딩)로 이용되고 있다.
※ 육전조례(六典條例)
조선 후기 각 관청에서 맡은 사목(事目) 및 시행규례(施行規例)를 수록한 책으로 활자본이며 10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세로가 19.4×29.8 cm이다. 1865년(고종 2) 《대전회통(大典會通)》이 엮어져 전장법도(典章法度)는 구비되었으나 여기에 빠진 사례가 많다. 같은 해 2월 찬집제신(纂輯諸臣)에게 명하여 이 조례를 편집하게 하고 1867년(고종 4)에 인쇄, 경외각아문(京外各衙門)에 반전(頒典)하였다.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전을 강(綱)으로 하여, 그 밑에 해당 각 관청을 분속시키고, 소장사목(所掌事目)·조례·시행세칙 등을 규정한 일종의 행정법규집이다.
6전의 구성과 관청분포가 이전(吏典)에는 종친부·의정부·충훈부·의빈부·돈녕부·이조·사헌부·승정원·사간원·상서원·내수사·내시부·액정서, 호전(戶典)에는 호조·선혜청·균역청·양향청·한성부·군자감·광흥창·사도시·사재감·제용감·평시서·내자시·내섬시·전설사·의영고·장흥고·사포서·양현고·오부, 예전(禮典)에는 예조·사직서·종묘서·영희전·정전·경모궁·봉상시·장악원·기로소·규장각·교서관·경연청·홍문관·예문관·춘추관·성균관·세자시강원·보양청·강학청·세손강서원·관상감·내의원·승문원·통례원·전의감·사역원·전생서·예빈시·빙고·혜민서·도화서·활인서·사학, 병전(兵典)에는 중추부·병조·세자익위사·세손위종사·도총부·오위장·부장·훈련원·능마아청·사복시·내시 ·군기시·훈련도감·금위영·노량진·어영청·총융청·장산진·북한산성·호위청·포도청·선전관청·무겸·수문장청·별군직청·충장위청·충익위청·공궐위장·의장고·순청·무신당상군직청·문신당하군직청·대보단·선무사, 형전(刑典)에는 형조·의금부·전옥서, 공전(工典)에는 공조·준천사·주교사·장생전·상의원·선공감·분선공감·영선·오소장·자문감·장원서·조지서·와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 고당기념관(古堂記念館)-저동2가 4번지
민족운동가이며 정치가인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1883~미상)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고당기념사업회에서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1984년 6월 12일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고당 조만식이 남긴 말 “내가 죽거든 내 비석에 두 눈을 새겨다오. 한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고 한눈으로는 조국이 독립하는 것을 보리라”했던 민족지도자여 애국자였다. 또한 국산품 애용의 열렬한 실천자였다. 백범 김구가 북조선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김일성에게 고당과 함께 남쪽으로 모셔가겠다는 제의를 거부한 바 있다.
※ 조만식(曺晩植, 1883.2.1~1950.10.15?)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에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한국최초의 기독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가, 1946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살해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북조선지역에서 지도적인 기독교 민족주의자였으며, 평안도 개신교도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 종교는 기독교이다.
▲ 구 약초좌(舊 若草座, 현 스카라극장)-초동 41번지
구 약초좌는 지상 4층의 철골·콘크리트조 건물로 카와자와건축사무소(川澤建築事務所)에서설계하였고 시공은 생전조(生田組)에서 맡았다. 1935년 6월 착공하여 1935년 12월에 준공되었다. 2개 층의 관람석을 지닌 영화상영 및 다목적 극장으로 지어졌다. 전면에 캔틸레버로 돌출된 반원형 구성과 좌우에 위치한 수평으로 긴 창호와 코너가 개방된 창호는 1930년대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모더니즘 건축의 세련된 입면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건축구조에 따른 원통형 캔틸레버(2층 홀)의 수직 창호사이의 두터운 멀리언이 기둥의 구성을 갖고 있고, 코니스를 연상시키는 원통형 부분의 창호 상부 처리는 양식주의 건축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약초좌는 1930년대 양식주의 건축에서 모더니즘 건축으로 이행하는 여타 건축물이 고전주의 구성에 모더니즘의 건축 어휘가 덧붙여지는 것과는 달리, 중앙에서 좌측으로 위치한 원통형 돌출부와 창호 처리가 갖는 전체적인 모더니즘 건축구성에 양식주의 건축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현재는 스카라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이충무공탄생지-인현동1가 18-5 마른내(명보플라자)(인현동 1가 40번지)
이순신은 1545년 음3월 8일(양4월 28일)에 건천동에서 덕수이씨 정(貞)과 초계변씨 사이에서 4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서 이순신의 태몽을 이순신의 증조부인 이거가 나타나 한 말에 따라, 이름을 순임금의 신하인 순신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순신의 형제이름을 보면 장남이 삼황오제의 한사람인, 복희씨의 신하라는 의미의 희신, 이분의 아버지이고 둘째는 요임금의 신하라는 의미의 요신, 넷째는 우임금의 신하인 우신이라는 점을 보면 순신이라는 이름은 다른 형제들처럼 중국 고대 제왕의 이름에서 지어진 것이다. 충무공은 20세(1565)때에 상주 방씨(方氏) 보성군수 방진의 딸에 장가들어 22세에 큰아들 회를 낳고 26세에 차자 위(蔚)를 낳았다. 충무공의 큰형 희신(羲臣)은 분(芬)등 4형제와 둘째형 요신(堯臣)은 두 아들로 6명의 조카와 4명의 조카딸 등을 남기고 별세하였으며, 슬하에는 본부인에서 3남1여 첩부인에서 2남2여 모친 형수 두 분 제수까지 합하여 24명의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무술공부 중에 애로도 많았지만 가정살림이 어려운 가운데 장성한 조카들의 성혼시키는데 차례를 지키고, 자기 자녀들은 뒤에 성혼시켰다고 한다. 민족적 영웅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인현(仁峴) 기슭, 마르내 냇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마르내 용(龍)의 옥(玉)이 아닐 수 없다. 1545년 4월 28일, 장군이 태어난 자리다. 공이 무과(武科)에 급제했을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었다. 공의 사람됨을 듣고 또 같은 종씨로 친척이 됨을 알고서 사람을 시켜 한번 만나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은 사양하며 말했다. “일가 간에는 서로 만나볼 수 있지만, 그가 지금 이조판서로 있는 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공은 어릴 적부터 잘못의 책임은 앞서서 스스로가 지고 공을 남에게 돌리어 전혀 생색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옥포해전에서 대거 내습한 왜적은 충무공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다 잡고, 원군사령관(援軍司令官)인 명나라 진도독(陳都督)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병은 아예 싸우지도 못했다. 충무공과 진도독의 일화다. 진도독이 공을 세우지 못한데 대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음을 간파한 충무공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이 명나라의 대장이 되어 바다도적을 토벌하고 있으니, 진중에서 이기는 것은 곧 장군이 이기는 것이외다. 내가 적군의 머리를 벤 것을 장군의 공으로 돌리겠습니다. 장군이 온지 얼마 안 되는데 북경조정에 큰 공을 보고하오면 되레 좋지 않겠소이까.” 이에 진도독이 크게 기뻐하며 충무공의 손을 잡고 “내 중국에 있을 때부터 공이 명성을 많이 들었소만, 이렇게 어진(仁) 인품인줄 몰랐오.”하였다. 정승 유성룡이 파란 많았던 충무공의 벼슬길을 끝까지 뒷받침하고 두둔했던 것도 인현기슭 마르내 바닥에서 어린 시절 뛰놀며 어진(仁) 정을 서로 나눴음이 클 것이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5년 먼저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평택시 도일동이다. 원주 원씨는 이곳의 유력가문이다. 원균은 이후 건천동으로 이사를 하고, 이순신은 이곳에서 태어나 10살무렵 아산으로 이사를 하고, 유성룡은 본래 경상도 출신으로 건천동으로 이사하였다.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었다. 청녕공주(靑寧公主) 저택의 뒤로 본방교(本房橋)까지 겨우 서른네 집인데, 이곳에서 국조이래로 명인(名人)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 정인지, 이계동(李季仝)이 같은 때이고, 양성지, 김수온, 이병정(李秉正)이 한 시대였으며, 유순정(柳順汀), 권민수(權敏手), 유담년(柳담年)이 같은 시대였다. 그 후로도 노정승(노수신을 가르킴)과 나의 선친 및 지사(知事) 변협(邊協)이 같은 때이고, 근세에는 유서애와 가형 및 덕풍군 이순신, 원성군 원균이 한 시대이다. 서애는 국가를 중흥시킨 공이 있었고, 원, 이 두 장수는 나라를 구원한 공이 있었으니, 이때에 와서 더욱 성하였다.
▲ 건천동(乾川洞)-인현동1가 40
이 지역을 흐르는 개천이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바닥이 말라붙어서 통행길로 사용하지만,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금세 물이 불어 냇가로 변한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근처 마을을 마른내골, 마른냇골이라 하였으며, 한자명으로 건천동(乾川洞)이라 한 것이다.
▲ 양성지(梁誠之)집터-인현동1가 40(초동18-15명보플라자 인근 대림빌딩앞)
양성지의 집터는 을지로3가역 8번 출구 김이비인후과 앞이다. 양성지(梁誠之,1415~1482)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에 속하며, 성리학자로는 드물게 조선왕조의 자주성을 강조했고, 여러 분야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가져 많은 저술과 편저를 남겼다. 본관은 남원.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송파(松坡). 아버지는 증우찬성 구주(九疇)이다. 서거정(徐居正)·신숙주(申叔舟)·김수온(金守溫) 등과 두터운 교우관계를 맺었다. 그의 가문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토성사족(土姓士族)이었으나 일찍부터 관직에 진출해 만년에는 대신의 반열에 올랐다. 1441년(세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식년문과에 급제해 경창부승·성균주부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교리 등을 지냈고, 144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했고, 이해 서적의 보전과 간행을 건의하는 10조의 상소문을 올려 학문의 발전을 꾀하도록 했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춘추관기주관과 <고려사> 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1) 왕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했고, 다음해에는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편찬해 올렸다. 1455년(세조1)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편찬했고, 집현전직제학에 승진했다가 1456년(세조2) 집현전이 폐지되자, 좌보덕에 전임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463년에는 홍문관의 설치를 건의해 역대의 서적을 보관케 하고 제학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구현시(求賢試)에 급제해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69년(예종1) 지중추부사·홍문관제학·지춘추관사를 겸직했으며, 공조판서를 거쳐 1471년 좌리공신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 대사헌에 재임했다가 지춘추관사가 되었으며, 1481년 홍문관대제학으로 승진했는데 이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했다. 그는 일찍이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한 이래 국가에서 벌인 편찬사업에 적극 참여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463년 왕명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1464년에는 <오륜록(五倫錄)>, 1465년에는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을 찬진했다. 1469년(예종1) <세조실록>, 1470년(성종1)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1481년 홍문관대제학으로 <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했다. 1482년에는 서적의 간행과 보관에 대한 12조의 건의문을 올리는 등 일생동안 서적편찬과 간행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규장각은 조선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개혁정치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고자 세웠지만, 단초는 300년 이상이나 앞선 세조 9년(146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규장각 설치를 건의한 사람은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1415∼1482)였는데, 정조는 규장각을 출범시키면서 그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가 ‘양성지-조선 수성기 제갈량’(지식산업사 펴냄)이란 눌재를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평전을 내놓았다. 1992년부터 4년 동안 서울대 규장각 관장을 지낸 한 교수는 “눌재를 되돌아보게 된 것은 정조의 정신적 스승의 하나가 그였다는 사실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양성지는 눌재라는 아호처럼 더듬거리는 말투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동료들이 사육신이나 생육신으로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할 때, 세조의 총신(寵臣)으로 자리 잡아 훗날 사림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어눌함을 극복하고자 항상 글로 뜻을 드러내어,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知無不言·지무불언)’는 평을 들을 만큼 자신을 끊임없이 독려한 인물이다. 세조와는 시정개혁과 국방정책의 적극적인 조언자이자 이론가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눌재를 제갈량에 비유한 것도 세조이다. 한 교수는 “1970년대 초 ‘눌재집’을 읽고, 그 애국적이고 주체적인 경륜에 놀랐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조선 선비들은 주체성이 없고 중국을 지나치게 숭상한 사대주의자들이었다고 단정한 것은, 나뿐 아니라 당시 학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였으나 ‘눌재집’은 나의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렸다.”고 털어놓았다. 한 교수는 눌재를 ‘주체성 있는 실학적 성리학자’로 규정한다. 그는 “눌재의 상소문 대부분은 관념적인 주장보다 병학, 지리, 역사, 문학 등 각 분야의 실용적인 정책 제안을 담고 있다.”면서 “눌재가 추구한 ‘유용지학(有用之學)’,‘경제실용(經濟實用)’의 학문은 18세기 이후 실학의 학문적 토양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눌재 사상의 기본 목표는 ‘자주독립된 부강한 왕조국가의 건설’이었다.”면서, “그는 단군을 전조선왕(前朝鮮王)이라는 역사적 실재인물로 파악하고, 중국과 우리는 제가끔 하늘의 일방(一方)을 차지하여 별개의 건곤(乾坤·구역)을 이루는 나라라고, 우리 역사의 독립성을 확신했다.”고 설명했다. 눌재는 특히 조선은 강토가 본래 요동을 포함한 ‘만리지국(萬里之國)’으로 우리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군사력의 강화는 물론 명나라 세력이 이 지역으로 뻗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조의 지나친 부국강병 정책은, 지방 세력의 희생을 강요하는 부작용을 낳았고, 이런 점 때문에 성종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신진 사림이, 눌재를 ‘오직 임금에게 아첨하고 재물을 탐한 노인’으로 보는, 근본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한 교수는 분석한다. 한 교수는 “눌재가 300년 만에 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위대한 실학자로 부활한 것은, 사림 정치가 부작용을 낳으면서, 왜란과 호란을 불러오고, 다시금 강력한 지도력과 실용정치를 요구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라면서, “명분보다 실리를 중요시하고, 왕권강화를 옹호하는 실학이 일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그 선구자로 양성지가 주목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 동평관터(東平館址)-인현동2가 142-1(인현어린이공원 출구내)
조선시대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남산 북쪽 기슭의 남부 낙선방(樂善坊 : 지금의 인현동)에 있었으며, 1407년(태종 7)에 설치되었다. 1434년(세종 16)에 일본 사신들의 금수품 밀매행위 때문에, 담을 높이 쌓고 문단속을 엄히 했으며, 허조(許稠)의 건의로 명나라 금릉(金陵)의 회동관(會同館)에 부속되어 있는 객관을 모방하여 신관 2개를 지었다.
1438년에는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예에 따라 감호관(監護官)을 두었고, 이어 동·서평관을 동평관 1·2개소로 개칭하고 5품아문(五品衙門)으로 정했다. 1444년에는 영접도감의 예에 따라 감호관이 후임자에게 사무를 인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창고를 설치해 그릇과 미곡을 저장하고 일본 사신과 객인을 접대했다. 공청무역(公廳貿易) 외에는 관문 밖에서 행하는 무역을 금했고 출입도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러나 담을 넘어 민가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는 자가 늘어나서, 의금부에서 체포한 적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폐지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왜관동(倭館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 인성붓재-인현동2가
남산골 아래 마른내골(건천동)은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해 한양의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한양의 주산은 백악(북악산)이고 안산은 남산이다. 이 남산의 동쪽 가닥이 뻗어 내린 곳을 안산용(案山龍)이라고 한다. 이 산줄기가 뻗어 내린 곳에는 명당이 많고 여기다 집을 짓고 살면,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는 풍수지리설이 있다. 남산골 필동에서 인현동 일대로 뻗어 내린 곳에는 대추알처럼 명당자리가 많다고 한다. 선조가 16세(歲)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정계에서 훈구(勳舊) 척신 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이 대거 등용하면서 선비 김효원과 명종비 인수왕후의 동생 심의겸의 대립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되어 동인과 서인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천동에 있었던 까닭이다. 지금의 인현동2가에 있는 작은 고개는 선조의 7째 아들인 인성군의 저택이 근처에 있어서 '인성붓재'라 하였다. 이 이름이 줄어서 '인현('仁峴)'인데, 이것이 지금의 '인현동'이란 이름의 바탕이 되었다.
▲ 앵정소공원(櫻井小公園)
현 중구 인현동(仁峴洞)을 일제 때는 앵정정(櫻井町)이라 불렀고 인현동 2가에 현존하는 영희국민학교(永禧國民學校)는 당시 앵정소학교라 하여 일본인 자제들의 국민학교였다. 경성부가 이 앵정소학교에 인접해 있는 인현동 2가 142번지의 땅 600평에 그네, 시이소 등 아동의 놀이기구를 설비하여 순수한 아동공원으로서 개설한 것은, 1935년 1월부터의 일이며 이것은 일제 때의 유일한 어린이놀이터였다. 이 공원은 현재 인현공원으로 개명(改名)되어 관리, 이용되고 있다.
▲ 유성룡(柳成龍)집터-필동2가 52-1(충무로3가 60-1 중앙석유주유소앞 보도)
1542~1607. 조선중기 문신, 학자. 이곳 남부 낙선방 묵정동계는 서애 유성룡이 살았다.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동인의 일원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의성 출신이며, 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이다.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김성일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의 대가였다. 탁월한 군사 지식으로 무관 이순신을 후원하여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유성룡, 황희, 맹사성, 채제공)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뼈저린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564년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유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후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1582년~1583년),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없이 승진해 나갔다. 상주(尙州) 목사로 나가 예절로 다스렸으며,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함경 감사·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조 판서 재직 중 위주 목사 서익(徐益)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니,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고 대제학을 겸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의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강경파인 북인의 일원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또한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성룡은 권율·이순신 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 왕을 모시고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의 말에 따라 그 날로 사퇴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조정에서 북행(정확하게는 북행하여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자는 의견)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홀로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 건저의문제(建儲議問題)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며, 건저의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건저 문제, 건저 사건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건저의(建儲議)는 “왕세자를 세움에 따른 의론”을 뜻한다. 정여립 사건에 치죄(治罪)가 가혹하여 동인의 원한을 사고 있던 서인의 영수 정철이, 소위 건저의 문제로 실각함에 따라 서인의 세력은 다시 꺾였다. 즉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仁嬪) 김씨가 신성군(信城君)을 낳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인빈의 오빠 김공량(金公諒)과 연결하고 있었다. 이에 좌의정 정철이 세자를 정할 것을 주장하여 왕의 미움을 사고 강계(江界)로 유배되었으며, 이에 관련되어 윤두수 등 서인이 파직 혹은 원류(遠流)됨에 따라 동인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동인은 이 사건을 전후하여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려 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여러 신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듬해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직문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파주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한편 일본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적의 연락을 끊었다.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 되었다. 1607년 음력 5월 6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당을 병산서원 뒤에 세우고 여산(廬山)의 퇴계묘(退溪廟)에 함께 모셨다. 사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위패가 모셔져 제향하게 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문충공(文忠公)이 되었다.
[유성룡일화]
-유성룡은 바둑의 고수로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유성룡은 의학과 침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허준에게 의학과 침술에 대한 많은 조언을 하였
다고 한다.
-살아 생전 유성룡은 너무나 청렴했던 삶을 살았던 탓으로 장례비가 없었는데, 이를 듣고 많은 백성들이 제수용품을 싸들고 문상을 왔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예악교화(禮樂敎化)·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으나,《선조실록》에서는 편찬자의 평으로, 재상으로서의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하는 등, 그의 성품에 대한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
※ 붕당(朋黨)
최초의 붕당은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이다. 당시 동인의 우두머리 격은 김효원의 집이 한양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서인의 우두머리 격은 심의겸 집이 한양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서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조임금에서 광해군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다시 나뉜다. 남인들은 당시 한양의 청계천이남(특히 남산골)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남인(선조 때 남인의 거두 유성룡의 집이 남산<당시 목멱산>골), 북인들은 당시 한양의 청계천 이북(북악산기슭)에 주로 살았기 때문에 북인으로 명명되었다.
서인은 숙종임금 재위 중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다. 1680년에 남인들이 벌을 받고 정권에서 밀려났는데(경신환국, 혹은 경신대출척), 이 때 서인세력은 남인들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해야 한다는 세력과 그 처벌을 다소 너그럽게 해야 한다는 세력으로 갈라졌다. 당시 강경파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였기 때문에 노론, 온건파는 주로 소장파였기 때문에 소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다시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대북은 다시 골북과 육북으로 나뉘었다. 서인세력은 노론, 소론으로 갈리기 전에 공서와 청서로 나뉜 적도 있다. 영조임금 때는 사도세자 처벌을 놓고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주로 소론과 남인 및 일부 노론)와 세자의 처벌을 강조하는 벽파(노론내 강경파)로 나뉘기도 했다.
[붕당의 유명인사]
북인-정인홍, 이산해(선조-광해군 시기) 등
남인-유성룡(선조), 이원익(선조-광해군), 허목(현종), 이익(숙종-영조), 안정복(영조), 채제공(정조), 정약용(정조) 등
서인-정철(선조), 김육(인조), 김상헌(인조), 최명길(인조)
노론-송시열(효종-숙종), 김만중(숙종), 박지원(영조), 김조순(순조)
소론-윤증(숙종), 박세채(숙종), 남구만(숙종), 박문수(영조)
[붕당의 학통]
북인-주로 남명 조식선생의 제자들
남인-주로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들
노론-율곡 이이선생의 제자들이면서 동시에 우암 송시열의 제자들
소론-율곡 선생의 제자들이면서 윤증(윤증은 원래 송시열의 제자였음)의 제자들
[붕당의 특징]
북인-매우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정책 추구,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은 의병장 배출, 인조반정 이후 거의 몰락
남인-인격수양과 도덕을 중시, 왕권강화를 통한 민생안정 추구, 장희빈 옹호세력(성호 이익선생의 형은 장희빈 옹호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당했음), 영남남인과 기호남인(기호남인은 천주교-실학자들), 정조대왕 이후 거의 몰락
노론-사대부의 권위 강조, 신권 강화 세력, 주로 대농장주들, 조선말기까지 집권 세력, 영정조 때 노론시파 중 일부인 박지원과 서얼 출신들(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 등)은 북학파를 이룸
소론-영조 때 암행어사는 주로 소론 출신들(박문수가 대표적 인물), 남인과 북인이 몰락한 정국에서 노론을 견제한 세력
▲ 박팽년(朴彭年)집터(한국의집)-필동80-2
필동 '한국의 집'으로 전통혼례를 올리기도 하는 곳이며, 육신송이라는 소나무가 있는데 박팽년이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세조에게 고문을 당하고 3대가 참화를 입었는데, 며느리의 아이와 계집종의 아이를 바꾸어서 유일한 혈손을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박팽년(朴彭年.1417~1456)은 조선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본관은 순천이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조선 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였다. 1455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김종서·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하위지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세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서 마음을 돌려 보려고 하였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박팽년은 고문 받던 중 사망하였다. 후에, 숙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저서로 <취금헌 천자문>이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 당했으나, 사육신 중 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후손이 존재한다. 그의 며느리이며 장남 박순(朴珣)의 아내 이씨는 사육신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며느리 이씨와 한 여종의 기지로 그의 아들은 무사하였다 한다. 뒤에 그 아이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숨어 지내다가, 성종 때 자수하여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박팽년의 사위 김자무(金自茂)는 단종 때 제주목사를 역임했으나, 처가가 화를 당하자 일족을 이끌고 피신하여 무장(茂長)에 정착하였다.
▲ 남학당터(南學堂址)-필동1가 36-2(충무로3,4호선 4번출구앞 보도. 매일경제신문사)
학당제도는 고려 말기부터 시작하였는데, 조선시대에도 존속되어 한성을 동, 서, 중, 남, 북 등 5부로 나누어 학교를 설치, 5부 학당이라 하였다. 1445년(세종27) 북부학당이 폐지되어 4부학당만 유지되었다. 남학당은 조선의 중등교육기관의 하나로서 남부성명방(南部誠明坊-현재 중구 필동지역)에 있었다. 태종 11년(1411)에 예조참의 허조의 건의로 독립건물을 세웠다가, 1419년(세종 1)에는 개성에서 폐사의 재목을 옮겨와, 남학당의 동서재를 증축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 2년(1610) 이후에 중건되었고, 고종31년(1894)까지 존속되었다. 한성 4학당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는 학사(學舍)가 없어 대부분 사원을 이용하였으나, 남학당이 설치되면서 다른 학당들도 독립적인 학당건물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종로6가에는 동학당, 종로구 중학동에는 중학당, 중구 태평로1가에는 서학당이 있었다.
▲ 남별영터(南別營址)-필동2가 84
남별영과 남소영은 수도방위의 임무를 띤 조선 후기의 군사주둔지이다. 남별영은 금위영, 남소영은 어영청의 분영으로 각각 설치되었다. 남별영의 남쪽과 남소영의 북쪽에는 큰 군수창고가 있었다. 남별영은 남산 아래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고 했으니, 이는 현재 한국의 집 남쪽의 중구 필동 2가 103번지에 해당된다. 영조 6년(1730)에 처음 설치된 남별영은 건물이 139칸이 되었다. 남별영 아래 남쪽에 남창(南倉) 101칸이 있었는데, 창고의 수는 12문(門)으로, 그 중 8문에는 군향미(軍餉米)와 여러 가지 곡물이 있었고, 4문은 비어 있었다. 북쪽에는 하남창(下南倉) 104칸이 있었으며, 남창 서쪽 기슭에는 17칸이 되는 화약고가 있었다. 또한 남별영 내에는 물 흐르는 골짜기에 천우각(泉雨閣)란 정자가 있어서 여름이면 장안에서 피서와 놀이터로서 유명했으며, 석벽에는아계(溪)의 큰 각자가 있어 명소였임을 전해 준다. 이곳은 일제가 한국침략을 노골화하면서 한국주차대사령부(韓國駐箚隊司令部)를 설치한 곳이기도 하다. 근래에 남산한옥마을이 조성되었으며 천우각도 복원되었다.
▲ 남산골공원-필동2가 84-1 수방사터. 남산국악당, 일석이희승선생기념비, 이희승학덕추모비, 남산한옥마을, 서울천년타임캡슐
필동에 위치하는 곳으로 옛 수도방위사령부의 넓은 지역의 터에다, 남산골공원을 복원하여 면적 79,937㎡ 전통공원과 전통가옥을 복원해서 서울시가 관리해 오고 있다. 이 곳 남산골 전통정원 내에는, 그 동안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자연식생인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또한 정자·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정원의 북동쪽 7,934㎡ 대지에는 시내에 산재해 있던 서울시 민속자료 한옥 5채를 이전, 복원하고 이 한옥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분성격에 걸 맞는 가구 등을 배치하여, 선조들의 삶을 재조명 하였으며, 전통공예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상품을 항상 전시·판매하고 있다. 정원의 서쪽에는 물이 예스럽게 계곡을 흐르도록 하였고, 주변에는 고풍의 정자를 지어 선조들이 유유자적하였던 남산 기슭의 옛 정취를 한껏 느끼도록 하였다. 전통정원 남쪽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1994년 11월 29일 지하 15m 지점에 매설하였다. 보신각종 모형의 타임캡슐 안에는 서울의 도시모습, 시민생활과 사회문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을 수장함으로써 현 시대의 사회상이 400년 이후인 2394년 11월 29일에 후손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 서울 1,000년 타임캡슐-중구 필동 2가 84-1 일대
서울 1000년 타임캡슐은 1994년, 서울시가 수도로 정해진 지(정도) 600년이 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캡슐이다. 1994년 11월 29일 높이 1.7m, 직경 1.3m 크기의 특수재질로 만들어졌고, 보신각종 모양을 본떠서 제작했다. 600점의 물품이 담겼으며, 개봉 일시는 2394년 11월 29일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2가 84-1 일대 남산골 한옥마을 안에 위치한다.
[캡슐]
보신각종을 본뜬 모양. 직경 1.3m, 높이 1.7m, 무게 2.5 톤의 크기. FRP외장 스테인레스 특수장(STS 316L)유리섬유, 실리카 등으로 구성된 5중 구조로 4개의 용기로 구성. 진공처리(1/1000MM HP) 및 아르곤가스 추입보전.
[담긴 물품]
기저귀, 담배, 팬티스타킹, 남녀 수영복, 워드프로세서(아래아한글 2.5), 현미효소 등 건강식품, 신용카드, 부동산 매매계약서, 주요작물 씨앗, 피임기구, 인공심장, 상품권, 공무원 급여명세서, 운전면허증, 초중고 시험지, 무선전화기, 화투, 각종 복권, 우리별 1호, 94년도 시판 승용차 등의 축소 모형, 삐삐, 1994년 당시의 휴대폰 대체 기기, 1994년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CD-ROM, 마이크로필름, 영상기록
[의의]
서울정도 600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을 600점의 캡슐에 담아 400년 후인 서울 1000년 후손에게 문화유산으로 전하는 사업이다.
[매설 및 개봉]
매설일시 : 1994년 11월 29일
개봉시기 : 2394년 11월 29일
▲ 남산한옥마을-필동 2가 84번지 1호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서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이름 있던 곳이다. 또한 청학이 노닐고 하여 청학이 사는 선향이라 불릴 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청학동으로 불리었으며, 천우각이 있는 청학지 주변은 산수화를 보는 듯 곱고 단아하다. 청학동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릴 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곳의 옛 정취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골짜기를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였으며,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전통정원을 조성하였다.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안채·사랑채·대문간채가 연결된 'ㅁ'자 평면, 건평 224.79㎡),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사랑채와 몸채로 구성된 '元(원)'자 평면, 연면적 218.18㎡),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안채·사랑채·별당채로 구성, 연면적 323.96㎡), 오위장 김춘영 가옥('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 연결, 건평 82.46㎡), 도편수 이승업 가옥(안채·사랑채, 건평 119㎡), 전통공예관(전통공예작품과 관광상품 전시·판매, 건평 122.31㎡) 등을 이건 조성하고 있다.
※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1894~1966년)
대한제국 순종의 두 번째 황후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나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고, 이때 아버지 윤택영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풍설이 돌았다. 이듬해인 1907년에 남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옥새(玉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큰아버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자,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인민군을 5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남북)이 휴전을 맞아 환궁하려 하였으나, 대통령 이승만이 사람들의 순정효황후에 대한 존경심을 두려워하여 환궁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정신장애인이 되어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남편을 여읜 평생의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승하할 때까지 영어 공부에 게으르지 않았고(타임지를 읽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국문학과 불경 연구에 혼신을 쏟는 등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2살의 나이에 불우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 해풍부원군 윤택영댁재실(海豊府院君 尹澤榮宅齋室)
일반 살림집이 아니고, 윤씨 일가의 재실이었다. 윤택영은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의 생부다. 이 가옥은 원래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었는데, 옛 이름은 '제기동 정규엽가'이다. 현재는 '남산 제모습찾기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조성된 남산한옥마을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이 가옥은 윤택영이 그의 딸이 1906년 동궁 계비에 책봉되고, 이듬해 황후가 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집으로 전한다. 가옥 전체의 분위기는 살림집이라기보다는 재실 용도에 걸맞게 되어 있다. 이 가옥은 경운궁(慶運宮)을 헐 때 나온 부재를 이용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사랑채ㆍ안채ㆍ사당채를 포함한 전체 건물배치 형태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전통한옥 중에서, 가장 독특하게 '元(원)'자형으로 된 길상문자(吉祥文字)를 이루었다. 이 가옥의 제일 안쪽 높은 터에는, '元'자형 배치의 북측 머리에 해당하는, '一'자형 평면을 한 사당이 자리 잡았다. 사당 앞 남쪽 한 단 낮은 터에는, '元'자의 '兀'자를 이루는 안채ㆍ사랑채ㆍ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서로 길게 연속되어, '兀'자의 상부를 차지하며 '一'자형의 몸채를 이루었고, 그 앞 동·서 행랑채가 '∥'자 형태를 이루며 몸채에 연속되어 있다.
※ 윤택영(尹澤榮,1876~1935)
조선 순종의 장인이다.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이나 정작 사위인 순종보다는 두 살 어렸다. 1899년 시강원에서 벼슬을 시작했고, 1906년 딸이 황태자인 순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간택되어, 이듬해 황후가 됨에 따라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다가, 채무 관계로 파산 선고를 받아 1928년 불명예 실작 하였다. 이후 후작 작위는 회복되었고, 윤택영 사후에 차남 윤의섭이 습작했다. 윤택영은 헤픈 씀씀이로 부채를 쌓아 ‘채무왕(債務王)’, '차금대왕(借金大王)'으로 불렸고, 1920년 아들 윤홍섭과 함께 베이징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사망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할아버지: 윤용선, 아버지: 윤철구(尹徹求), 형: 윤덕영(尹德榮, 1873~1940), 아들: 윤홍섭,
윤의섭(尹毅燮, 1912~?), 딸: 순정효황후 윤씨, 사위: 순종(1874~1926)
※ 부마도위 박영효가옥(駙馬都尉 朴泳孝家屋)
원래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1에 소재하고 있었으며, 남산한옥마을로 이전하기 전 문화재 지정 명칭은 '관훈동 이진승가옥'이었다. 박영효는 조선 25대 왕인 철종과 숙의 범씨 사이에서 난 영혜옹주의 남편이다. 박영효는 이 가옥 외에 안국동 윤보선가에서도 살았고, 후일 창신동에서도 큰 저택을 짓고 살았다. 서울 8대가 중의 하나로 전해지는 이 가옥은, 안채·사랑채·별당채·대문간채·행랑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안채 외에는 헐리어 없던 것을 이건하면서 사랑채와 별당채만 복원하였다. 가옥은 'ㄱ'자형 몸채에 '一'자형 행랑채가 붙어 있으며, 부엌과 안방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형으로, 안방이 회첨골에 위치하는 서울지방의 가옥과는 다른 형식이다. 옮기기 전 이 가옥의 모습을 보면, 관훈동 큰길에 면한 골목을 들어서면 남북으로 길게 뻗은 행랑채가 있고, 이 행랑채에 솟을대문이 있었다. 행랑채는 헛간·마루방·대문간·문간방과 마루방·문간방·아궁이부엌·광 2칸·아궁이부엌·행랑방 2칸·헛간 2칸이, 남에서 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있고, 동측과 북측에 각각 중문이 있다. 동측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나오고, 그 앞으로 'ㄱ'자형의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사랑방과 정면 2칸 측면 1칸의 대청, 정면 1칸 측면 1칸 반의 누마루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로 위치하며 남향하고 있다.
사랑방 뒤로 1칸 크기의 침방과 1칸 크기의 함실아궁이가 각각 동쪽과 서쪽에 있으며, 사랑방과 대청 앞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행랑마당의 북측에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또 하나의 행랑마당이 나오고, 여기서 동측으로 위치한 중문간을 들어서서 맞은편의 내외벽을 돌아 들어가면 안마당에 이른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을 하였는데, 서쪽으로 '一'자형 중문간 행랑채와 접해 있다. 남향한 안방 서쪽으로 부엌이 있고, 안방 동쪽으로 2칸 작은 대청과 작은 건넌방이 있으며, 작은 대청과 건넌방에서 남쪽으로 꺾여 나오며 서향한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큰 대청과 정면 2칸 측면 2칸의 노모방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ㄱ'자형 평면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방에 보이는 실(室)배치 형식이다. 부엌에서 남쪽으로 꺾여 나간 곳으로 찬간ㆍ방ㆍ중문간이 차례로 위치하고, 부엌 북쪽으로는 곡광이 있다. 안방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크기인데, 창호로 구획하여 모두 6개의 큰방과 작은 방(협실)을 만들었으며, 안방·큰대청·큰건넌방의 둘레에는 툇마루가 둘러있다.
※ 박영효(朴泳孝,1861~1939)
조선 말기의 정치인으로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며, 철종의 사위이기도 하다. 노론의 실력자인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1872년 음력 4월 선왕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였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고, 금릉위(錦陵尉)에 책봉되었다.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朴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했다. 1882년(고종 19년)의 제물포 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그가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 도안을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 조야(朝野)를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기도했으나, 민태호·김병시(金炳始)·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들의 정권 장악으로 실패했다. 1882년 음력 12월 19일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접한 인력거를 들여와 한성부판윤 재임 기간 중 조선에 보급했다. 1883년 음력 3월 17일 광주부(廣州府) 유수로 발령을 받았다.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1884년(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 전후영사 겸 좌포장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되돌아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개명(改名)하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자 이듬해 귀국했다.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1895년(고종 32) 반역 음모사건(고종 양위 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융희 1년) 오랜 망명 끝에 박제순 내각의 알선으로 귀국하여 사면을 받고,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을 하다가 대신 암살 음모사건으로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28만 원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귀족원 의원(1932년)과 조선식산은행 이사,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선전 심사위원, 조선농회 부회장 및 조선농회 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로 시종하였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이우와 결혼하였다. 1939년 정 2위 훈 1등으로 사망하였다. 박영효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부인 범(范)씨와 사이에서는 2남 1녀를 두었다. 자녀 가운데 박흥원(朴興元)은 불가에 귀의해 서울 봉원사 주지로 있었으며, 박흥원의 아들 박혜륜(朴彗輪) 역시 승려이다. 범씨의 딸 박묘옥(朴妙玉)은 인천의 부호 한갑현과 결혼하여 5남 2녀를 두었다. 그의 묘는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손자 박환범이 묘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의친왕의 차남 이우의 처가 되었다. 박영효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반면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을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며, 뉴라이트 등은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가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과 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저서로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 오위장 김춘영가옥(五衛將 金春永家屋)
원래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에 있었던 가옥으로 조선 말기 훈련도감의 포수였던 김춘영이 건립하였다. 현재의 남산 한옥마을로 옮기기 전 문화재 지정 명칭은 '삼청동 김홍기가옥'이었다. 1980년대 서울시내의 급격한 땅값 상승으로 인해, 단층의 옛 가옥들이 토지의 경제적 이용가치를 저해하는 장애 요인으로 취급받게 되어, 일부 전통가옥의 소유자들은 문화재 지정을 해제하여 자유로운 재산권 행사를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가옥 소유자들이 거의 방치상태에 가깝도록 성의 없이 가옥들을 보존하여, 자체 붕괴 위험마저 있었으므로 문화재 보존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어왔다. 이러한 문제점과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 시작된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한옥들을 이전하고 남산한옥마을을 조성하여 1998년 개장했다. 이곳으로 이건된 가옥은 김춘영가옥을 비롯하여, 이승업가옥·박영효가옥·윤택영재실 등이고, 새로 복원한 가옥은 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의 친가이다.
※ 도편수 이승업가옥(都片手 李承業家屋)
1867년 경복궁 중건공사에 참여했던 도편수 이승업이 1860년대에 지은 중인 가옥이다. 본래 삼각동에 위치하여 조흥은행의 역사자료 전시실로 사용한 '조흥은행관리가'였으나, 1998년 남산한옥마을을 조성하며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가옥은 조선 말 중인계층 주택의 시대적 특징을 읽을 수 있는 점에서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다. 현재 안채ㆍ사랑채ㆍ사주문만 한옥마을로 이건 되어 있지만, 본래 문간채ㆍ앞뒤 행랑채ㆍ사랑채ㆍ안채ㆍ사랑뒤채 등으로 구성된 큰 규모의 가옥이었다고 한다. 목수의 자택답게 장식적이고 정교한 부재들로 치밀하게 구성되었다.
▲ 청학동(靑鶴洞)-남산1호터널 입구
남산의 북쪽 기슭 남산1호터널 입구 일대는 일찍이 청학동으로 불리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서울 성안에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런 중에 놀만한 곳으로는 삼청동이 제1이고, 다음이 인왕동이며, 쌍계동·백운동·청학동이 그 다음이다.(중략) 청학동은 남학(南學)의 남쪽 동네로 골이 깊고 물이 맑아 찾을 만하다"고 기록하고 있어, 남학동 남쪽 기슭의 청학동은 골짜기가 깊숙하고 맑은 냇물이 흐르고 시원한 샘물이 고이던 곳으로, 도성민들이 즐겨 찾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동국여지비고』 제택조에 "권람의 집이 목멱산 기슭 비서감 동편에 있었는데, 그곳은 일찍이 무학대사가 잡아 준 바위 위의 집터였다. 세조 임금이 행차하여, 그 서쪽에 있는 벼랑바위 돌샘물을 마신 후로 어수우물(御井)이라 불려왔다. 그 집터 위에 소조당(素凋堂) 유적이 있어,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했다가 지금 녹천정(鹿川亭)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남산동3가 34번지 2호 일대이다. 이곳에는 일찍이 연산군 때의 천재시인 박은(朴誾), 그리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대제학 이행(李荇) 등이 별장을 가졌다. 이후 조선말까지 남산에는 숱한 시인 묵객들이 별장과 정자를 짓고 경관을 즐겼다. 특히 녹천정 터에서 동쪽 방향으로 필동 골짜기 서쪽 둔덕 바위 위에 '靑鶴洞李相國容齋書舍遺址'라 새긴 암각글자가 있다. 바로 이곳이 이행(李荇)의 집터였다. 이행은 청학동에 공부방을 꾸미고 스스로 청학도인이라 자칭하였다. 우의정·대제학의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몸이건만 한가한 일개 야인처럼 오솔길가에 소나무·회나무·복숭아·버들 등을 심고, 퇴궐 후에는 망건에 무명옷 차림으로 동산을 거닐었다고 한다.
▲ 노인정(老人亭)터-필동2가 134-2
노인정은 헌종(1834~1849)의 국구(國舅)인 풍은부원군 조만영(趙萬永.1776~1846)이 지은 정자로, 풍광이 수려하여 당대의 명문가들이 찾아 여가를 즐기던 곳이었다. 고종 31년(1894) 청일전쟁 직전 7월 17일에 일본공사 오오토리(大鳥圭介)가 조선의 대신 신정희(申正熙)·김종한(金宗漢)·조정승(曺定承) 등과 내정개혁안 5개조를 논의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모임을 노인정회의라고 부른다. 이 정자는 일제시대에도 있었으나 이후 멸실되었고, 잔존 사진으로 볼 때 정면 1칸, 측면 1칸, 초석 위에 기둥과 나지막한 마루를 설치하고, 기둥의 사이로는 간단한 난간을 돌렸으며 사모지붕 위에는 절병통을 올렸다.
▲ 조씨노기(趙氏老基)-필동134-2
푸른빌라 내 노인정 자리 배후 거암(巨岩)에 각자되어 있다. 노인정 주변은 풍양조씨들의 근거지가 되었는데, 이를 나타내는 「趙氏老基」라는 바위글씨가 중구 필동 2가 134-2 공동주택과 바로 연접한 바위 면에 남아 있다. 크기는 185×30㎝이다. 현재 보존상태가 몹시 불량하여 보존대책이 시급히 요구된다.
▲ 귀록정(歸鹿亭)터-필동2가134-27
조선중기의 문신인 풍원부원군 조현명(1690~1752)이 세운 정자로 중구 필동2가 134-27(필동5길 22) 연합지류유통 뒷마당이다.
▲ 유묵록선기제석 바위글씨(遊墨麓先基題石 刻字)-중구 필동 2가 134번지
「遊墨麓先基題石」 바위글씨는 필동약수터 서쪽에 있는 Total Studio Road건물 뒤쪽에 위치한다.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1690~1752)이 지은 시가 40자 음각되어 있고, 말미에 녹옹(鹿翁)이 새겨져 있다. 바위글씨가 새겨진 방격의 크기는 110×123×3㎝이다. 바위글씨는 조현명이 선조가 살았던 옛터를 방문하고 시를 지어 돌에 새긴 것으로, 선인이 덕을 펴시던 이곳에 장차 두어 칸의 집을 지으리라고 다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문은 조현명의『귀록집(歸鹿集)』에 전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先人種德地 荒廢幾多年 襟帶雙溪合 煙霞一局圓 胡爲損白壁 終愧失靑氈 是有堂構責 吾將結數椽 鹿翁
▲ 남산사터(南山寺址)-장충동2가 192-137, 192-148 번지.필동3가 79
남산사지는 조선조 때 창건되고 일제 때 중창된 남산 기슭의 절터이다. 입구에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고, 계단길로 잠시 오르면 우측 축대 사이로 난 계단 위쪽에 「대일여래존(大日如來尊)」이 음각(陰刻)된 대리석제 육각주석(六角柱石)이 놓여있다. 柱石의 크기는 67×77×80㎝, 좌우받침돌은 60×20×30㎝ 내외이다. 이곳에서 약간 더 오르면 우측으로 석계(石階)가 놓여져 있는데, 너비는 625㎝ 내외로 12단을 이루고 있다. 계단 맨 위부터는 다소 평탄한 대지가 나타나는데 현재는 ‘ㄱ’자형의 남루한 건물이 위치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지금 집터에 사찰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 2,300여 평 정도가 그 사역이었다고 한다. 대지 위에는 건물 부재들이 놓여 있다. 초석 1기가 보이는데, 정연하게 치석되어 있으며 크기는 63×75×54㎝로 화강암제이다. 주변에 원반형 석재도 보이는데 지름은 46㎝, 높이 30㎝이다. 가옥 대문 앞에도 화강암으로 만든 계단 3단이 잔존해 있다. 남산사는 서울 시내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절터 중의 하나로, 창건 이후 훼손되어 1936년 각념선사(覺念禪師)가 이 절터 위에 각심사(覺心寺)를 지었다고 한다. 현재 보존상태가 몹시 불량하고 지속적으로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 녹천정터(鹿川亭址-권람(權擥)집터-박원영별장-이등박문정자)-필동(남산1호터널입구)
세조 때의 문신인 권남의 집터는 중구 남산1호터널 입구에 무학대사가 잡아준 바위 위에 지은 집터였으며, 박원원의 별장이었으며, 후에 녹천정(鹿川亭)이 되었다고 한다. 남산 기슭 예장동 왜성대(통감부) 부근 샘이 흐르는 언덕 위에는 조선 초기에 녹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이곳을 소위 총독관사로 정하고 이등박문이 정자를 새로 꾸민 일도 있었다. 한명희집터이기도 하다.
▲ 이행집터(용재서실)-필동(녹천정 동쪽)
청학동이상국용재서사유지(靑鶴洞李相國容齋書舍遺址)라는 암각글씨가 명동역 1번 남산1호터널 입구에 있었다고 하며 이곳이 이행의 집터이다.
※ 이행(李荇.1478~1534)
조선 전기의 문신. 박은과 함께 해동의 강서파(江西派)라고 불렸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叟)·청학도인(靑鶴道人). 아버지는 사간 의무(宜茂)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전적을 역임했고, <성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1504년 응교로 있을 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고,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교리에 등용,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대사헌·대제학·공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펴내는 데 참여했고, 1531년 김안로를 논박하여 좌천된 뒤 이듬해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시는 허균 등에 의해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 당시(唐詩)의 전통에서 벗어나 기발한 착상과 참신한 표현을 강조하는 기교적인 시를 써서 새로운 시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표현의 격조가 높아진 반면 폭넓은 경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은 없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1537년 신원(伸寃)되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고,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 서울시청남산별관-예장동 산5-85. 안기부 5별관터
1995년 안기부(현 국정원)가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제5별관'이었던 곳으로, 이후 도시철도공사 연수원을 거쳐 작년 말부터 '시청 남산별관'으로 사용돼 왔다. 제6별관보다 악명 높은 곳이 ‘제5별관’이었다. 남산 1호터널 위 구름다리를 건너면 갑자기 터널이 나타난다. 100m 남짓한 터널의 끝으로 4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서울시 남산 별관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다. 이 제5별관은 정보부 직원들도 수사용이었다고 인정하는 곳이다. 깜깜한 밤, 정보부 직원들에게 연행된 이들은 눈을 가린 채로 끌려오기 마련이었다. 이들이 처음 눈을 뜨는 곳은 남산 3호 터널 앞 대형 철제문. 육중한 철제문이 끔찍스런 소리를 내며 열리면 차는 곧바로 깜깜한 터널을 향한다. 깊은 밤, 위치를 알 수 없는 이들은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끌려가는 듯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제5별관 앞 터널의 용도였다. 제5별관으로 통했던 이곳은 주로 대공수사국이었는데, 간첩 혐의를 받는 이들이 조사받는 곳이었다. 한 교수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간첩사건을 조사하면서 얻은 결론인데, 남북 분단 이후 남쪽에서 검거된 간첩(고정간첩) 1100여 명 중 엄밀한 의미에서의 남파 간첩은 50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며 “나머지는 간첩으로 의심될 일을 한 이들이나 무고한 이들이 간첩으로 조작된 것인데, 그 조작이 모두 이 건물에서 이뤄졌다.”고 말했다. 안상운 변호사는 제5별관 앞을 떠나며 “경찰은 악명 높았던 ‘남영동 분실’을 ‘박종철 인권기념관’으로 바꾼 바 있다”며, “그곳보다 더 많은 인권침해와 고문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던 이곳이 이제는 아시아 평화와 인권의 중심으로 서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 남산 소파길의 동쪽 끝. 너른 주차장 앞에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면적 2449㎡)라고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균형발전본부 건물에는 청계천복원추진본부도 함께 있었다. 조화와 균형, 환경과 녹색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명칭에서 두려움을 느낄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 그곳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에겐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곳의 명칭은 ‘6국’. 학원 사찰과 수사를 담당했다. 2~3층에서 통상적인 조사를 받은 학생들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지하 1층과 2층에 끌려 들어가 고문을 당했다.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씨 등 8명이 이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서 자행된 고문 끝에 조작된 혐의로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형 집행을 당한다.
▲ 남산창작센터-예장동산5-84. 안기부의 한 건물.
남산창작센터는 대규모 무대공연예술의 창작여건을 활성화하기 위해 규모 있는 창작공간을 마련하여 민간문예단체의 창작 욕구를 해결하며 다양한 실험무대, 아카데미 등을 통하여 무대 예술인을 지원하는 공간이다. 뮤지컬·오페라 등의 대형 무대공연을 위한 국내 최대 규모의 전용 연습실이 있고, 실험무대, 아카데미 등을 통하여 무대 예술인들을 지원하며, 기본대관료 최소 20,000원~최대 80,000(4시간)으로 저렴하다.
▲ 서울유스호스텔-예장동 4-5번지(통감부터).
남산창작센터에서 동산 허리를 돌아서면 눈앞에 서울유스호스텔이 들어온다. 길게 치솟은 통신용 철탑과 권위적으로 사각 진 형태가 예사 건물이 아니란 느낌을 주지만, 누구도 그 과거를 알려주지 않는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마음공부 잘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되자’는 액자가 뒤통수를 친다. 독재의 시절, 취조와 고문의 목적은 대상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었다. 새 마음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건물의 옛 용도를 아는 이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건물이 여기에 들어선 것은 지난 1972년의 일이었다. 중앙정보부(안기부) 남산 본관. 여기는 1층부터 6층까지 대부분 행정 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탐지와 분류, 분석이 업무의 주요한 부분인 정보의 특성상 행정 사무실은 곳곳에 필요했다고 한다. 6층에는 정보부장실(안기부장실)이 있었다.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여기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 지난 1973년 본관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최종길 교수는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옥상으로 가는 외부 계단에서 최 교수를 내던졌다는 증언을 받아낸 것이다. 본관 내부는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형태를 다 잃어버렸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공간은 있는 법. 유스호스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그대로 보존됐다. 두 단계의 계단을 내려가면 굳게 잠긴 문이 나온다. 이 문 뒤에는 지하 통로가 있다. 지하 통로는 유스호스텔 앞의 서울종합방재센터로 이어진다. 남산 안기부가 가장 세력을 넓혔을 때에는 2만4800여 평의 부지에 총 41개동이나 되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KCIA라고 불렸던 중앙정보부를 만든 인물은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였다. 박정희 소장과 함께 5·16 쿠데타를 일으킨 그는 쿠데타 이틀 만인 1961년 5월18일 육사 동기생(8기)인 육본전략정보과의 이영근·서정근 중령을 불렀다. “우리에게도 정보부가 필요하다, 이를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어 달라.” 이 중령과 서 중령은 이화여고 앞 정동호텔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일본의 내각조사실 같은 기관을 연구하며, 한국형 정보부의 뼈대를 만들었다. 법은 6월20일 공표된다.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중앙정보부 초기 요원 수는 500명 정도였다. 독재를 연장하려면 감시와 처벌이 필요했다. 항거가 불가능할 만큼 겁줄 수 있는 정보부는 날로 커져갔다. 요원이 가장 급격히 늘었던 때는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사건 직후였다. 공안수사의 법적 완결성을 좀 더 높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정보부는 법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을 한꺼번에 늘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늘어난 조직은 더 많은 건물과 사무실을 삼켰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3천여 명 정도로 불어났다. 안기부 요원은 전두환 정권과 김영삼 정권까지 이르면서 갑절로 규모가 늘어난다. 안기부는 남산의 공개성과 협소함 때문에 1995년 내곡동으로 청사를 옮긴다. 안기부 건물들의 소유권은 이때 모두 서울시로 넘어갔다. 서울시는 이전 당시 남아 있던 건물 27동 중 23동을 해체했다. 대표적인 것이 1996년 8월 제1별관 폭파 해체였다. 본관 바로 옆에 붙어 두 번째 규모를 자랑했던 제1별관은 지금 시멘트 바닥만 텅 빈 공터로 남아 있다. 1961년 만들어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2011년 50주년을 맞는다. 서울시는 올해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내놨다.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청사를 허무는 것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서울시 남산 별관과 교통방송 건물 등을 모두 허문다는 계획이다. 유스호스텔로 쓰이는 본관 건물도 임대 기간이 지나면 철거해 녹지로 바꾸기로 했다. 지난 2003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등 18개 인권단체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안기부 본관을 유스호스텔이 아닌 인권기념공원으로 만들자고 요청했다. 이명박 당시 시장은 이를 거부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제 아예 그 공간 전체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정치공작과 인권침해를 오랜 세월 연구해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를 보존한 독일을 비롯해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불행한 역사를 기념관으로 만든 사례는 해외에도 많다.”며, “남산의 옛 안기부 청사를 평화와 인권의 기념관으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한홍구 교수는 옛 중앙정보부 건물 중에서 대표 격인 중앙정보부 남산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 지하취조실(제6별관, 현 서울유스호스텔 앞 서울종합방재센터)과 대공수사국(제5별관, 현 서울시청 별관) 그리고 ‘6국’(현 서울시균형발전본부) 건물은 꼭 보존해야 한다고 꼽았다. 그는 “서울시와 공식적인 협의를 통해 이 건물들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철거가 아닌 다른 형태로 되살리는 방안을 만들어보려 한다.”고 설명했다. 2011년 6월10일(중앙정보부 창설 50년)을 목표로,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유엔과 아우슈비츠박물관 등 인권·평화 관련 국제기관·단체들과 함께 근대유산 지정 청원을 할 계획이다. 근대유산 지정이 이뤄지면, 이곳을 ‘아시아인권평화센터’ 또는 ‘평화공원’으로 만들자는 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킨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 통감부 설치와 한일합방
을사조약에서는 대한제국 황제 밑에 일본정부의 대표자로 1명의 통감을 두어, 한일의정서 이후 제한되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통감이 지휘·감리하게 하였다.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 만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주재하도록 하였으며, 개항장 및 기타 지역에 이사관을 두어 통감 지휘 하에 일본 영사가 관장하던 일체의 직권 및 협약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1905년 11월 22일에 ‘통감부 및 이사청 설치에 관한 칙령 240호’를 발포하였다. 이후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만 관리한다고 을사조약에 명시되었지만, 일본은 을사조약 이전에 한일 양국 간에 체결된 기존의 조약은, 을사조약과 저촉되지 않는 한 유효하다는 조약 내용에 근거하여, 외교 이외에도 종래의 양국 간의 조약 시행을 담임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하여, 통감의 직권 확장을 도모하였다. 결국 이후의 관제에 따라 통감은 한국의 외교 대행자일 뿐만 아니라, “조약에 기초하여 한국에 있어서, 일본 제국 관헌 및 공서(公署)가 시행하는 제반 정무를 감독하고 기타 종래 제국 관헌에 속하는 일체에 대해 감독사무를 시행”하도록 하고, “한국정부에 용빙된 일본제국 관리를 감독” 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를 통하여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한국 정부에 꾸준히 파견된 고문관에 대해 통감이 감독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른바 고문통치를 통해 한국 내정에 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통감부는 일본 외무성에서 독립된 천황 직속의 기관으로, 통감 유고시에는 일본의 한국 주재군 사령관이 그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 주재군 사령관은 통감의 명령으로 병력을 사용할 수 있고, 긴급한 경우에는 재량으로 병력을 동원하고, 사후에 통감에게 보고하도록 규정되었다. 이처럼 통감부는 일본군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06년 3월 2일 위풍당당하게 통감으로써 한국에 도착한 이등박문은 그 후 일체의 준비를 마치고, 통감부의 개청식 및 이등통감 착임의 피로연을 3월 28일 대화정(大和町)의 주차군사령부 내에서 개최하였다. 통감부는 실제로는 1개월 전부터 업무를 개시하였으나 이 때 개청식을 할 수 있었다. 이날의 대축연과 가든파티에는 한일 양국의 문무현관, 신사, 귀부인, 재한 제 외국인을 합하여 무려 이천 명에 달하는 많은 내빈이 참석하였다. 전일까지는 구름이 많았던 날씨도 이날은 갑자기 변했으며, 통감에게는 좋은 형편이 되었다. 하늘은 약간 흐린 정도에 머물렀지만 좋은 날씨였다. 주차군 사령부 입구에는 장대한 아치에다 한일 양국의 대형 국기를 교차하였고, 무수한 크고 작은 둥근 등 그리고 만국기 등을 연결해서 달았다. 산정의 수목에는 모두 종이로 만든 꽃을 떨어뜨려 밝은 봄 3월 벚꽃이 활짝 핀 듯한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정면에 가설한 함석지붕의 건물은 넓이가 수백 평이 넘었고, 이곳을 그날 식장 겸 식당으로 사용하였다. 천정을 받드는 기둥은 모두 홍백의 면직물로 만든 조화로 둘러싸서 장관이었고, 아름다움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좌석이 정해지고 식순에 의해 군악대가 취주하는 기미가요(일본 국가)와 더불어 한국 국가 삼창을 하였고, 우뢰와 같은 박수 속에 이등통감은 제복 상의의 가슴팍에 빈틈없이 훈장을 달고 유연하게 단상에 올라와 낭랑한 음성으로 사방에 울려 퍼지는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다. "대한국 각 대신 및 장관 각하, 내외 신사, 귀부인 여러분, 근래 내가 통감의 직을 맡게 되었고 여러분의 후의어린 원조를 얻고자 원하여 오늘 왕림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나의 희망이 헛되지 않게 이와 같이 많이 내왕해 주셔서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통감으로써 나는 일본을 대표하여 이곳에서 그 임무에 진력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매우 어려운 일로 생각합니다. 특히 이와 같은 임무는 본디부터 전혀 경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한일 양 국민 및 이곳에서 살고 있는 누구를 불문하고 외국에서 이곳에 와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분의 원조에 의해서만 그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고 기대합니다. 특히 한국의 개발과 한국의 진보를 원조하기 위해서 내가 진심으로 정열을 쏟아 붓고 싶습니다. 부디 천하 각 나라에서도 나의 성실성심(誠實誠心)을 양해해주기를 바랍니다." 통감의 연설에 이어 참정 박제순씨가 일어나 내빈의 대표로 국분서기관의 통역으로 답사를 하였다. "우리들은 금일부터 한일 양국의 교의(交誼)가 한층 더 돈후해질 것을 바라고, 통감각하의 지도 아래 국정의 개선 및 국가의 부강을 기대한다." 그런 뒤 이등통감의 선창으로 대한황제폐하의 만세, 박참정의 선창으로 일본 천황폐하의 만세를 삼창하고 대중은 이를 따라 하였다. 샴페인의 잔을 들어 화기양양한 사이 개청식은 끝이 났다. 그런 후 통감은 직접 마차를 전신국으로 타고가, 대기(大磯-오이소) 자택에 순조롭게 개청식을 마친 사실을 알려주었다.
통감부 설치 초기에 고문통치를 통해 정부와 내각을 어느 정도 장악하게 되었으나, 광무 초기를 중심으로 강화된 대한제국 황제의 권한과 궁내부의 권한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끊임없는 불만을 드러내며, 황제권에 대한 해체를 시도했고, 고종황제는 친일 내각의 붕괴를 시도하여 서로 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통감 이토는 1907년 5월 22일에 박제순 내각을 해체하고, 고종의 폐위를 주장한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발탁했다. 나아가 6월 14일에는 갑오·을미개혁 이후 꾸준히 시도해오던 ‘내각 관제’를 발포했다. 일본의 내각을 모델로 한 새 관제에서 내각총리대신은 의정부의 참정대신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황제권의 제한을 위한 것이었다. 곧이어 일본은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고종의 폐위를 단행했다. 1907년 7월 19일에 고종의 황태자 대리 조칙이 발표되었고, 일제는 7월 20일에 양위식을 진행하여 대리가 아닌 양위로 몰아갔다. 이와 함께 고종과 순종의 격리, 병력의 증강 등을 통해 정국의 경색을 가져왔고, 7월 24일에는 제3차 한일협약, 이른바 정미7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정미7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규정하여 통감의 내정 관여를 공식화했다. 또한 행정상 처분도 통감의 승인이 필요하도록 하였으며, 한국의 고등관리 임명 동의권 등을 통감에게 부여하여, 한국 내정의 최고 감독권자로 부각시켰다. 또한 고문 통치를 대신하여, 일본인을 직접 관리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른바 차관 정치의 시작이다. 또한 이완용과 이토 사이에 비밀리에 조인된 각서에서는 군대 해산과 한·일 양국인으로 구성된 재판소를 신설하는 등 국권을 순차적으로 해체시키는 데 합의하였다. 경찰권과 함께 사법권·행정권·군사권의 장악을 도모한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 조직에 일본인이 임명되면서 통감부의 조직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통감부는 여전히 대한제국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고위 기구로 군림하면서, 입법·사법·행정·군사 등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을 지배했다.
통감부는 고종 폐위와 정미7조약 체결 등에 일본군부의 지원 하에 활동하던 일진회를 이용하였으나, 의병 항쟁 등 전국적인 반일 운동이 거세지자 일진회가 반일운동의 목표로 대두되면서 부담을 느끼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완용이 권력에 핵심에 서는 것에 반발한 송병준은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 병합에 소극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일본 내의 강경파나 병합 급진론자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일본 내의 강경파는 이토의 정책이 온건해 헤이그 밀사사건 등이 일어났으며, 병합만이 이러한 상황의 대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토는 한국에는 자신이 적임자라며 정책을 고수했고, 송병준을 내부대신으로 전임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우치다 료헤이 등의 지원을 받은 송병준은 내각에서 사퇴하여 본격적으로 병합 운동을 벌이겠다고 주장하였으며, 일진회의 이완용 내각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었다. 결국 일진회장 이용구는 1908년 9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의 경질과 함께 병합을 호소하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이토의 경질에 찬성해 이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으나, 이토가 귀국한 후 정계로 복귀할 것을 우려한 총리 가쓰라 다로는 찬성파에서 이토의 유임을 주장하는 등 경질은 난항을 겪었다. 이토는 위기에 닥치자 1909년 4월 10일에 가쓰라 총리와의 회합에서 병합의 단행에 이의가 없다고 표명하여 여론의 전환을 도모했다. 하지만 여론의 악화를 이기지 못한 이토는 6월 14일에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직을 넘기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결국 일진회의 병합 촉진 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진회는 지속적으로 한일합병을 탄원하였으나, 이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당시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의 의사를 왜곡한 것에 불과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면서 이토의 동양평화론이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거짓 평화론이라 주장하였다. 게다가 병합 가속화시에 주도권을 잃는 것을 우려한 이완용 내각도 일진회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진회는 12월 4일에 일한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 황제와 총리대신, 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했다. 1910년 5월 30일에 일제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한국통감으로 겸임시키고, 한국 병합을 진행시켰다. 6월 30일에는 유명무실하던 한국 경찰을 일본 한국주재군 헌병대에 통합시켜 폐지하였다. 7월 23일에 한국에 도착한 데라우치는 8월 16일에 이완용과 함께 병합 조약 체결을 진행시켰다. 8월 18일에는 별다른 수정 없이 병합조약안이 한국의 각의를 통과했고, 8월 22일에는 형식적인 어전회의에서 이완용이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같은 날 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리고 8월 29일에 한일 병합 조약이 공포되었다.
▲ 안기부청사 제1별관터-예장동 4-5번지
서울유스호스텔을 지나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은행나무 뒤로 벤치 몇 개 달랑 놓인 잔디밭이 보인다. 2007년까지 그곳은 시멘트로 바닥을 바른 농구장이었다. 99년 전 1910년 통감 데라우치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몰래 숨어 한일합방조약을 맺은 곳이라는 것을 기억할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기관의 이름을 뺀 준공 기념비와 표지석 조차 없는 잔디밭은 ‘망각’을 유도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조약이라고 부르는 통상조약을 맺는다. 서대문 밖 천연정, 교동의 박영효집으로 옮겨 다니던 일본공사관이 1885년 남산기슭 왜성대에 자리를 잡는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곳은 조선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관저가 자리 잡는다. 이 통감관저에서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을 포함한 8대신들이 불려와 한일합방 서명을 한다. 황제였던 순종의 서명은 없다. 1주일후인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된다. 경술국치의 현장이 남산 기슭 총독관저 터이다. 통감관저는 한일합방이후 조선총독부 관저가 된다. 총독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옮긴 이후 건물은 헐리고 말았다. 해방 후 총독관저 터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자리를 잡았다. 안기부는 국가안전보다 권력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한 장소이기도 하다. 총독관저 앞에 있었던 은행나무는 400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키며 흔적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현재 잔디밭 공원으로 남아 있는 일본 통감관저 터도 마찬가지다. 역사신탁 사업 실무를 총괄할 서해성 소설가(한신대 외래교수)는 “일단 내년이 한일합방 100년인 만큼, 100년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의 현장으로 삼기 위해, 경술국치 현장인 통감관저를 옛 모습으로 복원해 생생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드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며 “경술국치의 현장을 되살릴 다른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올바른 복원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르면 9월 하순에 역사와 건축에 대한 국제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라며 “이 심포지엄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존하는 폴란드와 일제 식민지를 경험한 중국과 대만의 전문가들은 물론, 일본 학자들도 불러 인류 공통의 지혜를 모아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중앙정보부장의 옛 관사에서 통감관저 터까지는 보통 걸음으로도 3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곳이 통감관저가 있던 자리임을 확인해줬던 하야시 곤스케(1860~1939)의 동상 받침대 판석은, 통감관저 터 옆 공터의 석조 벤치가 돼 있었다. 2006년까지 시멘트 바닥 농구장이었던 이 터를 잔디밭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이 대리석 널판의 의미를 알 리 없는 건설업자가 벤치로 재활용한 것으로 보였다. 통감관저 터에 들어서면 뒤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석조 계단이 보인다. 계단은 휑한 시멘트 바닥의 공터로 이어진다. 한홍구 교수는 “바로 여기가 1961년 중앙정보부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며, “당시에는 여기에 퀸셋 막사(천막으로 만드는 조립형 군용 막사)를 치고 처음 정보부 요원들을 모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정보부 요원들이 늘어날 때마다 남산 곳곳에 퀸셋 막사가 들어섰다. 그 일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왜성대’ 지역이다. 한 교수는 “이 자리에는 1970년대 중반에 제1별관이 들어섰는데, 이 건물에서는 주로 통신 도·감청이 이뤄졌기 때문에, 1995년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가 여기를 떠나면서 폭파 해체하도록 요청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제1별관이 해체된 공터 옆에는 안기부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천정배 의원은 “1980년대 안기부에 끌려간 이들을 접견하려면 남산 안기부 입구에 있는 ‘주자파출소’에서 면회를 신청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며 “그나마 안기부가 조사 중인 인물의 접견을 허용한 것은 1989년 문익환 목사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안상운 변호사도 “민변 활동 당시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이들을 면회할 수 있는 곳은 3곳이었다.”고 자신의 경험을 밝혔다. 가장 보편적인 곳이 서울 중부경찰서 면회실로, 주자파출소에서 접견을 신청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중부경찰서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안상운 변호사도 문익환 목사를 중부경찰서에서 접견했다. 중앙정보부장 관사에서 멀지 않은 정문 쪽 면회소에서도 접견이 이뤄졌다. 1990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활동을 하다 구속된 박노해 시인을 정문 면회소에서 만났다고 했다. 1992년께는 본관에서 접견이 이뤄지기도 했다. 안상운 변호사는 “1992년 안기부에 붙잡힌 전대협 간부들은 안기부 본관에서 면접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팽팽한 긴장의 순간도 잠시. 정문 초소에서 폭파 단추를 눌렀다. “쾅” 하는 굉음에 이어 연쇄 폭발. 높이 18.5m(5층), 연면적 2581㎡(약 781평) 규모의 직사각형 회색 건물이 도미노식으로 내려앉았다. 건물 외벽에 둘러친 차단막을 뚫고 뿌연 회오리 먼지가 치솟았다. 10여 분 뒤. 먼지가 가라앉은 잔해 위로 남산타워가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1996년 8월 4일. 남산의 옛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청사 제1별관이 서울시의 ‘남산제모습 찾기사업’의 하나로 폭파 해체됐다. 민주화 탄압과 인권 유린으로 악명 높았던 안기부 청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초. 30여 년 공포정치의 무소불위 권력은 무상했다. 이보다 앞선 1995년 9월. 안기부가 서울 서초구 내곡동 신청사로 이전해 23년간의 ‘남산시대’가 막을 내렸다. 안기부는 5·16군사정변 직후 김종필씨 주도로 창설된 중앙정보부의 후신. 러시아혁명 뒤 레닌이 만든 체카(KGB의 전신)나 히틀러가 조직한 게슈타포가 그랬듯이 ‘반정부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정치사찰, 정치공작, 언론탄압이 이뤄졌던 곳이 안기부 청사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장세동 안기부장이 한때 이곳의 주인이었다. 군사독재의 절정기에는 음습한 정치공작과 고문이 벌어졌다. 유신헌법 반대 시위 대학생들의 체포에 항의하던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가 1973년 의문사한 곳도 여기다. 남산시대가 끝나자 ‘남산’이란 단어 자체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시절은 기억 저편으로 묻혔다. 안기부는 어두운 이미지를 씻고 국민에게 다가가겠다고 약속했다. 제1별관 폭파는 새 출발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99년 그 이름도 국가정보원으로 바꿨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국정원은 어떤가.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사찰, X파일 유출, 도청 등 독재정권의 구태를 다 정리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처남의 부동산 자료 열람 등을 놓고 공작정치 논란을 빚고 있다. 지난해 8월 한 달 동안에만 정부 전산망으로 수천 건의 개인정보를 열람한 사실도 드러났다. 남산 안기부 청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본관은 그대로 남아 세계의 젊은 대학생들이 모여드는 서울유스호스텔로 바뀌었다. 3일 총지배인에게 물으니, 21개국 젊은이 300여 명이 이곳에 머물며 미래 지향적 국제교류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조직과 사람은 아직 옛 버릇을 못 버렸는지 몰라도 건물만은 환골탈태한 셈이다.
▲ 읍백당(挹白堂)터(박승종집터)-예장동2 서울종합방제센터
예장동 2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박승종(朴承宗)의 집터이다. 읍백당터라는 표지석이 있는 곳은 조선시대 광해군 때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으며, 광해군 세자빈의 할아버지로 밀양부원군에 봉해졌던 퇴우당(退憂堂) 박승종(1562~1623)과 차남 읍백당(悒白堂) 박자응(朴自凝,1589~1845)의 집이 있었다. 박승종은 인목대비 폐비론을 적극 반대했으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부원군이었던 장남 박자흥(朴自興,1581~1623)과 함께 자결하였다.
※박승종(朴承宗)-1562(명종 17)~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 자는 효백(孝佰), 호는 퇴우당(退憂堂). 할아버지는 지충추부사 계현(啓賢)이며, 아버지는 안세(安世)이다. 1586년(선조1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봉교·지제교·병조정량 등을 지냈다. 1600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부제학·병조판서, 1610년(광해군2)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尹認)·이인경(李寅卿) 등이 경운궁에 난입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영창대군의 어머니)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저지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극력 반대했다.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좌의정, 1619년에는 영의정이 되고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아들인 자흥(自興)의 딸이 1611년 광해군의 세자빈으로 책봉된 뒤부터 일족이 권세를 누려온 것을 자책해 아들과 함께 목을 매고 자결했다. 이어 관작이 추탈되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박자응(朴自凝)-1589(선조 22)∼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 자는 정길(正吉), 호는 읍백당(挹白堂). 영의정 승종(承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사원(金士元)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세자시강원사서 및 홍문관부수찬을 거친 뒤 1617년에는 홍문관부교리·성균관직강·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고, 1618년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론이 대두되자, 신병을 핑계로 불참한 이유로 이듬해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0년 영광군수를 거쳐, 그 뒤 홍문관수찬·정자 ·교리·응교 및 헌납·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제주로 유배되고, 이재영(李再榮) 등의 공사(供辭)에 의하여, 그의 급제가 차술(借述)임이 밝혀지자 삭과(削科)되었다. 1628년(인조6) 진도로 이배된 뒤 이듬해 위리(圍籬)만 철거되었다. 박자응이 폐모의에 참석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간하는 그의 언사가 파격적이었다. 그 내용을 살피면 "23적신이 국모를 폐하고자 하니 천인공노할 패륜이오니 전하께서 만약 용납하시면 과격한 유생이 수백 명 떼지어 강상을 바로 잡고자 하면 상감께서는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그 후 어전에 등대했다가 폐모를 주장하는 흉소가 들어오자 박자응은 광해군의 면전에서 찢어 버렸다. 호를 읍백당이라 하였다. 흰 것을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항상 결백을 견지한다는 정신을 표출한 것이다. 박자응은 인조반정 때까지 적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다시 출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박자응은 벼슬에 환멸을 느껴 고향 목천현 말원으로 돌아가 여생을 시주로 자오하며 마쳤다.
※박자흥(朴自興)-1581(선조 14)∼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 초명은 흥립(興立), 자는 인길(仁吉). 영의정 승종(承宗)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이때 고시관이 아버지와 장인인 이이첨(李爾瞻)이어서 물의가 분분하였다. 1611년 5월 설서(說書)가 되고, 7월에는 딸이 세자빈으로 책정되자 벼슬이 정6품인 전적으로 올랐다. 그 뒤 정언·사서·이조정랑·동부승지·형조참의·전라감사·부제학·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621년 대사성이 되고 다음해 경기감사 로 재직 시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함께 과천에 있는 절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이이첨의 사위였으나 서로 반목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때에는, 형조참판으로 폐비절목(廢妃節目)을 정하는 등 앞장섰고, 딸이 세자빈이 된 뒤 권세를 얻어 민전(民田)을 탈취하고 사치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 한명회집터-예장동2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정치가로서 널리 알려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의 집은 남산기슭 예장동 2번지에 있었다. 생가의 비각. 이곳 비서감(秘書監) 동쪽은 무학대사가 정한 암석의 집터로 곧 한명회의 집이기도 하였다. 이집 서쪽 언덕에는 석간천(石間泉)이 있었으며 물맛이 좋고 또 세조(世祖)가 마셨기 때문에 어정(御井)이라 하였으며, 그 위에는 소조당(素凋堂)의 유지(遺地)가 있었는데, 뒤에 후조당(候凋堂)으로 변하고 고종(高宗)때에는 녹천정(鹿川亭)으로 바뀌었다. 한명회의 자는 자준(子濬)이며 호는 압구정(鴨鷗亭) 또는 사우당(四友堂)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청주(淸州)로 상질(尙質)의 손자이며 증영의정(贈領議政) 기(起)의 아들이며 예종(睿宗)의 비(妃)인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成宗)의 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아버지이다. 1452년(문종2) 음보(蔭補)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고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게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 등 30여명을 추천, 그의 심복을 삼게 하였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癸酉靖亂)에 수양대군을 도와 군기녹사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 소윤(司僕侍 少尹)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했으며, 이해 가을 좌익공신 1등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이듬해(1456)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 시키는데 중요역할을 담당하고, 그들의 주살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증지에 승진되었다. 1457년(세조3)에는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세조5)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낸 후에 1461년에는 상당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고, 이듬해 우의정에 이어 1463에 좌의정을 거쳐 1466년(세조12) 영의정이 되어 병으로 한 때 사임했다가, 다음해 신숙주 등과 앞서 편찬에 착수했던 신제대전(新制大典)의 초안을 완성하였다. 1467년(세조13)에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는 소문이 돌아 피체, 신문을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고, 1468년에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이 해 남이(南怡)의 옥사(獄司)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1 등에 올랐고, 1469년(예종1)에 영의정에 복직 되었으며, 이 해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471년(성종2)에는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이 해 영춘추관사로서 최항·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완성하고, 1484년(성종15) 70세로 궤장을 하사 받았다. 세조의 총신으로 왕을 보필하여 조선 초기 문화의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했으며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윤비(尹妃) 폐사(廢死)에 관련했다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 한명회 일대기
1504년(연산 10) 4월 21일 연산군의 추상같은 호령에 모든 대신들이 벌벌 떤다. 누구라도 감히 반대 의견이나 부언을 달았다간, 언제 자기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피 바람이 소용돌이친다. "이극균(李克均)·윤필상(尹弼商) 등이 살아서는 인군(仁君)을 업신여기고 죽을 때는 분(噴)을 내었으니, 어찌 신하의 예인가? 이유녕(李幼寧)은 형벌에 임하면서 원망하는 말이 없었고, 이르기를 `죽어도 남은 죄가 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곧 신하의 예의가 아닌가? ........................(중략)
“이극균·윤필상(尹弼商)은 살아서는 교만하여 위를 업신여기고, 죽을 때는 분(噴)하여 독을 내었으니 이것은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일이다. 이세좌(李世佐)도 죽을 때에 역시 노복(奴僕)에게 성을 내었으니 시신을 베어, 함께 사방에 돌려 경계시키게 하라. 대신의 머리라도 어찌 돌려 보이지 못할 것이랴? 무릇 신하로서 이러한 자는 닭이나 개로 대우해야 할 것이다.”라고 엄명한다. 또한 송흠(宋欽)·이파(李坡)·윤필상·이세좌를 모두 능지처참(陵遲處斬)하여 시체를 돌리게 하라.”고 하명하니, 조회에 참여한 유순(柳洵)·허침(許琛)·박숭질(朴崇質)·이계동(李季仝)·김수동(金壽童)·김감(金勘)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고 아부를 떤다. 이어서 왕에게 진언하기를,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한명회(韓明澮) 등은 처음에는 간(諫)하였다가 후에 따랐으니, 그 죄가 윤필상에 비하면 차이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에 연산군이 대꾸한다. “3인이 처음에는 정지(停止)해 달라고 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신들이란 큰일을 접하면 시종 고집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 저들은 죽은 지 벌써 오래 되어 다 썩은 뼈를 베는 것이 이익 될 것은 없지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나라에 불충하면 죽은 후라도 베임을 면치 못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게 해야 하니, 이렇게 징계함이 가하다.”고 말하니, 여러 대신들이“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고 합창을 해댄다. 동년 5월 11일 의금부에서 연산에게 아뢰기를, “의금부 낭청(義禁府郞廳, 의금부 소속 5∼6품의 문관)이 청주로 내려가 한명회의 관을 쪼개어 머리를 베어 왔다.”하니, 전교하기를, “죄명을 써서 저자거리에 효수(梟首, 목을 높은 곳에 메달아 놓는 형벌)하라.” 명령한다.
이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면 이렇다. 연산의 생모인 폐비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와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연산이 궁중 뜰에서 두 후궁(작은 어머니)을 참(斬)한 뒤 산야(山野)에 방치시키도록 명령하고,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귀양보낸 뒤 사사(賜死)를 한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했던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를 머리로 들이받아 절명케 만든다. 그리고는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찬성을 한 윤필상, 김굉필(金宏弼),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이주 등 십여 명을 사형시키고, 이미 죽은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은 등은 유골을 꺼내어 토막을 내는 부관참시를 시행토록 한다. 이 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등 수 십 명에게는 참혹한 형벌을 내리고, 이들의 가족, 자녀까지도 연좌죄를 적용하여 처벌했던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한 장면이다. 살아생전에는 날던 새도 떨어트린다는 천하의 권력자 한명회가 음택지에 안장 된지 꼭 17년 만에 일어난 변고다.
한명회의 일대기를 담은「비서(碑嶼)」의 내용이다. ‘일곱 달만에 세상에 태어나 처음에는 완전한 사지(四肢)를 갖추지 못하였다. 늙은 여종이 떨어진 헌 옷에 싸두었는데, 몇 달이 지나서야 사람의 형체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등과 배에는 천태(天台, 별)와 북두칠성(北斗七星)처럼 생긴 검정 사마귀가 박혀있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고 적고 있다.
한명회의 가계도를 보면 조부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들어가 ‘조선’ 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韓尙質, 예문관대학사)로, 명문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일찍 부모를 여인 한명회는 생긴 것이 변변치 못하여, 어릴 적부터 칠삭둥이란 별명과 함께, 머리가 유독 커 '대갈장군' 이란, 별명이 하나 더 붙어 또래들의 놀림을 받으면서 자란다. 그래도 가문의 후광(後光)으로, 열 살 때에 중추부사 민대생의 사위로 장가를 들었는데, 그의 장모인 허씨 부인의 심한 반대에 부딪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장인 민대생은 부인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당시 민대생의 딸은 장안에서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천하의 추남인 한명회의 여식들은 모두가 예쁘게 성장하여, 두 딸이 모두 왕비로 출가하였으니, 민대생의 선견지명은 적중했던 것 같다. 초년 시절의 한명회는 권남(權擥)과 생사의 벗이 되기로 맹세하고, 그와 함께 산천을 떠돌며 해가 바뀌어도 집에 돌아올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런 인연이 되어 훗날 권남의 천거로 한명회는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긴 대 재상의 반열에 선 것이다. 한명회가 압구정(狎鷗亭)이란 호를 사용하게 된 것은, 일찍이 중국 송나라 때의 한기(韓琦)란 재상이 살았는데, 만년에 정계를 은퇴하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이라 한 고사에서 인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명회는 은퇴를 하면 정자나 짓고 한 평생을 살 욕망으로, 한강변에 경관이 뛰어난 동호(東湖, 동호대교 우측)에 있던 저자도(楮子島)를 선택하여, 두 개의 섬 중, 사람이 살지 않던 무인도에 `압구정` 이란 정자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압구정은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 때만 사용되었고, 평상시는 비어 놓았다고 한다. 압구정은 조선 5백 년 역사와 함께 수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구한말 때에 박영효에게 넘어간다. 그러나 박영효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압구정도 철거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명회의 일생은, 초년에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일찍이 과거에 도전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다가 38세가 되던 1452년에 빽(문음)으로 경덕궁직(임시직)으로 관직에 진출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세상을 호령할 나이이지만 말단 벼슬길에 오른 압구정은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를 않았다.「대동기문」에 그 때의 압구정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어느 날 경덕궁 관리들이 만월대(滿月臺)에서 계모임을 하게 된다. 이 모임은 서울인 타향에 나와 벼슬을 하던 관리들의 모임이었는데, 술과 자리가 마련되고, 압구정도 그 자리에 끼게 된다. 그러나 계원들이 합석을 꺼려하고, 푸대접을 한다. 다음 해에 세조가 등극하고, 한명회는 일등공신에 오르면서, 일약 임금의 장인이 되자, 그 때 참석한 모든 계원들이 몸둘 바를 몰랐다고 한다.' 압구정 한명회는 뛰어난 모사와 책략으로 친구인 권남에게 수양대군의 거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권남은 다시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를 책사(策士)로 천거한다. 한명회가 없었더라면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명회의 역할이 컸는데, 정난(靖難)이 성공하고, 9년 뒤 1463년(세조 9)에 좌의정을 거쳐 1466년(세조 12)에 영의정으로 오르면서, 일개 임시직이던 그가 불과 1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을 대상으로 정략적인 결혼 등, 친인척 관계를 맺어가면서 권력의 기반을 다져나간다. 우선 그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장순왕후, 17세 사망)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작은딸을 성종(공혜왕후, 18세 사망)에게 보내면서, 2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한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딸 공혜왕후는 친 언니가 시어머니가 되는 아이러니한 혼사였다. 또 집현전 학자로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숙주와도 인척관계를 맺었고, 자신을 반열에 오르도록 한 권남과도 사돈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고속도로를 질주하듯 순탄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466년(세조 12)에 일어난 '이시애 난' 때,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들면서 신숙주와 함께 죄인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히지만, 결국 무혐의로 석방된다. 1468년(세조 14)에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지(遺旨)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정사의 결재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되는데, 이 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한다. 이후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고, 노년에는 부원군(왕비의 아버지)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고, 죽을 때 까지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성종 18), 73세로 세상을 하직한다.
▲ 구 안기부장 공관터-예장동2-20(문학의집) 옛 중앙정보부장 관저.
대지 793.7㎡, 연건평 491.94㎡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이며, 1975년부터 국가안전기획부장 공관 및 공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6년 서울특별시가 매입하였다. 이후 남산 한옥마을 조성 등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이 추진되면서 이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로 하고, 2001년 7월 12일 개수·보수 작업에 들어가 같은 해 10월 '시민의 날' 주간에 맞춰 개장하였다. 건물 1층은 전시실·세미나실·자료정보실로, 2층은 접견실·사랑방·휴게실로 이용된다. 또 매주 작가와의 만남, 시 낭송회, 시화전 등을 개최하며, 청소년 관련 문학행사의 하나로 백일장, 문학강연을 한다. 운영은 100여 명의 문인이 설립한 사단법인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에서 맡는다. 남산에 둘러싸인 320평 규모의 산림문학관은 기존의 안기부 경호원 숙소 건물을 완전히 헐고 2005년 신축한 것으로, 문학관은 외벽을 통유리로 해 아름다운 남산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했으며 강당과 북카페, 세미나실, 영상실 등이 마련돼 있다.
▲ 구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청사(舊 日本赤十字社 朝鮮本部 廳舍, 현 대한적십자사 사옥)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청사는 남산동3가 32-2번지에 소재하는 철근콘크리트조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이며, 1933년 2월에 착공되어 9월에 완공되었다. 본 건물은 단순한 박스형 매스의 조합을 근간으로 구성되었으나, 저층부와 계단실의 처리가 전체적으로 동 시기에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볼륨감 있는 세련미를 연출하고 있다. 특히, 건물 상부로 돌출된 계단실에 사용된 전면 창호와 주 출입구 측 2층 벽면의 장방형 창 및 3층 벽면의 정방형 창호의 단순한 반복 배열은, 이 땅에 건축된 모더니즘 건축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특히 남산에 오르는 경사 길에 위치하여, 각 조망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조형 감각이 연출되는 것도 본 건축물이 갖는 모더니즘 건축의 아름다움이다. 신축 당시 1층은 현관·사무실·소집회실·응접실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2층은 대집회실·귀빈실·예비실, 3층은 다다미를 깔은 소집회실과 일본식 숙박실·탕비실 그리고 옥상에는 정원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부분적인 증축이 이루어지고 외장이 개보수 되어 예전의 모습을 많이 상실하였다. 현재 대한적십자사가 사용하고 있다. 한 때 안기부의 행정업무 공간으로 주로 쓰였지만, 건너편 세종호텔에 투숙한 사찰 대상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 서울종합방제센터-예장동6-7(박승종집터,건설안전본부)
길쭉한 원통형 철탑을 모자처럼 쓴 방재센터 건물은 1층짜리 구조물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면 지하 3층까지 이어진다. 그 옛날 안기부로 끌려온 이들은 본관 지하 통로를 통해 방재센터 건물 지하로 끌려갔다. 건물의 당시 명칭은 ‘제6별관’.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이 ‘안기부 지하 벙커’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던 곳이다. 그만큼 수많은 조작과 고문이 이뤄진 현장이다. 당시 ‘제6별관’에는 아예 지상 구조물이 없었다. 건물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도록. 지하 통로를 따라 지하 1층으로 끌려간 이들은 다시 지하 2층으로 옮겨졌다. 지하 2층에는 복도 양쪽으로 화장실이 딸린 4~5평 크기의 취조실들이 10여 개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는 대형 취조실이 있었고, 취조실을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특수한 창문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지하 3층 한쪽에는 유치장도 있었다.
▲ TBS교통방송국-예장동3-8
TBS교통방송(면적 1962.2㎡)과 서울시 소방방재본부 두 건물 역시 안기부 청사였다. 수사 기능과 행정 기능을 맡았다. TBS교통방송(Traffic Broadcasting System)은 질서의식의 함양, 교통문화 정착을 방송목표로 삼고 서울시 교통방송과에서 운영 관리하고 있는 지역교통방송이다. 가청지역은 서울과 경기일원이며, 표준FM 95.1MHz로 방송하고, 교통정보, 오락 및 음악 등 하루 20시간 방송해주는 TBS는 TBN과 별개로 DMB와 TV, FM라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본사는 서울시 중구 예장동에 위치하고 있다.
TBN한국교통방송(Traffic Broadcasting Network)은 질서의식의 함양과 교통문화 정착,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 명랑한 국민생활의 길잡이라는 방송목표를 가지고 1997년 12월 20일 개국되었다. 1997년 광주와 부산교통방송이, 1999년 서울 신당동의 본사를 신축, 대전과 대구교통방송이 방송을 시작하였고 2001년에 강원인천방송이, 그리고 2002년에 전주교통방송이 개국하였다. 2006년 현재에는 부산교통방송(94.9MHz), 광주교통방송(97.3MHz), 대구교통방송(103.9MHz), 대전교통방송(102.9MHz), 인천교통방송(100.5MHz), 강원교통방송(105.9MHz), 전주교통방송(102.7MHz)과 DMB(183.00008MHz)를 운용하고 있으며, 뉴스, 교양, 오락, 기상, 교통제보 등 FM방송은 하루 20시간, DMB방송은 24시간 보내주는 교통전문방송이며, 가청지역은 제주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교통방송을 들을 수 있다. TBN한국교통방송 본부는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 위치하고 있다. TBN한국교통방송은 라디오만 전문으로 방송하고 있다.
▲ 남산빌딩(전KBS방송국터,대한민청,동봉신사터)
현재 삼화제분(주)가 본사 사옥으로 사용 중이나, KBS가 여의도에 본사를 짓기 전까지 서울텔레비전방송국 연주소(演奏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방송과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지금은 홍릉에 있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가 한국영화진흥공사이던 시절 이곳을 거쳐 갔고, 지금은 한국영화감독협회가 이 건물에 입주해 있다. 4층 콘크리트 건물인 이 빌딩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3층이다. 야트막해 보이는 건물이 오롯이 서있다.
▲ 남산예술센터-예장동 8-19(서울예대드라마센터터)
서울예술대학은 1960년대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센터의 부설 연극학교로 시작했다. 이미 유명 연극인, 예술인들을 배출한 서울예술대학은 안양으로 터전을 옮기고 지금 있는 건물 중 두 동은 서울시에서 임차 사용 중이다.
▲ 서울애니매이션센터남관-예장동8-145(전KBS라디오방송국터,왜성대,통감부,일본영사관)
1999년 5월 개관하였다. 한국 만화, 애니메이션산업에 대한 종합적 지원, 만화, 애니메이션 산업진흥의 구심체 역할, 만화, 애니메이션 산업을 서울형 산업으로 집중 육성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설립하고 서울산업통상진흥원이 위탁운영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만화, 애니메이션 전문 교육, 어린이, 청소년 교육, 애니메이션 영화제 및 전시회 개최, 전문 정보자료 구축 및 정보실 운영,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제작지원. 해외 페스티벌 출품 및 참가와 국내외 마케팅 지원, 프리, 포스트 프로덕션 제작 지원을 위한 기술지원실 운영, 창작지원실 입주지원, 캐릭터 상품화 개발 지원을 위한 캐릭터 원형제작실 운영 등을 수행하고 있다. 시설은 2005년 1월 개관한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전용관 서울애니시네마를 비롯하여 도서정보실, 만화정보실, 미니시어터 등으로 이루어진 만화의 집, 테마전시실, 기획전시실, 캐릭터체험전시실1 등의 관람시설과 체험관, 세미나실, 원동화실, 디지털교육실, 캐릭터체험전시실2 등의 교육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또 영상편집실, 녹음편집실, 캐릭터원형제작실 등의 전문시설과 협회사무실, 창작지원실 등을 갖추고 있다. 서울애니매이션센터 북관 앞은 과거 통감부터였다.
▲ 김익상의사의거터(리라초교)-예장동 8-145(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정문 왼쪽)
김익상(1895~1925)은 독립운동가로서 1921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총독암살의 밀령을 받고,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여 당시 남산에 주둔하고 있던 총독부건물에 잠입한 후 폭탄을 던진 곳이다. 김익상은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로 근무하다가 상경하여, 광성연초공사(廣成煙草公司) 기계감독을 지냈다. 1920년 펑톈[奉天] 지점으로 옮긴 뒤 비행사가 되기 위해 광둥[廣東]으로 갔으나, 중국 내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비행학교가 폐교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항일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1921년 베이징으로부터 폭탄 2개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왔다. 전기수리공을 가장하고 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비서실을 총독실로 잘못 알고 던져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폭발 뒤의 혼란을 이용하여 무사히 상하이[上海]로 탈출했다. 이어 1922년 상하이 황푸탄[黃浦灘]에서 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시찰차 중국에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암살을 기도했다. 오성륜이 권총으로 쏘았으나 영국인 여인이 끼어들어 실패했고, 그가 던진 폭탄도 불발했다. 도망하다가 죽은 영국 여인의 남편 톰슨이 쏜 총에 맞고 체포되었다. 나가사키[長崎]로 이송된 후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몇 차례에 걸쳐 감형되어 풀려났으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암살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 교서관터(敎書館祉:현 숭의여대-외교구락부)-예장동 8-3.남산동2가 26-8 번지
교서관은 조선시대 경적(經籍)의 인쇄, 제사 때 쓰이는 향·축문·인신 등을 관장하던 관아로 1392년(태조 1)에 설치되었다. 일명 교서감(校書監), 예각(芸閣), 내서(內書), 외각(外閣) 등으로 불렸다. 위치는 남부 훈도방에 있었는데 현재 중구 남산동2가 전 외교구락부 부근에 해당된다. 병자호란 뒤에는 중부 정선방으로 옮겼다가 후기에는 남부 낙선방으로 옮겼다. 교서관은 조선 초에 교서감(校書監), 태종 때는 교서관(校書館), 세조 때 전교서(典校署)으로 불리다가 성종 때 교서관(校書館)으로 환원되었다. 1777년(정조 1)에 규장각제학 서명응(徐命膺)의 건의에 따라 교서관은 규장각에 편입되었다. 규장각을 내각(內閣)이라 하고, 속사(屬司)가 된 교서관을 외각(外閣)이라 하였다. 관아도 창덕궁 돈화문 밖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은 세월에 따라 고급 레스토랑 외교구락부로 명성을 날려 오다 한 때는 웨딩홀로 전업, 현재는 대학의 별관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숭의여대의 강의동 확장 계획에 따라 완전 철거되었다.
외교구락부는 격동의 시기에 정치, 외교의 막후무대와 독재타도-민주화운동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양식당이 드물던 50-60년대 민간인이 경영한 최초의 웨스턴 레스토랑으로 기록되는 남산외교구락부는 당시의 정치 외교계의 고급 사교장으로 첫 손 꼽히는 명소였다. 이른바 '개발독재'의 호황기를 맞은 정-재계 실력자들의 '막후협상의 드레싱 룸' 같은 곳이기도 했다. 전성기를 구가할 때 로비에 비치되어 있던 방명록에는 윤치영, 장택상, 유진산, 이후락 등 거물정치인과 재계의 중요인사 이름이 즐비하게 적혀 있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철권정치에 맞서는 야권의 투쟁사의 굵직한 터닝 포인트는 여기가 시발점이다.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이 여기서 나왔고, 영원한 정치적 라이벌인 YS-DJ가 벌인 필생의 대권쟁취사가 여기서 터져 나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손을 잡았고, 또 어떤 때는 손가락질하며 돌아서기도 했다. 박정희 서거로 맞은 '서울의 봄' 때 YS-DJ의 단일화 실패로 호기를 놓친 것도,'대통령직선제'를 목표로 손을 맞잡고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을 구성한 것도 여기다. 이는 직선제대통령 쟁취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큰 사건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야권인사와 반정부운동가들 소재파악을 위해 제 각각 서로를 따돌리고 온 군-경 정보맨들과 취재기자들이 마주치며 멋 적은 미소를 주고받던 곳, 외교구락부에 재야인사들이 몰려들면 '남산(중앙정보부 또는 안기부가 있어 붙은 공포정치시대의 은어)이 긴장했다'는 '카더라 방송'이 사실처럼 믿어지던 때의 '재야 프레스센터'였다.
▲ 소파길
충무로2가 60-3번지 의 세종호텔에서 숭의여대, 남산케이블카, 백범광장, 남산공원을 거쳐 남창동 205-4번지의 남산놀이터에 이르는 길이 1.6KM, 너비 20M의 4차선 도로이다. 남산의 북쪽기슭을 지나는 길로 조선시대부터 많은 관리들이 이 길을 통해 왕래하였다. 소파길의 이름은 남산공원에 있었던 방정환 선생의 동상 때문으로 아동문학가이자 사회사업가인 방정환의 호인 소파(小波)에서 비롯되었다. 동상은 1971년에 40주기를 맞아 세워졌으나, 1987년 5월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으로 이전하였다. 1984년 11월 7일에 소파길로 이름 붙여 계속 사용되고 있으며, 처음에는 주요 경유지에 국립중앙도서관(현 서울과학교육원)이 포함되었었다. 4차선도로는 시민의 접근성을 위해 2~4차선으로 축소하여 보행로를 넓혔다.
※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1899~1931)
아동문학가. 한국 아동문학 초창기에 활동한 작가이자 실천가이다. 호는 소파, 필명은 잔물·금파리·북극성·몽중인. 방경수(方慶洙)의 장남으로 당주동에서 태어나 1909년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 1913년에 졸업했다. 이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1914년 중퇴했다. 1917년 유광렬(柳光烈)·이중각(李重珏)·이복원(李馥遠) 등과 청년운동조직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이듬해부터 기관지 <신청년>을 펴냈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청춘> 9월호에 수필 <관화(觀火)>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등사판 '독립선언문'을 인쇄해서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주일 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이때 <개벽>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7월호에 시 <갈마반도>와 12월호에 소설 <그날 밤>을 발표했다. 손병희의 사위가 된 뒤 1921년 5월 1일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浩)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천도교소년회 중심으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개벽사에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냈다. 1923년 3월 20일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그해 5월 1일 도쿄에서 손진태(孫晉泰)·윤극영(尹克榮)·진장섭(秦長燮)·고한승(高漢承)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다. 색동회는 발기회록에서 "동화 및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일반 아동문제까지 할 사"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동화구연대회·아동예술강습회·아동예술전람회·소년문제강연회 등을 열어 소년운동단체의 통일을 꾀했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의회 지도위원, 1927년에는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28년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동맹으로 개편되고 소년운동 노선이 변화하자 일선에서 물러나 <어린이>·<학생> 등의 편집에 힘썼다.
그의 아동문화운동은 어린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문필활동으로 나누어진다. 1920년대 한국 사회전반에 나타나 있던 어린이에 대한 불합리한 의식을 계몽하는 활동을 펼치는 한편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에서 희노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감성의 해방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그는 <어린이> 등 여러 아동잡지에 창작작품은 물론 해외 아동문학작품을 번역해서 실었다. 그의 번역작품은 선량·정직·노력 등 권선징악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해학과 풍자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사회교화와 어린이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창작동화는 비록 양적으로는 번역동화에 미치지 못하나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명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제의 지배와 유교적 전통 아래에서 고통 받는 어린이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일깨워주는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이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독자들의 감상에 호소함으로써 소극적인 감상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번역동화와 창작동화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어린이를 지나치게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존재로 보았는데, 이는 1920년대 한국 아동문학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 5월 1일에 마해송(馬海松)·최영주(崔泳柱)가 <소파전집>을 펴냈고, 1957년 '새싹회'에서 그의 아동문화운동과 아동문학의 업적을 기리는 '소파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197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 부엉바위와 부엉바위약수-예장동 산 5번지(숭의여대 서쪽)
남산 중턱에 부엉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는, 옛날부터 맛이 좋고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남산에서 가장 기가 세고 터가 좋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서울의 많은 약수 중에 남산, 현재 숭의여자대학 서쪽(중구 예장동 산 5번지)에 있는 부엉바위 약수 또는 범바위 약수를 첫 손으로 꼽았다. 바위모습이 마치 부엉이처럼 생겼다 하여 부엉바위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간혹 범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 밑에서 나오는 약수는 물맛이 좋고, 위장병에 특효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부엉바위에는 한 선비와 오래된 암 지네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후기 영조 때 한은석(韓恩錫)은 관직에 있다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고는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혔다. 하지만 워낙 결백한 한은석은 몹시 궁핍하여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어두운 밤에 남산에 올라 부엉바위 옆의 나무에 줄을 매고 자결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바로 이때 "사람 살려요~" 라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소리 나는 쪽으로 급히 달려가 보니 웬 젊은 여인이 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오?”, “쇤네는 이 산 너머 마을에 살고 있사온데 장안에 복숭아를 팔고 오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금세라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사옵니다. 선비님께서 제발 저희 집까지만 데려다 주신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사옵니다.”
“아니 집이 어딘데 데려다 달라는 거요?”, “이 산 너머 복숭아밭 안에 있사옵니다. 선비님, 부탁입니다!” 한은석은 여인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여인이 청하는 대로 방안으로 들어가 주안상까지 받았다. 취기가 오른 그는 여인이 붙잡는 대로 이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까지 했다. 다음날 아침, 여인은 “제게 돈 백 냥이 있사온데 가지고 가셔서 쓰십시오.” 한은석은 그 여인의 깊은 정에 감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살아갈 희망이 없던 그는 다시 의욕을 얻고, 이튿날부터 날이 어둡기가 무섭게 부엉바위 옆을 지나 여인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 어느 날 밤 부엉바위에 한 노인이 앉아 한은석에게 행선지를 물은 뒤에 “실은 그 계집은 사람이 아니라 수천 년 묵은 지네인데 사람의 진을 빼먹는단 말이오. 그동안 당신도 그 계집한테 진을 빼앗겨 왔는데 오늘밤에 마지막으로 당신은 죽고 말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이 담뱃대를 입으로 빤 후에 입 안의 고인 침을 그 계집의 얼굴에 뱉으시오. 그래야만 당신은 살 수 있소. 자~이 담뱃대를 가져가시오.” 한은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문을 흔들자 여인이 나오면서 반색을 하였다. 이때 한은석은 입안에 고인 침을 여인의 얼굴에 뱉어야 하였지만, 어여쁘고 마음씨 고운 여인을 어찌 죽인단 말인가 하며, 차라리 자기가 죽더라도 노인이 시킨 대로 할 수가 없어서, 입안의 침을 땅에 탁 뱉어버렸다. 그러자 여인의 몇 번이고 고맙다고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여인은 “아까 만났던 노인의 말대로 저는 지네이고, 그 노인은 천년 묵은 지렁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을 질투해서 죽이려 했던 것인데 살려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여기 돈 만 냥이 있사오니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 여인은 많은 돈을 내어 놓았다. 그 다음날 한은석이 다시 여인의 집을 찾았더니 어엿하게 있던 집은 자취도 없고, 그 여인도 사라졌다.
▲ 와룡묘(臥龍廟.삼성묘)-예장동 산5-6
와룡묘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며 군사 지략가인 제갈량을 받드는 사당이다. 제갈량의 자는 공명이며 호는 와룡이다. 그의 호를 따서 와룡묘라 한 것이다. 이 묘사는 고종의 계비인 엄귀비가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일설에는 묘사 뒷면 암벽에 조각된 제갈공명의 영정을 받들어오다가, 1862년에 제갈공명을 추모하는 인사들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1924년에 화재로 소실된 뒤 1934년에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1976년에 보수하였다. 경내에는 와룡묘 외에 단군성전·제석전·약사전·삼성각·요사·문신각(文臣閣) 등이 있다. 이 묘사는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된 건물로, 왼쪽 처마에 연이어서 정4각형 지붕의 종각이 있다. 묘사 중앙에는 석고로 된 와룡선생상이 봉안되어 있다. 머리에는 와룡관을 쓰고 녹색도포를 입었으며, 오른손은 우선을 들고 가슴 쪽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좌정한 자세이다. 오른쪽 관성제군상도 석고로 되었는데 황색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달았으며, 오른손은 책을 펼치고 왼손은 책 쪽으로 향해 있고, 다리 사이에는 긴 칼을 세워 왼쪽 무릎에 기대어 놓고 있다. 단군성전의 단군상은 석고상이며 복식은 상 위에 물감으로 칠해져 있고, 양손은 소매 안에 넣고 앉아 있으며, 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달았다. 삼성각에는 산신님이 중앙에, 오른쪽에는 칠성님, 왼쪽에는 독성님이 각각 모셔져 있다. 산신님은 석고를 벽면에 붙여 양각 형식으로 만들었으며, 머리에는 복건 같은 것을 쓰고 수염을 길게 늘였으며, 겉에는 붉은 도포를 입고 아래에는 녹색 옷을 입고 왼쪽 무릎은 세웠고, 오른손에는 우선을 들고 있다. 좌정한 산신 뒤에는 호랑이가 있다. 칠성님은 부처님형상이고, 독성님은 민머리에 붉은 도포를 입고, 오른손에 단장을 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다. 도구는 일산과 청룡도 2자루, 삼지창 한 자루와 그 외 향로ㆍ촛대ㆍ제기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음력 6월 24일 와룡선생ㆍ관성제군 두 분을 위해 제사를 지내며, 평상시에도 신도들이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옛날에는 와룡선생 탄신일과 기일과 명절에 제사를 지냈으나 근래에 간소화된 것으로 보인다. 제의는 시봉인이 독축·배례 순으로 진행한다. 제비는 시봉인인 관리자가 준비하며 제물은 떡·제육·채소·과실 등이고, 제주(祭酒)는 소주를 쓰며, 현재 민간신앙화 되어 유지해 오고 있다.
와룡묘는 중국 도교계 신령을 모시는 단순한 사당이 아니라 불교 및 단군신앙·무속 등의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 도교의 전래뿐 아니라 한국 무(巫)의 독특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관우를 모신 사당인 동묘는 동대문에 있고, 와룡묘는 예장동의 남산 북측 순환로 입구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은 지점에, 산쪽 능성이가 아닌 조그만 골짜기 안에 위치하며, 둘레에 철책이 설치되어 있고 조그만 출입문을 들어서면 계단 옆 나무주위에 돌탑이 쌓여져 있으며, 바위 앞에는 조그만 돌하루방이 놓여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양쪽에 공덕비 몇 기가 서 있으며, 채색화가 그려진 사립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요사채, 왼편에 와룡묘가 있다. 출입구 맞은편 바위 밑에는 제갈공명의 영상이라는 신주를 모신 유리케이스가 설치되어 있고, 그곳을 지나 왼쪽 위편에는 단군성전, 뒤편 계단을 오르면 삼성각이 위치하고 있다. 건물과 의식으로 보아 유교, 도교, 민속종교 등이 혼재된 사당으로 보인다.
▲ 조지훈시비-예장동 산5-6
[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더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어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 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전면)
석질 및 크기 : 비신 화강석에 오석 부착. 너비 1m20cm 높이 2m95cm
건립내용 : 비문 생전의 벗들과 제자들이 뜻을 모아 그의 빛나는 시와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조지훈시비건립위원회에서 세우다. 글 김종길 전면 글씨 배길기.후면 글씨 김재현.
위치 : 서울시 중구 남산공원(남대문 쪽으로 올라가 순환도로 좌측에 있다.)
※ 조지훈(趙芝薰.1920~1968)
경북 영양 출시의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동탁(東卓). 8·15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헌영(憲泳)과 전주이씨(全州李氏)인 어머니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시집>을 펴낸 시인이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고, 이때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唐詩)를 즐겨 읽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으며,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면서, 시쓰기 보다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다. 그 뒤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고, 1972년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 반공건국청년운동기념비-예장동 3-5 범바위약수터앞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과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당시, 국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하여 북한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17,274명의 애국청년동지들의 위패가 봉안된 곳이다.
[비문전문]
강산은 아름다운데 역사는 기구하다
민족은 해방되어도 국토는 갈라졌었고
혈통은 하나여만은 사상은 둘로 나뉘어
그로써 쓰린 역사가 이땅을 지나갔었다.
슬프다 1950년, 뼈저린 6·25동란
북한의 공산도당들 남한을 침공했을 때
조국과 자유를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우니
피흘린 청년동지들 17,274명이라
살아서 남은 벗들이 이곳에 비를 세우고
비아래 위패를 묻어 혼령을 모시었나니
원한의 혼백들이여 여기 평안히 쉬시라
돌아보건대 지난날 수많은 청년단체들
하나로 뭉쳤던 것이 300만 대한청년단
그전통 이은 동지들 정우회로 다시모여
반공투쟁 다짐하고 통일을 맹세하노니
여기 이 비석은 돌 아니요 심장이다
맥박이 뛰지 않느냐 숨소리도 들려온다.
피끓는 젊은이들아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일어나 힘을 길러라 눈부신 역사를 짓자
1968년 개천절 글 이은상 반공청년운동 기념비 건립 위원회 세움
▲ 남산케이블카-회현동1가 산1-19
남산 케이블카(cable car) 또는 남산 삭도(索道)는 서울 중구 회현동의 승강장과 예장동 남산 정상 서울타워 부근에 위치한 승강장 사이를 운행하는 케이블카 구간을 말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객용 케이블카로, 1962년 5월 12일 운행을 개시하였으며, 한국삭도공업주식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남산 케이블카는 왕복식으로, 2개 선로에 총 2대의 객실이 순환하며 교행한다. 각 객실의 정원은 38명이다. 선로의 길이는 605 m, 시종점간의 고저차 138 m로, 노선의 평균 경사각은 약 77°이다. 운행 속도는 약 3.2 m/s로, 편도 운행 시간은 3분 남짓이다. 연중무휴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운행하며, 기상 상황에 따라 운행 여부는 바뀔 수 있다. 회현동에 위치한 본관 승강장은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다.
▲ 잠두약물-회현동1가 산1번지
예장동에 있었던 약수로서 잠두약수라고도 한다. 남산 누에머리 북서쪽 중턱에 있었으며, 바위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바위에 ‘蠶頭藥水’ 넉자가 새겨 있었다.
▲ 호위청터-남산동2가 2(명동역 남산초교)
조선조 궁중을 경호하는 군영의 터인데, 인조반정후 인조 원년(1623)에 설치하였다. 고종 때에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1894년 군제의 개편에 따라 폐지하였다. 호위청은 원래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고 있던 반정 군사력을, 정규 병력으로 공인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호위청은 4명의 훈신(勳臣) 또는 척신(戚臣)이 호위대장이 되어, 각 대장이 100명의 군관을 거느리고, 궁중의 깊은 곳에서 국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도록 하여, 각 대장이 1청씩 맡아 모두 4청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후 어영청(御營廳)·총융청(總戎廳) 등의 신군영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호위청 소속의 군관들이 신군영의 기간요원으로 빠져나가 위치가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현종 때는 3청으로 줄었고, 숙종 때 4청으로 회복되었다가 다시 3청으로 환원되었다. 이때 호위청의 관원으로는 각 청마다 대장(大將:정1품) 3명, 별장(別將:정3품) 3명, 군관(軍官) 350명, 소임군관(所任軍官) 3명, 당상별부료군관(堂上別付料軍官) 1명이 있었다. 호위청의 대장 중 1명은 국구(國舅:국왕의 장인)가, 2명은 훈신·척신인 대신이 겸직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1777년(정조 1) 호위청 군관이 침전에 침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정조는 3청이던 호위청을 1청 350명으로 크게 축소했으며, 호위청 대신 숙위소를 신설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당시 호위청은 사실상 정조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던 척족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정조가 호위청을 축소한 것은 친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호위청은 몇 번의 폐지와 복설이 거듭되다가, 1894년(고종 31) 군제개편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2) 남산공원-중구 회현동1가 100-177
남산이 ‘남산(南山)’이라는 이름을 얻고 역사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부터이다. 이전에 인경산(引慶山)이라 불렸던 이 산은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도읍을 서울로 옮기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세우고 바라보니 남쪽에 솟아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 되었다. 이후 1395년(태조 4년)부터 남산에서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고 산신, 기우제를 지내고 1397년 국사당을 건립하는 등 나라를 지키는 신과 스승을 모시는 영적인 산의 구실을 하였다. 또 내사산(內四山) 중 안산(案山, 주작에 해당)인 이곳에 도성을 축조하고, 5개의 봉수대를 설치하여 도성방어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한편 남산은 내사산 중에서도 주위의 풍경이 아름답고, 다른 산들이 암산인데 비해 토산으로 이루어져 산록이 푸르고 계곡이 깊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남산은 계곡과 산록 등이 명승지여서,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계절과 절기에 따라 씨름, 순성(巡城)놀이, 관등놀이 등을 즐겼고, 안산으로의 위상에 따라 자연경관을 관리하려는 다양한 노력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공원을 조성한다는 미명하에, 일제강점기에 민족혼 말살을 위하여, 남산에 위치한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인 서울성곽, 봉수대, 국사당 등을 철거하고, 침략의 중심기관인 공사관, 통감부, 헌병대사령부와 신사, 관사 및 주거지를 배치하였다. 또한 1897년 일본은 1592년 이래로 일본거류민 주둔지였던 남산 북사면에, 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왜성대공원(倭成臺公園)을 설치했고, 1898년 숭의여대 일대에 경성 최초의 신사인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 1923년 경성신사로 개칭) 등을 설치하여 남산을 일본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왜곡하려 했으며, 1910년에는 회현동 일대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으로 30만평에 이르는 공원을 조성하여, 한양의 안산으로서의 남산을 파손하기 시작하였다. 1916년에는 장충단, 남쪽성곽 밖, 한양공원, 왜성대공원을 포함하여 남산 전체를 공원화하는 '대산림공원계획(大山林公園計劃)'을 수립하고, 1925년에 지금의 회현자락에 조선신궁을 조성하였다. 조선신궁은 주 진입로를 직선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계단과 광장의 설치로 과도하게 지형을 변형하여 남산의 지형을 크게 훼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일제의 남산 역사왜곡은 한 층 더 심해졌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남산정상에 있었던 국사당을 철거하여 인왕산에 옮긴 일이며, 두 번째가 고종황제가 항일의 뜻으로 세운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들고,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를 지은 일이다. 이후 일제는 1940년 남산공원 348,000㎡, 장충단공원 418,000㎡를 각각 지정하면서 남산공원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해방이후 고도성장기에 학교, 호텔, 군부대, 공공기관 등이 남산주변에 건립되면서 남산의 자연환경과 경관은 우리 손에 의해 다시 훼손되었다. 8·15광복과 한국전쟁 후 월남민과 피난민의 주거지 형성되고, 박문사, 조선신궁 등 일제 잠식시설이 군부대, 학교, 호텔, 공공기관, 민족의식 관련기념관 등으로 대체되었으며, 수십 개의 동상과 기념비 건립으로 인하여 자연파괴가 행해졌다. 또한 1962년 7월에는 장충단공원의 일부를 해제하고, 자유센터, 타워호텔(1968년 완공)을 건설하였고, 1970년 남산 2호터널 개통, 1971년 장충 리틀야구장 건설, 1972년 남산 외국인 임대아파트(16-17층) 완공, 1973년 국립중앙극장, 국립국악원, 국립국악고등학교 건설, 1974년 어린이회관(지상13층, 지하 3층, 現서울시교육정보연구원)개관, 1975년 서울타워 개관, 1978년 남산 3호터널 개통 등 공원용지 해제와 잠식 시설물 조성으로 남산공원의 훼손이 심화되었다.
1990년대 이전에도 1968년 산림보호구역(78만평)을 지정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경관관리구역(150만평)을 지정하는 등 남산의 훼손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은 있어 왔지만, 남산의 모습을 회복하고 자연성을 강화하는 종합적인 노력을 실시하는 등 적극적인 남산이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남산 제 모습 가꾸기를 통하여서였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1994년 남산외인아파트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남산 야외식물원, 팔도 소나무 광장, 야생화 단지를 조성하였으며, 개인주택의 일부도 철거되어 가시적인 녹지 회복효과가 나타났다. 1998년 필동 수도방위사령부의 이전적지에 79,008㎡의 전통정원이 있는 남산한옥마을을 조성하였고, 또한 1993년에는 멸실된 5개의 봉수대 중 1개소를 복원하였으며,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남산공원길로 연결되는 보행교를 설치하여 접근성을 개선하는 등, 시민이용성을 고려한 공원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되었다. 남산 제 모습 가꾸기를 통한 10년간의 노력 후에도, 여전히 몇몇 잠식건물의 철거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계획으로 남아있고, 시대변화와 이용자 증가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 이에 2004년 남산공원의 이용 실태분석 및 개선방향 연구, 2006년 도심재창조 종합계획의 열린남산만들기 등을 통하여 남산 가꾸기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 남산팔영(南山八詠)
조선 초 판한성부사를 지낸 정이오(鄭以吾.1347~1434)가 손꼽은 남산팔영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전한다. 그는 당시 남산에서 볼 수 있는 여덟 가지 경치를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읊었다.
① 구름이 북쪽 궁궐에 가로지른 것(雲橫北闕)
② 물이 남강에 넘치는 것(水漲南江)
③ 바위 밑에 그윽한 꽃(巖底幽花)
④ 고개마루의 높은 소나무(嶺上長松)
⑤ 3월의 답청놀이(三春踏靑)
⑥ 중양의 등산놀이(九月登高)
⑦ 언덕에 올라 관등행사 구경(陟 觀燈)
⑧ 시냇물에 갓끈 빨기(沿溪濯纓)
첫째 '운횡북궐'은 남산에 올라 저 건너 북쪽에 자리하여 구름 속에 어른거리는 경복궁을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좋고, 둘째 '수창남강'은 장마철에 불어난 한강물이 모래톱 휩쓸어 흐르는 중에 하늘가로 떠내려가는 배 아득하게만 보이는 광경이 좋고, 셋째 '암저유화'는 산 속은 녹음이 우거지고 골짜기 바위틈의 기이한 풀 향기 그윽하여 좋고, 넷째 '영상장송'은 산마루 위 우뚝 솟은 소나무들이 공중을 버티고 흰 구름 두둥실 떠 노는 고요한 밝은 달 휘영청 흥청이는 광경이 볼만하다. 다섯째 '삼춘답청'은 북쪽 편과는 달리 남쪽 기슭은 별난 동천이라 봄철이면 꽃 좋고 바람 맑고 풀이 포근하여 색다른 정서를 자아내니 좋고, 여섯째 '구월등고'는 하늘 맑은 구월 초승 붉은 단풍잎 먼 골짜기에 새빨갛고 푸른 소나무 층층마다 둘린 속에서 술 마시고 시 읊는 운치 또한 제격이며, 일곱째 '척헌관등'은 4월 8일 성안 집집마다 연등놀이 성대하여 밤하늘은 대낮 같이 밝아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그 구경 밤새도록 흥을 일구니 좋고, 여덟째 '연계탁영'은 천천히 흐르는 맑은 냇물가에서 흐르는 물에 갓끈 씻고 붉은 꽃잎 동구 밖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보노라면 바로 도원경이 예가 아닌가 싶어 좋다는 것이다.
※ 정이오(鄭以吾, 1347~1434)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 또는 우곡(愚谷), 시호는 문정(文定),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374년(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석린, 이색, 정몽주 등과 교유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김유신장군상-남창동 205-4
갈라 지내던 한 민족을 삼국통일로 이끌어 단일민족으로서의 국가생활로 재출발하게 한 김유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기마상의 모습인 동상을 1969년 9월 23일 건립하였다. 높이 11.3m. 김유신(595~673) 장군은 가락왕계의 직계후손이며, 신라의 명문귀족으로 태어난 신라의 명장이었다. 지혜와 덕과 용맹을 겸비한 장군은 11세에 화랑이 된 후, 십팔 세에 극천에 올라 그는 낭도들에게 용화 향도라 불렸다. 화랑이 된 후, 신라의 서쟁북벌에 승리를 거듭하여 백제, 고구려를 아우르고, 당 세력을 축출함으로서 통일신라의 웅대한 모습을 이루었다. 장군은 생전에 태대각간의 지위에 오르고, 사후에 홍무대장으로 추봉되기까지 한겨레의 명장이었다.
▲ 백범광장(김구동상, 이시영선생상)-회현동1가 100-115
회현역에서 내려 남산 방향으로 가는 작은 계단을 올라가 힐튼호텔 맞은편 횡단보도를 건너면 남산 놀이터로 올라가는 이정표가 보이고, 조금 더 걸으면 100여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하는 계단을 오르면, 백범 김구의 동상이 보이는 백범광장공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던 곳이었으나, 4.19 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허물고 1968년 8월 백범광장을 만들면서 김구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공원 내에는 맨발로 걸으며 지압을 받을 수 있는 맨발길이 있고, 소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삼림욕의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공원에서 배드민턴 등 운동도 할 수 있고, 벤치가 많아서 친구나 연인들은 가을, 단풍도 구경하고 단풍잎도 밟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 할 수도 있다. 또한 계절마다 다양한 작고 큰 행사들도 열려서 구경거리가 많다.
※ 김구(金九.1876~1880)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 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아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언함(彦喊)의 부인이 진주 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 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 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 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 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김구는 유년기에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황해도 해주군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 한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에 걸려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 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7세에는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는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게 되었다. 과거 시험 당시 매관매직의 타락상, 즉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 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입교한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 수백 명을 포덕,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 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 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 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 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 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군 부대가 쏘는 총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종선을 묻어주고 안태훈을 찾아가게 되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 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안중근과의 관계는 친밀하지 못하였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 받았는데, 그로부터 공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은 화서학파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20세 에는 청나라행을 결심,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참빗장수를 만났다. 연령은 김구보다 8~9세 위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으로 그를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고, 백두산을 관람하고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 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에 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 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 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그는 일본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 김구는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자서전인 《백범일지》에는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고 쓰여 있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라고 기록되어 있다.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옆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은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으나, 고종은 판결을 보류하였다. 이는 우연히 승정원승지가 특이한 죄목명인 '국모보수'(國母報讐) 라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라 한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과 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여론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가 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죄수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죄수들로부터 노래를 배웠다. 이때 그는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그해 가을께에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그러나 승려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 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99년 가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농사일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 뒤 본향을 떠난다.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 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인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1906년 종산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10년 경성의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신민회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연루, 체포되어 이에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912년에는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19] 1915년 8월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죽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였다. 9월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자 안창호는 그에게 경무국장(警務局長)을 천거하였다. 9월 경무국장(警務局長)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 1921년 5월 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 후임은 김용원이 임명되었다. 경무국장에서 면직됨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만 활동하게 되었다.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상하이로 건너왔고, 그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차남 김신(金信)이 출생하였다. 10월 여운형·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한국노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 1923년 4월 9일 내무총장에 재임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였고 김구는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의경대를 설치할 때, 의경대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 최준례는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인 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이때 청년 오면직, 노종균 등을 파견하여 러시아의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추격, 제거하도록 지시하였다. 1922년 2월 11일 오면직, 노종균 등을 파견해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 등을 사살했다.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범일지에는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되었으나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 만 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 1920년대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23년 이후 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구미의 각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돈이 모였다.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임시정부 재정부장 이시영(李始榮)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31]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31],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31] 1923년 12월 상해 한인교민단에서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하였고,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24년 4월 23일 국무총리대리에서 면직되었고,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 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1925년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1926년 9월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6년 12월 14일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맞았다. 1927년 4월 10일 후계내각 발표로 국무령에서 총사퇴하고, 국무위원회의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8년 3월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1929년 8월 상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고, 1930년 다시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의 재창당에 참여하였다.
1930년 8월 4일 국무령에 임명되었다. 1930년 11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財務部長)에 선출되었다. 1931년 임시정부 내에 일본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 김구는 홍보하여 청년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 말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초기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신뢰하게 되었다. 이봉창이 왜 일본왕을 죽이지 못하느냐는 힐난에 자극을 받은 그는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파견하여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2월 12일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신형 잠수정 이즈모호(出雲號)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선하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실패하였다. 2월 윤봉길이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요인인 왕백수, 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 상하이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 실패하였다. 4월초,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을 지휘하였다. 윤봉길 의거로 사라카와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하였다. 상해 사건 발생 직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였으며,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미국인 선교사 페이스의 집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야 했다. 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 1932년 5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軍務部長)에 임명되었다. 5월 일본의 만주철도국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5월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였다. 5월 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ㆍ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 5월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고 상해에서 탈출했다. 그 뒤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길 때 군무부장에 취임하였으나,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또는 '장진(長震)'으로 행세하며 숨어 지냈다. 가흥에서 김구는 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 결혼하여 일경을 피해 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가흥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1933년 강소성 가흥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추격당하였다. 이때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그러나 상해 법대총장 저보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흥으로 옮겼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을 추진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진과부가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5월 장개석과 만났으며,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강소성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소론이 나오자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7월 조소앙·김두봉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체와 단일신당결성을 주장하여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10월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 김구는 남경중앙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국민당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김구는 곧 한국국민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한 김구 등은 1936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중일 전쟁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의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돈 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표 지청천) 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었다. 1938년 5월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 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은 즉사하고 유동렬, 지청천 등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시켰다. 병원에 가료 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거동의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 1938년 이후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 개조론, 임정고수론 논쟁 당시 개조파와 창조파에 참가하거나 기울었던 인사들이므로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 소수인사들은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정체이며 민족의 대표기관이므로 해체되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1939년 모친 곽낙원여사가 폐렴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 뒤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 말 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에 선출되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 되었고, 그해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주석 장제스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4월 기강(朞江)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통합)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0년 9월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 1940년 9월 워싱턴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 이후 구미위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좌파정당인 민족혁명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해 승인 거부되었던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1942년 2월에는 김성숙, 김원봉, 장건상 등 좌파들이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였다. 5월에는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당시 임정 내부 좌·우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 측이 한독당의 김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 되어 취임하였다.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8월 한국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으로 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이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그는 광복군 통수부의 주석도 겸하여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립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같은 해 초, 장남 김인이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 되었다.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8월 15일 섬서성에서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로부터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로 귀환하였다.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11월초 국민당의 송별식에 초대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송별연에도 참석하였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의 집단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
김구는 11월 3일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하여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이후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김구는 조선공산당에 가담해 있던 김두한을 찾아가 선친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들의 적색테러의 희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이범석에게도 "너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공산주의자"라는 소식을 접하고 그 뒤 염동진에게서도 비슷한 설득을 듣자 김두한은 그대로 우익으로 전향하여 우익청년단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1월 23일 김구는 바쁜 와중에도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 주관하였다. 순국선열추념대회 총재로 선출되었다. 12월 25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의문을 입수해 검토한 뒤,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12월 29일 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 브루스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전이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 송진우와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 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 12월 30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하지에게 보냈다. 12월 30일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위원회는 반탁시위를 주관하였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 엄항섭 대독을 통해 군정청 한국인 직원의 복귀를 촉구했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전해지자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
1946년 1월 3일 갑자기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의 지지로 돌변했다.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선공산당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 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김구는 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찬탁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 민주당의 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구는 김규식, 이승만,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 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비상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비상 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 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 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 이어 남조선 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김구와 이승만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 2월 14일부터 2월 17일 김구는 비상 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 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 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 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 3월 5일과 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 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려 하지 않자 그것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 6월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단독정부론을 말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 만 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 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됐다. 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2월말 김구와 신익희는 염동진의 백의사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앞에서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백의사 청년단원들은 김일성에 대한 폭탄을 던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의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가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한 것이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를 받은 백의사는 3명의 청년을 평양으로 보냈는데, 북한의 3.1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간 열여덟 살 소년 김형집이었다.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과 김책의 집에도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양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을 분실했고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 이 테러가 임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 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1947년 1월 18일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서울특별시경성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구는 김성수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 등에도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이는 대부분 일회성이었다. 1947년 1월 18일 김구의 주도로 우익진영은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 1주년을 기념, 대대적인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몇 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이승만의 만류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고로 김구는 반탁시위를 보류하였다.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는 천도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축소되었고,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가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 2월 14일~2월 17일 김구는 비상 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 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만약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로 하여 이승만의 도미를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젠 자기 길을 걷겠다고 나선 셈이었다. 김구는 임정 계열과 함께 이승만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3.1절 전후로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의 3.1절을 전후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은 기밀이 누설되어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조차 '아이들 장난'으로 조롱하였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했다. 미군정은 김구와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을 호출하였고, 군정의 호출을 받고 3월 5일 임정 요인들을 데리고 주한미군사령관실을 방문하였다. 군정청은 그들을 잡아넣겠다고 협박했고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정부수립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정해구는 김구의 이같은 시도에는 '이승만 부재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의한 김구의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국민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구의 이같은 시도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대처와 여타 세력의 지원부족으로 제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김구의 반탁노선에 반발한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국민당 세력은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한독당을 이탈하기도 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김구는 이승만과 반탁투쟁을 전개했다.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 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이승만의 격려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 6.23 반탁시위는 10만 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 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성명을 번복하여 발표하였다. 성명서 발표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미 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 것과 해방 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 장덕수의 암살로 김구와 이승만·한민당의 단결은 무산되고 말았다.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레믈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에서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원 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 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공격을 당했다. 남북협상 참여 당시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 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 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 1948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자 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자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해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 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 암살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절명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같은 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만 73세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1960년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 원 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일부 세력들이 이승만 사진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등 반발이 심해서 현재 10만 원 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선생을 모시는 우리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한미호텔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 의하면 김구를 수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저서 《백범일지》(1947, 국사원) 이 부분의 본문은 백범일지이다.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 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하략)...
그 외《도왜실기》(1932, 엄항섭 정리) 《백범어록》(2008, 도진순 주해)
[가족 관계]
김구의 자서전《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 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증조부 : 김영원(金榮元)
종조부 : 김일묵(金日默)
조부 : 김만묵 (金萬默, ? ~ 1888년)
아버지 : 김순영 (金淳永, 1848년~ 1901년 2월)
큰아버지 : 김백영(金伯永, ?~1884년)
작은아버지 : 김필영(金弼永)
작은아버지 : 김준영(金俊永, ?~1917년 1월[161])
어머니 : 곽낙원 (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부인 : 최여옥(汝玉, 약혼 중 사망, ? ~ 1903년)
부인 :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아들 : 김인(金仁, 1918년 11월 ~ 1945년 2월)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육군 소령
며느리 : 안미생(安美生, 안중근의 조카)
손녀 : 김효자(金孝子, 1941~ ), 장자 김인의 딸
아들 : 김신(金信, 1922년 2월 11일~) 대한민국 6대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주중국 대사, 국회의원 역임, 현 백범기념관 관장
며느리 : 임윤연
손자 : 김진(金振, 1949년 10월 30일 ~ ) 대한주택공사 사장 역임
손자 : 김양(金揚, 1953년~ ) 상하이 대사 역임
손자 : 김휘(金揮, 1955년 ~, 나라기획 이사 역임)
손녀 : 김미, 한화 그룹 회장인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과 결혼
딸 : 이름 미상(1906년 ~ 1907년)
딸 : 김화경(1910년 ~ 1915년)
딸 : 김은경(1916년 ~ 1917년 2월)
외조부 : 곽양식(郭陽植)
사돈 :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기업인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가 김구를 지목하였다.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한다.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 놓고 따랐던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 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6년 초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강준만과 도진순은 각각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 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 교수는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가 건국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의 반공주의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세력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독립운동가·정치가.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始林山人(시림산인), 이조 판서 裕承(유승)의 아들,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 형은 이건영, 이석영, 이회영이다. 1885년(고종22)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형조좌랑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18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894년 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우승지에 올라 내의원·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했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 府事)·궁내부수석참의(宮內府 首席參議)를 역임, 1896년 장인인 김홍집이 살해되자 사직했다. 1905년(광무 9) 외부교섭국장(外部 交涉局長)으로 등용, 이듬해 평안남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8년 한성 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고등법원 판사를 지냈다.
이시영의 6형제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0년 12월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수십 식솔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후 이시영은 형제들과 만주로 이주, 1912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교사를 신축하고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여 본격적인 독립군 간부를 키워냈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신흥무관학교는 3,500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하게 되었으며, 이때 양성된 병력은 청산리전쟁의 주축을 이루게 됐다. 이는 신민회가 구국운동은 실력양성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만주 이민계획과 독립군장교 양성으로 전환됨에 따라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할 목적으로 서울의 명문 출신인 이철영(李哲榮), 이시영(李始榮), 이회영(李會榮) 6형제 일족과 이동녕(李東寧), 김동삼(金東三), 이상용(李相龍) 등이 비밀히 재산을 처분하고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 뒤 아들과 며느리 서차희의 결혼식 때는 1000여 명의 하객이 보낸 축의금을 모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냈다. 1919년 그는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조완구 등과 함께 3·1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경, 이시영은 상하이로 가서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9월에 재무총장을 역임하고, 1926년까지 임시정부 재무총장으로 근무하며 자금 조달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그 뒤 감찰위원장을 지냈다.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미리 항주에 가서 임정 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1933년 임시정부를 개조하고 주석제도를 윤번제로도 고칠 때 그는 다시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에 임명됐다.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 출판하여 우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35년 중일전쟁으로 임시정부가 쓰촨성 충칭으로 이전한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1942년 다시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임정의 어려운 재정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환국 때 환국 제1진 자격으로 미군 수송기로 귀국하였다.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민주 진영을 영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게 되자, 3월 5일과 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김구,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그 뒤 남북협상과 단독정부 수립 문제에 관하여 김구와 의견이 달랐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놓고 단정론과 단정반대론이 섰을 때 이시영은 남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고, 그 다음에 우리 손으로 국가의 장래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국민들에게 총선거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한국문제가 유엔총회에 상정되기 직전인 1947년 9월부터 그는 임시정부와의 일체의 관계를 끊고 일선에 물러나 있었다. 이승만은 그를 부통령에 낙점하였다. 그러나 부통령을 두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의견이 조정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한민당 당수 김성수를 불러 이시영을 부통령에 앉힐 뜻을 비췄고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즉석에서 동의하였다. 1948년 7월 20일 초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후보에 113표를 얻었으나 2차 선거에서 133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의 비민주적인 통치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을 사퇴했다. 한편 대종교도로서 1950년 원로원 원장을 지냈으며 글씨를 잘 썼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해 있던 중, 1953년 4월 19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국민장으로 정릉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수유리 북한산 기슭에 이장됐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이시영의 후손들은 현재 이시영 묘소 앞 움막에서 적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건국훈장 (建國勳章)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기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이다. 1990년에 개정된 상훈법에 따라 수여된다. 건국훈장에 준한 상훈으로 건국포장이 있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나뉘며, 건국훈장 아래의 훈격으로 건국포장과 대통령 표창이 있다. 본래 명칭은 건국공로훈장이었다가 건국훈장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건국공로훈장으로도 불린다.
대한민국장(중장) 역대 상훈자(59명)
1949년: 이승만, 이시영
1962년: 강우규 김구 김좌진 김창숙 민영환 손병희 신익희 안중근 안창호 오동진 윤봉길
이강년 이승훈 이준 조병세 최익현 한용운 허위
1970년: 조만식 1976년: 임병직 1977년: 서재필 1979년: 박정희
1980년: 최규하 1983년: 전두환(2006년 3월 28일 서훈 취소)
1989년: 김규식 조소앙(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미서훈 납북 독립운동가 복권)
1999년: 장면 2008년: 여운형(광복 이후 건준 조직과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선 공로)
[명예 수훈자]
1953년 11월: 장개석(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공로) 1957년 9월: 응오딘디엠
1966년: 송미령 진과부 진립부(중국 국민당 정부의 일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 공로)
1968년: 손문(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와준 중국 국민당의 대표 자격) 진기미
▲ 남산공원내 이승만동상
1960년 4월 26일에 촬영된 한 장의 사진으로 40여 년 전, 그때의 환희와 감격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마침내 그날 오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있었고, 이내 파고다 공원에 있던 절대 권력자의 동상은 그렇게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딱히 파고다 공원에다 동상을 세워야 했던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이곳에 느닷없이 '살아 있는', 그것도 '현직'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선 것은 1956년의 일이었다. 그 시절의 신문자료를 뒤져보니, "그해 3월 31일에 준공된 동상은 2미터 40센티의 높이에다 기단까지 합쳐 모두 6미터에 달하는 크기였고, 대한소년화랑단이 건립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던 것이 겨우 4년의 세월을 넘길 즈음에 4·19의 함성 속에 여지없이 넘어지고 말았으니, 어째 동상치고는 참으로 딱한(?) 처지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데 애당초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얄궂은 운명에 처해야 했던 동상은 하나 더 있었다. 절대권력자의 위세는 파고다 공원에만 자신의 분신을 남기는 것에 그쳤던 게 아니라 남산의 중턱에도 또 하나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남산의 동상이 파고다 공원의 것보다는 약간 뒤늦게 완공되긴 했지만, 그 크기만은 서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달랐다. 조각가 윤효중(尹孝重)의 작품인 동상은 본체만 7미터의 높이에다, 기단까지 합치면 무려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이었던 것이다. 원래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만들어진 동상의 준공식은 1956년 8월 15일이었고, 때마침 이날은 제3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날이기도 했다. <경향신문> 1956년 8월 17일자에는 이때의 풍경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 15일 오후 4시부터 시내 남산공원에서는 김 대법원장, 이 민의원 의장을 비롯한 3부 요로와 8·15 광복절 및 제3, 4대 정부통령 취임을 경축하기 위해 내한 중인 각국의 외교사절, 그밖에 내외 귀빈 및 일반시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이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육군군악대의 주악으로 시작된 동 제막식은 김 대법원장, 이 민의원의장, 함 전부통령, 이 내무장관의 동상 제막에 이어 동 건립위원회 의장 이(李起鵬)씨의 식사, 김 대법원장의 송축사, 작가 윤(尹孝重)씨 및 전국극장연합회에 대한 표창과 조(趙炳玉) 민의원 부의장 선창의 만세삼창으로 동 45분의 식을 마치었다.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건립된 동(同) 동상은 작년 10월 3일 기공 이래 10여 개월에 걸쳐 7만여 명의 인원과 총 공사비 2억 6백만 환이 소요된 것이며, 높이 81척에 건립부지 3천여 평을 차지하고 있다." 건립비용이 상당했던 만큼 동상의 규모도 장대했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남산에 세워진 동상은 군중의 힘으로 손쉽게 무너진 파고다 공원의 동상과는 달리 그렇게 쉽사리 넘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4·19의 함성 속에도 불구하고 남산의 동상이 여러 달이나 굳건히(?) 제 모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토록 거대한 덩치 때문이었다. 이곳의 동상은 그해 7월 23일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철거결정이 내려졌고, 거기에다 또 한 달을 넘겨 8월 19일 중장비를 동원한 끝에 동상의 해체작업에 착수하는 과정을 거쳤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졌던 두 구의 이승만 동상은 천년만년 갈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거의 고물 신세가 되어 그렇게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승만의 동상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70년 3월의 일이었다. 그 시절 <코리아 라이프>라는 잡지에는 '95회 생일을 쓸쓸히 맞는 노정객 고 이승만 박사의 퇴락한 잔영'이라는 제목의 글 하나가 수록된 적이 있었다. 여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의당 폐품처리가 되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승만 동상의 행방이 소개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동상이 발견된 곳은 좀 엉뚱하지만 서울 명륜동 1가의 주택가였다. <코리아 라이프>에는 동상이 이곳까지 흘러온 연유를 이렇게 전해준다. "4·19 직후 이박사 동상은 어느 고철상인에 의해 용산에 있는 모 철공소에 인계되었었다. 홍윤성씨가 철공소로부터 이박사 동상을 구입할 때는 이미 동상 하체는 완전 분해된 후였다. 그나마 남은 부분을 철공소 주인을 달래어서 운반비조로 20만원을 지불한 홍씨는 20여명의 인부를 동원,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이란다." 그 이후 자유당 시절 대한노총 최고위원을 지냈던 김주홍(金周洪)씨가 1965년 무렵에 이 집으로 이사를 온 후 더욱 정성껏 모셔왔다는 것이었다. 다만 남산공원에 세워졌던 거대 동상은 이미 대부분이 해체되어 사라졌고, 오직 머리 부분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원체 그 규모가 컸던 탓인지 머리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도 여전히 높이가 160센티미터 정도나 된다. 파고다 공원에 세워졌다가 4·19 때 길바닥을 나뒹굴었던 동상 역시 125센티미터 정도의 상반신만 남은 채 이 집에 남겨졌다. 그리고 다시 3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지금 그 동상들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확인해 보았더니, 그 사이에 집주인은 바뀌었으나 그때의 동상은 명륜동 1가의 주택가에 용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때나마 위풍당당하게 저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았을 기념물은 구경거리에나 쓰일 몰골로 버려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기에 권력자의 동상은 그렇게 함부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애당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권력자의 동상은 처음부터 세상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고려대의 김성식(金成植) 교수는 <사조(思潮)> 1958년 9월호에 '동상사태(銅像沙汰)'라는 제목의 글로 이러한 세태를 꼬집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동상사태가 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줄 수 있으리만치 적지 않은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다른 나라에도 동상이 물론 안 세워진다는 것은 아니나, 특히 우리나라의 동상건립에 있어서 특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선진외국에서 별로 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존한 인물의 동상을 세우고 있는 것, 둘째로 생존한 외국인의 동상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중략)…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상은 과거의 애국자에서부터 세우기 시작하자는 것, 또 어떠한 인물이든지 사후(死後)에 국민의 정확한 판단을 기다려서 후손의 손에 의하여 세워져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 처칠의 초상화 한 폭이 사후 10년이 지나고서야 하원의사당 벽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천자유공원에 '살아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된 것이 1957년 9월 15일이었고, 권력에 빌붙은 사람들의 손으로 '살아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둘씩이나 만들어 세운 것 역시 1956년의 일이었으니, 그는 이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모든 권력자는 동상을 꿈꾼다는 얘기가 있긴 한데, 그렇더라도 동상건립만큼은 결코 자신 또는 자기 시대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머리 부분만 남은 이승만 동상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섣불리 만들어지는 권력자의 동상, 그것은 시쳇말로 그를 자칫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서울 명륜동 1가의 주택가에 쓸쓸하게 남겨진 지금의 처지가 잘 말해주듯이 애당초 주인을 잘못만난 이승만 동상에는 뒤틀린 현대사의 그림자가 잔뜩 들어 있었다.
<경향신문> 1956년 8월 17일자 '남산의 이승만 동상 준공' 보도에 "작가 윤(尹孝重) 씨 및 전국극장연합회에 대한 표창 운운"하는 대목이 들어 있다. 전국극장연합회는 자유당 시절 흔히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부르던 정치깡패 임화수(林和秀)가 부회장으로 있던 단체였고, 이 연합회가 이승만 동상의 건립기금모금을 주관했던 탓에 준공식장에서 표창장이 주어졌던 모양이었다. 조흥은행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조흥 백년 숨은 이야기>(1997)라는 책자에는 남산공원의 이승만 동상건립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담고 있었다. 말인즉슨 이승만 동상은 처음부터 '외상'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이었고, 그 돈은 전국극장연합회가 극장관람객들에게 조금씩 부과하여 충당하려고 계획했던 모양인데, 뜻밖에 4·19를 겪는 바람에 그 돈은 결국 권력의 몰락과 더불어 부도 처리 되고 말았다는 사연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던 1956년 봄 국무원 사무국에서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안건을 하나 의결하였다. 그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제 80회 탄신을 경축하기 위하여 경축 중앙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이기붕 씨를 추대한 것이었다. 이 경축 중앙위원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을 경축하는 경축금 3억환을 상납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전국 극장연합회를 조직하고 각 극장 입장객으로부터 10환 내지 20환을 더 거두어 경축금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입장권이 2백 환 미만이면 10환을 더 걷고, 200백 환 이상이면 20환을 더 걷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축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당장 현금이 필요했고 이 금액을 다 거둘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우선 우리은행을 비롯한 4개 은행에서 먼저 대출을 받아 충당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시내 4개 은행이 모두 이 대출에 참여했던 관계로 불가피하게 이 대출을 취급하게 된 은행(즉 조흥은행)은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이기붕 위원장을 채무자로 하고 극장연합회 간부 임화수를 비롯한 4명을 보증인으로 입보케 한 후 다른 은행과 함께 3억 환을 대출해 주었던 것이다.
그 후 1959년 4월까지는 전국 각 극장에서 거둔 수입금으로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갔으나 1960년 4·19가 일어났고, 4월 26일 이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 원금 및 이자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960년 11월 24일에는 동 은행을 비롯한 4개 은행이 652만 5944환의 연체 대출금을 안게 되었다. 이에 동 은행은 연체대출금 상환을 각 극장에 요구하였으나, 전국의 각 극장은 이에 응하지를 않았고 결국 임화수를 비롯한 4명의 보증인에게 대출금 상환 청구소송을 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3억 환의 용도는 1959년 7월25일 전국 극장연합회가 이기붕 위원장에 보낸 경축금 염출 종료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이 보고서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건립 기금으로 이 돈을 모았다고 적혀 있었다. 동 은행은 이 소송에서 일부 승소하였으나, 임화수는 물론 백운성도 압류할 만한 재산이 없어서 실익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구 어린이회관)-회현동1가 100-177(소월길 113)
어린이회관은 어린이의 건전한 육성을 위해 육영재단에서 건립한 복지회관이다. 1970년 7월 서울 남산(南山)에 처음으로 어린이회관을 개관하였으며, 1974년 10월 남산 어린이회관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이양하고 서울 광진구 능동의 새 회관으로 이사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어린이회관으로서 전 서울대교수 이광노 교수가 설계해 1969년 5월 5일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7월 25일 개관하였다. 동시 수용 인원 3천 명, 지하 1층, 지상 18층의 건물로, 한국 최초의 프리캐스트 콘크리트(P.C)로 외벽을 마감했으며, 10층 옥상에는 한 시간에 한번 회전하는 원형 회전식당을 처음으로 시설 하였다. 남산 야외음악당 앞(서울 중구 회현동 1가 100)에 자리 잡았다. 설립 목적으로는 정규 교육과정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내용을 보충하고자 하였으며, ‘청소년에 대한 반공정신의 앙양, 과학지식의 보급, 건전한 민족정신의 함양·고취, 청소년의 복지증진을 위한 체위의 보양과 정서의 순화’가 제시되었다. 국가적인 관심으로 건립되었으며, 미국 정부에서는 달착륙선의 모형을 어린이회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개관 후에는 몰려든 관람객들로 인한 기물 파손, 인력 부족 등 운영상의 문제로 3일 만에 휴관하기도 했고, 불편한 계단, 유용한 공터의 부족 등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이 주로 이용하였고, 과학오락실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고 조사되었다. 남산 어린이회관은 1974년 7월 국립중앙도서관의 이전으로 문을 닫기까지 총 297만여 명, 일일 평균 2,500여 명이 이용하였다. 휴관하는 매주 월요일에는 고령의 노인 수백 명을 초청하여 ‘월요경로회’를 열었다.
※ 능동 어린이회관
1974년 10월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10월에 준공하였다. 서울시 성동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옆에 위치하며, 한옥 형태로 지어졌다. 건축 연면적 1만 7000㎡로 과학관과 문화관 및 체육시설로 나뉘어져 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인 과학관에는 생활과학전시실·우주과학전시실·컴퓨터교실·천체과학관·과학실험실·시청각실 등이 있고, 지상 2층의 문화관에는 올림픽전시장·무지개극장·도서실·음악실·무용실·유치원·태권도교실 등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대형체육관·운동장·야구장·사격장·스케이트장·수영장 등이 있고, 그 밖에 각종 놀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야외상설무대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각종 연극이 공연되며, 또한 세계아동미술전람회·어린이그림그리기대회 등 어린이의 건전한 육성을 위한 행사도 거행된다.
▲ 지구촌민속박물관-용산동2가 산 1-3
지구촌 박물관은 지구촌이 한 가족이라고 할만큼 국제적 교류가 빈번한 국제화시대 서울의 상징 서울타워에 우리 민속과 세계 여러 민족의 민속유물을 한자리에 전시, 관광객에게 친근감과 볼거리를 제공, 관광문화진흥에 기여하고 학생들에게 세계화 교육용으로 활용코저 1997년 설립하였다. 오대양육대주 전세계 희귀민속과 한국, 중국, 일본 등 민속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구촌민속박물관은 관광객에게 친근감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알차고 값진 전세계 알뜰 문화탐방의 효과를 주고 있다. 특히 안동 하회탈, 북청사자탈 등 한국 중요문화재와 전통 혼례복 등 한국의 민속 문화를 상설 전시하여 지구촌의 다양한 의, 식, 주 문화를 비교함으로써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과 세계 10위권의 유물을 가진 문화민족으로서의 한국의 전통미를 면면히 살펴볼 수 있는 한국 유일의 세계 관광, 문화, 교육 탐방코스이다. 지구촌 생활민속전, 희귀 탈전, 한국 전통 민속 닥종이인형, 일본민속 문화전, 중국 희귀 민속전, 세계인형전 등 한자리에서 모든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봉산탈 만들기 및 공예체험, 지구촌 원주민 체험, 탁본체험, 지구촌 다양한 민속악기 체험 등을 통해 지구촌 문화를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더불어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바로 앞에 기념품 가게가 있어서 세계 여러 기념품들을 구입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 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시품들의 관리가 소홀하고 관람객들을 위한 전시품들의 설명이나 이름이 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아서 관람하는데 불편함이 있을 것으로 예상 된다.
▲ 안중근의사기념관-남대문로 5가 471(예장동8)
안중근의사 기념관(安重根義士 記念館)은 안중근의사 숭모회에서 관리하는 기념관으로 안중근의 정신과 뜻을 추모하고, 기념하기위해 설립되었다. 1970년에 준공하여 1971년에 개관하였다. 세부적으로는 건물 179평의 석조와즙 1동과 함께, 기념관 앞에 높이 3m의 안중근 동상이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내 소장품으로는 '국가안위노심초사'외 20점의 휘호, '인심결합론' 외 20점의 액자, '안중근의사 존영'외 35점의 사진, '안중근의사 공판기' 외 35점의 책자 등이 있으며 일반인의 관람을 위하여 전시하고 있다. 개장시간은 하절기(3월~10월)엔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동절기(11월~2월)엔 오전 9시부터 저녁 5시까지이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1,000원이며 어린이나 청소년은 30% 할인된 700원에 입장 할 수 있다.
[연혁 및 활동]
1963.12.14 안중근의사 숭모회 법인설립 승인 (문화공보부)
1967. 4.26 안중근의사 동상이안 (숭의여고 앞→남산공원)
1970. 8.28 안중근의사 기념관 준공
1970.10.26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 개관
1973. 6.18 전남 광주시 상무대로 동상 이안
1974. 7.10 동상 재건
1973.9.2-1987.3.26 기념관 앞 광장에 안의사 충의비 성역유묵, 어록비 건립
1991. 3.26 국제학술심포지엄 개최
1992. 3.14 한,중,일 국제학술 심포지엄 개최
1992.8.7-16 애국순례 사업
1992.10.17 청소년서예백일장 개최, 매년 안중근의사 탄신,의거기념 및 순국추념식행사
[전시 유품 및 유물]
안의사의 영정 및 관계사진
건국공로 훈장 및 훈장증
옥중 유묵
옥중 자서전 및 동양평화론
옥중 유언 및 서한 등
관계도서 및 문헌
공판 당시의 신문 및 유명인사 휘호, 찬시 등
▲ 남산분수대-회현동1가 100-177
일제의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남산 식물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 소월시비-후암동 30-65
남산도서관 앞길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는 소월시비는 화강석에 ‘산유화’를 서예가 김충현의 글씨로 새겨 넣었다. 소월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1902~1934). 평북 출신으로 남과 북에서 똑같이 시비를 세워 대접을 하는 ‘민족시인’이다. 그를 문단으로 이끈 사람은 오산학교 스승 김억(金億)이다. 서구풍의 신시가 문단을 풍미할 때 소월은 한국 전통의 정한(情恨)을 민요 가락에 얹어 서리서리 엮어냈다. 그런 소월을 가리켜 미당 서정주(徐廷柱)는 “고향이 부르는 소리에 쏜살같이 돌아온 귀향자와 같았다.”고 말했다. 32세에 요절해 불과 5,6년 남짓 문단에 머물며 시집 <진달래꽃>(1925년) 한권을 유일하게 남겼으나, 한국 시문학의 중심축을 이루는 불멸의 혼으로 남아 있다. 1968년 3월12일에 세워진 남산의 소월시비는 4월13일에 제막식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최 측 한국일보의 장기영 사장과 이효상 국회의장 등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홍종철 공보부장관이 식사를 낭독하였다.
배재고 소월시비 : 소월이 다녔던 배재고등학교에 세워진 소월시비.
오산고 소월시비 : 소월의 모교인 오산고등학교에 세워진 시비.
남산도서관 시비 : 남산의 소월시비
▲ 남산도서관-후암동 30-84(소월길 111)
남산도서관은 서울시 용산구 소월길에 소재한 시립도서관이다. 바로 앞에 용산도서관이 위치하고 있다. 1922년 서울시 중구 명동에 경성부립도서관으로 개관하였으며, 이후 1964년 현재 건물을 신축한 뒤 이전, 이듬해 남산도서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장서 44만여 권, 비도서 1만 2천 점, 연속간행물 1천 2백여 점, 고서 1,876권, 동양서 68,119권을 보유하고 있다. 휴관일은 매월 1,3째 월요일과 일요일 제외 법정공휴일, 그리고 도서관이 정하는 임시 휴관일이다.
※ 어려웠던 시절 대부분의 서울시민 집은 공부방 하나 없었고 학교 도서관은 휴일이나 방학 때면 문을 안 열었고, 대학교 도서관을 제외하곤 아현동에 있던 아현도서관 이외엔 변변한 도서관이 없어, 많은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매표소 앞에서 장사진을 치곤했었다. 특히 시험철이면 매표소 수위 아저씨가 일반 열람객보다 중, 고학생들을 먼저 들여보내 주었다. 입장료는 10원. 1층에는 매점과 식당이 있어 점심때면 식당에 내려가 15원 정도의 우동국물을 한대접 사서 도시락을 먹던 곳이다. 시청각실이 하나 있어서 가끔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2층에는 정기간행물과 정부간행열람실이 있어 신문이나 잡지들을 볼 수 있었다. 3층은 여학생 전용 열람실과 도서대출대가 있어서 도서목록 카드함에서 책을 고르면서 여학생들과 부딪쳤던 곳이다. 도서대출을 신청할 때는 반드시 2권을 신청해도 대출중이라 1권만 나오거나 재수 없으면 두 권 다 대출중이라 다시 신청하고 기다려야 했다. 4층은 남학생 전용 열람실이었다. 동쪽과 남쪽을 향한 곳으로 발코니 겸 휴게실이 있어 한강과 용산구 일대, 멀리 관악산을 조망하면서 눈의 피로를 풀기에도 좋았다. 또한 이곳에서 쪽지나 종이비행기에 학교, 학년과 이름을 적어 아래 3층 발코니로 던지는 치기 어린 행위를 하던 곳이다. 하오의 햇살이 너무 좋거나하면 얼른 도서관을 나와 남산공원을 기웃거리거나 남산기슭의 양지바른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추억의 장소이다.
▲ 다산정약용선생상-후암동 30-84
실학연구의 최고봉으로서 많은 개혁과 저술로써 후세에 많은 가르침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0년 10월 20일 건립. 1762년 광주 마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밝았고 기중기를 설계 수원성 축조에 힘썼으며, 우두법을 시행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8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정조 이후 천주교 대박해가 일어나자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서 18년 동안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836년 2월 22일 75세로 별세했다.
※ 정약용(丁若鏞.1762~1836)
자는 미용(美鏞) 또는 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 또는 삼미, 여유당.
정약용은 1762년 6월16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지내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대다수의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묻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정권에서 쫒겨 난 남인들이 다시 등용되자, 정재원도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한성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9살 되던 1770년에 어머니 윤씨를 여의었고, 1776년 정조가 등극하던 해에 승지 황화보의 딸과 결혼했다. 한양에 올라온 그는 외가를 자주 찾았다. 그의 외조부 윤두수는 문인으로 명망이 높았고, 잘 알려진 문인 화가이기도 했으며 장서가로도 유명한 분이다. 정약용이 외가를 드나들었던 이유는 바로 윤두서가 소장했던 책들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열정적인 독서를 통하여 고전을 섭렵하는 한편 친형 정약전과 그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 정약전의 친구 가운데 이승훈이 있었고, 또 이승훈의 소개로 이 익의 종손 이가환을 알게 되었는데. 이가환은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유능한 학자로서 당시 젊은 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과의 교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호조좌랑이 된 아버지는 곧 다시 전라도 화순의 지방관으로 발령 났고, 그도 역시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1781년 스무 살 때 과거를 치렀지만 떨어졌고,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초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생원으로서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뒤인 1784년 정조의 부름을 받아 경연석에서 중용을 강연하면서부터 파란 많은 삶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의 그의 삶은 대체로 3기로 나눠질 수 있다.
제1기는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벼슬살이를 하던 득의의 시절이고,
제2기는 정권에서 밀려나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이며,
제3기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던 시절이다.
정약용은 생원이 된 후 1789년 3월에 정조 앞에서 치른 전시에서 합격하여 초계문신의 칭호를 얻었으며, 그 해에 종7품의 부사정을 거쳐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큰 배를 강에 나란히 띄워 가교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그리고 배다리를 준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1791년 정6품의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는 수원성 수축에 동원되어 설계를 도맡았으며, 기중기를 제작해 공사기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1793년 수원성 수축 도중에 아버지 정재원이 임지 진주에서 세상을 뜨자 그는 이듬해 7월까지 상을 마치고 다시 정5품의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에 왕의 특명을 받아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지방의 서용보일당의 범죄사실을 보고해 그를 해직케 했지만, 이때 해직당한 서용보는 앙심을 품고 혈안이 되어 여러 차례 그를 죽이기 위해 모략을 꾸미게 된다. 암행어사 일을 마친 그는 1795년 정3품의 병조 참의에 올랐지만, 이때 청나라 신부 주문보 잠입사건이 발생해, 충청도 금정의 찰방으로 좌천 되었다. 그 후 규장각 교서로 돌아와 편찬과 교정업무에 종사했고, 천주교 문제가 다시 정쟁의 핵심으로 떠올라 1797년 6월 재차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떠나야 했다. 이 곡산부사 생활을 하며 그는 뛰어난 목민관의 자질을 드러내어 곡산군민들의 추앙을 받게 되며. 또한 이때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유행하자 서학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적절한 치료책을 세우고, ‘마과회통’ 이라는 의학서를 저술 편찬, 보급하였다. 그때까지 천연두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민간에서는, 그의 치료 대책에 힘입어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조정에 알려져 전국적으로 이 책을 보급하게 되었다. 1799년 그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참지에 올랐지만 그가 요직을 제수 받는 것을 반대한 정적들은 그를 천주교인이라고 몰아 갔다. 이 때문에 그는 해명소인 ‘자명소’ 를 제출한다. 자명소에서 자신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서영의 함군’, 특히 천문, 종정, 지리, 건축, 수리, 측량, 치료법 등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서학에 접근했다면서, 이를 위해 서학에 능통한 천주교 신부를 만났다고 밝힌다. 그리고 사퇴 건의서를 함께 제출하자, 정조는 애써 그를 달래어 조정에 머무르게 했지만, 그의 사의는 완고하여 1800년 봄 처자를 거느리고 낙향했다. 그 후 정조의 재촉으로 일시 상경하였지만, 정조가 그해 8월 죽으면서 다시 향리로 돌아왔다. 정조가 죽은 후부터를 그의 제 2기 인생이라고 하겠다.
조정은 노론 벽파가 완전히 장악하였고,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정약전, 정약종을 비롯한 이가환, 이승훈 등이 투옥되어 이가환, 정약종, 이승훈 등이 죽고 서용보의 간언으로 정약용도 유배되었다. 1801년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오로지 독서와 창작에 몰두 하였고 그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져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서학 관련자들이 처형되지만 정약용과 형 정약전의 공적을 존중한 조정내부의 사람들에 의해 유배형으로 끝났다. 그래서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떠났으며,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 그는 1801년 11월부터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유배지의 주막에서 거처하는 동안 만덕사의 혜장선사와 인연을 맺는다. 1803년 봄 소풍길에 만덕사의 혜장선사를 알게 되어 유교와 불교를 서로 교환할 기회를 맞게 된다. 이후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1805년 겨울 거처를 고성사로 옮기고, 다시 9개월 후에 목래 이학래의 집에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1808년 봄 다산 초당으로 옮길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1808년 봄 정약용은 다산에 있는 한 정자를 얻게 되었는데, 그곳은 윤박이라는 선비의 별장이었다. 거기에는 천여 권의 장서가 있어 그가 책을 집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초당에서 기거하면서 그는 자신의 아호를 ‘다산’이라고 붙였고 자신이 머물던 곳을 ‘다산초당’ 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11년 동안 다산초당은 정약용 학문의 산실이 되었다. 이곳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비롯한 <시경강의보>,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중용자감> 등 수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818년 유배가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오면서 정약용은 다시 제 3기의 인생을 맞이한다.
유배 생활 중에 쌓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흠흠신서>, <상서고훈> 등을 비롯한 많은 책을 집필했다. 그의 저서는 <여유당집> 250권, <다산총서> 246권과 나머지 책들을 포함하여 약 508권에 달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없어져 버렸고, 1934년에서 1938년에 걸쳐 신조선사에 의해 <여유당전서>가 출간되었다. 가히 한마디로 업적을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여 남겨 놓은 정약용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업적]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을 대표로 한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 역사·지리 등에도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저서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등을 비롯한 학문과 역사적 자료로 꼽히는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 퇴계이황선생상-후암동 30-84
선생의 고고한 학문과 가르침, 학문에 임하신 자세, 정신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1970년10월 20일 건립. 70평생을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고 후학의 양성에만 힘쓰셨다.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돌아가셨지만, 멀리 일본의 선비들마저 선생을 신명같이 존숭하여 명치시대까지 정신적 길잡이로 받들었다.
※ 이황(李滉.1501~1570년)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도수·퇴도(退陶),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 계열의 종주이다. 이황은 경북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8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1552년(명종 7)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5년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웠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계몽전의》,《주자서절요》,《송계원명이학통록》,《인심경석의》및 기대승과 문답한《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그가 죽자 선조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1610년 문묘(文廟)에 모셨다.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을 계승하여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용산도서관-후암동30-90
1981년 개관한 용산도서관은 공기 맑고 전망 좋은 남산 중턱 후암동에 위치하고 있다. 지역주민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지역의 정보·교육·문화 센터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남산팔각정-용산동2가산1-3
면적 64.17㎡로 1959년 11월 시민들의 안식처인 동시에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수도서울 관광의 전망대로서 지어졌으며, 이승만대통령의 아호를 따서 우남정(雩南亭)을 지었다가 1960년 4.19의거 때 철폐되었으며 그 뒤 1968년 11월 11일 다시 세워졌다.
▲ 국사당터(國師堂址)-용산동2가 산1-3(예장동 8-1 팔각정 우측)
조선 초에 남산 산신을 모시고 국가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제사를 받들던 사당으로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 때인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강제로 철거되고, 그 일부 건물이 현재는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남산 팔각정 앞에는 '국사당 터' 표지석이 있다. 이 당은 태조 이성계와 여러 호신신장을 모셨기 때문에 국사당이라 명명했으며 태조 4년 12월에는 이조에 명하여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여 목멱신사라고도 불렀다. 국사당이란 명칭은 태종 때 3신인 천신, 산신, 수신과 태조, 무학대사, 그 외에 여러 신장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명명했다. 이 당에는 국무당 대표자인 3대 만신들이 모여서 받들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당이다.
▲ N서울타워-용산동2가 산1-3번지
N서울타워(엔서울타워, N Seoul Tower)는 남산 공원 정상 부근에 위치한 전파 송출용 탑이다. 1969년에 착공하여 1975년 전망대를 마지막으로 완공되었다. 높이는 236.7 미터, 해발 479.7 미터이다. 전망대에서 서울시내 전역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 찾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보통 “남산타워”라고도 불린다. 뉴스 전문 텔레비전 방송국 YTN이 2000년 인수하였으며 2005년에 개·보수하였고 “서울타워”에서 “N서울타워”(정식 이름은 “YTN 서울타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조선신궁이 있었던 곳으로, 철거하면서 공터로 있다가 안전기획부 청사 등이 세워지면서 같이 세워진 것이다. 전파 송출용 시설뿐 아니라, 전망대, 식당, 전시관, 기념품점, 카페 등이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 부분에 위치한 식당은 바닥이 48분마다 360° 회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목멱산봉수대(南山烽燧臺)-예장동8-1(산5-6)
남산봉수는 목멱산봉수(木覓山烽燧)로 불렸고 조선조에 전국 각지의 경보를 병조에 종합 보고하는 중앙봉수소의 역할을 수행한 경봉수(京烽燧)였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봉화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에서부터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온조왕 10년 조에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이라는 기록이 나타나 봉수제의 연원이 오래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증거는 고려시대부터 나오는데, 1149년(의종 3) 봉수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수군(烽燧軍)에게 생활 대책을 마련해주며 감독책임자를 배치한 사실이 문헌에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세종 때 봉수의 시설·관장·요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봉수망을 유기적으로 정비하게 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세종 29년경에 확립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게 된다.
남산 봉수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제1봉에서 제5봉까지 5개소가 있었다. 동쪽 제1봉은 남부 명철방(明哲坊)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양주의 아차산 봉수와 연결하여 함경·강원도 방면을 통하였고 이곳에 연결되는 직봉이 120곳, 간봉이 60곳이었다. 제2봉은 성명방(誠明坊)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광주 천림산 봉수와 연결하여 경상·충청도 방면을 통하였고 이곳에 연결되는 직봉이 40곳, 간봉이 123곳이다. 제3봉은 훈도방(薰陶坊)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무악의 동봉(東峰)과 연결하여 평안·황해도 방면의 육로를 통하는 것으로 직봉이 78곳, 간봉이 22곳이다. 제4봉은 명례방(明禮坊)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무악의 서봉과 연결하여 평안·황해도 방면의 해로를 통하였는데, 직봉이 71곳, 간봉이 35곳이다. 제5봉은 회현방(會賢坊) 쪽 산마루에 있었는데 양천 개화산 봉수와 연결하여 전라·충청도 방면의 해로로 통하여, 직봉이 60곳, 간봉이 35곳이었던 것이다.
남산 봉수대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에서 다루었고 봉수군과 오원(五員)이라 칭하는 감고(監考)를 두었다. 그리고 봉수군은 군사 4명과 오장 2명을 배속시켰는데, 모두 봉수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선정 임용하였다. 남산 봉수대는 1895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갑오경장으로 봉화가 폐지되고 나서도 1930년대까지 남산에 5개의 봉수지가 산정상에 일렬로 남아있었다고 전하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산정상부를 따라 도로가 나있고 서울타워가 들어서 있다.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위급한 사항을 알리는 것으로서 평상시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렸었는데, 남산 봉수대는 전국의 봉수가 도달하는 봉수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설치되어 갑오경장 다음해까지 약 500년간 사용되었으며,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 봉수대로 불리거나 서울에 있다하여 경봉수대로 불리었다. 과거 남산 내에는 5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파발제(擺撥制)의 도입과 봉수의 효용성 반감으로 인하여 고종 32년(1895년) 봉수제도 폐지 및 전국의 봉수대·봉수군의 철거로 남산의 경봉수도 소실되었다.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봉수대의 정확한 자리를 확인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으나 1992년‘남산 제 모습 가꾸기 사업’시 『청구도』등의 관련 자료를 종합하여 1994년 N서울타워 주변에 봉수대 1개소가 복원되었고, 시도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남산야외식물원(남산외인아파트)-이태원동 258-148일대
남산공원의 한남지구에는 남산야외식물원과 야생화공원 그리고 팔도소나무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남산야외식물원은 남산제모습가꾸기사업의 하나로 1994년 철거한 용산구 한남동 외인주택 터에 만들어진 식물원으로 1997년 2월 18일에 개원되었으며(59,241㎡), 야생화단지는 1994년 11월 16층, 17층짜리 2개동 외인아파트 철거지역에 설치하였고(9,877㎡), 팔도소나무단지는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조성( 3,630㎡)하였다. 연못과 습지생태원, 돌무지와 돌탑, 지압보도, 산책로 등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남산등산로와도 연결되어 있다.
※ 보유식물
13개 주제(테마)로 나누어서 서울지방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 총 269종 117,132주가 심어져 있다. 이 중 나무종류는 소나무 등 129종 60,921주이고, 풀 종류는 할미꽃 등 140종 56,220본이 있다. 무궁화원, 유실수원, 식용식물원, 약용식물원, 덩굴식물원, 희귀식물원, 시각장애인식물원, 꽃나무식물원, 살구나무원, 야생산야초원, 철쪽·진달래원, 키작은나무식물원, 경제림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남산식물원
중구 회현동 남산공원 안에 있었던 식물원이다. 1968년 12월 23일 1호관이 개관되었으며, 재일교포 김용진이 선인장류를 기증함으로써 71년 9월 10일에 2,3,4호관이 증축개관 되었다. 대지면적 3,220㎡, 건축면적 2,730㎡ 이었다. 1호관은 관엽식물관으로 소철, 워싱통야자, 켄티아야자, 관음죽, 당종려 등 173종 2,392본이 있었으며, 2호관과 4호관은 다육식물관으로 각기린 등 138종 1,169본이 있었다. 3호관은 선인장관으로 대능주철화, 금호, 금유, 거상환, 로라비아 등 239종 2,792본이 있었다. 이 외 야외분재원에는 모과 등 51종의 분재가 있었으며, 난실에는 130종의 난이 있었다. 남산식물원 철거는 1990년대 초 남산 제모습 가꾸기사업에 따라 철거가 결정되었으나, 시설을 더 사용할 수 있다는 여론에 따라 계속 운영해 왔다. 그러나 노후가 심해지면서 2006년 10월 30일에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 동상 및 기념비
남산은 한양이 수도로 정해진 후 국가의 무사태평을 비는 장소였으며, 남산 자체가 호국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신궁이 세워지는 등 민족의 아픈 과거를 지닌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민족정기와 관계가 깊은 장소인 남산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국가적 위인과 대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된 각종 동상, 기념비, 기념탑 등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백범광장과 장충단공원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번호 |
동상명 |
위 치 |
높이(m) |
건립자 |
건립일 |
1 |
안중근상 |
중구 남대문로5가 471 |
7 |
안중근의사동상건립위원회 |
67.03.23 |
2 |
이준상 |
중구 장충동2가 197 |
7.8 |
사단법인일성회(국민성금) |
64.07.14 |
3 |
사명대사상 |
중구 장충동2가 산7-16 |
6.7 |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서울신문사 |
68.05.11 |
4 |
김구상 |
중구회현동1가 100-115 |
10 |
백범김구사업협회 |
69.09.23 |
5 |
김유신상 |
중구 남창동 205-4 |
11.3 |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서울신문사 |
69.09.23 |
6 |
이황상 |
용산구 후암동 30-84 |
11.3 |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서울신문사 |
70.10.20 |
7 |
김용환상 |
중구 장충동2가 산14-21 |
5.2 |
재일동포대한민국거류민단 |
70.10.02 |
8 |
유관순상 |
중구 장충동2가 산7-22 |
9.8 |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서울신문사 |
70.10.12 |
9 |
정약용상 |
용산구 후암동 30-84 |
6.5 |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서울신문사 |
70.10.20 |
10 |
이시영상 |
중구 회현동1가 100-115 |
5.7 |
이시영선생동상건립위원회 |
69.09.23 |
11 |
소월시비 |
남산공원관리사무소입구 |
1.2 |
한국일보사 |
68.03.13 |
12 |
자연보호헌장비 |
남산공원관리사무소앞 |
3.6 |
세종라이온스클럽 |
80.05.13 |
13 |
반공청년기념비 |
범바위약수터 앞 |
8.0 |
반공청년운동기념비 건립위원회 |
68.10.09 |
14 |
조지훈시비 |
케이블카부근 |
2.5 |
조지훈시비건립위원회 |
71.05.10 |
15 |
최현배기념비 |
리틀야구장옆 |
9.0 |
최현배선생기념비 건립위원회 |
71.05.15 |
16 |
이한응기념비 |
장충자락 |
3.0 |
이한응열사추모회 |
60.03.11 |
17 |
파리장서비 |
장충자락 |
3.0 |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 |
73.10.03 |
18 |
장충단비 |
장충자락 |
2.0 |
- |
1990년대 |
19 |
3.1운동기념탑 |
국립극장 옆 |
19.0 |
3.1독립운동기념탑 건립위원회 |
99.03.01 |
20 |
박명룡시은적덕비 |
용산구 한남동 산10번지 |
1.4 |
- |
1807년 |
21 |
한양공원 표석 |
회현자락 |
1.7 |
- |
1910년대 |
22 |
박승희기념비 |
국립극장 내 |
3.5 |
- |
- |
23 |
조택원충비 |
국립극장 내 |
3.0 |
- |
- |
3) 서울성곽, 국립중앙극장, 신라호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都城)으로 1395년(태조 4)에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1396년(태조 5)에 경상·전라·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 이남, 동북면의 함주 이남의 장정 118,070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시작하였다. 전체 59,500척의 성터를 1구간 600척씩 총 97구간으로 나누어서 축성하였다. 구간마다 천자문의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백악산 동쪽의 제1구간을 천(天)으로 시작하여 97번째인 조(吊)에서 끝났다. 1396년(태조 5)의 49일 만에 이루어진 도성(都城) 18km의 축조는 견고하지 못하여 폭우로 성곽이 일부 유실되자, 동년에 경상·전라·강원도 민정 79,400명을 동원하여 제2차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 때 장마비에 무너진 토성을 석축으로 대체하고 성의 높이가 낮은 곳은 높게 쌓았으며, 동대문 부근의 운제(雲梯)를 하나 더 만들어서 수구물을 두 곳으로 뽑게 하였다. 4대문과 4소문도 함께 완성하였다. 1422년(세종 4)에는 322,400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전장 40,300척의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고쳐 쌓아 험지(險地)에는 높이 16척, 차지(次地)는 20척, 평지는 23척으로 하였다. 종래의 동대문 부근 수문 이외에 남변·북변에 각 1칸씩의 수문을 증설하였으며, 서대문을 남쪽으로 이설하고 남대문도 개수하였다. 또한 성 내외의 15척 길을 새로 내어 평상시 순찰과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이후 1424년(세종 6)에는 함경도 북청부(北靑府)에서 쌓은 부분이 퇴락하여 이를 다시 쌓았고, 1429년(세종 11)에도 도성의 세 군데를 수축하였다. 1451년(문종 1)에도 경기·충청·전라 3도의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무너진 도성을 수축하였다. 1451년 수축 이후로는 임진왜란이 있을 때까지 성곽은 특별한 보수 공사 없이 유지되었다. 이후 북한산성 축성의 선행과 도성 수축의 선행을 둘러싼 논쟁이 도성 수축으로 낙착되어 1704년(숙종 30) 공사에 착수하였다. 우선 수축에 필요한 석재를 뜨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의 한재(旱災)로 중단되고 9월에 다시 공사를 벌이다가, 이듬해 1월에 중단되었다. 1705년(숙종 31) 6월에 다시 공사를 속행하여 1706년(숙종 32) 9월까지 동서쪽 도성의 수축을 마치고, 남북쪽 수축에 착수하여 1709년(숙종 35)에 공사를 끝내고 이듬해 봄에 성첩 공사에 들어갔다. 이때 수축된 도성은 주위가 9,975보, 성첩이 7,081보에 달했다. 1745년(영조 21)에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에서 도성을 분담하여 모두 40여 개 처 도합 14,935보를 수축하였다. 1899년(광무 3)에 시내전차의 개통에 따라 동대문·서대문·남대문 주변의 도성이 일부분 헐리면서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이때까지 태조·세종·숙종조에 축성된 도성(都城)은 축조방법과 석재가 상이하여 3시기의 성벽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태조 때 축조한 서울성곽의 축조방식은 면석 석재가 규격이 1척 내외로 비교적 적고 거칠게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여 난석(亂石)쌓기에 가깝게 축조하였다. 세종 때 면석은 태조 때의 거친 깬돌과는 달리 2×3척의 장방형으로 잘 가공된 마름돌을 사용하였다. 체성의 하부는 규격이 큰 장대석 석재를 상부로 갈수록 적은 장방형 석재로 축조하였는데 전부 평축(平築)하였다. 전체적으로 체성의 가운데 부분이 배가 나온 형식으로 축성하였다. 숙종 때에는 면석을 규격화하여 가로·세로 2척인 정방형 돌을 가공하여 면석 간의 맞댄 면에 빈틈없이 평축하였고 체성 기울기도 수직에 가깝게 하였다.
버티고개는 한남동 쪽에서 장충동 국립극장(해오름극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양쪽의 절토된 것을 감안하면 당시에는 꽤 높은 고갯길이라 생각된다. 이 길은 최초 성곽을 쌓을 때는 없었는데, 그 후 한강진으로 들어오는 물량이 많아짐에 따라 세조 3년(1957년)에 한강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지름길인 이곳을 택하여 고갯길을 만들고 도성문을 내었다. 그러나 당시 통행이 잦지 않고 한적한 고갯길로 도적들이 자주 나타나서 약탈과 살인 등 불미스런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여 순라를 돌았다고 한다. 순라를 돌때 번도! 번도! 라고 외치며 도적들을 쫓고는 하였는데, 그 번도! 라는 말이 -번치-번티-버티가 되어 지금 “버티고개”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소문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다소 높은 곳의 나무 밑이라 찾기는 쉽지 않다. 이 고갯마루에는 물맛이 좋은 약수터가 있었는바 오고가는 사람은 물론 아랫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즐겨 마셔 약수동이란 동네 이름을 남긴 채 지금은 없어졌다. 남소문을 건설 할 당시 이곳의 치안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는 중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었는바, 이는 동남쪽에 성문을 내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음양가(陰陽家)의 잇단 상소를 받아들여 예종 원년에 성문 이름도 옳게 얻지 못하고 철거해 버리고 말았다.
길을 따라 걷다가 자유연맹 안으로 들어가 뒷산으로 오르면, 멀리 신라호텔이 보이고 약 1.6km의 성곽이 보인다. 중간에 암문이 하나 있는데, 이곳 주변의 성곽을 둘러보면, 몇 번에 걸쳐 보수를 한 흔적이 역역하다. 시대별로 성곽의 축성기법이 잘 설명되어진 안내 간판이 있다. 조금 더 내려가 “금호로”의 큰길을 만나면 성곽의 모습이 끝난다. 현재 성곽의 흔적은 없어졌으나, 금호로를 건너 맞은편 신당동 성당 길로 접어들어 광희문 방향으로 성곽이 이어졌던 길이다. 15분 정도 걸으면, 약 100m 정도의 성곽과 광희문(光熙門)이 보인다. 숭례문 화재사고 후 설치한 문화재관리초소가 있다.
▲ 버티고개-약수동~한남동
신당동 끝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한다. 옛날 이 고개는 길이 좁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란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옛날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하면서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치(番峙),버티,버터 또는 한자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한성부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다니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또 남쪽에는 벌아령(伐兒嶺)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그 아이를 못 나가도록 막았다는 것으로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 남소문(南小門)터-장충동 산5-15
옛날 서울의 도성(都城)에 있던 문. 지금의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문의 축조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세조실록(世祖實錄)》에 의하면 1456년(세조 2) 11월 20일에 세조가 종친과 재상을 거느리고 청학동(지금의 장충동 일대)에 나가서 이 문의 건립 예정지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남소문은 문자 그대로 남쪽의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세조 때(1457) 교통의 편리를 위해 개설되었다. 한강나루인 한남동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이 험한 산길이라 광희문까지 진입하기가 까다롭다 하여 광희문을 보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남소문이 광희문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꽤 있는데, 이는 한동안 광희문보다 남소문의 역할이 더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도둑무리들에게 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나 예종 1년 때 문이 폐쇄됐다. 음양가(陰陽家)들은 동남쪽에 문을 내는 일은 나라에 흉흉한 일을 불러들이는 것이라 충고하며 문을 다시 개방하는 일을 크게 반대했는데 공교롭게도 세조3년에 왕의 장남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사망하는 비극까지 일어나 남소문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1936년에 발행된 <대경성정도>에 보면 장충단에서 한남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성곽을 허물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소문은 문루가 채 만들어지기도 전에 철거된 것이다. 그런 탓에 정식 이름도 없이 그저 남소문이라 명명되는 남쪽의 작은 문. 그 흔적이라곤 현재 장충로 고갯길에 남아 있는 ‘남소문터’라는 작은 표지석이 전부다.
▲ 국립중앙극장-장충동2가 산14-67번지
국립중앙극장(國立中央劇場, National Theater of Korea)은 1950년 창설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공연 예술 기관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의 남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장충지구의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국립극장은 서울특별시의회의사당 자리에서 구 명동예술극장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이관한 건물이다. 국립극장은 1972년 건축가 이희태의 설계로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 공연시설을 대표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국립극장 대극장은 기단부와 몸체부, 지붕부의 3단계로 구성된 입면과 전통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둥과 서까래, 그리고 기둥과 지붕 사이에 있는 구조장식재인 공포의 변용과 같은 수법을 보인다. 또한 건물의 외관을 콘크리트로 울퉁불퉁하게 처리하여 마치 하나의 조각물을 연상시킨다. 건축 설계 당시 콘크리트를 이용한 건축의 조각적 디자인 경향을 볼 수 있다. 국립극장은 2000년대에 별오름극장과 하늘극장 등을 새로 개관하여 현재의 형태를 완성하였다. 해오름극장(대극장)은 1,522석, 달오름극장(소극장)은 454석, 별오름극장(실험무대)은 100석, 하늘극장(야외극장)은 600석 규모로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연혁]
1950.04.29 국립극장 창설(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및 국립극단 창단
1952.12.15 6.25 전쟁 중 대구 문화극장으로 이전
1957.06.01 국립극장 서울로 이전(구 명동예술극장)
1962.01.15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오페라단 창단
1969.03.08 KBS로부터 교향악단 인수(국립교향악단으로 개칭)
1973.05.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 창단
1973.10.17 현 국립극장 중구 장충동 신축 개관
1981.08.01 국립교향악단 KBS로 이관
1982.05.15 야외극장 개장
1991.02.01 국립중앙극장으로 명칭 변경
1995.01.01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2000.01.01 책임운영기관 시행
2000.02.01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 재단법인화
2001.05.23 별오름극장 개관
2002.06.11 야외극장을 하늘극장으로 새단장 재개관
2003.04.21 재단법인 국립극장발전기금 설립
2004.10.29 해오름극장 새단장 재개관
2005.04.29 달오름극장 새단장 재개관
2006.01.01 신선희 국립극장장 취임
2008.04.30 하늘극장을 KB청소년하늘극장으로 새단장 재개관
[시설]
해오름극장
건립 당시의 명칭은 대극장이었으나, 2000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2004년에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거쳐 재개관했으며, 객석 수는 1563석이다. 오케스트라 피트와 회전무대, 승강무대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어 창극 등의 무대 작품 공연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달오름극장
건립 당시의 명칭은 소극장이었으나, 해오름극장과 함께 2000년에 개칭되었다. 개축 공사 후 2005년에 재개관했다. 객석 수는 427석이며, 국립 예술단체들의 대표 레퍼토리 및 상설 공연, 특히 연극과 창극 전용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별오름극장
2001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개관했으며, 객석 수는 수납식(지정석으로 운영) 74석과 이동식 30여석 등 총 100여 석이다. 무대는 가변식으로, 소규모 창작 혹은 실험적인 무대 예술의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KB청소년하늘극장
2002년에 개장한 야외 공연장인 하늘극장을, 국민은행의 후원으로 2008년 리모델링을 통해 732석의 객석을 가진 돔형 공연장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지붕 일부가 자동으로 열리고 닫혀 자연 채광이 가능하고, 날씨에 관계없이 안정적인 공연이 가능하다.
그 외 시설
해오름극장과 달오름극장 로비에 관객들을 위한 카페와 매점, 매표소 등이 있으며, 극장 앞의 문화광장에도 간단한 음식과 음료수를 파는 노천 매점이 자리 잡고 있다. 해오름극장 1층(전면부 계단 아래쪽)에는 어린이 놀이방과 문화상품 매점,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정보검색대도 마련되어 있으며, 고급 궁중음식 전문점도 입점해 있다.
전속단체로 국립극단, 극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있다.
▲ 춘강박승희기념비-장충동2가 산14-67번지
국립중앙극장에 있는 극작가, 신극운동가로 우리나라 연극계에 신파극을 토착화시킨 춘강박승희 선생의 기념비이다.
※ 박승희(1901~1964)
본고나 반람. 1901년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1841~1904)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메이지대학 영문과 재학 중 김복진, 김기진, 이서구 등과 극단 토월회를 조직, 체호프 작 ‘곰’, 쇼 작 ‘그는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 거짓말을 했는가’, 유젠 피로트 작 ‘기갈’ 등의 번역극과 자작 희곡 ‘길식’으로 제1회 공연을 가졌고 이어 톨스토이 작 ‘부활’을 상연했다. 1932년 토월회를 태양극장으로 개칭하고 주로 지방공연을 했으나,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에 해산, 광복이 되자 1946년에 ‘1940년’, ‘의사 윤봉길’, ‘모반의 혈’ 등의 레퍼토리로 토월회 재기공연을 가졌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63년 제1회 한국연극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희곡에 ‘사랑과 죽음’, ‘산 서낭당’, ‘이대감 망할 대감’, ‘혈육’, ‘요부’, ‘고향’, ‘아리랑고개’ 등이 있다. 민중계몽을 위한 연극을 주창하여 우리나라 연극계에 신파극을 토착화시킨 첫 번째 공로자로 평가된다.
▲ 관성묘(關聖廟)-장충동2가 186-140번지
관성묘는 중국 삼국시대 蜀漢의 將帥 關羽를 모시는 사당으로 關王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들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관성묘의 유래는 임진·정유의 난에 전투가 있을 때 자주 관왕의 영혼이 나타나 神兵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하는데 힘쓴 것은 아마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관성묘는 조선 고종의 후궁이었던 嚴妃가 세웠다는 설도 있다. 關聖廟는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6짝 분합문이 있고 내부 정면에는 관우 내외상을 모셨는데, 왼쪽에 관운장 오른쪽에 부인상을 배치했다. 왼쪽 벽에는 장군상, 오른쪽 벽에 신령님을 모셨다. 관운장상은 녹색 戰服에 금빛 견장을 붙이고 투구를 썼으며 매우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앉아서 왼손으로는 활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수염을 매만지고 있다. 관운장 부인상은 머리에 봉황 무늬가 있는 띠 모양의 장식을 두르고, 적색과 청색의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좌우의 무릎 옆에는 시녀가 한 명씩 배치되어 있다. 시녀는 갈모 형식의 모자를 쓰고 오른쪽 시녀는 분홍저고리에 녹색치마를 입고, 왼쪽 시녀는 녹색저고리에 적색 치마를 입고 있는데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다. 왼쪽의 장군상은 말을 끌고 두 명의 장군이 있고, 오른쪽의 신령님은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용과 봉황이 그려진 한복을 입고 있다. 제일은 음력 정월 초하루, 또는 관운장 탄신일인 5월 13월, 6월 24일, 10월 19일 4번 지낸다.
▲ 박문사터(博文寺. 현 신라호텔)-장충동2가 202번지
박문사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동쪽에 있던 사찰이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식 등을 기리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이곳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장충단 자리는 1919년에 공원으로 바뀌었다.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을 공원화한데 이어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발기하여 세워진 소토슈 사찰로 건평은 387평이었다. 설립 목적은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이 쓰였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 정문으로 삼았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참석하고 히로히토 천황과 황족들의 하사품도 전해졌다. 1939년에는 이곳에서 이토를 포함하여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 한일 병합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용구의 아들인 이석규가 흑룡회와 함께 개최한 이 행사에는 이광수와 최린, 윤덕영 등 약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찰은 대한민국 건국 후 헐렸고, 박문사터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신라호텔이 세워져 있다.
4) 장충단공원-장충동2가 197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의 남산 동쪽 종남산 기슭 아래 조성된 공원으로,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해온 역사적인 공간이다. 현재는 남산공원의 일부에 속하며, 광장·놀이터·분수대 등의 공원시설과 석호정(石虎亭)·장충단비석·이준열사동상·사명대사동상 등이 있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던 이 계곡에는 조선 영조 중엽 이래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고, 근처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살해된 후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이곳에 사전(祠殿)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건립하고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으로 순사(殉死)한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호위 장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폐사되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 장충단공원이라 하여,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놀이터·연못·산책로·광장·교량 등의 시설을 설치하는 한편, 상하이 사변 때 전사한 일본군의 동상을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보제사(菩提寺)인 박문사 등을 건립했다. 박문사의 건물은 경복궁의 예원전 및 부속건물을 이축한 것이고, 입구의 문은 옛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 세운 것이었다. 8·15해방 직후 이것들은 즉시 철거되었고, 여러 가지 공원 시설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건물은 완전히 소실되고, 장충단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가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신라 호텔의 일부와 한때 국빈전용의 숙소였던 영빈관이 있다. 비의 전면에 새겨진 '奬忠壇'이라는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일 때 쓴 글씨이고,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143자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이전한 수표교(水標橋)가 근 15년간 공원의 초입에 있었으나,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장충단공원 내에는 1960년대 이후 자유 센터, 서울 타워 호텔, 중앙공무원교육원(1993년 현재 경기 과천시 소재), 재향군인회, 신라 호텔, 장충체육관,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국립국악고등학교 등을 비롯해 어린이야구장·테니스장·수영장 등의 각종 시설물이 건립되어, 처음 42만㎡ 넓이의 공원이 계속 축소되고 주변 환경이 훼손되었다. 장충단공원을 독립된 근린공원으로 존속시킬 경우 과다한 시설물의 건립을 막을 방법이 없고, 남산공원과 함께 보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정부는 공원 전역을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신라 호텔, 장충체육관 등의 고급문화·위락 시설이 있는 장충단공원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바로 공원으로 진입할 수 있다.
최근 서울시는 1996년까지 6개년계획으로, 급격한 도시화에 의해 훼손되어가는 남산을 회복시켜 보호하고자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장충단공원 부지 3만 3,060㎡에 남산계곡에서 끌어 들인 물로 소폭포와 돌다리 등을 만들어 하천경관을 조성하고, 경로당 및 노인위락시설이 마련된 노인 모임터와 어린이놀이터를 조성할 예정이다. 국립국악고등학교 자리 1만 3,224㎡는 민속공연장으로 꾸미고, 서울공연예술회관을 건립, 각종 공연활동의 연습장 및 연구 장소로 활용할 예정이다. 또한 장충단공원을 비롯해 동서남북 각 지역에서 남산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너비 12~20m로 확장해 산 속 산책로와 연결시켜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대폭 정비해나가고 있다. 남산 전체를 덮고 있는 아까시나무·은사시나무 등의 볼품없는 외래 수종을 점차로 없애고 남산 고유수종인 소나무와 신갈나무로 바꾸어 나가며,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된 주변의 역사유적을 복원·재현해 나가고 있다.
장충단은 광무4년(1900) 5월 31일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갑오년(1894) 이후 국가를 위해 목숨을 잃은 장졸들을 위해 단을 쌓게 하고, 장례원(掌隷院)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지내라는 조칙에 따라 조성되었다. 이에 원수부는 1900년 10월 서울 성곽 남쪽을 수비하던 어영청의 분영(分營)인 남소영(南小營)터(장충동2가 197번지 6호 부근) 일대에 제단(祭壇)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짓고, 주변을 정화하는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동년 11월 11일 고종은 이 단을 ‘장충(獎忠)’이라 명명하자, 황태자 순종이 ‘장충단’이라 쓰고, 충정공 민영환이 비문을 지어 장충단 앞에 세운 것이 장충단비다.
장충단은 일명 충렬사단(忠烈祠壇)으로도 불렸다. 순국한 이들을 제사하기 위한 초혼단(招魂壇)이 장충단이므로 일본침략에 대항하려 했던 항일, 배일사상이 깃든 곳이니만큼 오늘날 동작동 국립묘지의 헌화하고 참배하는 현충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말 정교(鄭喬)의 「韓國季年史」에 보면 동년 11월 12일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민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 순교한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위시하여 이도철(李道撤), 임최수(林最洙) 등과 전몰한 사졸들을 제향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군인은 아니지만,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으로 사형당한 시종 임최수(林最洙) 등을 제사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있었다. 이듬해 광무 5년 2월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가 고종황제에게 상소하자, 고종황제는 충성을 표창하고 절의를 장려함에 있어서 어찌 문관과 무관을 구별할 필요가 있겠느냐? 상소한 내용이 옳은 것으로 생각되니 장례원에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고 재가함으로써, 장충단에 모셔야할 신위가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만행에 분노를 금할 수 없던 무렵에, 이러한 항일, 배일의 순국열사를 장충단에 모셔 제향 하는 일은 장병들을 크게 감격시켰고, 온 국민들이 장충단에 대한 경모심을 높여 애국순열사상이 고조되어 갔다.
장충단을 건립한 이래 9년 동안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때마다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을 쏘면서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그러나 융희 2년(1908)에 이르러 일제가 한국의 주권침탈을 노골화하면서, 장충단 제사가 반일감정을 부추긴다 하여 폐지하도록 하였다. 한일합방 후인 1919년 6월부터 일제는 장충단 일대를 일본식 공원으로 꾸미면서 장충단비는 현재 신라호텔 부근의 남산 숲 속으로 버리고, 이곳에 벚꽃 수 천 그루를 심고, 광장, 어린이놀이터, 산책로, 공중변소, 교량 등의 시설을 하는 등 장충단공원이란 이름을 붙여 경성부가 관리하였다. 또한 일제는 이곳에 상해사변 때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워,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6.25전쟁 때는 제단마저 소실되어 흔적마저 없어졌다.
1929년 10월에 개벽사에서 발행한 「별건곤(別乾坤)」(京城號)에 실린 장충단 사진을 보면 규모가 큰 단층 기와집으로 넓은 축대 위에는 본 건물인 사전(祀殿) 1동 외에도 부속건물 2채가 세워져 있고, 장충단이라고 쓴 비석을 세워 놓았음을 볼 수 있다. 현재 지하철 3호선 동국대 입구역에서 장충단공원으로 들어가는 어구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장충단비가 세워져 있다. 1.5m 정도의 크지 않은 비 정면에는 순종황제가 황태자 때 손수 쓴 ‘獎忠壇’이란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충정공 민영환이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한문으로 쓴 14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고종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중에 甲午, 乙未 등의 사변을 만났을 때 군인으로서 어려움에 당면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으니 슬프다. 그 서릿발 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밝기가 해와 별 같다. 충성과 의리를 길이 기려 제사를 지내라는 어명이 있어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고 아울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노니 백세(百世)에 빛남에 보답함이로다. 그 士氣, 군인들의 마음을 북돋을지니 그 아름다움은 크고도 장하도다.”
▲ 석호정(石虎亭)-중구 장충동2가 산14-21(남산국립극장 뒷편)
석호정은 황학정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정(射亭: 활터)이다. 황학정이 왕실과 관련을 맺고 전통을 이어왔다면 석호정은 민간 사정으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동국대 후문인 장충단 공원 뒤편에 남산골 선비들의 심신단련을 위하여 석호정이라는 활쏘는 정자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없어졌다. 현재는 남산 북록의 국립극장 뒤편에 1956년 노인정으로 쓰이던 건물을 중수하여 석호정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1970년 9월 사단법인 대한궁도협회에서 설치, 운영하다가 1972년 3월 서울시에 기부하였다. 사석은 7석, 국궁 표준거리 145m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 남소영터(南小營址)-장충동2가 197번지
남소영은 남소문 동쪽인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었으니, 이는 현재 중구 장충동 2가 197번지에 해당된다. 남소영은 정시 무과의 초시의 두 번 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남소영은 어영청의 분영(分營)으로 군사주둔지로 광무 4년(1900) 장충단이 설치되었다. 남소영의 병영 규모는 194칸에 이르렀고, 창고의 수는 모두 18문(門)이 있었는데 13문에는 군기(軍器)가 있었고, 4문에는 군물(軍物)이 있었으며, 1문은 비어 있었다. 남소영 북쪽에 137칸의 남창이 있었고, 남소영 내에 52칸의 화약고 등이 있었다.
▲ 장충단비-장충동2가 197번지
1900년(광무 4년) 난을 당하여 몸을 던져 왕을 섬겨 죽음에 이른 이들에 대한 제사 드리는 절차를 처리하게 하라는 황제의 소칙(詔勅)에 따라 원수부(元帥府)에서 단 설치를 건의하여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에 장충단(獎忠壇)이 설치되었다. 을미사변에 순국한 훈련대(訓練隊) 연대장(聯隊長) 홍계훈(洪啓薰)을 위시한 장병들의 제사를 올렸고 이듬해에는 문·무의 차별을 없애 임오년의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을 위시해서 갑신년의 찬성(贊成) 민태호(閔台鎬)와 을미년의 궁내대신(宮內大臣) 이경직(李耕稙) 등 신위가 증가되었다. 장충단비는 장방형의 대석(臺石)위에 세워져 있고 크기는 총고 183㎝, 비신의 폭은 63㎝, 두께는 35㎝이다. 전면의 전서(篆書) 「獎忠壇」은 후예 순종이 된 황태자의 예필(睿筆)이고 뒷면은 민영환(閔泳煥)이 쓴 143자의 찬문이 있다. 입석 연대는 1900년(광무 4) 2월이다. 장충단은 원래 지금 한국유림독립파리장서비가 있는 자리에 설치되어 있었고, 장충단비는 신라호텔 서쪽 큰길가 동쪽에 있었다. 단은 폐사된 뒤 건물은 남아 있다가 한국전쟁 때 없어졌다. 장충단비는 길을 확장하고 신라호텔 영빈관을 지으면서 196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면 : 睿筆 獎忠壇
후면 : 欽惟我 大皇帝陛下 姿挻上聖 運撫中興 奠泰磐之業 惕履霜之漸 無奈天步時或○○ 乃有甲午乙未之事變 而武臣之投難効死者多 嗚呼 其毅烈之凜於霜雪 名節之炳如日星 乎永享芬苾 不朽竹帛 是以 聖明特軫褒忠之義 爰降惻怛之詔 設壇竪碑而表㫌之 繼又定春秋祀儀 以示崇報 以樹風聲 此誠百世之曠典也 勵士氣 激軍心 亶在於斯 ○歟盛哉 ○歟盛矣
正一品輔國崇祿大夫元帥府會計局摠長兼任表勳院摠栽陸軍副將勳一等 臣閔泳煥 奉勅謹記並書
광무四年十一月 日
▲ 수표교(水標橋)-장충동 2가 197-1(서울 유형문화재 제18호)
수표교(水標橋)는 청계천의 다리이다. 조선세종(世宗) 2년에 처음 놓였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동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원래 자리에 다시 놓으려고 했으나,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겨지지는 못했고, 대신 그 자리에는 임시 다리가 놓여져 있다. 수표교는 만들어질 당시는 그 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리었다. 세종 23년(1441년) 다리 앞에 개천(開川,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세웠다. 다리 아래에 ‘在長通橋東橋西中央立石標刻尺寸之數 凡雨水以知深淺(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영조 36년(1760년)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庚(경)·辰(진)·地(지)·平(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측정하였다. 이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 수표교는 6모로 된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를 얹고 그 사이에 판석(板石)을 깔아 만들었다.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 2단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 윗 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난간에 새겨진 연꽃봉오리·연잎 등의 조각들이 매우 아름답다.
이 다리는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영조 36년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마치고 다리 동쪽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漢城判尹)에게 알려 홍수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수표교에 ‘丁亥改造(정해개조)’,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라 새겨져 있어 준설공사가 끝난 후 영조 43·44년(1767·1768년)에 다리를 다시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서울의 풍속 가운데 정월 대보름날 서울 사람들이 밤을 새워 즐겨하였던 답교놀이 때는 이곳이 가장 성황을 이룬 곳 중의 하나였다. 정월 대보름 전 2·3일은 이 수표교를 중심으로 청계천 위·아래에 연날리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쭉 늘어서 구경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이 다리는 수표석과 함께 장안의 명물로 남아 있었으나, 1959년의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일시 신영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65년에 장충단공원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날 수표교가 있던 곳은 수표동(手標洞)과 관수동(觀水洞)이라는 동명과 수표공원이라는 어린이공원이 있어 그 이름만 전하고 있다. 6각형의 큰 화강암 석재로 된 달기둥 위에 길게 모난 횃대를 걸치고, 돌을 깐 매우 드문 수법의 다리이다. 돌기둥에 새긴 경(庚)·진(辰)·지(地)·평(平)의 수위표(水位標)로 물깊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했다.
▲ 사명대사동상-창충동2가 산 197(장충단공원 내)
유정(惟政,1544~1610)은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이다.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별호는 종봉(鍾峯), 본관은 풍천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법명인 유정(惟政)보다 당호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사명당은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사사(師事)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선(禪)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1561년(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당시의 학자·대부·시인들이었던 박사암(朴思菴)·허하곡(許荷谷)·임백호(林白湖)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선조 8) 선종(禪宗)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淸虛)대사(서산대사)에게서 성종(成宗)을 강의 받고 크게 각성하였다.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으며,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역옥에 죄 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순안에 가서 청허의 휘하에 활약하였고 청허가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을 통솔하고 체찰사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왕의 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과 전마(戰馬)를 바치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島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이르러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架善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604년(선조 37)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 갔던 사람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그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병을 얻어 광해군의 신변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사망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가 있다. 승려의 몸으로 국가의 위기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외교) 등 눈부신 활약은 후세 국민이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 이준열사동상-장충동2가
이준(李儁.1859~1907)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아버지는 병관(秉瓘)이며, 어머니는 청주이씨(淸州李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명섭(命燮)과 숙부 병하(秉夏)에게서 양육되었다. 1887년(고종 24) 북청의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인재양성을 위해 고향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했다.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며 이듬해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장박(張博)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협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여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다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저지시켰다. 또한 같은 해 12월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가 조직되자, 회장을 맡아 반일투쟁을 주도하다가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했다. 1905년 윤효정(尹孝定)·양한묵(梁漢默) 등과 같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으며,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지어 동지들과 함께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운니동에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으며 함경도의 유지들을 규합하여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발기하여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에 힘썼다. 그해 평리원(平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에 임해 결국 법부대신과 알력을 빚어 취임 8개월 만에 파직 당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3월 하순 극비리에 고종을 만나 세계 각국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헤이그 특사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4월 22일 서울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했으며 다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했다. 그곳에 만국평화회의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6월 25일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회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므로 1국을 대표하여 참석할 자격이 없다 하여 거부되었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언론기관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회의 참석의 길이 막히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순국(殉國)했다. 시신은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특별시 수유리에 안장했으며,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 유관순열사 동상-장충동2가 7-22
유관순(柳寬順,1902~1920)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제국의 모진 고문으로 18세 때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시 서북구 백석동에 위치한 천안종합운동장의 ‘유관순체육관’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 어영창(御營倉)터-장충동2가187
어영청(御營廳)은 조선 후기 중앙 5군영(五軍營)의 하나. 상번군(上番軍)을 중심으로 도성숙위(都省宿衛)를 담당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성공하여 집권한 서인정권이 정권을 안정시키고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설치했다. 1623년 후금이 침입할 경우에 국민에게 항전의식을 고취시키고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국왕친정(國王親征)을 계획하면서 어융사(御戎使) 이귀(李貴)로 하여금 국왕의 호위를 담당할 260여 명의 정예병을 개성에서 모집하게 했는데, 이것이 어영청의 시초이다. 당시 후금의 침입은 없었지만 1624년 이귀를 어영사(御營使)로 임명하고 부사(副使)·중군(中軍)·참모관(參謀官) 등의 편제를 갖춘 다음 어영군으로 하여금 계속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게 했다. 어영청은 그해 발생한 이괄의 난을 계기로 훈련도감과 함께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1,000여 명의 중앙군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훈련도감처럼 서울에 병력을 상주시키지 못하고 500명씩 교대로 번상(番上)하게 했으며, 번상의 경비를 부담할 보인(保人)을 제공했다. 일시적으로 총융청에 소속되기도 했으나,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7,000여 명으로 숫자가 늘어났다. 1646년에는 도제조(정1품)·제조(정2품, 병조판서가 겸임)를 포함하여 어영대장(종2품)·중군(종2품)·별장(정3품) 등 300여 명의 군관으로 편제가 확충되었다.
1652년(효종 3) 효종의 북벌정책에 따라 군비확장을 할 때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한 다음 원호(元戶) 2만 1,000명을 확정하고, 도성에 어영창(御營倉)을 두는 등 체제를 크게 개편하여, 어영군을 북벌의 핵심부대로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현종·숙종 때 양역(良役)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정책이 추진되면서, 1704년(숙종 30) 1만 6,300여 명으로 어영군의 수를 줄였으며,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 향군(鄕軍)의 번상체제로 바꾸었다. 아울러 흉년·농번기·재해·재정절약 등의 이유로 정번(停番)이 자주 있었고, 정조대 이후에는 감번(減番)이 제도적으로 시행되었다. 순조대에는 도성숙위의 허소(虛疏)를 방지하기 위하여 1초(哨)는 도성인으로 선발했다. 어영군의 선발기준은 궁(弓)·포(砲)·창(槍)·력(力) 중 1가지만 능하면 되었으므로 신분구성은 사대부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주요임무는 국왕의 호위와 도성의 수비였지만 그 외에 적간(摘奸), 금송(禁松), 착호(捉虎), 중앙관청의 파수 등을 맡았다. 번상급료제(番上給料制)를 채택한 어영청의 재정은 주로 보(保)에 의존했지만, 양역변통(良役變通)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던 현종·영조 연간에는 점차 둔전(屯田)을 확보하여 재정에 활용했으며, 일시적이나마 숙종대에는 어영청에서 주전(鑄錢)하여 얻은 이익금을 재정에 충당시킨 바 있다. 그런데 현종대 이후에 정번이나 감번이 잦아지면서 그로 인해 덜 소비된 재정과 위의 방법을 통해 모아진 재정을 화성축성비(華城築城費)·사신접대비·진휼비 등에 옮겨 사용했다. 그것은 도성의 숙위와 국왕의 호위를 주목적으로 하던 어영군의 성격 변화와 아울러 조선 후기 군역이 국가의 재정확보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순조대 이후에는 어영청이 장어영·총어영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 이한응선생비-장충동2가 197
이한응(李漢應.1874~1905). 한말의 외교관·순절의사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아버지는 곤양군수 경호(璟鎬)이다. 1892년(고종 29)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897년(광무 1) 한성부주사,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을 지냈다.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런던에 부임했다. 1902년 10월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이 귀국하자 서리공사가 되었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각국에 주재하는 한국 공사들에게 연락하여 재외한국공관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주권 수호에 힘쓸 것을 호소했다. 1905년 일본의 한국에서의 지도·감독·보호를 인정하는 새로운 영일동맹(제2차 영일동맹)을 맺으려는 영국과 일본 간의 비밀외교가 진행되자, 이 조약이 동양 평화를 침해하는 것이라 하여 영국정부에 항의했으나, 영국정부는 냉담했고 오히려 일본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그를 축출하려 했다. 이에 제1차 한일협약과 침략적인 영일동맹개정조약에 죽음으로써 항쟁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5월 12일 음독 자결했다. 그의 자결은 국권 박탈에 대한 최초의 자결이었으며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기관에 상세히 보도되어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고종의 특명으로 시체가 국내로 옮겨져 용인에 안장되었다. 내부협판에 추증되고,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금위영 화약고터-장충동2가191
금위영은 인조(仁祖) 때 기병(騎兵) 중에서 정병(精兵)을 선발하여 병조 산하에 두었던 정초군(精抄軍)과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를 통합하여 1682년(숙종 8)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금위영은 처음부터 5군영의 일부로 독립된 채 생겨난 것이 아니고, 병조 판서가 금위영의 대장직을 겸함으로서 실질적으로 6조 중에서 병조의 수중에 있었다. 이후 1754년(영조 30년)에 독립된 군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초기의 편제는 1영-5부-20사-105초(哨)로 구성되었으나 1704년 군제를 개혁할 때 1영-5부-25사-125초로 편제되어 그 수가 증가하였다. 지휘부의 인원은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 대장(大將)· 중군(中軍)· 별기위별장(別騎衛別將) 각 1명, 천총(千摠) 4명, 파총(把摠) 5명, 낭청(郞廳) 2명, 초관(哨官) 41명 등이며, 병력은 별무사(別武士) 30명, 기사(騎士) 150명, 별기위(別騎衛) 32명, 표하군(標下軍) 1,177명, 별파진(別破陣) 160명, 보군(步軍) 등으로 구성되었다. 금위영의 운영은 보(保)에 의해 이루어져 많을 때는 9만명에 이르렀다. 주축을 이루는 6도의 향군은 5초씩 번상하여 2개월간 복무하였고, 마병으로 이루어진 기사는 장번(長番)으로 복무했으며, 별파진은 16교대로 복무하였다. 이러한 금위영은 1881년(고종 18)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혁파(革罷)되었다.
5) 동국대학교
▲ 숭정전(崇政殿)---중구 필동 3가 26번지 1호(동국대학교 내)
숭정전(崇政殿)은 원래 경희궁의 정전이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이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즉위 9년인 1617년에서 1620년 사이에 궁궐을 건립하여 경덕궁이라 불렀던 곳이다. 숭정전은 1910년 일제가 경희궁을 철폐하고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설립할 때도 남아 있었다. 그 후 1926년에 필동 남산 기슭,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에는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曺洞宗)의 조계사가 들어서 있었는데, 1926년 3월 조계사가 매입하여 동절의 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건하였다. 광복 후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1976년 9월 현재 위치로 옮겨져 정각원(正覺院)이란 현판을 걸고 학교의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국대학교는 1946년 9월에 종로구 명륜동에 있던 혜화전문학교를 동국대학으로 승격 1947년 9월 중구 필동 현 장소로 이전, 산림을 훼손하고 교사를 신축하여 1953년 2월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다.
숭정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으며, 주춧돌과 기둥이 둥근 것이 특징이다.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같이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어서 국왕이 문무백관의 진하를 받거나 조회를 하는 중심되는 건물이다. 따라서 숭정전 앞에는 정1품부터 종9품까지의 문무백관이 서열대로 늘어서는 표지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후기 숭정전 둘레에는 무랑(廡廊)과 담이 둘러 있었고, 남쪽으로 崇禎門, 남동쪽에 建明門, 동쪽에 麗春門, 서쪽에 宜秋門이 있었다. 숙종 36년(1710) 60세를 축하하는 헌수하례(獻壽賀禮)가 숭전전에서 있었고, 4년 두인 정월 오리(午日)에는 조회를 마친 후에 국왕이 지은 시가 「궁궐지」에 수록되어 있다. 그 후 경종, 정조, 헌종 세 임금이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린 뒤 이 전각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일제침략기에 경희궁 부지는 국유지로 편입되어 그 관리권이 1925년부터 경기도로 이전되고, 1926년 숭정전 전각은 일반에게 매각되어 현 동국대학교 자리의 일본 사찰인 조계사(曹溪寺)의 본당으로 쓰이게 되면서 궁궐 건물형태를 변형하여 사찰형태로 변형되었다. 현재도 숭정전은 동국대학교의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내부에는 널마루가 깔리고, 벽에는 유리창이 끼워져 있으며, 기단석은 없어지고 장대석만 둘러져 있다.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에 따라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던 흥화문을 다시 경희궁에 옮겨다 놓고, 숭정전도 원래 위치로 이전, 복원하려다가 건물의 본 모습이 많이 변형되고 부재들이 낡아서 새로 축조하여 복원한 바 있다.
▲동악시단(東岳詩壇)-필동 3가 26번지 1호(동국대내)
시를 생활화했던 옛 우리 선조들의 시속은 다양하고 멋이 있었다. 이를테면 시종(詩鐘) 같은 것이다. 시를 짓는 모임의 규칙은 엄했다. 모임의 복판 천장에다 끈을 드리워 끈 끝에 동전을 달아 놓고 그 아래 구리쟁반(銅盤)을 놓아둔다. 그 끈의 중간 즈음에 일정한 길이의 향조각을 꽂아 놓고는 한 선비가 시 한수를 짓는다. 이 시를 받아 대구(對句)를 지어야 하는 선비는 향에 불을 붙여 향이 다 타기 전까지 작시를 해야 한다. 향이 다 타면 끈이 타게 되어 있고 끈이 타면 끝에 달아 놓은 동전이 동반으로 떨어져 소리가 난다. 쨍그랑 소리가 나면 이 선비는 실격이 된다. 이를 시종이라 했다. 또한 시환(詩丸)이라는 것도 있었다. 선조들은 요즈음처럼 남이 봐 주기 위한 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족하는 시를 지었다. 그래서 시를 쓰면 그 종이를 마치 환약처럼 둥글게 하여 바가지 속에 저장한다. 그리고 그 시환이 바가지에 가득 차면 그 바가지를 봉해서 강물에 띄운다. 이 시표(詩瓢)는 은둔한 선비들이 곧잘 띄웠다. 뱃사공들이 이 시표를 주우면 횡재를 한다. 왜냐하면 이 시환은 선비들에게 쌀 몇 섬으로 매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뜻 맞는 사람끼리 시사(詩社)를 만들어 철따라 자연과 시를 융화시키는 풍류 또한 대단했었다. 이를테면 정약용(丁若鏞), 이치훈(李致薰) 등 열네 명이 결사한 죽란시사(竹欄詩社)의 경우를 보면, 시사의 규약은 살구꽃이 처음 피면 모이고, 복숭아꽃이 필 때와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모이며, 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만개하면 모였다. 또 국화꽃이 피어 있는데 눈이 내릴 때와 한해가 저물기 전에 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이례적이라 하여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서지의 연꽃 집회는 현대인보다 훨씬 세련된 멋이 깃들어 있었다. 서지는 지금의 서대문 밖 금화국민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터에 있던 연못으로 장안에서 연꽃 크고 좋기로 으뜸이었다. 연꽃이 필 때 선비들은 이른 새벽어둠이 가시기 전에 이 못가에 모인다. 모두 모이면 배를 띄우고 연못 한가운데로 가서 배를 멎고 숨을 죽이고 연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연꽃은 이른 새벽어둠이 가시면서 피기 시작한다. 이 연꽃이 필 때 가느다란 미성을 낸다. 이 미성을 들을 줄 아는 그 섬세한 감성과 미(美)를 실밥 골라내듯이 집어내어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 얼마나 미에 성숙된 우리 선조였던가. 그리고 청개화성(聽開花聲)을 두고 시를 짓는다. 세상이 오래 되고 넓다 하지만 아마도 꽃 피는 소리까지 들을 줄 아는 백성은 동서고금에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 때 폐모에 분개하여 낙향한 조춘풍이 주축이 되어 결사했던 학시사(鶴詩社)도 기품을 복합시킨 한국인의 멋이었다. 이 결사에 든 선비들은 각기 한 마리씩의 학을 길렀다. 이 양학술(養鶴術)은 적이 형이상학적이고 또 시적인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시 읊는 소리를 많이들은 학일수록 눈을 감는 오묘함이 더한다든가, 이른 새벽 꽃이슬로 학 벼슬을 닦아 주어야 선홍(鮮紅)이 더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년에 한 번씩 각기 자기가 기른 학을 안고 가서 서로 상학(相鶴)을 하고 품평한다. 그리고 장원에 뽑힌 학을 가운데 놓고 시를 짓는다. 또 이 결사에서는 섣달그믐께 날을 받아 제시(祭詩)하였다. 일년 동안 지은 시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 제시 습속은 당나라 책 '가도전(賈島傳)'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가도란 사람은 시 한수 짓는데 어찌나 심로(心勞)를 했던지 섣달 그믐날 밤 일년동안 지은 시를 모시고 주포(酒脯)로 제사를 지내는데, 그로써 심로했던 정신을 보기(補氣)하였다 한다. 이 시사의 한 유적으로 서울 필동 동국대학교 내 서북쪽 학생회관 앞에 있는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을 찾아볼 수 있다. 동악 선생은 선조 때의 계관시인 이안눌(李安訥)이며, 바로 이 동국대 캠퍼스의 서반이 동악의 집터였다. 순조 때 지은 '한경식략(漢京識略)'에 보면 「동악 시단은 남산 묵동 아래 있는데 옛날 동악 이안눌이 그 집 뒤뜰 기슭에 단을 쌓고, 여러 문사들과 함께 시를 읊던 곳으로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그 터전을 사람들이 동악 시단이라 불러왔으며, 그 옆에 흩술(單辨)의 홍매나무가 있는데,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고목이 되었을 그 홍매는 없고, 다만 그 후 영조 때 동악의 현손인 이주진(李周鎭)이 시단을 기념하기 위해 새겨둔 여섯 글자만이 옛 터를 지켜내고 있다. 이주진은 이 옛 터에 담을 쌓고 폐허가 된 단에 증토하는 한편, 물을 끌어 못을 만들었으며 단풍과 철쭉을 옮겨 심어 춘추를 채색케 했다. 지금 자라고 있는 인근의 단풍과 철쭉은 그 옛 뿌리에서 돋아난 것들일 것이다. 동악은 당대의 명류인 이오봉(李五峯), 권필(權鞸), 홍학곡(洪鶴谷) 등 일류시인들을 이곳에 유숙시켜 시단에 모이기도 하고, 시루(詩樓)에 모아서 시종이며 시환이며 제시를 하였으니, '인계앙지여신선(人階仰之如神仙)'이라 아니할 수 없었겠다. 시단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 저항시인 석주(石洲) 권필을 생각에서 놓칠 수 없다. 한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숱하게 많지만 유일하게 시 때문에 죽은 석주의 원혼이 차원을 바꿔 놓는다.
궁(宮) 버들 청청한데 꾀꼬리 요란하게 우는구나
성에 가득한 관개(冠蓋)가 봄볕에 상긋거리네
조정에서 더불어 태평악을 하례하는 판에
누가 시켜 위태한 말이 포의(布衣)의 입에서 나오게 했나
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蓋媚春暉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
그는 이 시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 '궁버들 청청함'은 광해군을 업고 갖은 악세를 자행하고 있던 당시의 외척 유희분(柳希奮)을 가리키고, '포의'는 당시 악정을 간절하게 간했다는 이유로 수난 받고 있던 임숙영(任叔英)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 시를 짓고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석주는 자기가 지은 시의 초고를 보자기에 싸서 생질에게 맡기면서 그 보자기에다 다음과 같은 절구 한수를 썼다.
평생에 우스개 글귀를 즐겨 지어서
만명의 입에 숙덕거림을 끌어 일으켰다
이제부터는 입을 봉하고 내 생을 마칠 것이다
옛날에 공자께서도 말 없고자 하셨는데
平生喜作俳諧句 惹起人間萬口喧 從此括囊聊卒歲 向來宣聖欲無言
그는 이 시를 지은 지 사흘 만에 광해군의 어명에 의해 붙들려가 혹심한 형장(刑杖)을 받았다. 당시 좌의정이던 이항복(李恒福)은 임금 앞에 가서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가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반나절 동안 만류했다. 또한 이덕형(李德馨)도 시 때문에 선비를 죽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우리들이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석주를 능히 살리지 못했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 것인가.」 그 후 이항복은 이렇게 자탄하였다 한다. 권필은 북변으로 귀양 가게 되었는데, 동대문 밖에서 첫 밤을 못 넘기고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그가 유숙하던 집 주인이 술을 대접하여 권필은 많이 취했었는데 이튿날 보니 죽어 있었다 한다. 주인은 방문짝을 떼어서 시상(屍床)을 만들었는데 그 문짝에는 죽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 한수가 적혀 있었다.
그대에게 한 잔 술 나누기를 다시 권하오
술이 유령(劉伶)의 무덤 위 흙에 이르지 않으니
3월은 거의 다 갔고 4월이 오는데
복사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으니
權君更進一盃酒 不到劉伶墳上土 三月將盡四月來 桃花亂落如紅雨
그리고 「이것이 시참(詩讖)이다. 내가 죽으리로다.」라는 낙서를 해 놓았다 한다. 시인이 시 때문에 시적인 죽음을 당한 것이다. 정철(鄭澈)이 강계에 귀양 가 있을 때 이 동악시단에서 술잔을 주고받던 이안눌과 권필은 정철의 고독한 풍류를 사모하여, 그 멀리까지 찾아가 시회(詩會)로써 정철을 위로하였다 한다. 소위 원정 시회였던 것이다. 이때 정철은 이 두 젊은 시인을 보고, 「이 길에 천상의 두 적선(謫仙)을 얻어 보았다.」했다 한다. 그래서 동악시단은 한국인 멋의 존재방식이요, 특유한 생활 형태의 증명이다. 그것은 감정의 오묘함으로 횡사를 뽑고 감정의 섬세함으로 종사를 뽑아, 그 두 실가닥으로 감정을 교직하며 살았던, 그 잊어버린 소중한 것의 망실탑(忘失塔)이기도 하다. -이규태의 <역사산책>-
이안눌(李安訥)은 본관이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증조할아버지는 행(荇)이고, 아버지는 진사 형(泂)이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하였고 권필(權韠)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이란 모임을 갖기도 했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 그 후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고 말년에 봉조하에 이르렀다. 그는 도학(道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문학에 힘쓰되, 평생 "뜻을 얻으면 경제일세(經濟一世)하고 뜻을 잃으면 은둔한거(隱遁閑居)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살았다. 특히 시작(詩作)에 주력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 동악선생시단 바위글씨(東岳先生詩壇 刻字)-동국대 구내 계산관 앞 계산고시학사 뒤
조선 선조대의 시인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 석주(石洲) 권필(權韠) 등과 어울려 집에서 시단(詩壇)을 이루었다. 사대손인 이주진(李周鎭.1691~1749)이 이러한 동악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영조 연간에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라는 바위글씨를 해서로 바위에 새겼다. 크기는 73× 34㎝이다. 이 바위글씨의 원위치는 중구 필동3가 동국대학교 구내 계산관 앞 계산고시학사 뒤에 있었으나, 현재는 멸실되었다. 현재 바위글씨의 일부만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이며 바위글씨의 위치에는 1987년 8월 표석을 세웠다.
6) 용산지역.둔지산(屯之山)
서울 용산 일대의 옛 땅이름은 기름진 들판이란 뜻읠 부원이었다. 한강이 먼 상류로부터 실어나른 퇴적물이 쌓이고 쌓인 땅이기에 기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행정적으로 과주현(지금의 과천)에 속했다가 조선조 태조3년에는 고봉현(지금의 고양)에 속하기도 했다. 옛부터 용산 8경이라는 것이 있었다. 1경이 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이 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이 만초천(지금은 복개된 옥천)이 게 잡는 불, 4경이 동재기를 돌아오는 돛배, 5경이 밤섬에 지는 해, 6경이 검은돌모루(흑석동)를 돌아가는 스님, 7경이 노들나루의 행인들, 8경이 사촌(삼각지)의 저녁비가 그것이었다. 가수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노래에서 한강인도교에 이르는 벌판이 모래(내)마을 즉 '사촌'이었다. 조선조 초기 사육신에서 조선조말 천주교도 처형장으로 이름난 새남터도 이 사평의 남쪽 가장자리터란 뜻이다. 1950년 전후까지만 해도 지금의 이촌동 강가에 50~60호의 오두막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한다.
삼각지 로터리로부터 동쪽으로 완만하게 구릉져 야산을 이루고 있는 이 산 이름이 둔산 또는 둔지산. 둔지산이란 '밋밋한 산'이라는 뜻도 되지만, '군대 주둔지'란 뜻도 있다. 그 '군대 주둔지'의 뜻에 걸맞게 육군본부(지금의 전쟁기념관)와 국방부가 둔지산 기슭에 자리 잡았다. 조선조 초기부터 이곳에 별장을 두고 관선을 관장케 했다. 관선이 광나루 4척, 송파 9척, 양화진이 9척인데 비해 이 둔지산이 끝나는 한강진에 15척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강병영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또, 둔지산에는 무운을 비는 사당인 무후묘가 근대에 이르기까지 있었다. 묘당은 중국의 무신인 관우와 한국의 무신인 김유신을 함께 모셨는데 노일전쟁 때 일본군이 둔지산에 병영을 구축하면서 보광동으로 옮겨졌다. 둔지산 일대는 한강의 수군을 배경으로 한 전략적 요지였다. 임진왜란 때는 침략의 선봉장격인 왜의 고니시의 주력 부대가 이곳에 주둔하기로 했다. 또 임오군란 때는 진압을 구실로 출병한 청나라 오장경 부대가 주둔한 적도 있다.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 바로 그 부대였다. 뿐만 아니라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 때 일본군 여단사령부가 이곳에 기지를 둔 것이 시초가 되어 일제때 조선군 사령부가 이 터에 자리 잡았다. 광복 뒤에는 육군본부와 국방부,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가 이 둔지산에 자리 잡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둔지산을 한때는 왜둔산 또는 외둔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남쪽에 왜병영이 있다하여 남영동이란 땅이름이 생겨났다. 또, 이 일대는 한강나루와 맞닿는 곳이기에 여러 관창이 많았다. 오늘날 수도여고 앞 남영동 일대에도 군자감의 커다란 군수창고가 있었다. 둔지산은 임진왜란 이후로 우리 역사에 그 땅이름처럼 아군과 외국군의 주둔지였다. 온통 무로 얼룩진 땅이다.
▲ 철도공원
한강통 16번지(용산)에 총독부 철도국 부속의 운동장이 있었다. 야구장, 육상경기장, 럭비구장, 풀장 뿐 아니라 순환도로, 산책도로, 연못, 화훼원(花卉園), 철도사고사망자 조혼비(弔魂碑), 관람석, 벤치 등도 갖추어 일반 주민의 이용도 허락했으므로 이를 널리 철도공원이라고 불렀다. 1915년에 개설된 이 공원은 광복 후에는 그 관리의 역정(歷程)을 알 수 없으며 현재는 철도공업전문대학 부지가 되어있고 당시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이태원터-용산로2가 1번지
이태원(梨泰院)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관광지로, 주로 해밀턴 호텔 주변을 가리킨다. 이태원동이라는 법정동으로 지정되어있다. 이름의 유래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효종 때 배나무가 많아 이태원(梨泰院)이라고 불렸으며, 조선시대에 이태원이라는 역원이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주한미군들의 주요 위락지대로 번창하여 이 인근에 미8군 기지가 위치해 있다. 이후 외국인 관광객들의 쇼핑, 관광지대로 번창하여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이슬람교 성원인 서울 중앙 성원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 독서당터(讀書堂址-동호독서당)-청파동 168-8.옥수동244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일대는 옛날에 두뭇개(豆毛浦)로 불리었다. 이곳 응봉(鷹峯) 아래에는 중종12년(1512)에 지은 독서당이 있었다. 독서당이란 본래 세종이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옛정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에 전념케 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러나 독서당이라 불리기는 성종이 용산에 독서당을 마련하고 부터였다.
▲ 동호(東湖)
한강이 금강산(북한강)과 태백산(남한강)에서 발원해 흘러오면서 서울 응봉(鷹峰)과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이르러, 물이 서서히 흐르면서 큰 호수를 이루니 ‘동호(東湖)’라 부른다. 동호란 경복궁(景福宮)에서 보아 동쪽 호수라는 뜻. 동호는 유속이 느리고 겨울에 얼음이 얼면, 빙질이 좋아 그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사시사철 왕실에 진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얼음을 저장하던 곳의 땅 이름이 오늘날 동비고동(東氷庫洞)과 서빙고동(西氷庫洞)으로 남아 있다. 또 옥수동 중턱에는 얼음을 채취하기 전에 용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빙고단(氷庫壇) 자리가 지금도 남아있다. 동호는 예로부터 산수가 어우러져 풍광이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오늘날 한남대교 북단 언덕(한남동 537번지)에는 왕가의 별장으로 사신을 영접하던 제천정(濟川亭)이 얹혀 있었고, 또 외국인촌으로 불리는 한남동의 마루턱에 오르면 거울처럼 맑은 호수를 바라다 볼 수 있다 하여 화경대(華鏡臺)라 일컬었다. 화경대 위에는 동호에 평화롭게 노니는 갈매기의 모습이 꿈속의 비경과 같다고 하여 몽구정(夢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데 모두가 사라진지 오래됐다. 또 화경대 가장자리(한남동 459번지)에는 황희 정승의 손서 김국광(金國光)이 지었다는 천일정(天一亭)도 있었다는데… 그래서 동호의 호심위에는 늘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그칠 날이 없어, 풍류와 시가 흘렀다고 한다. 영남 강호시가 문학의 대가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그의 고향인 예안(禮安)으로 낙향하면서 그 당시 문인들인 조계상(曹繼商), 김안국(金安國), 성세창(成世昌), 송인수(宋麟壽), 장적(張籍), 이퇴계(李退溪) 등과 동호에서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이 나온다.
1542년 7월17일 퇴계와 농암이 이 동호의 제천정에서 또는 배 위에서 사흘간에 걸쳐 농암을 전별하는 시를 나눈다. 퇴계는 ‘송이참판남행(送李參判南行)’이란 제목의시 한수를 짓는가 하면, 제천정에서 ‘송이참판사환(送李參判辭還)’이란 7언절구도 짓는다. 또 정세호(鄭世虎), 김광준(金光準), 주세붕(周世鵬)등과 함께 동호의 닥섬(楮子島)까지 농암 이현보를 전송하며 시문을 나눈다. ‘소광(疎光)의 은퇴처럼 공은 이미 이루어졌고/ 전별인사 구름 같아 후생을 감동시키네/ 맑은 날 신선처럼 오르니 어찌 글로 나타내리/ 급류 시절, 어떻게 이런 명예로운 은퇴가 있을까.’ 퇴계의 시다. ‘나부끼며 돌아가는 어부같이/ 바로 긴 한강을 거슬러 왔네/ 오늘 죽령으로 돌아온 뜻은/ 천지만고의 강상이 아니랴!’ 당대 문인의 거두라 할 주세붕의 시다. 이어, 농암 이현보는 또 시로써 답한다. ‘이별 섭섭해 총총히 따라오는 벗들/ 숲 속 마을에서 배를 나누어 탔다/ 피리소리 끊어지고 사람들 멀어지는데/ 날 저문 강가는 아득하기만 하구나// 돌아보니 북악은 높이 솟아/ 산 같은 무거운 은혜 새롭구나/ 어찌 나라 은혜를 다 갚았다 하리오/가을 바람에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는 법이라네.’ 동호는 강심에 시심이 뜨고 가락이 흐르던 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화에 밀려 닥섬도 체천정도 사라진지 오래고 시정이 흐르던 동호의 풍광은 찾을 길이 없다. 당대 의문인들이 동호에서 시심을 나눈 것이 뒷날 영남의 강호문학을 낳았을까.
▲ 용문동(龍門洞). 도원동(桃園洞)
용산(龍山)의 용자와 옛 지명인 동문외계(東門外契)의 문자를 따서 지칭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성저십리 지역, 1751년(영조27)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동문외계, 1914년에 경성부 대도정,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다. 대도정은 일제가 청일전쟁 때 서울에 주둔한 대도소장(大島少將)의 이름을 붙힌 것이다. 38번지 주택가 일대는 군기창(軍器廠)으로 불리던 곳이다. 1903년에 이곳에 총기제조소를 세웠으나, 본격적으로 생산하지는 못했고, 그 후 화약고를 설치하였다가 다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들어섰다. 106번지 언덕에는 남이장군 사당이 있다. 동네에서는 3년마다 음력 4월 1일에 대규모의 대제치성(大祭致誠)을 올렸는데, 주민들의 건강과 소원성취 및 태평을 빌며 축제를 벌였다. 일제 때도 지냈으며, 1973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로 등록하였다. 옛날엔 이곳에 체구가 당당한 장사들이 많이 살아 매년 정월초 만리현에서 석전(石戰)을 벌릴 때 크게 활약하였다. 도원동은 일제강점기에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었으므로 도산(桃山)이라 하다가, 해방 후 이름을 바꾼 것이다. 예전에 이지역은 공동묘지였으나, 지금은 모두 주택이 들어서고, 현재는 산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도원동의 서쪽 산을 삼선당이라 불렀다. 밤나무가 무성하여 밤굴재라는 마을이 있었고, 밤굴재에 율곡정(栗谷亭)이라는 활터가 있었으나, 위치는 알 수 없다.
▲ 새남터기념성당-이촌동 199-1
새남터는 한강의 모래사장으로, 풀과 나무를 의미하는 새나무터에서 유래한다. 1456년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실패한 성삼문 등의 사육신들이 처형된 장소이다. 또한 김대건, 주문모 등의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순교한 장소이다. 서울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다. 새남터는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고 일명 "노들" 또는 "사남기(沙南基)" 라고도 불렀다.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된 이곳은 사육신의 처형 장소이기도 하다. 1801년의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있을 때 많은 천주교인들이 여기서 처형당했는데, 이들 중에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인 프랑스의 앵베르 주교 등 11명의 성직자와 현석문 외 많은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9분의 성인유해가 소성당 제대에 모셔져 있다.
▲ 구용산수위관측소(舊龍山水位觀測所)-청암동 169
구 용산수위관측소는 한강변에서는 최초로, 전국에서는 아홉 번 째로 건립된 자기관측소로 서울시 용산구 청암동에 있다. 관측소는 1924년 12월에 조위와 홍수위를 관측할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며 조위 변동으로 인해 1977년에 폐쇄되었는데, 실제 수위관측은 1976년 9월까지 이루어졌다. 관측소는 철근콘크리트 우물통 형식으로 수면과 우물통 내부를 지름 10cm 내외의 철관으로 연결하고 우물통 내부에 부자를 띄워 수위를 관측하는 형태였다.
자기관측소 바깥에는 반드시 목측용 양수표를 건설해 우물통 내부의 수위와 실제수위와의 차이 유무를 검사했다. 용산수위관측소는 관측소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없어졌고 상부 관측실 내 관측기구도 없어졌으며 외부의 목측용 자도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원형이 잘 남아 있고 수위 측정을 하던 독립구조물로서는 서울 한강변에서 유일한 현존물이며 전국적으로도 남아 있는 예가 희귀한 중요한 자기관측소이다.
▲ 전생서터(典牲暑址)-후암동 370
전생서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기구로, 나라의 제례에 쓸 짐승을 기르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전구서(典廐署)라고 칭하였던 것을, 1460년(세조 6년)에 전생서로 고쳤다. 1797년(정조 21년)에는 주재관으로 판관을 새로 두어 예조의 종 5품 속아문이 되었고, 이속(吏屬)으로는 서리(書吏) 8명을 두었다가 이를 서원(書員)으로 격하시켰다. 1894년(고종 31년)에 갑오개혁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 조선의 통치 기구
의정부, 비변사,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집현전, 규장각, 훈련도감, 포도청, 한성부, 개성부, 종친부, 충훈부, 의빈부, 돈녕부, 봉조하, 중추부, 내금위, 겸사복, 오위도총부, 경연
이조 : 충익부, 내시부, 상서원, 종부시, 사옹원, 내수사, 액정서
호조 :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사섬시, 군자감, 제용감, 사재감, 풍저창, 광흥창, 전함사 평시서, 사온서, 의영고, 장흥고, 사포서, 양현고, 오부
예조 :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춘추관, 승문원, 통례원, 봉상시, 교서관, 내의원, 예빈시 악학, 관습도감, 악학도감, 장악원, 관상감, 전의감, 사역원, 세자시강원, 세손강서원
종학, 소격서, 종묘서, 사직서, 빙고, 전생서, 사축서, 혜민서, 도화서, 활인서, 귀후 서, 사학, 문소전, 연은전
병조 : 5위, 훈련원, 사복시, 군기시, 전설사, 세자익위사, 세손위종사
형조 : 장례원, 전옥서
공조 : 상의원, 선공감, 수성금화사, 전연사, 장원서, 조지서, 와서
▲ 삼각지(三角地)
배호의 노래로 세인들에게 더 잘 알려진 ‘돌아가는 삼각지’. 행정구역 명칭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동이다. 옛날에는 이 지역이 습지였다. 오늘날과 같이 한강기적의 상징처럼 각인되고 있는 이촌동 지역의 개발이 있기 훨씬 이전에는 한강이 법람하면 말그대로 삼각지일대는 물바다였다. 한강물이 상습적으로 들락거리다 보니, 늪지대로 습지(濕地)일 수밖에 없었던 것. 그래서 억새풀이 우거진 습한 이 늪지를 두고 ‘새펄’이라 불렀다. 이 ‘새펄’이 세월이 흐르면서 ‘새펄-새뻘-세뿔’로 된소리 발음되다 모음발성음으로 인해 ‘세뿔’, ‘세뿔’했던 것. 이 ‘세뿔’이라는 땅이름을 일제가 우리국토를 유린,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세뿔’은 곧 ‘삼각(三角)’이라 한 것이 삼각지(三角地)라는 땅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또, 서쪽에는 철도가 지나고 있어, 한강, 서울역, 이태원 쪽으로 통하는 세갈래 길이라는 뜻으로 ‘삼각지’라고 하나 큰 설득력이 없다. 어찌되었던, 삼각지 거리를 돌아보노라면 화랑가가 밀집해 있음을 알게 된다. 삼각지의 액자거리에 걸려있는 간판은 대부분 화랑, 갤러리 등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크게 두개의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게 특색이다. 하나는 ‘다빈치 화랑’과같이 삼각지역 출입구를 사이에 두고 서울역 쪽으로 자리한 점포들로 액자제작보다는 상업화를 담은 액자를 주로 전시, 판매하고 있다. 이 일대에 무명화가들의 화실이 수 십 군데 모여들게 된 것은 인근의 외국군기지라는 큰 소비시장이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화가들의 그림값이 예전보다 많이 오르면서 몇몇 곳에서는 중국 화가들의 그림을 수입해 판매하고 있을 정도다. 또 유명 북한 화가들의 그림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국액자’가게에서는 북한의 최고 예술가 칭호인 인민예술가 나병주의 ‘묘향산에서’나 최성조의 ‘금강산’ 등도 만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견지나무액자’와 같이 액자제작,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이곳 상인들은 ‘최상의 질과 낮은 가격의 액자가 삼각지 액자거리의 특징’이라고 입을 모은다. 액자는 틀을 만드는 몰링(소조물)과 그림을 받쳐주는 메트 등으로 이뤄진다. 몰딩의 주재료는 합성수지, 원목, 금속 등으로 재료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오늘의 삼각지 액자거리는 8ㆍ15광복 뒤, 인근에 외국군기지가 들어서면서 하나둘씩 액자가게가 몰려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사진, 그림 등의 액자로 삭막한 전쟁터의 폐허위에서 집안꾸미기를 좋아하는 외국군들의 기호ㆍ욕구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그 뒤, 인사동의 액자제작소와 상업화랑들이 점차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오늘과 같은 모습의 삼각지 액자거리를 이루었다. ‘로코코풍의 낭만적인 액자로부터 모던한 금속액자까지 당신의 집안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라는 문구가 길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삼각지의 액자거리! ‘삼각지(三角地)’라는 땅이름의 ‘각(角)’자 탓일까. 삭막하고 딱딱한 군주둔지 인근에 이런 화랑가 액자거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신선함을 더해 준다. 삼각지라는 땅이름의 ‘각(角)’자처럼 삼각지는 각자(액자)거리를 이루고 있다.
▲ 전쟁기념관-용산동1가 8번지(옛 육군본부 자리)[
대한민국을 지켜온 항쟁과 전쟁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보존하는 기념관이다. 전쟁에 대한 교훈을 통해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적 통일(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목적으로 한다. 1990년 9월 28일에 기공식이 있었다. 1993년 12월 건립하여, 1994년 6월 10일개관하였다. 지하 2층, 지상 4층 건물로, 6천여 평 정도의 전시관을 갖추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전쟁사 종합박물관인 만큼 다양한 유물과 정보, 볼거리가 있으며, 전시실에 있는 전시자료를 합하면 모두 9000여점이 된다. 전쟁기념관은 옥내전시와 옥외전시로 나뉜다. 옥내전시실은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6·25 전쟁실,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방산장비실, 대형장비실로 총 7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있으며, 전시실에 따른 다양한 벽화부조, 각 전투의 기록화, 모형, 기록물, 각종 무기장비,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어 전쟁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호국선열들의 업적을 알 수 있다. 그 중 대형장비실은 옥내와 옥외전시실에 나누어 쓰고 있다.
옥내전시관에는 각종 전쟁자료와 다양한 유물 및 복제품, 기록화,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다. 1층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친 한국의 전반적인 전쟁사 자료를 제공하며, 2층과 3층에 걸쳐 있는 6·25 전쟁실은 전쟁 원인부터 상세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전쟁체험실은 한국전쟁 당시의 야간 전투 상황을 영상·음향·진동·포연·조명·화약냄새 등의 특수효과로 연출해 전쟁터에서의 긴장된 극한 상황과 장병들의 투혼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옥외 전시관에는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월남전에 쓰인 전차, 항공기, 야포 등 세계 각국의 대형무기 1백여 점을 전시하여 관람 할 수 있다. 전쟁기념관의 편의 시설로는 매점, 별관 식당, 문화극장, 기념품점, 수유실, 정자, 뮤지엄웨딩홀 등이 있다. 기념조형물에는 형제의 상, 6.25전쟁 조형물, 평화의 시계탑, 전쟁기념관 양쪽 화랑에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 전사한 국군전사자명비, 유엔군전사자명비 등이 있다. 전쟁기념관의 녹지공원에는 인공호수와 휴식공간들을 조성해 놓았다. 전쟁기념관의 캐릭터는 무돌이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을 가진 철모와 평화를 상징하는 월계수잎이 특징적이다. 무돌이에 대한 정보와 기념관 관람료, 관람 시간, 교통, 사진, 전시관에 대한 설명 등 전쟁기념관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전쟁기념관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다.
▲ 서빙고터-용산구의회 서쪽
용산구 서빙고동 서빙고초등학교에서 서빙고동파출소 부근, 곧 서빙고동 1994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서빙고(西氷庫)가 있었는데, 그 뒤쪽에 있는 고개를 서빙고 부근에 있는 고개라 하여 서빙고고개라 이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겨울철에 한강의 얼음을 떠다가 빙고에 저장한 뒤 여름에 꺼내어 사용하였다. 여름까지 얼음이 녹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빙고는 대부분 지하에 설치되었고, 얼음과 얼음 사이에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모두 메워져 저장되었다. 빙고제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한 것으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한양을 수도로 정하여 궁궐 조성공사를 마치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면서 빙고제도를 만들었다. 조선시대의 빙고제도는 크게 정부에서 관리하는 관영빙고와 민간이 운영하는 민영빙고의 두 종류가 있었다. 관영빙고는 크게 네 군데에 있었는데, 동빙고와 서빙고, 그리고 궁궐의 내빙고가 두 군데 있었다. 태조 5년(1396)에 동빙고를 두모포에, 서빙고를 둔지산에 설치하여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으로 하였는데, 광무 2년(1898) 폐지될 때까지 500여 년간 존속되었다. 얼음은 한강에서 채빙하였다. 처음에는 청계천의 더러운 물을 피하려고 빙고와 20여리 떨어진 연파곤(淵波昆)에서 채빙하였는데, 성종 때부터는 저자도(楮子島)에서 채빙하여 저장하였다.
동빙고에서 저장된 얼음은 국가의 제사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서빙고의 얼음은 궁중의 부엌용과 각 관아와 관원들에게 공급되었다. 동빙고에서는 얼음 10,244정(丁)을, 서빙고에서는 134,974정을 보관하였으니,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10배 이상의 얼음을 저장하였다. 실제 동빙고의 창고는 1동이었는데 비해 서빙고의 창고는 8동이었다. 저장된 얼음을 궁중 내 각 전(殿)과 관아에 공급할 때는 그 시기가 각각 따로 정해져 있었다. 각 전에 얼음을 나누어 주는 시기는 음력 2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였으며, 비변사·승정원·홍문관 등 각 관아에는 음력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나누어 주었다. 종친과 동·서반 정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는 음력 6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나누어 주었다. 또 해마다 음력 6월에 문·무당상관, 내시부 당상관, 직책이 없는 당상관, 70세 이상이 되는 자, 동·서활인서의 병자들,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까지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동·서빙고에 저장된 얼음을 지키고 관리·공급하는 일을 맡은 관원은 예조판서의 겸직으로 제조(提調)를 두고, 그 밑에 별좌(別坐, 종5품), 별제(別提, 종6품), 별검(別檢, 종8품) 등과 얼음을 채취하는 벌빙군(伐氷軍)이 배치되었다. 조선전기의 문신 성현(成俔)에 의해 중종 20년(1525)에 씌어진 『용재총화(齋叢話)』에는 한강에서 얼음을 뜨고 이를 저장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얼음을 빙고에 저장하는 일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하는데, 별제 두 사람이 검사하고 살핀다. 또 감역하는 부장(部長)과 벌빙군관(伐氷軍官)이 있어 저자도(楮子島) 사이에서 얼음을 뜬다. 이는 청계천 하류의 더러운 물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빙고는 한강 아래 둔지산 기슭에 있다. 창고가 모두 8동이나 된다. 모든 국용을 위시하여 여러 관사와 재신(宰臣)·추신(樞臣)들이 모두 서빙고의 얼음을 받아쓴다. 군기시(軍器寺)·군자감(軍資監)·예빈시(禮賓寺)·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사섬시(司贍寺)·사재감(司宰監) 등이 서로 빙고를 주관하는데, 별제 두 사람이 검사하고 살핀다. 여기에는 감역부장과 벌빙군관이 있다. 얼음을 채취할 때 군관과 그 외에 앞서 열거한 여러 관청의 관원들이 각각 빙고 8동에 나누어 소속되었다. 얼음이 4치(寸) 두께로 언 뒤에 비로소 얼음 뜨기를 시작한다. 그 때를 당하여 여러 관청의 관원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앞 다투어 뜬다. 그들 가운데 군인들이 많았지만 익숙하지 못하므로 마을사람들이 얼음을 떠서 군인들에게 팔기도 한다. 얼음 뜨는 방법은 칡으로 꼰 새끼줄을 늘어뜨려서 얼음 위에 팽팽하게 쳐놓아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한 다음, 강변에는 불 지필 장작을 준비하고 의약품도 미리 준비해서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세심히 보살핀다.
8월 초가 되면 고원(庫員)이 수많은 군인들을 이끌고 와서 먼저 빙고 천장을 손질한다. 썩은 마룻대라든가 들보를 갈아 끼우고 허물어진 담과 울타리도 매만지며 온갖 시설을 고친다. 한편 고원 중 한 사람은 오리섬(鴨島: 난지도)으로 가서 갈대를 베어다가 얼음창고를 위 아래 좌우사방으로 싸돌려 덮는다. 많은 갈대를 두툼하게 겹겹이 둘러야만 얼음이 녹지 않는다. 군관들이 밤낮으로 취하도록 술만 마시고 얼음 저장하는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에, 계축년(성종 14년, 1483)에 빙고 안의 얼음이 녹아 물이 밖으로 새자 임금께서 크게 노하신 나머지 관원 전원을 모두 파직시킨 일이 있었다. 그 다음해 갑인년에는 관리들이 마음을 다지고 애를 써서 얼음을 저장하여 을묘년(연산군 원년, 1495)에 성종임금의 대상을 치르고 또 명나라 사신 잔치에 쓰고도 모자라기는커녕 가을까지 얼음이 창고에 남아돌았다. 얼음을 뜨고 저장하는 데는 모름지기 검사와 보살핌이 꼼꼼해야만 하였다.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얼음을 저장할 때는 창고의 안팎을 위아래 좌우로 겹겹이 갈대로 덮었으며, 얼음을 차곡차곡 쌓았는데, 얼음과 얼음 사이에는 한 치의 틈도 없게 하여 얼음이 녹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던 것이다.
세종 때만 해도 해마다 경기도민들이 동원되어 빙고를 고쳐지어야 했으므로 그때마다 재목값이 비싸져서 백성들의 고생이 심하였다. 따라서 수십 년을 견딜 수 있는 얼음창고를 짓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는가 하면, 백성들의 인력을 덜기 위하여 얼음 뜨는 양을 줄이고 씀씀이도 줄이자는 상소도 있었다. 세종 5년(1423) 11월에 장빙군(藏氷軍)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하사한 기록이 보이는 것을 보면 국가에서 이 빙고제도에 대해 각별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겨울철에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충분히 얼지 않을 때에는 그만한 양의 얼음을 깊은 산골에까지 가서 뜨다가 저장하였다. 이듬해 춘분에 개빙제(開氷祭)를 올리고 3월 초부터 출하하기 시작하여 10월 상강(霜降) 때에 그 해의 얼음 공급을 마감하였다. 한편 동빙고의 북쪽 현재 옥수동 산1번지에는 사한단(司寒壇)이 있었다. 여기에서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는 동빙제(凍氷祭·司寒祭)를 지냈다. 즉, 음력 12월 상순에 얼음을 떠서 빙고에 넣기 전에 동빙제를 지낸 다음 빙고에 얼음을 저장하였으며, 또 음력 2월 춘분에 빙고의 문을 열 때 제사를 지낸 후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성종 17년(1488) 12월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자 홍문관에 명하여 날씨가 춥기를 기원하는 기한제(祈寒祭)를 지내게 했고, 영조 45년(1769) 12월에는 기한제를 지낸 후 얼음이 얼었으므로 제관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빙고제도에 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성종 때의 이야기다. 국가에서 얼음을 저장했다가 대신들에게 얼음을 나눠주는 빙고제도는 크게 환영을 받는 제도였다. 그런데 조선초기의 양반관료들 중에는 청렴한 사람이 많아 대신이라고 해도 집안이 가난한 경우가 많았다. 조정에서 얼음을 나눠주는 것은 좋았지만 서빙고에까지 가서 얼음을 집으로 운반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하인이 없는 대신들은 얼음을 수령할 수 있는 표를 묵힐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눈치 빠른 사람들이 가난한 대신들 집에 가서 묵히고 있는 얼음수령표를 얻어다가 얼음을 타서 도성 내에 비싸게 팔았다는 것이다. 얼음장사가 이미 15세기에 출현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빙고터에는 1990년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에서 표석을 설치하였다.
▲ 창희정터-
용산구의회 동쪽 대원아파트 옆
▲ 서빙고동부군당-서빙고동 195-3
▲ 동빙고부군당-동빙고동 62
▲ 김유신사당 용화문-보광동 155 삼익리버빌 101동 뒤
보광동(普光洞)! 한마디로 불교지명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지 1,600여년의 세월이 넘다보니, 우라 땅이름에는 불교지명이 꽤 많이 있다. 이를테면, 금강산, 천태산, 마니산, 영취산, 천축산, 법전, 도솔, 무량 등과 같은 땅이름들이다. ‘보광(普光)’이라는 땅이름은 신라 진흥왕때 신라군이 북진하여 고구려군을 토벌하고 칠보강(오늘날 임진강) 이남의 영토를 빼앗은 뒤, 보광도사(普光道師)가 이곳에 큰 가람(보광사)을 짓고 수도한데서 비롯됐다.
이 보광사는 조선조말까지도 존속했으며, 이 가람에서 기우제와 국태민안을 비는 제사를 봄, 가을로 지냈다고 한다. 보광동 산 4번지 일대가 기우제를 올리던 우사단(雩祀壇) 자리다. 한편, 보광동에는 용산 둔지미(오늘날 국방부 청사 뒤 서쪽)에서 살던 사람들이 일제때 병영시설로 인해 이곳으로 이주해 마을을 이루니 웃보광이(새동네)이다. 둔지미에서 이주해올 때 그들이 마을신으로 모시던 제갈(諸葛)선생을 함께 모셔와 안치시킨 것이 웃당 또는 부군당으로 오늘날까지 그 당집이 남아 있다. 또, 보광동 28번지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서 있는데, 이 자리는 옛 사충서원(四忠書院)이 있던 곳이다. 사충서원은 처음에는 노량진(오늘날 사육신묘 인근)에 있던 서원으로 1927년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퇴락하고 말았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남았던 서원이나 지금 그 자리는 도시화에 밀려 신축사화(辛丑士禍)의 내력을 새긴 묘정비만 주택가 틈바구니에 외로이 서있다. 조선조 영조 원년(1725)에 건립된 사충서원은 신축사화로 희생된 노론의 4대신(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이이명)을 배향했던 곳이다. 보광초등학교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마치 이슬람 나라에라도 와있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골목에 늘어선 ‘무슬림 정육점(양고기 판매)’을 비롯해 살람(터키 식당), ALK무슬림(방글라데시식당), 알라바바(이집트 식당), 모글(파키스탄 식당), 우스마니아(파키스탄 식당), 아시안 아트&카페트(이슬람식 카페트)등이 즐비하다. 이유는 1976년에 이곳에 들어선 모스크(이슬람 서울중앙성원)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이슬람 국가들과의 인연은 멀리 신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용설화에 나오는 처용이 아랍에서 왔다든지, 신라능의 석조물들이 아랍인을 닮았다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 말고도 ‘고려사’에 1024년 서역 대식국(大食國:사우디 아라비아), 안식국(安食國:이란) 사람들이 토산품을 가지고와 벽랑진(碧浪津:예상강 어귀에 있던 고려때 무역항)에서 무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고려가 몽골지배에 들어가면서 원나라에 있던 무슬림들이 고려에 귀화한다. 그 보기가 1274년 충렬왕비 노국공주의 시종으로 따라왔던 삼가(三哥)는 무슬림으로 고려여인과 결혼 계급이 선무장군에 이르니 바로 덕수(德水) 장(張)씨의 시조 장순룡(張舜龍)이다. 이밖에도 고려에 귀화해 정3품 정6품 등 고관에 오른 무슬림 기록은 많다. 또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에 나오는 ‘회회(回回)아비’도 무슬림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광동 일대에는 옛 보광사를 비롯, 서원터, 부군당, 모스크 말고도 교회(보성, 보광, 섬광), 성당(이태원) 등 온통 종교 박물관이라 할만큼 각종 종교시설이 즐비하다. ‘보광(普光)’, 글 뜻대로라면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넓게 빛난다’는 땅이름에 걸맞는다.
▲ 한남동부군당-한남동 568-85
▲ 큰강부군당-한남대교 북단 강남한의원 옆골목
▲ 천일정(天一亭)-한남동 459 한남대교 북단 UN빌리지 쪽
천일정은 남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한강에 닿는 강안,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절 터였던 이곳에 조선 성종 때의 문신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처음으로 정자를 지었으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를 거쳐, 한때 민영휘(閔泳徽,1852∼1935)의 소유이기도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藤王閣)> 서문에 있는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의 시구를 취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3,000㎡나 되는 넓은 터전에 동쪽으로 아늑한 안채가 있고 정남향으로 조금 높은 터에 청원당(淸遠堂)이란 현판이 걸린 중사랑이 있었으며, 그 아래 조금 낮은 터에 강을 내려다보고 바깥사랑채 격인 천일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강변 높은 곳에 축대를 쌓고 평면으로 배치하였으며, 앞쪽으로 돌출된 누의 아래로는 사각 장초석을 세웠고 팔작지붕을 하였었다. 멀리 강 건너 압구정이 바라보이던 곳으로 1950년 6·25전쟁 때 폭격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 별영창터-청암동
청암동 쪽으로 넘어가는 도화2동에 있는 고개를 벼랑고개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는 이 고개를 넘으면 별영창(別營倉)이 있었기 때문으로 별영창고개가 음이 변하여 벼랑고개가 되었다. 별영창은 바로 마포와 접경을 이루는 지금의 청암동 마루턱 벼랑에 있었다.
별영이 용산에 있는데 헌종 14년에 세웠다. 혹 선조 병신년에 세웠다고도 한다. 훈련도감의 군병들 급료를 지급하는 곳으로 거기에 읍청루가 강가에 있어 명승으로 친다."라고 했고. 『한경지략』명승조에도 "읍청루는 소속된 별영창고에 딸린 누각이다. 앞으로 긴 강물이 흘러서 경치가 매우 좋다."라고 적고 있다. 읍청루는 정조 원년에 지은 집으로 여기까지 나와 놀다가 읊은 정조 임금의 읍청루 시도 전한다. 읍청루는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세관감시소가 되고 뒤미쳐 총세무사이던 영국인 브라운의 별장이 되었다가, 일제 시기에는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별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개화의 물결과 더불어 용산강의 수운도 현대화하여 고종 25년 8월 용산강에 증기선이 나타나서 삼산회사의 16톤급 용산호와 13톤급 삼호호가 인천과 용산 사이를 운항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해에 인천에 있던 독일 계통의 세창양행의 35톤급 제강호가 고종 28년에는 미국인 타운센트의 순명호가 운항하고 30년에는 동순태 라는 청국 상사가 용산에 화물마차회사를 설치하고 육지 운송권을 따내는 한편, 청조수항공사 관리선인 100hs급 한양호를 건조하여 역시 인천과 용산간의 수상운송을 맡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용산은 한때 외국상사 특히 청일 상인들의 경쟁무대가 되었다. 이때 읍청루에 세관이 설치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국계의 한양호가 일본에 빼앗긴 후로 용산은 일본인의 독무대처럼 되었다.
▲ 심원정터(心遠亭)-원효로4가 87-2
원효로4가 87-2의 비탈 일대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암(心庵)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심원정)이 있던 터였다. 유서 깊은 천연기념물 ‘원효로 백송’과 함께 조선시대 명사들이 한강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다는 심원정(心遠亭)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군과 왜군이 화전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선조 25년(1593) 정초, 이 땅에 와 곳곳에서 광폭하게 굴던 왜군은 평양과 행주에서 연패하자 통로를 이곳으로 찾아 고니시 유끼나까(小西行長) 등이 군자감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모였고,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은 청파역 일대에 흩어져 4월 20일 물러날 때까지 여기서 명군측과 교섭을 벌였다. 지금 이곳에는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剔)’라고 종서(縱書)로 음각된 비석이 서 있다. '왜명(倭明)'이라고 ‘왜’자가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비탈에는 당시의 강화비(講和碑)와 강화 체결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 구전되는 백송(白松)이 있었다. 순조 때 덕망 있는 대신 남공철은 은퇴하여 이곳에 머물며, 원로대신들이 찾아오면 함께 오르곤 했다. "---손님 오면 작은 배에 청노새도 함께 실으면 모랫벌 가까운 이 정자에 흰 회오라기 날아와 존다. 시와 술에 삶을 맡기며 한 세상 잊는데, 이 강가에 찾아온 친구들 반갑기 이를 데 없구려. 버드나무 늘어선 십리 강둑을 무어라 멀다 하리. 선창에서 말 달리며 하룻밤 쉬어 가세나."
한 때, 이 근처의 동리는 정자 이름을 따라 심원동이라 하였다. 고종 때에는 영의정이었던 조두순(趙斗淳,1796∼1870)의 별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천연기념물 "서울2호“로 지정된 백송과 예닐곱 그루의 오래 된 느티나무가 있다.
※ 원효로백송(元曉路白松)
천연기념물로 용산구 원효로 4가 87-2에 나무 높이 10m, 흉고 둘레 2m, 점유 면적 22평으로 수령이 500년에 이른다. 본래 밑둥에서 두 줄기가 뻗었으나 한 줄기는 죽어서 베어 버렸고, 한 줄기만 동쪽으로 비스듬히 서서 밑에서 받침대를 받치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나마도 1980년대에 말라죽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 조두순(趙斗淳)-1796년(정조20)~1870년(고종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원칠(元七), 호는 심암(心菴). 아버지는 목사 진익(鎭翼)이며, 어머니는 박종악(朴宗岳)의 딸이다. 1826년(순조26) 황감제시(黃柑製試:매년 제주도에서 진상한 밀감을 왕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하사하면서 거행하는 일종의 과거시험)에 장원하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이듬해 규장각대교로 뽑힌 뒤, 겸사서·승지·대사성을 지냈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한 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판·황해도관찰사·공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 중앙요직을 지낸 후 1848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849년(철종 즉위) 대제학에 이어 이조판서·지중추부사를 지냈고, 1853년(철종4) 우의정을 거쳐 1858년 좌의정에 올랐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자 명복(命福:뒤의 고종)의 추대를 적극 주장하여 조대비로 하여금 즉위전교를 내리게 함으로써 고종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5년(고종2) 영의정에 올라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전적인 신임을 받으며 국정에 참여했다. 1866년 벼슬을 그만둔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869년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그는 40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순조·헌종·철종·고종 등 4명의 왕을 보필했고, 요직을 두루 역임한 관료로서 문서편찬과 폐정개혁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49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실록청도당상(實錄廳都堂上)이 되어 <헌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했고, 이듬해 철종의 친아버지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1851년(철종2)에는 외교문서집 <동문휘고(同文彙考)>를 편찬했다. 1862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계속 발생하자, 정원용(鄭元容)·김흥근(金興根)·김좌근(金左根)과 함께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개혁방안을 수립했다. 당시 정부관료들은 농민항쟁이 삼정문란으로 인한 것으로 파악했는데, 조두순은 그중에서도 특히 환곡제도의 폐단을 가장 심각한 원인으로 파악해, 파환귀결(罷還歸結)을 실시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파환귀결이란 환곡을 없애고, 그 이자로 충당하던 국가의 재정수요를 대신 토지에 옮겨 1결당 2냥씩 받는 방법이다. 이는 토지소유자가 환곡세의 부담을 지게 되는 개선책으로 조선 후기 이래 지배층이 계속해서 지향해온 균부균세(均賦均稅)를 지향하는 세제개선방안의 하나였다. 삼정이정청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조두순의 주장을 채택했으나, 당시 환곡제를 통해 이익을 보던 계층들의 반발 때문에 실시가 지연되었으며, 게다가 1863년 철종이 갑자기 죽어 일부지역에서만 실현되었다. 고종이 즉위한 후 조두순은 1864년(고종1) <철종실록> 편찬의 총재관이 되어 이를 간행했다.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켰고, 경복궁 재건, <대전회통> 편찬 등을 지휘하여 세도정치 기간 중 실추되었던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또한 대원군의 명을 받아 천주교를 철저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저서로 <심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남공철(南公轍)-1760(영조 36)∼1840(헌종 6)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 또는 금릉(金陵)이다.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정조 4년(1780) 초시(初試)에 급제하고 1784년 그의 아버지가 정조의 사부(師傅)였기 때문에 음보(蔭補)로 세마(洗馬)에 등용되고 이어 산청(山淸)·임실(任實)의 현감을 지냈다. 정조 16년(179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어 부교리(副校理)·규장각 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고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珪) 등과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운동(文體反正運動)에 협찬하여 뒤에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그는 한(漢)·당(唐)·송(宋)의 여러 글을 읽고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했다고 한다. 순조 즉위년(1800)에 대사성(大司成)으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고, 1807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아홉 차례에 걸쳐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대제학·원자좌유선(元子左諭善) · 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순조 17년(1817) 우의정에 올라 14년간이나 재상직에 머물렀으며, 1833년 영의정으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있으면서, 심원정(心遠亭:용산구 원효로4가)에서 시인 묵객들과 남호(南湖)의 아름다움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상임(金相任)·성대중(成大中)·이덕무(李德懋) 등과 교유하면서 독서를 좋아했고 경전의 뜻에 통달했으며 특히 구양수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하였다고 한다.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서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금석문과 비명(碑銘)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순조 때 전사자(全史字)라는 동활자(銅活字)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서울 4산(山)이 명당(明堂)자리라 하여 사산금표(四山禁標) 안에 투장(偸葬)하는 경우가 많아 각(各) 군영(軍營)으로 하여금 이를 색출하여 금위영(禁衛營)에 10일마다 한번씩 보고하여 조처하도록 하는 등 서울 사산(四山) 보존에 노력하기도 했다. 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순조·익종(翼宗)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고 저서로는 자기가 편찬한 <귀은당집(歸恩堂集)>이란 시문집(詩文集)이 있으며, <금릉집(金陵集)>, <영옹속고(穎翁續藁)>,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영은문집(瀛隱文集)>,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등이 있다.
▲ 삼호정(三湖亭)-심원정의 작은 언덕위
심원정의 작은 언덕 위, 수녀원 앞쪽으로는 삼호정(三湖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이곳은 옛날 미녀 시인들의 시회(시짓기 모임)가 자주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강원도 원주 태생 김금원 여류시인은 이 정자에 자주 올라 다른 시인들과 함께 시짓기를 즐기곤 했다. "서호(西湖)의 좋은 경치 이 정자가 최고라오. 생각나면 올라가 마음대로 즐긴다오. ---양쪽 언덕의 봄풀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가위의 푸른 물결 석양에 흘러가네---" (김금원)
▲ 군자감터(軍資監址)-원효로 3가 1번지
원효로 3가 1번지에 있었다. 조선시대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았던 관청으로 고려시대의 군자시(軍資寺)를 이어서 1392년(태조 1)에 최초로 설치하였는데, 성 안에 본감(本監)·분감(分監)과 성 밖 용산강가에 강감(江監)을 두었다. 그 직제는 처음 만들었을 때 판사(判事) 이하 녹사(錄事)에 이르는 체계를 갖추었으나, 1414년(태종14) 1월에 정(正)·부정(副正)·판관(判官)의 체제로 바뀌었으며, 1466년(세조12)의 관제개편 때 판관·주부(主簿)·부봉사(副奉事)·참봉(參奉) 각 1명이 더 늘어나 군기시(軍器寺)의 경우와 같은 경위를 거쳐서 <경국대전>의 체제로 정비되었다. 관원으로는 정(정3품) 1명, 부정(종3품) 1명, 첨정(僉正:종4품) 2명, 판관(종5품) 3명, 주부(종6품) 3명, 직장(直長:종7품) 1명, 봉사(종8품) 1명, 부봉사(정9품) 1명, 참봉(종9품) 1명 등이 있었다. 1744년(영조20) 이후 숭례문(崇禮門) 안에 분감만 두고 녹미(祿米)도 함께 관리했는데, 보통 30만 섬의 곡식을 저장했다. 1894년(고종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 홍보재기터-
▲ 화경대-한남동 402
한강이 금강산(북한강)과 태백산(남한강)에서 발원해 흘러오면서 서울 응봉(鷹峰)과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이르러, 물이 서서히 흐르면서 큰 호수를 이루니 ‘동호(東湖)’라 부른다. 동호란 경복궁(景福宮)에서 보아 동쪽 호수라는 뜻. 동호는 유속이 느리고 겨울에 얼음이 얼면, 빙질이 좋아 그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사시사철 왕실에 진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얼음을 저장하던 곳의 땅 이름이 오늘날 동비고동(東氷庫洞)과 서빙고동(西氷庫洞)으로 남아 있다. 또 옥수동 중턱에는 얼음을 채취하기 전에 용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빙고단(氷庫壇) 자리가 지금도 남아있다. 동호는 예로부터 산수가 어우러져 풍광이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오늘날 한남대교 북단 언덕(한남동 537번지)에는 왕가의 별장으로 사신을 영접하던 제천정(濟川亭)이 얹혀 있었고, 또 외국인촌으로 불리는 한남동의 마루턱에 오르면 거울처럼 맑은 호수를 바라다 볼 수 있다 하여 화경대(華鏡臺)라 일컬었다. 화경대 위에는 동호에 평화롭게 노니는 갈매기의 모습이 꿈속의 비경과 같다고 하여 몽구정(夢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데 모두가 사라진지 오래됐다. 또 화경대 가장자리(한남동 459번지)에는 황희 정승의 손서 김국광(金國光)이 지었다는 천일정(天一亭)도 있었다는데… 그래서 동호의 호심위에는 늘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그칠 날이 없어, 풍류와 시가 흘렀다고 한다. 영남 강호시가 문학의 대가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그의 고향인 예안(禮安)으로 낙향하면서 그 당시 문인들인 조계상(曹繼商), 김안국(金安國), 성세창(成世昌), 송인수(宋麟壽), 장적(張籍), 이퇴계(李退溪) 등과 동호에서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이 나온다.
1542년 7월17일 퇴계와 농암이 이 동호의 제천정에서 또는 배 위에서 사흘간에 걸쳐 농암을 전별하는 시를 나눈다. 퇴계는 ‘송이참판남행(送李參判南行)’이란 제목의시 한수를 짓는가 하면, 제천정에서 ‘송이참판사환(送李參判辭還)’이란 7언절구도 짓는다. 또 정세호(鄭世虎), 김광준(金光準), 주세붕(周世鵬)등과 함께 동호의 닥섬(楮子島)까지 농암 이현보를 전송하며 시문을 나눈다. ‘소광(疎光)의 은퇴처럼 공은 이미 이루어졌고/ 전별인사 구름 같아 후생을 감동시키네/ 맑은 날 신선처럼 오르니 어찌 글로 나타내리/ 급류 시절, 어떻게 이런 명예로운 은퇴가 있을까.’ 퇴계의 시다. ‘나부끼며 돌아가는 어부같이/ 바로 긴 한강을 거슬러 왔네/ 오늘 죽령으로 돌아온 뜻은/ 천지만고의 강상이 아니랴!’ 당대 문인의 거두라 할 주세붕의 시다. 이어, 농암 이현보는 또 시로써 답한다. ‘이별 섭섭해 총총히 따라오는 벗들/ 숲 속 마을에서 배를 나누어 탔다/ 피리소리 끊어지고 사람들 멀어지는데/ 날 저문 강가는 아득하기만 하구나// 돌아보니 북악은 높이 솟아/ 산 같은 무거운 은혜 새롭구나/ 어찌 나라 은혜를 다 갚았다 하리오/가을 바람에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는 법이라네.’
▲ 와서터(瓦署址, 동서요)-한강로 3가 65-1
조선시대 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종6품 아문으로 제조 1명을 두었으며, 관원으로 종6품 별제 3명을 두었다. 초기에는 동서요(東西窯)를 설치하여 새로 천도한 서울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도와(陶瓦) 수요를 충당하게 했다. 1406년(태종6) 승려 해선(海宣)을 화주(化主)로 별요(別窯)를 설치하여, 일반에게 도와를 매매하도록 했다. 기와나 벽돌을 굽는 공역(工役)에는 많은 승도(僧徒)와 와장(瓦匠)이 동원되었다. 동서요와 와서와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으나, 1470년(성종1) 4월 와서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귀후서(歸厚署)가 설치된 뒤 와서가 설치되고 간사승(幹事僧)이 배치되었다. <속대전>에서 별제 1명을 줄여 2명만 두었다가, 1882년(고종19)에 폐지되었다.
※ 귀후서(歸厚署)
관곽색(棺槨色)이라고도 한다. 귀후서라 함은 민덕귀후(民德歸厚:죽은 사람에게 후하게 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감)에서 비롯되었다. 예조(禮曹)에 소속된 종6품 아문(衙門)으로서 관곽을 만들고, 이를 일반인에게 팔며, 장례에 관한 물품을 공급해주는 일을 담당하였다. 태종 때 승(僧) 신계(信戒)가 용산 강가에 사찰을 창건하고 여기에서 관곽을 사비(私備)하여 팔았는데 이것이 연유가 되어 1406년(태종6) 좌정승 하륜(河崙)의 건의로 용산 한강변에 관곽소를 설치했다. 1414년 2월에 관곽색을 시혜소(施惠所)로 고치고 9월 시혜소를 귀후소(歸厚所)라 칭하였다가 뒤에 귀후서로 바꾸었다. 1419년(세종1) 관원으로 제조(提調) 1명, 제거(提擧) 2명, 별좌(別坐) 2명을 두었는데, <경국대전>에는 타관(他官)이 겸직하는 제조 1명과 종6품 별제(別提) 6명을 두었다. 뒤에 <속대전>에서 별제 4명을 감축하였다. 1777년(정조1)에 폐지하였고, 소관업무는 선공감(繕工監)의 예장관(禮葬官)이 겸하도록 하였다.
▲ 산디발머리-
▲ 쇠경재
도동2가와 동자동의 경계 지역을 송경재 또는 쇠경재라고 하는데, 조선 중기의 문신 한음(漢陰)이덕형(李德馨)이 부근에 살면서 경전(經典)을 낭송한 데서 유래한다.
▲ 계묵재약수-후암동
▲ 해방촌-용산구 2가
해방촌은 글자 그대로 8·15 해방 뒤 생긴 마을이다. 법정 명칭은 서울 용산구 2가이고, 행정동으로는 용산 2가동에 속한다. 용산 2가동에는 용산 2가와 더불어 용산 4가까지 포함돼 있다. 기슭을 내려온 평지에 조성된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 용산 4가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성저십리에 속해 한성부가 관할한 지역으로, 인가가 드문 솔밭이었다. 갑오경장 때까지만 해도 왕실과 문묘의 제사에 쓸 황소·양·돼지를 키우던 전생서(典牲暑)가 있었다. 일제는 남산의 북쪽과 서쪽 사면 기슭을 따라 각종 신사와 권력기관들을 배치시켰지만, 능선 너머의 남쪽 기슭은 크게 손대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이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림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곳에 1946년께부터 북쪽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자리 잡게 되면서 생겨난 마을이 곧 해방촌이다. 1945년부터 월남한 사람들은 당시 비어 있던 일본의 육군관사(한때 육군형무소)를 집단적으로 점거해 살기 시작했다. 이 관사들은 필동 2가에 있던 일본 주둔군사령부가 1908년 용산에 새로 건립된 청사로 옮겨오면서, 현재의 용산고 남쪽으로 길을 따라 대규모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사람들이 무단으로 육군관사에 들어와 살자 퇴거명령을 내렸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군정은 건물을 뜯어가도 좋으니 관사 터는 비워줄 것을 다시 요구했다.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자 1946년 미군은 이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이렇게 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현재의 해방촌 중 윗동네(이태원 쪽, 초기의 용산동)에 터전을 잡았다. 해방촌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약간 아래쪽(후암동 쪽, 초기의 신흥동)에 또 하나의 거주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착자는 대부분 평북 선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선천은 기독교 선교가 일찍이 시작된 덕택에 기독교인이 많고, 또한 광산이나 해상무역 등으로 자산가들이 많던 지역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선천 사람들은 북한의 공산주의 통치에 자연스럽게 반발했고, 이를 피해 남쪽으로 대거 내려왔다. 내려온 사람들 중 교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교회 맞은편에 천막을 치고 살기 시작했다. 거주자가 점차 많아지자 이들은 1947년 사회부 장관과 교섭해 임시 천막 40여 개를 얻어 지금의 해방촌 자리에 정착했다. 이때 정착한 사람들은 400여 가구에 달했다. 이들이 자리 잡은 곳은 바로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였다.
▲ 힐탑아파트. 남산외인아파트
경제개발계획이 한창 진행되던 1960년대 후반. 선진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많은 외국인들을 초청했다. 이들 외국 기술자들은 경제발전에 꼭 필요한 존재였고, 그래서 최고 대우를 해줘야 했다. 이들을 위한 음식과 옷은 수입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살 집이었다. 짧게 머무는 외국인 사업가들은 시내 조선호텔과 도뀨호텔, 코리아나호텔에서 묵었지만 장기 체류하는 대사관직원과 상사주재원이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을 건설해야 했다. 이런 필요성에서 탄생한 아파트가 바로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힐탑 아파트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인 힐탑 아파트에는 새로운 것이 많았다. 엘리베이터가 처음 등장했고 밖으로 뛰어가지 않고 집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자동식 전화가 놓였다. 당시 귀했던 스프캔과 감자칩, 스파게티면도 힐탑 아파트 내 외국인 전용매점에서 살 수 있었다. 힐탑 아파트는 기획부터 준공 후 관리까지 철저하게 외국인을 위한 주택이었다. 지상11층짜리 힐탑 아파트를 지으면서 우리나라에 고층아파트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주택공사는 일본 다이세이(大成)건설에서 빌린 100만 달러어치 철근과 목재를 이용해 주택공사 소유 한남동 땅에 아파트를 건립하기로 했다. 1967년 3월 공사를 시작한 후 1년 7개월만에 지하1층, 지상11층 120가구 규모의 고층 건축물이 완성됐다. 힐탑아파트는 일단 높이에서 압도했다. 이전까지 등장했던 아파트는 고작해야 5층을 넘지 않았다. 일본에서 만든 오티스(Otis)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옥상정원과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나타났다. 이 뿐 아니다. 차량소음이 시끄럽고 빛이 안 들어 입주자들이 1층을 꺼린다며 필로티 구조(건물 전체나 일부를 기둥으로 들어 올려 건물을 지상에서 분리시키는 것)를 과감하게 도입하기도 했다. 건물 외벽은 단열효과를 고려해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브이자로 꺾인 건물은 단순히 멋내기용이 아니었다. 남향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더 오래 받고 북쪽 판잣집을 가리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냈다. 힐탑 아파트는 내부도 넓었다. 당시는 19~23㎡(6~7평) 크기에 방1개와 부엌, 복도에 화장실이 딸린 아파트가 대부분이었지만 힐탑 아파트는 62~108㎡(19~33평)으로 구성됐다. 방이 1개 있는 유형부터 방 3개짜리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힐탑 아파트만으로는 몰려드는 외국인과 미 8군 수요를 맞추기에 부족했던 정부는 본격적으로 외인아파트 공급에 나선다. 남산기슭에서 1970년 착공해 1972년 완공한 남산외인아파트는 힐탑 아파트의 동생뻘이다. 92.5~115.7㎡(28~35평) 16,17층 규모 2개동 아파트는 온수난방방식을 적용해 세대별로 온도조절이 가능했다. 비상시 대피하기 위해 옥상 헬리포트 시설을 설치한 첫 아파트이기도 하다. 모두 외국인을 위해 지었던 고급 주택이었지만 나중에 두 아파트의 운명은 달랐다. 남산기슭에 있어 어디서나 눈에 띄었던 남산외인아파트는 남산을 가로막는다는 바로 그 이유로 1994년 철거됐다. 1994년 11월20일, 2개동이 먼지 속에 무너지던 발파 장면이 전국에 TV로 생중계됐다. 건설할 때 선진 건축 기술을 선보였던 것처럼 철거 때도 첨단 철거 공법을 적용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남산외인아파트 자리에는 남산 야외식물원이 조성됐다. 힐탑 아파트는 ‘리모델링’이라는 변형을 거쳤지만 아직 살아남았다. 2003년 리모델링 후 ‘힐탑 트레저’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이제는 한국인도 살 수 있지만 여전히 외국인 임대 수요가 많은 편이다.
[우리나라 아파트문화사]
(1) 미쿠니(三國)아파트
1930년 경성 미쿠니상사가 한국주재 일본인직원들을 위해 회현동에 관사를 짓고 그 이름을 ‘미쿠니아파트’라고 붙였다. 지금의 아파트와 그 구조가 많이 달랐지만, 바로 이것이 한국 최초의 아파트(3층)이다. 1935년 미쿠니상사는 더욱 진보된 건출기술로 내자동에 또 하나의 관사(아파트)를 지었다. 회현동 고나사는 벽돌로 지었으나, 내자동 관사는 콘크리트 자재를 사용했으며, 4층 높이에 외관도 현대식으로 설계했다. 1942년이 되어서 한국인 손으로 지은 아파트가 등장한다. 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인 조선주택영단이 설립한 혜화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일본식 다다미와 좌식생활을 고려해 설계했다. 그러나 1930년대 아파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2) 우리나라 최초의 종암아파트
1958년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아파트, 처음으로 ‘아파트먼트’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 우리나라 회사가 독자적인 기술로 처음 시공한 아파트, 그리고 최초로 수세식 변기를 설치한 아파트가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담장 옆 언덕에 지은 종암아파트이다.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수세'하는 좌변기가 놓이고 욕조는 없었다. 이로써 한국인들은 집 안에 있는 쾌적한 공간에서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문명의 진보'를 볼 수 있었다. 중앙산업은 7260여㎡ 대지 위에 3개 동을 지었고 152가구가 입주했다. 독일에서 설계했다는 평면만 보면 '지금 아파트랑 별 차이 없잖아'라는 느낌이지만 당시는 정치인이며 예술인, 교수와 같은 상류층이 입주한 것으로 유명한 '고급' 주택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 벗는 공간이 있고, 바로 옆은 화장실이다. 방2개, 거실, 주방, 창고가 있고, 발코니까지 갖추고 있었다. 주방에는 인조석 싱크대 시설이 설치됐다. 요즘에는 주방과 거실을 연결하는 설계가 주류를 이루지만 종암아파트는 현관에서 들어서면 작은 복도가 있어 주방과 거실이 분리됐다. 거실은 거실대로, 주방은 주방대로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됐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집안에서도 바닥 높낮이가 달랐다. 뜨끈한 온돌바닥을 깔았던 침실은 현관과 주방, 거실보다 한 단이 높았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효형출판, 2009)에 따르면 '단이 높은 안방에서 발코니를 통해 내려다보는 공간감은 옛날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내려다보던' 시각과 닮았다고 풀이한다. 전통의 좌식구조와 서양식 입식구조가 사이좋게 공존한 셈이다. 서울시가 갖고 있던 땅에 1957년 시공해서 1년 만에 우뚝 올린 종암아파트는 미국자본을 지원받았고 독일회사가 설계했지만 시공은 우리나라 건설사인 중앙산업이 맡았다. 그래서인지 묘한 한국식 정취를 남긴다. 엉덩이를 떼지 못하게 하는 따뜻한 온돌이, 집집마다 빨래가 바람에 나부끼는 발코니가, 빛 잘 드는 남향으로 개천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정겹다. 1993년 서른 여섯해를 넘기고 철거됐지만 아직도 '고려대학교 옆에 있었던 낡은 아파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자리에는 1995년 종암선경아파트가 들어섰다.
(3) 1960년대 첨단아파트단지 마포아파트
1991년 3월 2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서 한 낡은 아파트가 저층부터 철거되기 시작했다. 아파트 앞 썰렁한 공터 한쪽에 사람들이 한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크러셔’ 라는 대형 철거 장비가 열심히 시멘트벽을 허물었다. 당시 크러셔를 작동했던 사람은 무심하게 벽을 부수었지만 이 때 철거되고 있었던 아파트는 우리 주택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건물이었다. 바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직후 ‘생활혁명’을 기치로 건립된 마포아파트다. 준공식에서 박 전 대통령은 마포아파트가 “혁명한국의 상징이 되길 바란다”며 큰 기대감을 보였다. 주공 30년사에 따르면 마포아파트를 처음 설계했을 때는 10층 11개동 1158호 규모로 각 동마다 엘레베이터를 설치하기로 했다. 수세식화장실은 기본이고 입주자들의 편의를 위한 중앙난방시스템을 적용할 계획이었다. 비록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곤 하지만 3,4층 규모의 개별난방에 만족해야 했던 종암아파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통 가옥의 흔적이었던 온돌 마루가 완전히 사라지고 서구식 입식 구조를 제대로 구현했다. 평면 설계만 보면 요즘 건설되는 아파트와 큰 차이가 없을 만큼 현대적인 특징을 지녔다.
하지만 더 큰 차이점은 처음으로 ‘단지’ 개념을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주거만을 고려했던 단계를 넘어 대규모 주택용지에 여러 개의 건물을 짓는 ‘아파트 단지’ 로 설계했다는 것이 마포아파트의 ‘혁명성’이다. 단지 안에는 공원과 녹지, 운동장 등 아파트 커뮤니티의 출발점이 되는 공간도 확보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쇼핑과 레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마포아파트는 이런 발전 가능성을 보여 준 최초의 시도였다. 이런 ‘생활혁명’ 을 위해 주공은 박정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당시 기와공장이었던 마포형무소 농장터를 주택용지로 변경해 단지형 마포아파트를 건립한다. 하지만 마포아파트의 최초 계획은 자금 부족과 사회 분위기 등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100% 달성되지 못했다. 전기와 물이 부족한 마당에 한 건축물에 너무 많은 자원을 몰아준다는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이를 이기지 못해 결국 규모와 설비를 대폭 축소하는 방향으로 변경됐다. 층수가 10층에서 6층으로 바뀌었고 각 동에 설치할 엘리베이터도 없던 일이 됐다. 기름을 연료로 사용하는 중앙난방은 연탄보일러로 개별 난방하는 방식으로 대체됐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포아파트는 1962년 1차로 6층 높이의 Y자형 주거동 A, B형을 각각 3동씩, 6개동 총 450가구를 선보였다. 이어 1964년 11월 30일에는 2차로 6층짜리 일자형(판상형) 4개동 192가구가 준공됐다. 총 10개동 642가구의 아파트 단지로 탄생한 것이다. 연면적 6316평, 총 사업비는 3억5600만원. 이 중 정부 지원금과 주공 자금이 2억7800만원을 차지하고 입주자 부담금은 7800만원에 불과했다. 공적 자금으로 건립된 셈이다. 처음에 마포아파트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고층 주택이었고 연탄가스 위험이 있다는 괴소문으로 초기 입주율이 10% 미만이었다. 빈집이 많아 겨울에 수도 파이프가 동파하기도 했다. 주공은 연탄가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동물 실험도 부족해 현장소장이 직접 연탄가스가 샌다고 알려진 방에서 잠을 자는 ‘인간 생체실험’ 을 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포아파트는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부상하고 나중에는 유명세를 타면서 웃돈이 붙어 거래된다. 당시 영화를 보면 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아파트가 배경이 됐는데 바로 마포아파트가 주요 촬영장 중 하나였다. 이렇듯 대중문화에 아파트가 고급 주거 공간으로 소개되면서 아파트에 사는 것은 일반 국민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아파트에 사는 꿈을 꾸었고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 강남에 있는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들이 여전히 인기를 끌면서 비싼 값에 거래되는 것도 마포아파트에서 출발했다고 보면 된다. 마포구 도화동 마포아파트 자리에는 현재 삼성이 재건축한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마포아파트를 허물고 1994년 준공된 이 재건축 아파트도 벌써 15년의 나이를 먹은 중년 건축물이 됐다.
(4) 60년대 후반 외국인을 위한 최초의 고급아파트 힐탑아파트
경제개발계획이 한창 진행되던 1960년대 후반. 선진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많은 외국인들을 초청했다. 이들 외국 기술자들은 경제발전에 꼭 필요한 존재였고, 그래서 최고 대우를 해줘야 했다. 이들을 위한 음식과 옷은 수입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살 집이었다. 짧게 머무는 외국인 사업가들은 시내 조선호텔과 도뀨호텔, 코리아나호텔에서 묵었지만 장기 체류하는 대사관직원과 상사주재원이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을 건설해야 했다.
이런 필요성에서 탄생한 아파트가 바로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힐탑 아파트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인 힐탑 아파트에는 새로운 것이 많았다. 엘리베이터가 처음 등장했고 밖으로 뛰어가지 않고 집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자동식 전화가 놓였다. 당시 귀했던 스프캔과 감자칩, 스파게티면도 힐탑 아파트 내 외국인 전용매점에서 살 수 있었다. 힐탑 아파트는 기획부터 준공 후 관리까지 철저하게 외국인을 위한 주택이었다. 지상11층짜리 힐탑 아파트를 지으면서 우리나라에 고층아파트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주택공사는 일본 다이세이(大成)건설에서 빌린 100만 달러어치 철근과 목재를 이용해 주택공사 소유 한남동 땅에 아파트를 건립하기로 했다. 1967년 3월 공사를 시작한 후 1년 7개월 만에 지하1층, 지상11층 120가구 규모의 고층 건축물이 완성됐다. 힐탑 아파트는 일단 높이에서 압도했다. 이전까지 등장했던 아파트는 고작해야 5층을 넘지 않았다. 일본에서 만든 오티스(Otis)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옥상정원과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나타났다. 이 뿐 아니다. 차량소음이 시끄럽고 빛이 안 들어 입주자들이 1층을 꺼린다며 필로티 구조(건물 전체나 일부를 기둥으로 들어 올려 건물을 지상에서 분리시키는 것)를 과감하게 도입하기도 했다. 건물 외벽은 단열효과를 고려해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브이자로 꺾인 건물은 단순히 멋내기용이 아니었다. 남향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더 오래 받고 북쪽 판잣집을 가리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냈다. 힐탑 아파트는 내부도 넓었다. 당시는 19~23㎡(6~7평) 크기에 방1개와 부엌, 복도에 화장실이 딸린 아파트가 대부분이었지만 힐탑 아파트는 62~108㎡(19~33평) 으로 구성됐다. 방이 1개 있는 유형부터 방 3개짜리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5) 역사의 곡절과 함께 사라진 삼일아파트
1960년대까지 청계천변은 서울로 몰려 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땅히 거주할 곳이 없었던 서민들은 천변을 따라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다. 이 때문에 도심과 인접해 있었던 청계천변은 슬럼가를 형성했고 서울시는 어떤 식으로든 이들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청계천변의 삼일아파트는 1969년, 이런 배경에서 설립된 시민아파트다. 삼일아파트는 청계천로를 중심으로 종로구 창신동 400-4번지 일대, 그보다 남쪽인 중구 흥인동 162-2번지 일대에 세워졌다. 각각 12개동씩 총 24개동 1243가구에 달하는 대규모로 1~2층은 상가, 3~7층까지는 주거공간으로 계획한 주상복합아파트다. 삼일아파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바로 ‘재개발’이다. 본래 청계천변 판잣집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주용으로 제공했던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따라 청계천로를 닦으면서 천변에 무허가건물과 판잣집 등을 모두 걷어냈고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새로 지은 시민아파트인 삼일아파트로 이사왔다. 3층을 넘는 건물이 드물던 시절 청계고가와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던 7층짜리 건물을 보고 사람들은 “박통(박정희 대통령)이 청계고가 지나실 때 판잣집 보기 싫어 가렸다지”하며 수군댔다. 삼일아파트 뒤편 황학동은 전쟁 직후 지은 낡은 한옥과 판잣집 등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풍물 사진 찍어야 되는데 삼일아파트 철거 끝났나요?”
“어릴적 아빠따라 황학동 시장 들를 때 오며가며 보던 아파트다”
“아파트 뒤에는 옛날 판잣집이 많았는데 이제 다 사라지게 됐다”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옛날 아파트 사진 중 블로그에 많이 올려진 순으로 치면 아직 남아있는 회현제2시민아파트가 1등이다. 근소한 차이의 2등은 삼일아파트다. 지난 2005년 철거한 청와대 뒤편 청운아파트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사라진 아파트다. 철거된 시기도 시기거니와 풍경이 독특했기에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듯하다. 동대문시장을 질러 청계 7가, 8가를 지나면 길 양편으로 우람하게 솟아오르던 병풍 같은 삼일아파트는 이 동네를 한번이라도 지나간 사람들에게는 잊기 힘든 그림이었다. 비피하고 밤이슬 가릴 집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말 서울시는 주택난을 해소하고 곳곳에 마구잡이로 지었던 무허가 판자촌을 정비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초에는 무허가건물을 개량하자며 보조비를 지급했지만 호응이 없자 직접 시민아파트 건립에 나섰다. 서울시가 아파트 골조를 올리면 입주자가 직접 내부공사를 했다. 자고 나니 아파트가 생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서울시가 목표로 삼았던 2000동 9만 가구 건립에는 못 미쳤지만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전용면적 36㎡(10평)의 미니 가구가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등에 우후죽순 들어섰다. 1969년에만 서대문구 금화시민아파트를 시작으로 종로구 청운 동숭 삼일 낙산 현저, 중구 삼일 용산구 산천 서부이촌 청파, 성동구 행응, 동대문구 전농 월곡 성북구 정릉, 은평구 녹번, 북아현 연희A 연희B, 창천, 마포구 서강 노고산, 양천구 김포, 강서구 김포, 동작구 본동, 관악 남현 시민아파트가 건립됐다.
1969~1971년 3년 만에 서울에 들어선 시민아파트는 총 434개동, 1만7402가구였다. 장소는 달라도 시민아파트를 사는 방법은 어디나 같았다. 계약금을 먼저 내고 입주하면 분양금은 최장 15년까지 쪼개 낼 수 있었다. 서울을 뒤덮을 속도로 시민아파트를 짓던 서울시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이후 1972년, 시민아파트 공사를 중단했다. 시민아파트를 본격적으로 없애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다. 1994~1995년 성수대교가 끊기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자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구조물 안전진단을 실시했다. 서울시에서는 대부분의 시민아파트가 ‘곧 무너질 수 있다’는 E등급을 받아 1997년 8월, 시민아파트 정리계획을 내놓게 된다. 주민들이 자체 개발을 할 수 있는 지역은 재건축이나 재개발사업을 실시했고 지대가 너무 높거나 공원에 붙어있어 아파트를 짓기 어려운 지역은 건물보상비와 SH공사가 짓는 분양아파트 입주권을 주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30년의 역사를 부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숭인동과 창신동 일대 삼일아파트 주민 일부는 철거가 함께 진행된 황학동 재개발 구역과 비슷한 수준의 보상 등을 요구하며 반발했다. 집을 비우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이 많아 철거가 지연되자 빈 집에 노숙자들이 집단으로 머물기도 했다. 2008년 현재까지 31개동 철거 사업에 1907억 원이 들었다. 오랜 이야기와 상처를 품은 아파트는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004년 황학동 판잣집과 중구 쪽 삼일아파트를 부순 자리에는 롯데건설에서 지은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대신 들어섰다. 종로구 쪽 삼일아파트는 2005년 3~7층 아파트 부분을 철거한 후 1~2층 상가만 남았다. 시민아파트가 없어진 자리는 구민체육센터(회현제1아파트)나 공원(동숭아파트) 등으로 바뀌었다. 내 집 장만의 기쁨과 서민아파트의 슬픔을 함께 나눴던 시민아파트도 점차 사진으로만 기억되는 ‘과거’로 변해간다.
(6) 70년 4월 8일 무너진 와우아파트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30분. 서울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뉴스가 방송에서 흘러 나왔다. 서울시가 마포구 창전동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지상 5층, 15개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한 동이 푹석 주저앉았다는 소식이다. 이는 준공된 지 석 달 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건물은 무너지면서 가파른 경사 밑에 지었던 판잣집을 덮쳤다. 아파트에서 잠을 자던 주민 가운데 33명이 사망했고 38명이 다쳤다. 아파트 아래 판잣집에서 잠을 자던 1명도 세상을 떴다. 판잣집 주민 2명은 부상을 입었다. 와우아파트는 서울시가 마포아파트의 성공을 보고 서민들에게도 쾌적한 환경에서 거주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건설했다. 또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를 감당하려면 좁은 땅에 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싼 값의 서민아파트가 절실했다. 문제는 의욕이 너무 앞섰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서민아파트를 건립하려는 서울시장의 의욕이 비극을 낳았다. 당시 서울시는 돈이 부족했고 사람들이 살 집은 턱없이 모자랐다. 단기간 안에 주택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서울시는 1967년 4월 서울을 뒤덮고 있던 무허가 건물 13만 동을 양성화하겠다며 보조비를 지급했지만 개량 실적이 미미했다. 그래서 내놓은 카드가 시민아파트 건립이다. 서울시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공급해 9만 가구가 입주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속하게 입주까지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시는 아파트 골조만 짓고 나머지 내부 공사는 입주자가 담당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입주금 없이 가구당 20만원씩 15년간 대출해 주는 방법으로 돈이 없는 서민들도 쉽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서울시의 청사진에 대해 정부 뿐 아니라 시민들도 환영했다. 여기에 힘을 받아 서울시는 건설 가구 수를 더 늘려 잡았다. 하지만 전체 예산을 늘릴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건물 당 투입되는 건축비는 점점 줄었다. 1개 동에 12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야 했지만 실제 660만원에 짓기도 했다. 당시 건설업계에 만연했던 부패도 문제였다. 이는 결국 총체적 부실 공사로 이어졌다.
와우 아파트는 1969년 6월 착공해 6개월 만인 12월 준공했다. 요즘 나온 첨단 건축 기술을 적용해도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려면 착공 후 2년이 넘게 걸리니, 초스피드로 건설한 셈이다. 와우 아파트는 70도 경사의 산비탈을 견디는 기둥을 만드는데 필요한 철근을 70개에서 5개로 줄였다. 건물을 견고하게 하는 시멘트도 거의 섞지 않았다. 1㎡당 280kg밖에 견디지 못하는 건물 기초에 900kg의 하중이 실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을 건물은 없었다. 와우 아파트 붕괴로 아파트 건설을 총 지휘했던 당시 서울 시장 김현옥씨가 물러났다. 구청장과 건축 설계자, 현장 감독, 건설회사 사장까지 책임을 지고 좌천되거나 구속됐다. 그 후 와우 아파트는 부실 공사의 대명사가 됐다. 가수 조영남씨는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로 신고산타령을 바꿔 부르다가 ‘와우 아파트 사건’을 부끄럽게 여겼던 박정희 정부의 기관원에게 끌려갔다.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은 서민들에게 싼 값에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해 건축비를 줄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공무원과 업체 간 부정과 비리로 기본 안전마저 무시한 결과였다.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건설 비리가 낳은 비극이었다. 이 사건 이후 서민 아파트 건립은 주춤했고 비싸지만 안전한 중산층 아파트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와우 아파트 이름은 실제 지명에서 따왔다.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지었던 아파트 자리에는 현재 와우산 체육공원 바위가 웅장하다. 초여름 저녁 오른 와우산 체육공원에는 홍익대 학생들이 농구공을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람들은 누워있는 소를 닮았다는 ‘홍대뒷산’을 오르며 간혹 와우 아파트를 기억한다. 체육공원에서 만난 동네 주민은 와우 아파트 있던 자리를 묻자 “공원과 비탈진 골목길 중간쯤에 아파트가 죽 들어서있었다. 이 산 밑에는 물탱크가 묻혀 있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주민이 아파트가 있었다며 가리킨 곳을 따라가 봤다. 산자락 아래로 내려와 보니 실제로 아파트가 설 수 있었겠다 싶게 터를 닦은 흔적이 있다. 산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만든 부분이다. 전체적인 지형은 언덕꼭대기에 산을 얹은 형태다. 경사가 급한 골목 초입에 세워둔 차들은 다들 45도 이상 기우뚱하다. 와우 아파트 이후 ‘부실한 아파트’, ‘무너지는 집’이라는 악명을 지우기 위해 대한주택공사를 비롯한 건설업계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요즘은 지진과 충격에 강한 아파트도 등장한다. 건축 기술도 크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이 사는 집을 안전하게 지어야 한다는 양심이 기본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서민아파트의 꿈은 무너졌지만 아파트는 튼튼하게 건립해야 한다는 인식만은 확실하게 심어 놓았다.
(7) 준공 40년 앞둔 최고령아파트 회현 제2시민아파트
와우 아파트 붕괴로 시민아파트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던 1970년 5월, 회현동 남산 언덕에 또 하나의 시민아파트가 준공됐다. 산자락에 자리 잡은 서민용 아파트라는 점에서 이 아파트는 와우 아파트와 너무나 닮아 있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은 이 아파트를 보고 와우의 악몽을 떠올렸다. 와우 아파트의 비극을 초래했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부터 그랬으니 말이다. 아직까지 남산 언덕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40년 가까이 서민아파트의 흔적을 보여주는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김 전 시장은 와우 시민아파트는 실패했지만 이 아파트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시범’을 보여 줘야 한다며 ‘회현 제2시범아파트’라 부르라고 했지만 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셈’이 됐다. 결국 김 전 시장은 와우 아파트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무너지기는 커녕 지금도 그 기능을 다하고 있으니 김 전 시장의 요구대로 시범을 충분히 보여 준 셈이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일반 아파트와는 다른 독특한 구조로 건립됐다. 출입구가 1층과 6층 두 곳에 있다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남산의 급격한 경사지에 짓다 보니 건너편 언덕이 6층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6층에 출입구를 만들고 건너편 산비탈까지 구름다리로 연결해 밖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4층에 사는 사람은 1층 출입구를 이용하고 5층 이상에 거주하는 주민은 6층 출입구를 사용하는 것이 편하다. 구멍가게와 약국 등 편의시설도 자연스럽게 1층과 6층 출입구 모두에 들어섰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연면적 1만7932㎡로 ‘ㄷ’ 모양으로 설계됐으며 지하1층, 지상 10층, 1개동으로 구성돼 있다. 총 352가구로 면적은 대부분 전용 38.34㎡다. 평면은 방 2개에 개별 화장실, 거실이 있는 구조다. 10층이지만 서민 아파트로 건설된 것이라 엘리베이터는 없고 주차공간도 없다. 차량을 소유한 사람은 골목에 어렵게 주차를 해야 한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크기도 작고 초라하지만 당시에는 괜찮은 시민아파트에 속했다. 이 아파트가 건립되기 전 원주민들은 공중화장실을 사용했고 10㎡ 미만의 좁은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이런 서민들에게 방 2칸에 개별 화장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남대문과 동대문시장도 가깝고 날씨가 좋으면 남산에 올라가 즐길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러나 새 아파트가 건립되고 난 뒤 돈이 없는 원주민들이 입주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조건이었다.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효형출판, 2002)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입주금 30만원을 15년 거치 2000원씩 갚아나간다는 조건이 철거민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조차 그들에게는 벅찬 돈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5000원, 연탄 한 장이 16원, 담배 한 갑이 60원할 시기에 입주금 30만원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서울시 소유 땅에 서민들을 위해 조성한 회현 제2시민아파트에는 준공 초기 고위 공무원과 경찰, 연예인 등 중산층들이 새 주인이 됐다. 돈 없는 원주민들은 이들에게 밀려 다른 달동네를 찾아 떠나야 했다. 나중에 강남과 여의도에 진짜 ‘시범아파트’들이 건립돼 중산층이 이사를 간 뒤에야 서민들은 다시 이 아파트의 주민이 될 수 있었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30년 이상 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많은 추억을 남기고 있다. 성공해서 강남으로 떠난 사람도 있고 여전히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주민도 있지만 이 아파트는 이들의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을 묵묵하게 지켜보고 있다. <주먹이 운다.> 같은 영화 촬영 장소가 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인기 프로그램인 ‘무한도전’ 팀이 다녀가기도 했다. 지하철 회현역에서 이어지는 좁은 비탈길을 따라 ‘시범드라이크리닝’와 ‘시범상회’를 차례로 지나 언덕꼭대기에 오르면 지금도 굳건하게 서 있는 회현 제2시민아파트를 볼 수 있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 철거사업 추진 중’이라는 중구청의 안내판이 아파트 입구에 서 있지만 주민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생활하고 있다. 활짝 열린 창에는 발이 늘어졌고 창 앞에 가지런히 놓인 화분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구름다리 출입구로 들어가니 금방 어둡다. 멀리 복도 창으로 빛이 들지만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긴 복도 양 옆에 늘어선 붉은 나무 현관문에는 파란색 호수가 붙었다. 아파트 중정에는 7~8층 높이로 나무가 우거졌다. 와우아파트를 반면교사로 삼아 튼튼하게 건설됐던 이 아파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2006년 1월 서울시는 중구에 회현 제2시민아파트 정리계획을 전달했다. 위험시설 D등급으로 분류돼, 더 이상 거주 가능한 건축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남산의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철거가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부터 6월까지 주민동의서를 받았으며 9월18일 보상계획을 공고했다. 철거 계획 발표를 전후로 서울 강남권 등 위치가 좋은 곳에 조성되는 아파트 특별 입주권을 노린 투자자들이 이 아파트로 몰렸다. 1채당 1억 원이 넘지 않았던 아파트 가격이 2억5000만~3억 원까지 뛰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집을 팔았고 주인이 바뀌었다. 새 집 주인들은 대부분 이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주민 중 80% 이상이 전세보증금 3500만~4000만원을 주고 사는 세입자다. 보상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주민 동의율은 22%에 불과하다. 352가구 중 77가구만 보상을 받고 집을 비웠고 나머지는 더 좋은 지역의 특별 분양 아파트를 기다리고 있다. 시설이 많이 낡았지만 강제 수용을 통해 철거할 수 없다는 것이 서울시 관계자의 설명이다. 결국 서울 최고령 아파트 중 하나인 회현 제2시민아파트의 운명은 언제 집주인들이 철거 보상에 동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8) 60년대 후반 도심을 가로질러 설계된 최초의 주상복합 세운상가아파트
1966년 6월 20일. 김현옥 전 서울시장은 중구청의 6급 공무원인 이을삼씨가 낸 아이디어를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다. 종묘 건너편에서 시작해 청계천로, 을지로, 퇴계로를 가로질러 형성된 종로~필동간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이곳에 민간자본을 유치해 첨단 건물을 짓는다는 내용이었다. 빈민들이 우후죽순으로 몰려 살았던 이곳은 일제시대 때는 소이탄(불을 질러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폭탄) 투하에 대비해 공터로 남겨 놓았던 소개(疏開)지였다. 이 계획에 대해 박 대통령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에 고무된 김 시장은 곧 바로 이곳에 살고 있던 수 천 명의 빈민들을 서울 외곽으로 이주시키고 건축 설계에 들어간다. 여기에 참여했던 건축가는 당시 정치권과 두터운 인맥을 바탕으로 굵직한 사업을 전담했던 김수근씨와 그가 부사장으로 있었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도시계획 부장이었던 윤승중씨는 <건축> 1994년 7월호의 ‘세운상가 이야기’를 통해 “1966년 어느 날, 시장과 부시장에게 신용을 갖고 있었던 김수근 선생에게 시장이 문제의 땅(세운상가 터)의 이용방법을 물어 왔을 때 즉석에서 보행자몰, 보행자 데크, 입체도시 등의 개념을 설명하고 공감을 얻었다. (중략) 이 구상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 필자에게 명해졌고 최초의 스케치를 만들어야 하는 시간은 단 며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처음 설계된 세운상가는 시대를 뛰어넘는 개념과 기술이 적용됐다. 건물과 건물을 2층이나 3층에서 연결하는 공중 보행 데크를 비롯, 5층에 인공대지를 설정해 공중정원을 만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높이 올라가면서 층을 계단식으로 후퇴하게 해 바람과 햇빛을 잘 들게 하는 구조를 적용하고 지상 1층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할애한다는 개념도 당시에는 ‘혁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는 이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구상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대부분 실현되지 못한다. 건설 과정에서는 최초 설계를 주도했던 서울시가 뒤로 빠지고 민간업체들이 사업을 전담했기 때문이다. 민간 사업자들은 도시 경관이나 첨단 건축 기술 보다는 분양과 임대 수익을 올리는 것이 목표였고 그러다 보니 최초 이상적인 설계는 무시됐다. 이에 대해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는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1>(한울, 2007)의 ‘아 세운상가여-재개발이라는 이름의 도시파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세운상가는 현대와 대림,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6개 기업과 아세아상가번영회, 청계상가(주)를 합쳐 8개 업체가 분할, 시공하기로 결정됐다.(중략) 1968년 들면서 대림, 청계,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상가아파트와 호텔이 하나씩 준공됐다.(중략) 이 건물군은 (도도한 기업 논리에 의해) 당초의 구상과 전혀 다른 매우 추악한 모습으로 실현된 것이다.” 결국 첨단 건축 기술의 전시장이 될 뻔한 세운상가는 각각의 주상복합이나 호텔로 건립됐다. 종로~퇴계로 사이에 현대상가(13층), 세운가동상가(8층), 청계상가(8층), 대림상가(12층), 삼풍(14층), 풍전호텔(10층), 신성상가(10층), 진양상가(17층)가 특징 없는 모양으로 들어섰다. 총 연면적은 20만6025㎡, 최대 864세대가 거주하는 주상복합타운이 됐다.
세운상가가 건설될 무렵 언론들은 철근 7000t과 시멘트 87만부대 등 엄청난 자재를 사용해 만든 동양 최대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1966년 8월 세운상가 프로젝트의 첫 사업인 아세아번영회 기공식에서 김현옥 시장이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휘호를 써 ‘세운’이라는 이름을 붙었다. 하지만 이 최초의 주상복합타운은 나중에 볼품없는 외관으로 서울 도심의 경관을 해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지목된다. 세운상가는 준공 이후 7~8년간 서울의 명소로, 또 영화배우와 정치인 등 거물급들이 거주하는 고급 아파트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강남 아파트가 개발되고 도심에 롯데와 신세계 등 최신 백화점과 용산전자상가 등이 조성되면서 슬럼화되고 말았다. 1970년 말부터 세운상가는 일반 의류와 정상 제품 외에도 각종 싸구려 모조품과 해적판 레코드, 도색 잡지 등을 파는 음침한 장소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따라 도심을 살리기 위해 세운상가를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랜 검토 끝에 서울시는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 조성을 위해 세운상가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세운재정비촉진사업의 하나인 세운녹지축 조성 작업에 근거해 2008년 말 현대상가를 시작으로 8개 건물은 하나씩 해체될 운명에 놓여있다. 세운녹지축 건설 사업은 오는 2015년까지 계속된다. 이 사업이 끝나면 일제시대 소이탄 피해를 막는 소개지에서 전후(戰後) 빈민들의 불안한 삶의 터전으로, 그리고 경제개발시대를 대표하는 도심 랜드마크 건물로 존재했던 세운상가와 그 일대는 서울 시민을 위한 녹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으로 보인다.
(9) 1970년대 강남아파트 시대의 서막을 연 반포아파트
1973년 7월9일 아침. 관악구 동작동(현 서초구 반포동) 한강변에는 양산을 쓴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부(富)의 상징이던 승용차도 100여대나 몰려들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반포차관아파트(현 반포1단지 중 일부) 입주자를 은행나무 열매를 이용한 추첨으로 뽑는 날이었다. 1490가구 모집에 수 천 명의 사람이 몰렸고 경쟁률은 5.6대1로 치솟았다. 당시 이 아파트의 72㎡(약 22평) 주택형은 360만원. 무주택자만 신청할 수 있었지만 편법이 성행했다. 친척 이름을 빌려 두 채 이상 당첨된 사람, 입주 전에 웃돈을 받고 아파트를 팔아버린 사람, 집이 있는데도 동사무소 직원에게 뒷돈으로 3000~5000원을 주고 다른 집에 세든 척 서류를 꾸민 사람들이 나중에 적발돼 노량진경찰서가 한동안 북적였다. 반포1단지는 최초로 '강남'의 서막을 열었다. 72~138㎡(22~42평) 3786가구로 구성된 반포아파트는 처음으로 한강 남쪽에 건설된 대단지 아파트였다. 55만여㎡(16만7000평)부지에 242억원을 들여 만든 당시 최대 규모의 공사로 `남서울건설사업’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1970년대에는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중동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넘쳐났다. 정부는 전국 각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아파트를 지어댔지만 한계가 있었다. 사업지가 늘어나면서 공사기간은 길어졌고 수요가 많은 서울에서는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반포차관아파트는 임대아파트라 팔거나 임대할 수 없었는데도 아파트가격(360만원)의 25%나 웃돈이 붙어 최고 450만원을 호가했다. 반포1단지가 단순히 덩치로 승부했던 것은 아니다. 주택 내부에는 주택공사가 처음으로 복층 설계를 도입했다. 1,2층 연결주택이라고 불렸던 이 설계는 1호당 2개 층을 사용했다. 아파트는 6층 높이지만 1,3,5층에만 현관이 있었고 내부에 계단을 놓아 2,4,6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105㎡(32평C형) 주택형에는 아래층에 부부침실과 식당을 겸한 13평의 넓은 거실을 뒀고 손님을 위한 화장실도 별도로 마련했다. 부엌 옆에는 가정부방, 위층에는 서재와 가족실, 아동전용욕실이 있는 중상류층을 위한 집이었다. 단지 내에서 벗어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을 갖춘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단지 앞에는 상가점포 238개가 죽 늘어섰고 유치원, 동사무소, 전화국, 은행, 학교도 모두 단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했다. 또 단지 내로 노선버스가 통과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마포, 한강아파트와 확실하게 차별성을 뒀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단지를 만들면서 소소한 부작용도 나타났다. 노선버스가 단지를 관통하면서 보수공을 가장한 좀도둑이 늘었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서 물건이 없어지는 일도 빈번했다. 도난사고가 잦아지자 요즘처럼 경비원을 두고 드나드는 사람을 통제하는 바람에 단지 앞에서는 주민과 경비원 간의 실랑이도 벌어졌다. 뜨거운 물을 이용한 지역난방시설을 설치했지만 1973년 말 석유파동이 일어나 난방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석유절약정책에 따라 실내온도를 기존 23도에서 18도로 낮추자 입주자의 항의가 쏟아졌다. 결국 난방에 쓸 석유를 구하기 위해 직원이 석유공사 인천급유소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소형평형 임대주택과 중대형 분양주택이 한 단지로 묶이면서 예상치 못하게 입주자 간의 위화감 문제가 불거진 것도 반포아파트가 처음이었다. 단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현 신반포로) 남쪽에는 AID차관을 받아 지은 임대주택 1490가구, 북쪽에는 105~138㎡ 중대형 아파트 2296가구가 배치됐다. 중대형 아파트는 입주 전 집값을 모두 내야 해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입주했고 차관아파트는 봉급생활자가 많았다. 이 때문에 AID아파트 쪽 단지 경비나 청소업무를 더 소홀히 한다며 관리실에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포1단지는 1981년 8월 입주자자치관리운영위원회에 관리권을 넘길 때까지 주택공사에서 관리를 맡았다. 반포1단지 건설 후 1977년에는 반포2, 3단지 아파트가 착공한다. 반포1단지만한 규모(대지13만평, 263억원)에 5층 아파트 4120가구를 건설하는 난공사였다. 고속터미널 근처라 공사장 주변이 혼잡해 공사차량이 교통법규위반 딱지를 수차례 뗐고 공사 인력도 부족했다. 결국 완공이 되지 않은 채로 8월 입주가 이루어졌지만 한 달 만인 9월, 가스폭발사고가 발생한다. 입주자 6명이 숨진 이 사고 이후 결국 어린이 놀이터가 있던 자리에 건물을 다시 지어 재입주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1단지에 비해 더 늦게 지어진 2,3단지가 재건축은 먼저 이루어졌다. 3단지가 있던 자리엔 ‘반포자이’가 올라섰고, 2단지 자리엔 ‘래미안퍼스티지’가 들어섰다.
(10) 2000년대 뉴타운 개발의 시조 잠실아파트단지
1970년대 중반 1차 석유파동(오일쇼크)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고 불황이 엄습하자 정부는 건설경기 활성화를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런 취지에서 도로와 철도 등 토목 공사와 더불어 서울에 아파트를 공급하는 일을 서둘러 추진했다. 건설은 짧은 기간 안에 일자리 창출과 소비를 늘리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잠실 지구는 당시 이런 경제적 요구에서 탄생했다. 1971년부터 서울시가 잠실 인근 한강변에 308만평을 매립해 용지를 조성했고 대한주택공사가 그 중 41만평을 965억 원에 매입해 1975년 3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5개 단지를 건립했다. 삭막한 강변 매립지가 총 364동, 1만9180가구, 인구 10만명의 거대한 주택 단지로 변신한 것이다. 당시 이 정도 규모의 단지는 세계적으로 일본과 서독, 영국에 있는 8~9개에 불과했다. 주택공사는 처음부터 아파트 뿐 아니라 행정기관과 병원, 학교, 체육관과 오락시설, 새마을회관등 모든 것을 갖춘 뉴타운을 염두에 두고 잠실지구를 조성했다. 이를 위해 잠실단지건설본부를 만들어 90명이 넘는 기술과 관리인력을 배정하기도 했다. 이는 일반 공사 현장의 4배 이상 되는 인력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잠실 아파트 단지는 현재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는 뉴타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잠실 단지는 아파트를 공급받을 서울 시민의 소득 수준에 따라 면적을 결정할 수 있도록 10개가 넘는 주택형으로 설계됐다. 이와 관련해 주택공사 30년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구당 월소득이 4만4000원인 가구에는 전용면적 7.1~7.4평, 5만8000원이면 9.4~9.8평, 7만300원이면 13~13.5평이 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잠실1~4단지는 건물을 남향으로 길게 평행 배치됐던 이전 단지와 달리 건물들이 중앙을 향해 모여 있는 ㅁ자형 클러스터(cluster) 방식을 채택했다. 이른바 중정형 공간구성으로 설계됐던 것이다. 단지 중앙은 놀이터나 작은 공원을 조성해 완결성을 높이려고 했다. 또 많은 나무와 꽃을 심어 쾌적한 환경을 연출했다. 아파트 단지의 이런 설계는 당시 매우 신선한 시도였다. 하지만 길게 이어진 상가에 비해 중앙에 위치한 상업시설은 이용이 불편하고 수익성이 떨어져 주민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나중에는 단지 내 차량이 늘면서 공원으로 활용하려던 중앙공간은 주차장으로 변해 처음의 설계 의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평면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현관에 들어서면 오른쪽이나 왼쪽에 주방공간(부엌)이 있고 거실로 바로 이어진다. 면적에 따라 2~3개 있는 침실은 거실과 분리돼 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방을 두어 전반적으로 좁다는 느낌을 준다. 요즘 나온 아파트 평면과 비교하면 공간 효율성이 떨어진다. 한강맨션이나 외인아파트와 달리 일반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공급된 것이라 내부가 소박한 편이었다. 1976년부터 건립된 5단지는 1~4단지와 개념이 완전히 달랐다. 중정형 배치를 포기하고 반포아파트와 같이 강변을 따라 나란한 모양으로 단지를 조성했다. 층수는 15층으로 당시로서는 고층 아파트였다. 또 타워형과 판상형을 혼합배치했고 실용성에 입각해 생활편의시설을 설계했다. 이와 관련해 주택공사 40년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단지의 출입구를 최소한으로 줄여 관리상의 편의를 도모하고 단지를 통과하는 교통을 억제하도록 했다. 각 블록을 한 개의 근린주구단위로 책정해 국민(초등)학교 1개씩을 유치하고 단지 중앙에 근린공원과 상가의 기능을 가진 커뮤니티센터를 배치했다." 평면 구성도 거실과 침실을 모두 강조해 1980년대 이후 거실 중심의 아파트 내부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가교(架橋)역할을 했다. 대규모로 조성된 잠실지구에서 실험된 각종 건축 기술과 도시 계획은 그 이후 생기는 대단지 아파트와 우리나라 주택 건설사에 많은 자양분을 제공했다. 특히 각종 편의시설과 주택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노하우를 남겼다. 2000년대 들어 잠실아파트 1~4단지는 준공 30년을 넘기지 못하고 재건축에 들어간다. 3, 4단지가 먼저 공사를 시작했고 1, 2단지가 뒤를 이었다. 5층 규모의 저층에서 3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로 변신했고 이름도 1단지는 잠실 엘스, 2단지는 리센츠, 3단지는 트리지움, 4단지는 레이크팰리스로 바뀌었다. 고밀도로 재건축돼 가구수도 단지 별로 5000세대가 넘는다. 1978년 준공된 5단지는 처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울 강남권의 대표적인 재건축 아파트 중 하나로 지금도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던 2006년 말에는 모든 면적이 10억원이 훨씬 넘는 시세를 형성하기도 했다. 최근 2년간 가격이 크게 떨어졌으나 최근에는 다시 오르는 추세다. 언젠가 잠실 주공 5단지까지 재건축이 시작되면 이제 잠실단지는 화려한 고층 아파트촌으로 탈바꿈할 것으로 예상된다. 1970년대 중반, 불황 탈출과 서울 시민을 위한 주택 보급 차원에서 조성된 잠실지구는 역사에만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11) 고층아파트도 안전하다는 시범을 보인 여의도 시범아파트
“이런 모래밭에서 어떻게 사나…” 1971년 10월 15일 오후,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분양받는 예비입주자 가족들은 단지를 둘러보고 걱정부터 앞섰다. 서울 도심에서 들어오는 버스 한 대가 없고 주변에는 온통 모래벌판뿐인 곳에서 과연 살 수 있을지 한숨만 나왔다. 통신회선이 부족해 전화 걸기도 불편하고 변변한 상가도 없어 물건을 사려면 다리를 건너 노량진 쪽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도 단지 규모는 큰 편이었다. 287만㎡(87만평)의 거대한 택지에 12층짜리 아파트 24개동이 불쑥 솟아있었다.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12층 아파트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971년에 발표된 여의도 종합 개발계획안에 따라 ‘아름다운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시작돼 결실을 맺은 첫 작품이었다. 서울 초고층 아파트의 최초의 시도를 추적하다 보면 바로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만난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이야기하면서 여의도를 빼놓을 수 없다.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2003)에 따르면 1967년 여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강변북로 너머 여의도를 개발하면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선거유세나 가끔 열리던 넓은 백사장에 불과했던 여의도를 대규모 택지로 개발하기 위해 서울시는 1968년 2월, 밤섬을 폭파했다. 여기서 나온 11만4000t의 돌로 여의도와 한강 사이 제방을 쌓았다. 1970년, 지금의 마포대교인 서울대교 준공으로 여의도는 ‘육지’로 다시 태어났다. 세운상가(1966년), 청계고가도로(1967년)를 설계했던 건축가 김수근씨는 국회와 종합병원이 있고 사람은 2층으로, 차는 1층으로 다니게 하는 보행자용 인공데크까지 갖춘 혁신적인 여의도 개발 마스터플랜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정작 땅이 팔리지 않았다. 서울시에서는 여의도에 조성한 택지를 민간에 팔아 부족한 재정을 충당할 계획이었지만 사겠다는 업체가 없었다. 고심 끝에 서울시가 먼저 튼튼한 고급 아파트를 짓기로 했고 1971년 10월 착공 1년 만에 24개동 1584가구 규모의 ‘시범아파트’를 준공했다. 12층 높이의 시범아파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지은 아파트 중 가장 높았다. 최신식 아파트로 불리던 이촌동 공무원아파트도 5~6층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세대마다 냉온수 급수, 스팀난방 시설을 갖췄다. 파출소, 쇼핑센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지 가까이에 들인 배치 방식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였다. 여의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여의도 중학교, 여의도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는 특수학군제 때문에 사람들은 여의도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시범아파트 입주자 어머니의 70%이상이 대학졸업자라는 조사결과가 나올 정도로 고학력자, 전문직 종사자가 모여들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가장 큰 158㎡(40평)형이 571만원, 소형인 59㎡형이 212만원선에 분양되었는데 입주 시작 후 두 달 만에 158㎡형의 가격이 1000만원을 넘어섰다. 여의도시범아파트의 인기가 높아지자 민간업체들도 택지를 사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삼익주택이 1974년 시범아파트 남쪽에 삼익아파트(360가구)를, 한양주택이 은하아파트(360가구)를 지었고 대교아파트, 삼부아파트, 라이프아파트가 뒤를 이었다. 1970년대 후반 중동건설경기 호황으로 늘어난 유동자금이 여의도 아파트로 몰려 ‘투기열풍’을 빚기도 했다. 1977년 목화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45대1를 기록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20세기 생활문화변천사>에 따르면 한 부동산업자가 89㎡짜리 아파트 100채를 현금 2억 원을 내고 신청하는 일도 있었다. 청약결과 발표현장은 ‘당첨되면 프레미엄(당시 표기)을 붙여 팔아주겠다’고 명함을 돌리는 중개업자들로 북적였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생긴 ‘아파트에 대한 불신’을 씻기 위한 취지에서 태어났지만 파급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아파트는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집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시범아파트의 성공으로 민간 업체들이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시범아파트가 들어선 후 여의도 개발계획도 착착 진행됐다. 1975년, 국회의사당이 준공됐고 KBS 제2방송국(당시 동양방송)은 1980년 문을 열었다. 1979년에는 15층 규모의 증권거래소 건물이 완성되면서 여의도는 금융 중심지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야간인구 4만 명, 주간인구 18만 명으로 북적이는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1970년대의 구상은 2009년 현재 거의 목표치에 도달했다. 여의도동에는 2008년 기준으로 1만1699가구, 3만2591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여의도는 최근 ‘제2신시가지’로의 비상을 꿈꾼다. 서울시에서 지난 1월 한강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한강공공성회복선언’을 발표하면서 여의도를 전략 정비구역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여의도공원 동쪽으로 시범, 삼부, 삼익아파트 등 11개 단지 6327가구가 재건축 대상이 됐다. 2010년 이후에는 새로 건립되는 재건축 아파트들로 여의도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을 것으로 기대된다.
(12) 고급 민영아파트 시대를 연 압구정현대아파트
1970년대 초반 반포와 잠실에 공공주택 단지들이 조성될 무렵 지금의 한남대교인 ‘제3한강교’ 남단 압구정에서는 중대형 위주의 고급 민영아파트 단지 건립이 추진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모사(謀士) 한명회가 노년을 보낸 정자에서 유래한 압구정은 개발시대 이전에는 주변이 대부분 과수원과 채소밭이었다. 아파트 단지로 지정됐던 압구정동도 한강변 모래밭으로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를 공사하면서 외국에서 수입한 장비를 보관하기 위해 확보해 두었던 땅이었다. 하지만 제3한강교가 놓이면서 압구정 일대는 강남의 노른자위 땅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시공사인 현대건설 이름이 붙은 대규모 민영아파트인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탄생은 제3한강교라는 기반시설과 더불어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이 사업을 총괄했던 현대산업개발(옛 한국도시개발-현대건설 주택사업부를 모태로 설립된 주택전문 건설사)의 30년 사사(社史)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건립에 앞서 정부의 영동지구 개발촉진지구 선정이 있었다. 1972년 정부가 ‘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해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 1호로 지정했다. ‘영동 아파트지구 개발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강남 일대에 본격적인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75년에 강남구가 탄생하고 1976년에는 반포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 1973년 5만30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78년에는 21만6000여명으로 증가했다. 이에 공동주택 건설과 함께 민간업체에 의한 아파트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75년 4월, 제1차 사업이 시작됐다. 현대건설은 2년 전 서빙고아파트 건립에서 자신감을 얻어 본격적으로 주택 건립 사업에 뛰어 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주택사업부를 확대 발전시켜 1976년 3월, 현대산업개발의 전신(前身)인 한국도시개발을 설립했다. 이에 따라 1~3차 사업까지는 현대건설이 조성을 맡았고 4~14차는 현대산업개발이 사업을 주도하게 됐다. 1,2차 단지는 교통이 불편하고 기반시설이 부족한데다 홍보도 잘 되지 않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건설’이라는 브랜드와 강남 아파트 열기를 타고 압구정으로 중산층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7차 단지까지 입주가 끝난 압구정 현대는 이미 ‘명품’ 아파트로 명성을 떨쳤다. 1977년에는 현대그룹 계열 직원에게 공급하기 위해 건립한 아파트를 사회 고위층에게 특혜 분양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현대아파트가 성공하자 압구정동 주변에는 라이프주택을 비롯해 한양과 우성, 삼익주택, 삼호, 미성 등 다른 건설사들도 잇따라 아파트를 건설했다. 이는 강남 아파트에 대한 투기 바람이 몰고온 현상이기도 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87년 4월 14차까지 총 6148가구의 대단지로 조성됐다. 주택공사가 건립했던 잠실이나 반포와 달리 중대형 면적이 많아 명실공히 중ㆍ상류층을 위한 대단지 고급 아파트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민간이 건립한 최대 고급 단지라는 것 외에 건축 기술 측면에서도 얘기할 사안이 많다. 1970년대엔 15층 아파트가 드물었다. 첨단 건축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고층 아파트를 건립하기 위해 새로운 설계와 구조, 시공기술을 모두 동원했다. 이런 공법들은 그 뒤 다른 건설사들이 모방해 한동안 아파트 건축 기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현대산업개발은 30년 사사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아파트 시공에서 (그 때까지)국내 보편적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 라멘 구조에서 탈피해 무량판(FLAT-SLAB)과 조립식(PRE-FAB) 구조 등 선진공법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인원 감축 작업의 표준화를 기하고 과학적 공정관리를 통해 낭비 요소를 제거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인근 중개업소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평면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 건립된 아파트에 비해서는 효율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별로 없다. 가운데 큰 거실이 있고 침실과 주방이 주변에 배치됐다. 면적이 클 수록 침실 수가 많다. 가장 나중에 입주한 단지도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내부와 외부가 낡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주민은 내부를 리모델링해 살고 있다. 지금도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많은 상류층이 거주하는 대표 단지로 꼽힌다. 아파트 단지들이 조성된 이후 들어선 백화점과 학교, 행정기관 등 각종 편의시설들은 ‘압구정 현대’의 가치를 더 높였다. 기업인과 교수, 고위직 관리, 법조인, 유명 연예인이 오랜 기간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 이유다. 최근 서울시는 한강변 개발 계획의 하나로 압구정 일대를 전략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시가 요구하는 일정 규모의 땅을 기부 채납하면 50층 이상 초고층 아파트로 재건축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기부 채납 비율을 놓고 시와 주민 간에 시각 차이가 워낙 커 언제 재건축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잠재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면적에 따라 10억~30억원에 달하는 현재 시세에 이미 반영돼 있다.
(13) 서민을 위한 맞춤형아파트 상계주공아파트
1989년 겨울. 4년 전부터 조성된 상계동 신시가지 한가운데 높이 솟은 아파트를 보며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분명 아파트가 4가구 들어가야 할 자리인 16~18층 사이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고층 아파트의 뻥 뚫린 빈 공간은 보기만 해도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이 아파트는 당시 서울에서 최고 높이인 25층으로 건립된 상계 주공4단지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를 설계한 건축가 조성룡씨는 "건물이 너무 높아 고층 주민들이 자칫 바깥과 단절될 수 있다"며 중간 휴식공간을 만들었다. 그 때까지 우리나라 건축사에 없었던 첫 시도였다. 주민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에 나가는 대신 공중 휴식공간에서 주변 경관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이 공간을 놀이터 삼아 뛰놀았다. 그러나 이 특별한 공간은 벽을 타고 울리는 소음과 진동 때문에 이웃들이 불만을 제기해 나중에 폐쇄됐다.
상계주공아파트(16개단지 4만224가구)는 1985년 11월 30일부터 1989년 12월에 걸쳐 조성됐다. 제5차, 6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저소득층 대상 주택을 공급하는 차원에서 건설된 것으로, 이전까지의 '아파트'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공중에 휴식공간을 두는 등 특이한 모양이었고 소비자 맞춤형 인테리어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새로운 주택 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혁신적인 시도가 돋보인 단지다. 일단 외형부터 달랐다. 판으로 찍어낸 듯한 네모 반듯한 주동(아파트 건물) 외에 Y자와 U자, V자, L자 등 다양한 건물을 지형에 맞게 배치했다. 12~15층 내외에 머물던 아파트 높이도 최고 25층으로 훌쩍 높아졌다. 다양한 외형에 걸맞게 평형 배치에서도 '믹싱' 개념을 도입했다. 29.7~82.5㎡(9~25평)으로 구성된 각 가구를 한 동에 섞어 넣었다. 최근 분양하는 아파트에서 선보이는 '부모-자녀 세대가 같이 살 수 있는 2세대형' 아파트의 원조도 상계 주공아파트다. 아래층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윗층은 자녀와 부모가 함께 쓰는 복층형, 조부모가 따로 쓸 수 있는 별도의 현관과 간이부엌, 욕실을 설치한 이웃거주형 등이다. '3대가족형'아파트로 불리는 이 아파트는 조부모, 부모, 자녀 3대가 한 곳에 살아 주택 수요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의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설계로 호응을 얻었다. 또 소비자의 필요를 배려한 맞춤형 아파트를 지향했다. 큰 방과 작은방, 거실과 방 사이에 이동식칸막이를 움직이면 아이가 생기거나 손님이 방문했을 때 방 크기를 쉽게 조정할 수 있었다.
4만 가구 규모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신시가지가 조성되기 전 가옥 526채, 공장 171곳과 비닐하우스 2912건 등이 들어서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도심지 재개발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터라 원주민 반발이 컸다. 택지매수를 끝내고 나니 기반공사가 막막했다.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으로 둘러싸인 마들평야(도봉구 상계동 창동 월계동 일원 330만㎡)는 중랑천보다 2m가 낮아 비가 오면 어김없이 잠겼다. 아파트를 세울 단단한 지반을 만들기 위해 35만㎡의 흙이 들어갔다. 연인원 1260만 명이 철근 11만톤, 시멘트 500만포, 벽돌 3억2000만장을 날랐다. 신도시급인 과천(1만3522호), 개포(1만5710호)의 2배가 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 중 견본주택(모델하우스)을 처음으로 연 곳도 바로 상계지구다. 보상과 택지매수를 마치고, 기반공사를 시작하고 보니 주택경기가 침체돼 미분양이 염려됐다. 주택공사는 1214㎡(368평)규모의 대형 모델하우스를 짓고 분양 홍보영화까지 제작했다. 최근에는 분양단지마다 견본주택을 짓고 TV광고를 만드는 일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차 분양분인 4046가구는 1만8758명이 신청해 경쟁률이 4.6대1까지 올라갔다. 지금은 입주한지 20년이 넘은 중년단지지만 상계주공아파트에서는 아직도 주민 자치 활동이 활발하다. 또 인근에 뉴타운이 들어서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고 있다. 단독주택과 무허가 건물, 연립다세대가 밀집한 노원구 상계3,4동 일대 64만7578㎡가 3차 뉴타운으로 지정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불암산과 수락산 사이에 위치한 상계뉴타운에는 2016년까지 자연과 어우러지는 테라스하우스와 타운하우스, 복합 고층건물 등 8600가구가 건립된다. 현재 단독주택지로 단절된 수락산과 불암산을 잇는 녹지축이 새로 만들어지고 복개도로로 쓰이는 당현천 물길도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된다. 리모델링 이야기도 솔솔 새어나온다. 상계신시가지 리모델링과 상계뉴타운 조성사업이 끝나면 다시한번 상계지구는 새로운 시가지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14) 현상공모를 통해 설계된 선수촌아파트
1983년, 우리나라 공동주택 설계 역사에 의미 있는 이벤트가 열렸다. 서울시가 1986년 열리는 아시안게임 기간 중 선수와 코치, 심판 등 참가자들이 묵을 아파트 단지 조성을 위한 국제현상설계공모를 실시한 것이다. 개인이 짓는 단독 건축물이 아닌 일반 아파트를 대상으로 현상설계를 하기로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시도였다. 공모 결과 국내에서 26점, 재외교포와 외국인, 내국인과 외국인 공동 작품 7점을 합쳐 모두 33개 설계안이 출품됐다. 치열한 경쟁 끝에 조성룡과 문정일씨가 공동 설계한 작품이 최종 당선됐다. 이 설계안은 ‘ㄷ’자형 단지 배치와 주민들의 공동생활 공간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국제현상설계를 거쳐 1986년 5월 잠실 종합운동장 인근에 그 모습을 드러낸 아시아선수촌아파트는 이전에 나온 단지와 완전히 달랐다. 서울시가 발행한 <서울 20세기 생활문화변천사>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의 주택사적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보행자와 차도의 분리와 함께 건물의 1층을 빈 공간으로 띄워서(이를 필로티 구조라고 한다) 주민들이 자유롭게 공동생활 공간 사이를 왕래할 수 있게 해 주는 등 단지 내에서 이웃과의 공동생활을 최대한 고려했다.(중략) 이는 단기계획과 건축계획의 일체화, 일상생활동선과 공동생활공간의 유기적 연계를 통한 공간이용의 활성화 등을 보여준 사례로 현상설계의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례였다.”
‘ㄷ’ 자 형태의 2~3개 주거동 가운데 부분은 마당의 개념으로, 주차장 뿐 아니라 입주민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특히 필로티 구조는 일반 아파트의 단점인 주민간 단절을 극복하는 장치다. 1층 빈 공간을 통해 주민들이 주거동 사이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 공동생활의 활성화를 유도한 것이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는 9,12,15,18층, 전용면적 99~178㎡의 다양한 주택형으로 구성돼 있다. 총 1356가구로 대단지에 속한다. 지금도 개발 호재가 많은 송파구 잠실 역세권에 위치해 있는데다 관리도 잘 돼 있어 15억~26억원을 호가한다. 현상설계를 통한 아시아선수촌아파트의 성과는 올림픽선수촌아파트로 이어져 더욱 발전한 모습으로 계승됐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 국제현상설계에는 국내 건축가 30명을 포함해 총 39개 작품이 출품됐다. 당선작은 황일인과 우규승씨가 공동설계한 작품으로 건물을 방사형으로 배치한 것이 눈길을 끈다. 위에서 항공사진을 찍으면 거미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남향이 좋다는 기존 관념을 깨고 조망권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것이다. 중심부에는 저층이 자리잡고 외곽으로 나갈수록 층이 높아지는 점도 특이하다. 6층부터 24층까지 일정한 스카이라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같은 설계는 각 세대의 채광 효과를 높이고 주민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효과를 준다. 중앙에는 상가 시설과 광장을 배치해 공동생활의 편의성을 높였다. 순환도로가 단지 외곽을 감싸고 있으며 주민들이 주거동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동선을 설계한 것도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단지와 비교해 용적률이 낮은데다 한강물을 이용한 단지 내 하천을 비롯해 산책로와 자전거 길 등 쾌적한 환경을 조성한 점 역시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 받는다. 이런 장점으로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1988년 완공됐을 때 전문가의 찬사가 쏟아졌다. 1998년 모 일간지에서 건축가 등 전문가들의 설문 조사로 선정한, 해방 후 건립된 ‘걸작 건축물 20선’에서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설계 뿐 아니라 규모 측면에서 선배 격인 아시아선수촌아파트를 뛰어 넘는다.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이 단지는 총 122개동, 5540가구에 달한다. 1가구당 평균 4명이 거주한다고 할 때 2만2000명 이상이 몰려 살고 있는 셈이다. 서울 도심에서는 최근 재건축해 입주를 끝낸 잠실 파크리오(옛 잠실 시영아파트) 다음으로 큰 단지로 꼽힌다. 82~165㎡ 9개 주택형으로 구성돼 있으며 시세는 6억~18억원을 호가한다. 두 선수촌 아파트는 주택공사나 SH공사 등 공공기관도 독창적인 공동주택 단지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실제로 선수촌 아파트 이후 중랑구 신내지구 9단지와 강서구 가양지구 2단지, 송파구 거여지구 4단지 등 서민에게 공급되는 소형 위주의 아파트 단지들까지도 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조성됐다. 두 선수촌 아파트는 준공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송파구, 아니 서울의 대표적인 아파트 단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가장 살고 싶은 아파트를 꼽으라면 여전히 두 곳은 상위권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재건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이것이 실현되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남이장군사당-용문동107
남이(南怡.1441~1468). 본관은 의령.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거되었다. 할아버지는 영의정부사 재(在), 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휘(暉)이며, 어머니는 정선공주(貞善公主:태종의 4녀)이다. 좌의정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1457년(세조 3)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 속에서 여러 무직을 역임했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한 뒤 1467년 포천·영평(永平)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했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대장이 되어 구성군(龜城君) 준(浚)의 지휘 아래 진압에 참여했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서북변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토벌에 참여하여 이만주(李滿住)를 죽여 2등군공(二等軍功)을 받았으며, 그 뒤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으며, 이어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이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세력을 제거할 때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1468년 예종 즉위 후 역모를 꾀한다는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국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그 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창녕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문사(龍門祠)·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 한강진나루터-한남동 524-3
'강나루를 건너서/ 밀발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 '나그네'다.
강나루! 서울의 한강에는 나루터가 몇 곳이나 있었을까. 불과 70~80여 년 전만 해도 나룻배로 나그네와 짐 그리고 가죽을 싣고 한강을 건너던 광나루를 비롯해 삼밭나루(三田渡), 두미포(豆尾浦) 나루, 한강진(漢江鎭) 나루, 동재기나루(銅雀津), 노들나루(鷺梁津), 삼개(麻浦)나루, 양화진(梁花津), 염창(鹽倉)나루와 행주나루 등 10여 곳이 있었다. 그러나 한강 위에 현대식 다리가 놓이기 시작하면서 그런 정경은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그런데 한강에 유람선이 뜨면서 새로 생겨난 나루터가 여의나루, 거북선 나루(이촌동), 둑섬나루와 잠실나루가 생겼다. 옛날 나루터는 한강을 건너기 위한 나루, 즉 한강의 흐름에 횡적(橫的)이었던데 반해 오늘날 유람선용 나루는 한강을 따라 오가는 종적(從的)인 나루일 뿐이다.
옛날에도 한강의 물흐름을 따라 소금과 세미를 운반하던 종적인 나루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소금과 건어물을 실은 배가 북한강은 화천 인제까지, 또 남한강은 영월 정선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구한말 영국의 여류 여행가 비숍여사도 사람 힘으로 노를 젓는 나룻배를 타고 단양 영춘을 지나 영월까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절경에 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나루터! 이 나루터에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고, 물산과 먹거리가 가득 쌓이니 언제나 시끌벅쩍해 늘 파시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루터가 있는 곳에는 의례히 술집이 있었고, 술집이 있으니 여인네의 노래소리가 끊이질 않았을 뿐더러, 요염을 떠는 아낙네의 자지러진 웃음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먼길 떠나는 나그네의 단봇짐을 부여잡고 이별의 한숨과 눈물 또한 그칠 날이 없었던 한강의 나루터는 도대체 어디쯤일까? 그 가운데 한강진(漢江鎭)나루는 오늘날 한남동 단국대학교 정문 어귀와 순천향병원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형이 마치 오메가 모양으로 되어 있어 배를 갖다 대기에는 천혜의 나루터였다. 게다가 목멱산(南山)자락 고개 너머에는 조선조 때 수도방위와 왕실호위를 맡아보던 어영청(御營廳)의 분영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는지라 나루터 이름도 한강진(漢江鎭)나루였고, 고개 이름(오늘날 약수동과 한남동 사이에 있는 고개)도 '배를 타러가는 고개'라는 뜻의 '배터고개'라 불렀다. 이 '배터고개'가 '배티고개-버티고개'로 될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는 6호선 지하철 역이름도 버티고개역이요, 한강진역이라 이름하였다. 한강진나루는 옛날 한남동(순천향병원 앞)에서 사평나루(沙坪津:강남구 신사동)를 잇는, 군사적으로나 물류면으로 매우 중요한 나루터였다. 특히 삼남지방(경기ㆍ충청, 호남, 영남)의 물산과 많은 보부상, 선비, 나그네 할 것 없이 강남의 역삼동과 양재역, 말죽거리에서 몸을 풀고 건너오고 갔던 영고성쇠(영고성쇠)로 얼룩진 나루터였다. 그러나 근대화의 물결에 철길이 나루터 앞을 가로막고 철마가 종적으로 내닫고, 또 한남대교가 놓이면서 다리 위로 자동차의 물결이 횡적으로 달리고 있다. 한강진나루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도 나루터 자리엔 많은 사람과 물류가 흐르고 있으니 역시 나루터는 나루터인가 보다. 세월은 가고 나루터는 말이 없다.
▲ 제천정(濟川亭)-한남동 805
한남동과 보광동 사이 아래 기슭에는 조선시대의 제천정이 있었다. 제천정 터전의 정자는 모두 나라의 소유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이곳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4월 26일 이일의 상주 패전 보고를 접한 조정은 서둘러 도성수비 대책을 수립하고, 병조(兵曺)에서는 도성 안의 군사를 징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정안에서는 한양을 지킬 것인가? 피난할 것인가를 두고 중신들 사이에서 갑을박론이 벌어졌다. 결국 대놓고 도망가자는 주장을 하지 못한 피난파가 수성파에게 꼬리를 내려 한양 사수가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 우의정 이양원을 유도대장, 이전을 한성우위장, 변언수를 한성좌위장, 박충간을 한양순찰사로 각기 임명하고 사수작전을 지휘하게 하였다. 하지만, 한양의 성곽을 지키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한양의 성곽은 전투용이 아니라 왕도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도성으로써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방어전투를 위한 성채로서는 길이가 너무 길었다. 한양성은 세종 때 증축 되어 전체 길이가 27km가 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는 평균 12m정도였다. 적과 싸울 수 있는 성가퀴는 4,664개소로 각 성가퀴에 활을 쏘는 사수 1명, 조수 1명, 예비병 1명 등 3명씩의 군사를 배치해도 모두 1만 4,000명의 병력이 필요했다.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어쨌든...그러던 중 신립의 충주패전 보고가 올라오자, 지금까지 결사항전, 죽음으로 한성을 지켜야 한다고 외쳐 되던 사람들도 별 수 없었던지 슬그머니 피난파의 손을 들어 도성수비를 포기하고, 선조가 직접 피난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시간을 벌 요량으로 한강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도원수 김명원은 제천정(보광동)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순찰사에게도 한강 방어전에 동참하라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이제 막 무과에 급제한 신임 무관 50여 명과 군사 천 여 명을 한강의 도섭(徒涉)이 가능한 지역에 배치시킨 다음, 나룻배를 모두 강 북안에 계류시켜 일본군의 도하공격을 대비하게 하였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이양원과 김명원에게 도성 및 한강 방어를 일임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5월 2일 경 일본군 제1번대와 제2번대가 각각 한강 동쪽과 남쪽에서부터 도착하였다. 김명원은 적의 세력을 보고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무기를 강물에 밀어 넣으라고 명령한 뒤 자신은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이 때 종사관 심우정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총지휘관인 김명원이 전선을 이탈하자 휘하의 군사들도 전의를 상실하고 부대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강원도 조방장 원호의 군사가 홀로 여주 북쪽의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쪽의 일본군들은 쉽게 도하를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 때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이 불가항력을 자인하고 원호의 군사에게 강원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토는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이 없자 병사 한 명을 시켜 북안에 매여 있는 나룻배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타고 수 명이 도하한 다음, 다시 여러 척의 나룻배를 남안으로 가져가 차례로 도하를 완료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은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쉽게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유도대장 이양원은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한양 방어를 포기하고 양주로 퇴각하였다. 이 무렵 충주-양근-용진을 거쳐 북상한 일본군 1번대는 북한강을 건너 5월 3일에 동대문 방면으로 진입하여 텅 빈 도성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이 때 일본군 제 2번대도 남대문으로 입성하여 도성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 효창공원-효창동 255
용산에 자리한 효창원(孝昌園)은 정조의 장자로 세자책봉까지 받았으나 5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분묘(墳墓)의 땅이었다. 원래는 묘역이 광활하여 송림이 울창한 일대승지(一大勝地)였으며 같은 묘역 안에 정조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생모이기도 한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묘, 순조의 후궁인 숙의(淑儀) 박씨(朴氏)의 묘, 숙의 박씨의 소생인 영창옹주의 묘 등이 같이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 효창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인천에 최초로 상륙한 대도여단(大島旅團) 3,000명의 병력이 효창원 앞 송림안, 원래 만리창이 있던 곳에 야영하면서 부터였다. 경성부가 효창원의 일부 8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년 6월이었고, 순환도로, 공동변소 등을 시설하면서 일반인의 이용을 허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 해 8월부터의 일이다. 효창공원에는 1919년 미국인 댄트라가 설계한 9홀의 코오스가 최초로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패망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상기 묘소를 모두 서삼릉(西三稜)(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경내로 천장(遷葬)함으로써 효창원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대망의 조국광복과 더불어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선생은 그 주도하에 조국광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봉창(李奉昌.1900∼1932), 윤봉길(尹奉吉.1908∼1932), 백정기(白貞基.1896∼1936) 의사의 유해를 고국땅으로 모시어 1946년 7월 효창공원의 중심지(옛 문효세자 묘터)에 국민장으로 안장함과 아울러 안중근(安重根)(1879∼1910)의사의 허묘(虛墓)를 나란히 모셨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하신 임시정부 의장 및 주석 이동녕(李東寧)(1869∼1940)선생과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 차이석(車利錫)(1881∼1945)선생의 유해와 군무부장(軍務部長)을 역임하고 환국후 서거하신 조성환(曺成煥)(1875∼1945)선생을 공원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임시정부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선생이 민족통일의 한을 품고 흉탄에 쓰러지자 국민장으로 공원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가 선열묘역으로 화하였다. 그러나 특히 김구선생의 묘소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 등에서 이견을 보이던 이승만 영도하의 당시 집권세력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었고, 그리하여 선열묘소를 교외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不斷)하였는데, 그 일단으로 1959년, 봄부터 제 2회 아세아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묘소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을 추진하였다. 이에 독립투사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이 중심이 되어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 결성되고 언론사를 비롯한 각계의 여론이 비등하여 묘소이전은 보류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되었다. 이러는 동안 6·25동란으로 인한 자연파손도 있고 하여 효창공원, 특히 선열묘소 일대의 훼손은 극에 달한 형편이었는데, 5·16혁명 이후 또다시 선열묘소의 서오릉(西五陵)(고양군 신도읍 용두리) 부근 이전이 추진되었으나 역시 유족과 사회각층의 반대로 보류되었다. 이같은 경로를 거쳐 1972년 서울시에서 효창공원 조경사업(묘지진입로 및 석계단설치), 외곽주변정비, 수림조성 등)을 10개년 계획으로 개시하는 동시에 일반인의 공원출입이 금지되었으며(이는 1981년 6월 유료개방 때까지 계속), 1977년 7월에는 건설부에서 효창공원으로 고시하였다.
1978년 3월에 이르러 효창공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孝昌公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발기 한국전통문화사상연구소장(韓國傳統文化思想硏究所長) 김재홍(金在鴻), 회장 곽상훈(郭尙勳))가 창립되고, 이 회의 주관으로 다음해부터 임시정부수립일인 4월 13일을 기해 7위선열합동추모제(7位先烈合同追慕祭)가 매년 거행되게 되었다. 1984년 12월에는 서울시의 협조로 각 묘소 앞의 묘표석(墓表石)을 신비(新碑)로 개수하였다. 1988년 12월부터는 그간 사당건립(祠堂建立)등을 꾸준히 청원한 효창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孝昌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의 활동과 이를 적극 수용한 국가 최고 영도층의 지원으로 효창공원정비공사가 정부주도하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의열사(義烈祠)(사당, 1989년 11월) 및 창열문 (彰烈門)(정문)이 건립되고 묘역확장(墓域擴張)과 정비가 대충 마무리되게 되었으며 1989년 6월에는 사적 제 330호로 지정되었다. 앞으로 1991년 6월 기한으로 묘역원장개수(墓域垣檣改修), 의열광장조성 (義烈廣場造成)(의열사 앞) 기념관건립(白凡先生墓所 남쪽) 등을 완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선열묘소 외 공원관리소 , 어린이놀이터, 정구장 등 편의시설과 북한반공투쟁사위령탑(北韓反共鬪爭士慰靈塔), 원효대사동상(元曉大師銅像), 대한노인회중앙복지회관(大韓老人會中央福祉會館)등이 자리 잡고 있다.
▲ 전환국-원효로 체신공무원터
1883년(고종20) 8월 7일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폐기관. 개항 이후 고종은 종래에 통용되어오던 상평통보로 대표되는 동전 이외에 금전·은전과 지폐를 동시에 유통시킴으로써 근대적 본위화폐제도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면한 재정난 타개책으로 1883년 악화인 당오전을 발행하게 되었다. 당오전 주조 시 처음에는 종래와 같이 여러 정부기관에 의뢰하여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주출(鑄出)되었으나 이러한 임시적 주전소만으로는 계속 다량의 주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화폐를 발행할 수 없었으므로 별도의 국(局)을 설치했다. 설립 당시에는 종로구 원서동 소재의 대가(大家)를 전환국 건물로 사용했다고 전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885년 전환국 건물을 현재의 남대문국민학교의 북쪽으로 생각되는 당시의 선혜청(宣惠廳) 별창(別倉) 자리에 신축했는데, 이것이 경성전환국이다. 1892년 전환국을 서울에서 지금의 인천여자고등학교 자리로 옮겼다가, 1900년 다시 용산의 군자감(軍資監) 창고(지금의 용산구 원효로 근처)로 옮겼다. 전환국 설립 초에는 민태호가 관리, 이중칠이 총판을 맡았다가 1884년 묄렌도르프가 맡았으나 곧 이조연으로 바뀌었고, 묄렌도르프는 공조참판이 되어 경성전환국 신축에 힘썼다. 경성전환국은 연와조 건물로서 모두 3동으로 되어 있었는데, 제1동은 기관실, 제2동은 지금실·조각소·평량소, 제3동은 용해·신연·극인·분석공장으로 사용되었다. 독일에서 주조에 필요한 압인기(壓印機) 3대 등 조폐기계를 수입한 이후, 1884년(고종 21)에 '을유년'(乙酉年)이라는 연기(年期)가 표시된 1냥 은화와 5문 동화(五文銅貨)를 시주(始鑄)했고, 1886년(고종 23)에는 '개국 495년'(開國四百九十五年)이라는 연기가 표시된 금화·은화·동화 등 15종의 압인주화(壓印鑄貨)를 시주했다. 그러나 경성전환국은 대체로 시주화를 주조하는 데 그치고 신식기계를 이용한 다량의 당오전을 주조하지는 않았다. 1891년 은본위제를 표방하는 '신식화폐조례'가 반포되면서 이에 필요한 화폐주조를 위해 1892년 인천전환국이 설립되어 5냥 은화 1만 9,923원을 비롯하여 1냥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 등을 소량 시주했다. 그러나 인천전환국은 그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자 그에 관련된 일본인들이 철수함으로써 주조사업이 원활하지 못했다. 또한 신식화폐조례도 본위화폐의 주조가 적은 가운데 사실상 공문(空文)에 그치고 말았다.
1894년 일본과 동일한 은본위제를 표방한 '신식화폐발행장정'이 선포되면서 본위화폐인 5냥 은화의 주조가 사라지고 주조이익이 큰 보조화폐인 백동화가 발행되었다. 1900년 용산구 원효로에 용산전환국이 설립되었으며, 내부시설로 화폐주조시설 외에 우표인쇄를 위해 설치된 농상공부 인쇄소를 흡수함으로써 지폐 제조에 필요한 제지고와 인쇄소가 설치되었다. 사실상 전환국이 대량의 화폐를 발행하여 실제의 유통화폐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백동화를 대량으로 주조·발행한 용산전환국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전에는 주로 시주화의 제조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1904년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賈田種太郞]는 전환국에서 백동화를 남주한 것이 화폐제도 문란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는 구실 아래, 고종의 재가를 얻어 백동화의 주조를 정지하고 전환국을 폐지했으며, 전환국 소유의 기계·물품 등을 탁지부에서 조검(照檢)·보관하도록 함으로써 조선 자체의 조폐시설은 없어졌다.
▲ 별난물건박물관-용산동1가 -8번지 용산전쟁기념관 내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는 전세계의 별난 물건과 신기한 과학 완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이색 체험 박물관 "별난물건박물관"(www.funique.com 관장 김덕연)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일반 성인들의 감각까지 눈뜨게 하는 창의력 발전소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2005년 1월 개관한 별난물건박물관을 만든 ㈜밸루션이라는 업체는 본래 소프트웨어 및 콘텐츠 개발에 주력 하였으나 직원들의 동기부여와 즐거운 직장 분위기를 위해 하나 둘씩 모으게 된 별난 물건들을 여러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소박한 희망으로 박물관을 열게 되었다. 별난물건박물관은 약 300여 가지의 전시물들로 채워져 소리, 빛, 과학, 움직임, 생활의 다섯 가지 테마별로 전 세계 별난 물건들과 신기한 과학 완구들을 전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체험할 수 있으며 정해진 전시물들로 운영되는 일반 박물관과는 달리 매달 전시물이 추가, 교체되는 이색 체험 박물관이다. 2005년 12월에 사설 박물관으로는 최초로 부산 해운대에 지방 상설관을 개관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던(2007년 4월까지 운영) 별난물건박물관은, 2006년 4월에 외국인들과 함께 영어도 체험할 수 있는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관을 개관하여 계속해서 폭넓은 전시의 장을 펼치고 있다. 지방 관람객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기를 자청하며, ‘찾아가는 박물관’을 모토로 2007년 5월 대구우방타워 특별전시실에서도 전시를 선보이게 된다. 2006년 2월 확장 이전한 별난물건박물관 서울관(용산 전쟁기념관 내)은 지하철 4,6호선 삼각지역 12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 1호선 남영역에서는 도보로 10분 거리. 또한, 관람시간은 10:00부터 18:00까지 이용 가능하다. 관람료는 초등학생 이상이 8,000원. 유아 및 미취학 아동(36개월 이상) 7,000원.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에 한하여 10% 할인하며 전쟁기념관 내의 또 다른 체험 전시인 ‘롤링볼뮤지엄’과 할인 통합권 발행, 전쟁기념관 관람객에게 관람료 할인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문의) 02-792-8500
▲ 국립중앙박물관-용산동6가 168-6번지
1909년 - 창경궁 제실박물관.
1945년 - 조선총독부에서 인수, 경복궁 국립박물관.
1945년 - 1953년 한국전쟁 부산 광복동으로 동안에 7번 이동.
1953년 - 1955년 남산분관.
1955년 - 1972년 덕수궁 석조전 동관
1972년 - 1986년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1986년 - 1996년 경복궁 구 중앙청건물 (현재의 흥례문 자리).
1996년 - 2004년 광화문 왼쪽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2005년 10월 28일 - 현재 위치인 용산동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
▲ 삼성미술관 리움-한남2동 747 -18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자리잡은 리움미술관은 한국의 국보급 전통 미술과 근현대미술, 세계적인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이다. 이러한 내부 콘텐츠 외에도 세계적 건축가들이 지어낸 미술관 건축물은 리움미술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미술관 건축은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의 작품이며, 내부 미술품뿐만 아니라 건축 자체도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이러한 시도는 한국 미술관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도 들린다. 전통적 예술과 현대적 건축의 만남은 하나의 명품 미술관을 만들어냈다. 미술관은 크게 부지의 가장 높은 위치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뮤지엄1(고미술관)’, 경사면의 대지를 타고 상승하는 ‘뮤지엄2(현대미술관)’, 대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의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각 건축물은 건축가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재료와 혁신적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마리오 보타는 흙과 불을 상징하는 테라코타 타일로 한국 도자기를 빗대 고미술관의 견고함을 형상화했다. 장 누벨은 세계 최초로 녹슨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를 사용해 현대 미술의 첨단성을 표현했다. 렘 쿨하스 역시 최초로 시도된 재료인 블랙 콘크리트를 사용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미래적인 건축 공간을 구현했다. 리움미술관은 또 첨단 미술관이기도 하다. ‘디지털 전시가이드’(PDA)는 리움미술관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최첨단 시스템으로, 관람객이 감상하는 작품마다 자동감지 시스템에 의해 해당 작품에 대한 정보가 화면과 헤드폰을 통해 자동으로 제공된다. 당초 하루 관람객을 100명으로 제한했던 미술관측은 11월에는 200명으로 늘린 데 이어 이달 들어서는 300명으로 다시 늘렸다. 이와 함께 일반인들의 관람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인터넷 예약제를 도입하고 관람시간도 1시간 연장했다. 미술관은 내년 초까지 무료로 운영되는데 올해 예약은 이미 끝난 상태이며 내년에 유료로 전환한 이후에도 예약제는 계속될 예정이다. 따라서 지금 서둘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내년부터는 예약은 물론이고 돈까지 지불하며 관람해야 한다. ‘하늘의 별따기’로 표현되는 리움미술관 구경.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1. 고려 금동대탑등 한국미술품의 세계로
가장 높게 위치해 미술관의 대표 건물격인 ‘뮤지엄1’의 직육면체와 역원추형 형태는 서로 대비되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이 건축물의 단순하면서 견고한 형태는 전통 고미술품의 가치를 잘 드러낸다. 설계자인 마리오 보타는 한국의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아 외벽을 흙과 불로 만들어지는 테라코타 벽돌로 처리했다. 미술관 건축이 과거에 종교건축이 했던 역할, 즉 경건함과 숭고함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역설한 마리오 보타는 자신의 건축 철학을 유감없이 형상화한 셈이다.
내부적으로 보면 직육면체 건물이 전시실 역할을 하며 둥근 건물은 원형 홀 공간(로툰다)으로 층과 층을 연결하는 계단통로가 된다. 천장의 둥근 창문을 통해 자연광은 지하의 로비까지 전달된다. 어두운 전시장 내부와 밝고 환한 연결 통로는 흑백의 대비와 조화를 만들어낸다. 마리오 보타는 이에 대해 “관람객들이 어두운 전시장 안에서는 작품에만 집중하고,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는 원형 통로에서는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한다.
각 유물은 전시장 안의 벽면과 천장에 고정돼 있는 독립 케이스 안에 담겨 있다. 이 독립장 안에 따로 보관된 유물들은 각자의 조명을 받으며 오랜 세월의 자태를 맘껏 뽐낸다. 수려한 전통 미술의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전시 방법이 작품 하나하나를 더욱 고급스럽게 만든다는 느낌이다. 이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도자기, 불화, 금속공예품, 서예 등을 총망라한 시대별 대표작 12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국보 36점과 보물 96점 등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수준작들이다. 지금까지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선보였던 소장품들이 리움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4층 청자, 3층 분청사기와 백자, 2층 고서화, 1층 불교 미술과 금속 공예 순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주자’(국보 133호)를 비롯해 ‘청화백자 매죽문호’(국보 219호), 고려 불화인 ‘아미타삼존도’(국보 218호), 고려의 ‘금동대탑’(국보 213호) 등이 있다.
#2. 백남준·김환기… 국내의 근현대작품 만나볼까
워낙 귀중한 유물이다 보니 미술관측의 관리도 철저하다. 어느 관람객이 작품이 있는 유리벽에 손을 대자 비상벨이 울리면서 출입문이 닫히고 금세 경비원이 달려왔다. 미술관측은 “이런 관리가 관람객에게는 너무 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미술품이 만에 하나 도난당하거나 파손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말했다. 움푹 팬 대지 속에서 온전히 검은 색으로 육중한 바위처럼 형상화된 ‘뮤지엄2’ 건축물은 대지 위로 솟아오른 나무들과 함께 계속 생성되고 있는 현대 예술을 상징하고 있다. 검은색의 녹슨 스테인리스 스틸은 현대적인 세련된 느낌과 함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또 사이사이의 투명 유리는 자유롭게 배치된 전시 박스들과 함께 독특한 건축물, 새로운 모습의 미술관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출신의 장 누벨은 현대적이며 미래를 향한 도시적 감성을 표현해 온 건축가이다. 유리, 철 등의 차가운 재료를 즐겨 사용해 예리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창출하는 장 누벨의 능력은 뮤지엄2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녹이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에 녹을 슬게 한다는 역설적 발상을 구현하기 위해 많은 테스트를 거쳤다. 고미술관인 뮤지엄1의 전시실이 작품에 집중하도록 폐쇄된 공간이었다면, 현대미술관인 뮤지엄2는 바깥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유리 벽면을 통해 가깝게는 뜰의 돌과 나무, 멀게는 서울 도시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미술관 내부와 조화를 이룬다. 뮤지엄2에서는 국내외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중섭, 박수근 등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미술가는 물론 동시대 작가인 김환기, 백남준, 이우환 등과 서도호, 이불 등 최근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돼 있다. 이와 함께 1945년 이후 세계 미술계를 이끌었던 미니멀리즘의 대표 주자인 도널드 저드,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과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마흔 다섯개의 금빛 마릴린’을 비롯해 요셉 보이스, 루이즈 부르주아 등의 작품들, 그리고 매튜 바니, 데미언 허스트 등 동시대 작가의 최근작도 감상할 수 있다. 뮤지엄1에서의 우아하고 경건하기조차 했던 분위기는 이곳에서 180도 바뀌어 현대 미술의 파격적이고 발칙한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다.
#3. 아동교육문화센터에서는 어린이 미술감상 가이드 제공
미술관 입구에 자리한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 는 어린이 교육 및 복지 관련 사업을 맡는다. 이곳의 아동전시실에서는 어린이 눈높이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미술 감상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마련할 계획이다. 오늘날 도시 건축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건축가 렘 쿨하스가 이 건축을 설계했으며 그는 리움미술관 전체를 연출했다. 이 건물은 대지의 경계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유리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건물의 하이라이트는 유리 벽 안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품은 채 진동하고 있는 미래의 공간, ‘블랙박스’다. 블랙박스는 건물 내에서도 완전한 독립 공간을 이룬다. 블랙박스는 이름 그대로 빛이 들어가지 않고 인공적 조작과 통제가 가능한 공간으로, 회화, 조각뿐 아니라 다양한 멀티미디어 작품을 소개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연간 3∼4회의 다양한 기획전과 주제전, 해외교류전이 선보일 예정이다.
▲관람시간=화∼토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
▲교통편=●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에서 도보로 5분 ●지선버스 0014, 0015, 간선버스 110번 이용 한강진역 하차 후 도보로 5분 ●자가용은 한강진역 앞에서 이태원 방향으로 첫번째 골목에서 우회전
▲관람 예약=전화 예약(02-2014-6901)은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만 가능하다. 인터넷 예약은 지난 10일부터 홈페이지(www.leeum.org)를 통해 시작됐다. 예약 가능일자는 예약 당일로부터 2주 이내에서 가능하며 예약 가능 인원은 본인 포함 4명까지이다.
7) 일제하 근대시설
[도로개설과 경성부 개조계획]
한일합방과 함께 수립된 신경성계획은 일본의 식민지배의 명분이었던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경성의 근대도시화 프로젝트였으나, 이는 조선의 역사적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경성의 구조개편은 1913년에 시행된 시구개정사업에서 잘 드러난다. 1914년 시역확장(36.18㎢)으로 면적은 이전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남쪽으로 확장된 서울의 경계는 일본이 전략적으로 개발한 신시가지인 용산을 포함하면서 한강변에 이르렀다. 1907년 일본 황태자의 내한과 함께 본격화된 성벽 철거로 성곽이 도시경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경성은 구조적으로 성곽 내ㆍ외부가 연결되는 통합된 구조로 재편되었다. 1914년 발행된 경성부명세신지도(경성일보 발행)에 일제의 경성개조계획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비록, 전면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지만, 경성부명세신지도에 나타난 도시구조 개편을 살펴보면, 북촌과 남촌의 중심을 안국동과 을지로 3가에 두고 각각 방사형 도로망을 개설한 후 파고다공원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을 통합하는 도시구조 개편을 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조개편은 조선시대 이래 신분질서에 의한 서울의 2분적 공간구조를 민족에 의한 2분적 공간구조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식민도시화 정책의 가시적 성과는 도로정비와 도시기반시설의 구축(상하수도망, 전기, 전차의 보급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는 1910년에 남대문에서 남대문정거장까지에 이르는 도로를 개수한데 이어 1911년에 황금정(현 을지로), 1912년에는 태평통을 준공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황금정은 일본인이 주거주지인 남촌의 주 도로망이 되었으며, 이미 개통된 태평로에서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남북축과 함께 경성 도로망의 기본골격을 이루었다. 이 밖에 대한제국기에 시작되었던 전기 및 대중 교통망의 정비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1898년 황실이 미국인 콜브란(Collbran), 보스트위크(Bostwick)와 공동으로 설립한 한미전기회사가 전기를 공급한 이후, 1898년 서대문-청량리노선이 건설된 이래 1899년 종로-남대문노선, 1901년 남대문-구용산노선과 서대문-남대문노선 그리고 1910년 구용산-신용산이 완공됨으로써 한일합방과 함께 동서·남북축의 대중 교통체계가 구축되었다. 이렇게 구축된 전차노선은 1926년 경성에 처음으로 노선버스가 등장하기까지 주된 교통수단으로 활약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상권과 주거지의 형성과 확장을 주도했고, 전차 운영과 전기공급을 위해 거리에 세워진 전신주는 가로수와 함께 주요간선도로에서 주된 경관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시구개정사업에 의해 신설되거나 정비된 도로망 위에 1913년 시가지건축취체규칙(건축법과 도시계획법의 전신으로 건폐율, 건축선, 건축재료 및 미관과 재해방지 그리고 용도지구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총독부령 제11호>)에 따라 식민지배 관청이 건축되고 가로수가 식재되면서 식민도시의 가로 경관은 일신되었다. 1912년에 완공된 조선은행을 필두로 경성우편국(1915), 경성역(1925), 경성부청(1926)과 조선신궁(1925) 그리고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 세워진 조선총독부(1926)와 함께 새로 조성된 용산 신시가지가 대표적 결과물이다.
[대경성도시계획]
1920년대에 들어 도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행정구역의 확대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동아일보 기사(1922년 11월 14일)에 따르면 이미 경성시 인구가 30만 명에 달했고, 해마다 인구가 늘어 주택이 부족해지면서 교육과 위생이 사회문제로 등장하자 경성부윤 길송(吉松)이 청량리, 왕십리 등을 시찰한 후 향후 행정구역 확대를 위한 기초 자료를 조사키로 하여 그 성과가 1924년 12월 20일 종료되었다. 당시 경성부에는 관민유지로 성립된 경성도시계획연구회가 있었으나 그 역할이 유명무실하자, 경성부가 직접 대경성 건설을 위한 교통량조사, 산업조사, 사회 조사 등을 실시한 것이다. 이들 자료에 기초하여 경성부 전체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도시계획이 1930년에 입안되었다. 이 계획은 1929년을 기점으로 30년 후인 1959년을 목표 년도로 한 장기계획으로 그 내용은 조선공론 1935년 11월호의「국제도시 경성부」에 실렸다. 이 기사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국제도시’라는 명칭이다. 시기는 명확치 않으나 이 계획이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경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경성이 일본이 구상하고 있던 ‘대동아 공영권’의 거점 도시라는 위상을 염두에 두고 설립된 계획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수립된 도시계획은 1934년 공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과 총독부령 제78호에 시행되었다. 경성부가 발표한 시가지 계획에 따르면, 계획구역은 135㎢에 달하였고, 목표년도인 1959년의 계획인구를 110만으로 설정하고, 연이어 ‘가로망과 토지구획정리지구’, ‘지역제’, ‘공원계획’, ‘풍치지구’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동부시가지의 중심으로 설정한 청량리부근은 주거, 상업 및 부분적인 공업지역으로, 왕십리부근은 전원도시적 주택지역과 상업지역 혹은 일부 경공업지역으로, 한강부근은 주택지대, 노량진방면은 주택지대과 수변공원으로 계획하였다. 한편, 영등포 방면은 경부선과 경인선이 여기서 분기되는 지역으로 수운이 편리하고, 한·만·일을 연결하는 항공로가 위치한 이점을 살려 경성의 공장지역으로 개발하고, 마포, 용강 부근의 지역은 영등포 방면과 같이 한강을 끼고 장래 공장지역 혹은 경공업지역으로, 연희면 신촌리 방면의 지역은 주택지대와 일부 공장지역으로, 은평면 방면은 홍제리, 세검정 등 풍치가 좋아 장래 풍치지구로서 보호를 요하고 또 주택지대로써 적합한 토지로 개발할 것을 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이 계획은 경성부는 이미 4대문의 동쪽과 서남쪽으로 확장하고 있는 경성 최초의 장기발전계획인 셈이다. 계획구역이 확정된 후 1936년 12월 26일 총독부고시 제722호로 모두 220개 노선에 달하는 계획가로가 발표되었으며, 이 때에 고시된 가로 및 광장계획은 그 후 1938년 5월 13일과 1939년 9월 18일의 2차에 걸쳐 다소 변경은 되었으나 광복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울 간선도로망의 근간이 되어오고 있다.
[통감부의 시설]
조선이 공식적인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인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설립된 통감부 탁지부에 건축소가 설립됨에 따라, 식민지배의 기반을 구축하는 건축프로젝트가 한일합방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합방 전에 시작된 건축 작업으로는 탁지부 건축소의 공업전습소 본관, 대한의원 본관이 대표적인 예이며, 일본정부에 의한 직접 건축행위로는 통감부와 조선은행 등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배기구의 핵심인 통감부가 남산자락에 고전주의 풍의 목구조의 성관풍 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나, 일본은행 지점으로 건축된 건축 당시의 한국은행은 통감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성관풍 고전주의양식으로 건축되었으나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돌로 마감하여 통감부보다 많은 공력을 기울여 지어졌다는 점이다. 통감부의 건축작업은 건축구법으로 보면 목조건축과 벽돌조 건축으로 대별되는데, 주요 관공서의 경우 건축구법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신고전주의를 근간으로 한 절충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이밖에도 한성사범학교는 물론, 경성청운동공립보통학교와 같은 조선인을 위한 학교 외에도 경성 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 경성서대문고등소학교를 비롯하여 용산중학교, 경성고등여학교 등도 목조로 건축되었다. 특히, 통감부청사 외에도 현존하는 공업전습소 본관 등 목구조건축에도 양식주의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서양의 양식주의 건축을 통해 일본이 서구와 동등한 힘의 실체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동시기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 정책 하에 서양의 양식건축을 추정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경제력과 건축기술로 식민지 조선에 석조 양식건축을 짓는 것이 어려워서, 목조와 조적조로 양식주의 관공서건물을 건축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탁지부청사, 대한의원본관, 평리원 및 한성재판소, 광통관, 공업전습소 본관, 내부청사 등이 있다.
▲ 탁지부청사(1907년, 현무)는 당초 의정부청사로 계획되었으나,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체결로 내각청사가 필요 없게 되자, 용도가 변경되어 탁지부청사로 사용되었다. 중앙의 중정을 중심으로 ‘口’형으로 구성된 2층 벽돌 건축물이지만 외부에 스터코로 마감하여 석조건축물의 외관을 갖추었다. 전면 중앙에는 도움이 위치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 대한의원본관(1908년, 사적 248호)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의원과 경성제국대학 병원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의학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앙의 시계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2층 벽돌 건물이며, 시계탑 디자인이 네오바로크양식을 갖추고 있다.
▲ 평리원(平理院) 및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1908년, 현 무)
대한제국의 최고재판소로 계획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복심법원과 지방법원으로 사용되었다. 2층 벽돌 건물로 탁지부 건축소와 마찬가지로 스터코로 마감하여 석조건축의 외관을 갖고 있는 신고전주의양식으로 지어졌다.
▲ 광통관(1909, 현 상업은행 종로지점)
은행과 금융용도 관련 건물로 건립된 2층 벽돌 건축물이다. 전면은 건물하부에 기단부를 조성하였으며, 현관은 이오니아 기둥위에 엔타블레쳐로 구성되고, 건물양쪽 끝의 양쪽을 돌출하여 만곡된 지붕을 사용한 프랑스 성관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양식건축 요소를 사용하고, 전면에 2층 높이의 벽기둥을 사용하고 지붕에 반원형 페디먼트 창호를 사용하여 바로크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
▲ 공업전습소 본관(1909년, 사적 279호)
목구조로 건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고전주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중앙현관위의 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구성을 갖는 2층 양식건축이다. 외관은 목조 비늘판으로 구성되었다.
▲ 내부(內部)청사(1910년, 현 무)
조선시대 의정부 위치에 신축된 2층 벽돌 건물로 한일합방 후 경기도청, 해방 후 治安本部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철거되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하에서 경기도청이 광화문 바로 옆에 건축되었던 것은 ‘경성부’가 경기도의 한 도시의 위치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탁지부 건축소는 당시 주 건축 재료였던 목재와 벽돌의 생산 증대를 위해 1907년 독일에서 수입한 기계를 설치한 벽돌공장을 마포에 건설했다. 이후 벽돌은 통감부 시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동안 민과 관 건축의 주된 건축재로 자리 잡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탁지부 건축소가 신축한 공공건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남산 총독부와 경성부청에 비해 정치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조선식산은행(1907, 현무)은 정면이 4개의 이오니아 기둥으로 구성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나, 1923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에 의해 좌우가 대칭으로 증축되었다. 해방 후 한국산업은행이 사용하였으나 1984년 롯데백화점 건설로 철거되었다.)이 완성도 높은 고전주의 양식의 석조건축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밖에도 1915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경성우편국 그리고 경성일보사 등이 장대한 규모로 지어졌는데, 이들 시설이 경제 및 정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공시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과시보다 조선의 경제를 장악하는 현실적인 기관에 대한 투자가 우선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은행은 식민지배를 위해 건축된 양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일본근대건축의 1세대인 다쯔노 깅코(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석재로 마감된 건축물이다. 1층의 영업장은 이태리 팔라쬬의 중정에 지붕을 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천창에서 채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은행이라는 근대기능이 양식건축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초기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에 비해 20여년 후에 건축된 조선저축은행 본점(제일은행 남대문지점)의 경우 같은 양식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공간구성에 있어서는 근대건축의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된다.
[총독부의 건축양식과 식민지 관공서]
식민지 근대도시의 길을 걷게 된 경성의 주요 간선도로에서 요지를 점하고 있었던 일제의 관청 건물들은 예외 없이 서양의 역사주의 건축양식인 절충형의 신고전주의양식으로 지어졌다. 비록 개항이후에 간헐적으로 교회건축과 서양의 공사관건물들을 통해서 서양건축을 접한 바 있지만, 이들 건물들은 규모면에서나 대중의 접근성 측면에서 일반에게는 멀리서 조망할 수 있는 다소 신기한 이국정취를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일합방과 함께 서울의 간선도로변에 지어진 식민지배의 상징적인 건축물들은 석조 또는 조적+석조건축물 양식의 세련됨 이전에 규모가 주는 위용으로 인해 식민지 경성부민들에게 주는 충격은 이전의 양관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들 건물들은 식민지 경성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입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종종 업무차 방문할 수밖에 없는 성격의 건물들이었다. 따라서 경성부민이나 모처럼 경성을 방문한 경향 각지의 한인들에게 이전의 명동성당으로 대표되는 종교건축물이나 서양의 양관들이 연출하는 이국적인 풍경과는 달리 이들 관청들은 식민화되었다는 참담함 속에 접하는 건물의 위용으로 인해 조선을 삼킨 일본제국주의의 힘을 몸소 체험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은 서구는 물론 일본에서도 동시기에 보편화된 건축양식이었으나, 식민국가의 현실로 인해 서양의 양식주의 건물은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식민통치의 상징으로 각인됨으로써 우리 근대건축사에서 이 시기 양식건축에 대한 왜곡된 인식구조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식민지 하에서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식민지의 비애라고 할 수 있다.
[도시상징축의 변화]
이 시기에 완성된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경성역사 등 절충형 신고전주의 건축으로 지어진 식민지배관청의 재배치는 조선건국이래 한성부의 상징적 남북축을 형성하였던 북악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경관 축 및 도시구조의 개편을 가져왔다. 육조거리와 직각으로 뻗은 종로의 보신각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丁’형 도로체계는 조선총독부-경성부청-서울역-용산으로 이어지는 선형 축으로 대치되었고, 이어서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축됨으로써 경복궁이 위치한 북악에서 남산의 국사당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상징 축은 조선총독부에서 남산의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상징 축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북악에서 남산으로 흐르던 도시경관을 향한 시선과 개항이후에 이국정취를 연출해온 각종 종교관련 시설에 의한 도시경관을 뒤로하고, 일본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는 상징적인 건축물과 새로운 중심가로가 연출하는 식민도시의 모습으로, 식민지배의 전성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 조선총독부
독일인 건축가로 조선호텔 설계자인 ‘게 데라란데’에 의해 설계되었으나 ‘게 데라란데’의 사망으로 전 대만 총독부 기사이던 야촌일랑(野村一郞)이 설계를 마무리했다. 지층과 지상 4층 건물로서 평면은 낱일(日)자형으로 총 9,600여 평으로 되어 있다.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로서 기둥 사이의 벽을 벽돌로 채우고 외부에 면하는 부분과 중정(中庭) 내 징두리는 화강석을 첨부하고 기타 중정 내 외벽은 전부 인조석 바르기로 하고 있다. 이 건물의 내외부에 사용한 화강석과 대리석은 전부 한국산이다. 높이 165척의 중앙탑옥의 돔은 원설계도에는 사각추에 가까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지 건물의 그것은 둥글게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건축양식이 절충된 역사주의양식건축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건물의 전면과 좌우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은 유럽의 건축양식이 동남아시아를 거치면서 형성된 베란다식 식민지스타일이다. 조선총독부 준공과 함께 1925년 7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태평로에서 아름답게 바라보이던 광화문이 궁의 성곽 동쪽으로 이축되었다.
▲ 경성부청
처음 경성부의 청사는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광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맞은편 2층 건물(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이었다. 경성부청사는 1885년 남산 왜장대에서 시작하여 1895년 구(舊) 일본총영사관으로 옮겨졌으며 1906년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일시 경성이사청(京城理事廳)이라고도 하였으나 1910년부터는 경성부청으로 정식 접수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경성부의 도시 기능이 팽창되어 감에 따라 경성도시계획연구회의 요구로 경성부 청사가 신축되었다. 경성부 신청사는 1925년 3월에 착공하여 1926년 10월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근대식 건물로 총 건평은 2,502평으로 건축되었다. 신청사의 중앙탑과 돔은 일본의 국회의사당과 유사한 모습을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비대칭의 평면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좌우대칭의 정면구성과 기단부처리 등은 장식이 제거된 고전주의건축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경성부 청사 신축부지의 선정에 대해서는 처음에 중론이 많았으나 황금정(을지로)과 남대문통(남대문로) 그리고 태평통(태평로)을 잇는 삼각지대로서 부근의 무교정(무교동)은 일본인의 주상업지역이며, 동시에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장곡천정(소공동)과도 연락이 되는 요충지인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 청사의 규모는 4층 높이의 건물로 정면 중앙부 탑은 6층이나 후면 회의실은 3층, 좌우 사무실 앞 복도의 일부는 2층으로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를 지형(地形)에 따라 설계하였다. 경성부청사의 설계는 총독부의 건축과장인 암정장삼랑(岩井長三郞)과 기사(技師) 세경일(笹慶一)이 담당하였다.
▲ 경성역
총본정(총본정)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22년 6월에 착공하여 1925년 9월에 준공되었다.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서 중벽은 석재(石材)벽에 인조석을 붙이고 일부는 칠을 하였다. 지붕은 철골조에 천연 스레이트, 일부는 동판이음으로 하였다. 면적은 지하 781평, 1층 750평, 2층 439평, 합계 2,070평이다. 전체적으로 중앙의 돔을 중심에 둔 좌우 대칭의 구성이나 내부의 공간구성은 중앙 홀을 중심으로 비대칭적 기능적 구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물양식은 네오바로크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건물 모서리에 화강석 처리는 일본의 1세대 근대건축가인 진야금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공원과 광장]
1936년에 고시된 도시계획에 따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신문에는 연일 ‘살기좋은 경성 설계’, ‘100년후 경성계획 전람회’등 경성의 미래를 홍보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토지이용가치를 증진시키기 위해 계획가로와 지역제를 설정하고, 토지구획정리사통해 무질서한 시가지를 정연하게 배치하는 등 경성을 근대도시화하는 작업도 병행되었다. 1930년대 조선을 방문했던 이시가와는 부민관 강연에서 ‘광장과 로타리’가 근대도시의 상징적 요소임을 강조했고, 이러한 그의 주장이 경성부 도시계획에 그대로 받아들여지면서, 도심내 교통체증과 새롭게 확장된 지역의 교통요지엥 각종 광장과 공원 그리고 로타리가 설치되었다.
[남산 훼손]
남산 일대는 일제시대에 각종 시설의 설치로 인해 훼손되었다. 1897년(건양 2)에 남산 북록의 1ha의 땅을 영구임차하여 이를 일본거류민들을 위한 왜성대공원을 만들고 남산대신궁도 설치하였다. 1905년(광무 9)에는 왜성대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본공사관 건물에는 조선통감부가 들어섰다. 1910년에는 남산 서북록 일대의 땅을 영구 무상 대여 받아 한양공원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거류민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일본 불교의 포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서울에 별원을 설치하였으나, 나중에는 독립된 사찰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특히 남산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동대원사(東本願寺), 박문사(博文寺), 광운사(光雲寺) 등이다. 이 중 또한 남산 일대에는 조선신궁, 경성신사 등의 여러 신사가 설치되었다. 중구 예장동 8-6번지 현재 사회복지시설 남산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는 내목신사(乃木神社)가 위치했었다. 해방 후에도 건물이 남아 있다가 1979년 건물 3채가 소실되었고, 1993년에는 창고 건물이 철거되었다. 이 신사에서는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제3군사령관으로 여순전투에 참여한 내목희전(乃木希典.1849.11.1~1912.9.13)를 기리는 역할을 하였다. 구내에 내목신사(乃木神社)와 관련된 많은 석재가 남아 있다. 石槽는 화강암을 파서 만든 장방형으로 크기는 외부 174×70×60㎝, 내부 담수부는 149×44㎝이다. 장변의 한쪽면에는 「세심(洗心)」이라는 글씨가 한쪽 면에 가득 차도록 쓰여 있다. 반대면에는 「奉納 御手水舍 一棟 寄進者 高木 德彌 同 貞子 昭和九年九月日」라고 음각되어 있어 1934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석조 이외에도 지금은 뒤집어 놓았지만 바닥모양이 정육각형인 석재도 확인되는데 한 변의 길이가 80㎝인 정육각형이고 높이는 70㎝이다. 주위에는 화강암으로 치석된 장대석들이 여러 개 보인다. 이밖에도 강당 옆에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가면서 여러 매의 장대석이 확인되며 세탁실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맷돌과 절구도 확인된다. 돌절구는 외부지름 54㎝ 내부지름 36㎝ 내부깊이 21㎝ 높이 43㎝이다. 맷돌은 지름 42㎝, 높이 43㎝이다.
▲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
1897년 남산에 처음 세워진 공원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의 주둔지인 것을 일본인들이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에 일본인들은 도로를 내고 벚나무 600그루를 심었다. 1908년에는 현재 남산3호터널 부근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 조성되었으며, 1910년에는 다시 시민공원으로 개장하였다.
▲ 한양공원
일본인들이 그들의 성역으로 생각한 이른바 왜성대 자리에 대신궁(大神宮)이라는 이름의 신사를 건축하여 이를 경성신사로 삼았으며, 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전역의 수호신으로서의 신사(神社)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위치를 남산으로 잡아 조선신궁을 건축하였다. 그런데 총평수 127,900여 평에 달하는 조선신궁으로 인해 남산이 한양공원의 위락처로서의 가치가 떨어지자, 경성부는 기존의 왜성대공원과 한양공원을 합병한 새로운 한양공원계획을 수립하였다. 조선강점 전에 일인거류민단에서 건설한 한양공원은 그 규모가 작았을 뿐 아니라 장래 건설예정인 신궁부지로 그 절반이 전용될 운명에 있는 것이므로 이에 대신할 대공원의 건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 한양공원계획은 임학박사 본다정육(本多靜六)과 전촌강(田村剛)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공원계획은 한양공원·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을 합병한 외에 다시 노인정· 장충단의 일대까지 편입하여 일대 삼림(森林)공원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용산시가의 정비와 교통망의 완성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크게 발전하는 것을 염두에 둔 계획이기도 했다.
▲ 한양공원비(漢陽公園碑)-필동 산1-16번지 일원
일제는 1908년(융희 2) 국내에 일본 거류민수가 증가함에 따라 왜성대공원 이외에 또 하나의 공원을 조성하기 위하여 일본거류민단을 통해 지금 남산식물원 서울과학교육원이 위치한 자리에서 남대문까지의 남산 서북록 일대 30만평의 땅을 영구로 무상대여 받았다. 이후 2년여에 걸쳐 각종 시설을 설치하여 1910년 5월 29일에 정식 개원하였으며 고종은 칙사를 보내 치하하고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남산3호터널 위의 남산순환도로 변에 한양공원비가 잔존하고 있다. 비석은 화강암으로 바닥에 110× 55.5×45㎝ 크기의 대석(臺石)을 세웠는데, 외곽은 약간의 테두리를 남겨 두고 내부는 편평하게 깎아냈다. 비신은 88.5 ×165×45㎝ 크기로 윗부분은 원수형(圓首形)으로 되어 있다. 비신 전면은 좌·우측 너비 7.5㎝, 윗쪽은 10㎝의 테두리를 두고 내면에 깊이 2㎝ 정도 파낸 뒤 「한양공원(漢陽公園)」의 글씨를 새겼다. 「한양공원(漢陽公園)」은 고종의 친필로 전해진다. 후면에는 마지막 줄을 제외하고도 각줄 12자 7줄 총 84자 내외는 쪼아서 읽을 수 없게 되었고 상단의 넓은 면은 아예 전체적으로 박리시켜 내용을 읽을 수 없다. 비석의 주변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비를 보호하기위한 철선을 두르는데 사용되는 사각 석주 3개가 남아 있다.
▲ 조선신궁(朝鮮神宮)
조선신궁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토의 신사이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총독부는 각 지역에 관립 신사를 세우고 민간 신사도 지원하는 방식으로 신도를 장려했다.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행정,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12년부터는 조선신궁 건립 예산을 편성하여 경성부 남산 한양공원에 자리를 정했다. 1920년에 기공식을 갖고 15개의 건물과 돌계단, 참도 등을 조성했다. 조선교육회는 헌목 운동을 벌여 학생들의 헌금을 모아 나무를 심었다. 5년 동안 작업한 끝에 1925년에는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0월 15일에 진좌제 행사를 열었다. 조선신궁의 주제신은 일본 건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이다. 제신 후보로는 신공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거론되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 시국을 맞아 총독부가 신궁 참배를 강요하여 참배객이 크게 늘어났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에 스스로 폐쇄 행사인 승신식을 연 뒤 해체 작업을 벌여 10월 7일에 소각 처리되었다. 이후 조선신궁 자리에는 광복후 남산식물원이 들어섰다가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안중근을 기념하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조선신궁 표지판 없음)
▲ 일본공사관
일본인의 성 안 거주는 허용되지 않았다. 1880년 서대문 밖 천연정(지금의 서울적십자병원 자리) 청수관에 연 공사관에 40여 명의 일본인이 기거한 것이 처음이다.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청수관이 불타자, 이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 금위대장 이종승 집을 임시로 쓰다가 교동의 박영효 집을 사들여 공사관으로 신축했다. 이때 일한 인부 70명이 서울에 들어온 최초의 일본 민간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인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틈타 조정을 압박해 서울 입경과 거주를 정식으로 허가받았다. 이때가 1885년 2월이었다. 일본 공사관도 남산 기슭 ‘녹천정’ 자리로 옮긴 뒤였다. 일본인 거류 지역은 공사관 인근의 중구 예장동·주자동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진고개 일대로 지정되었다. 최초의 일본인 가옥 12동이 명동성당 후문 앞 일대에 세워졌는데, 그해 9월 일본 거류민은 20호 89명이었다. 이는 조선인이 모여 사는 북촌과 대비되는 일본인 거주지 ‘남촌’의 시작이었다. 지금의 예장동 일대인 남촌의 시작점은 300년 전 임진왜란 때 일본군 1500여 명이 성을 쌓고 1년간 머물던 ‘왜성대’라는 곳이다. 남촌의 등장은 300여 년 만에 일본인의 식민지 건설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거류민 수는 빠르게 늘어 1884년 말 260호 848명에서 1895년 말 500호 1889명으로 배가 되었다. 청일전쟁을 이긴 일본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거류 지역을 본격적으로 확장했다. 진고개에서 남대문 사이에 새 도로를 냈다. 일본인 전용 종합병원을 신설해 무료 진료도 했다. 일본 상품 전문 진열소까지 설치했다.
일본인 거류지가 커지고 관리 업무가 늘자 일본 공사관은 1896년 주자동 6번지에서 충무로 1가 입구(현 신세계백화점 자리)로 확장해 옮겨갔다. 고종이 도시 개조를 지시한 해였다. 공사관의 이전은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지가 외진 남산 밑에서 번잡한 도심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거류지 개념에서 신시가지 혹은 신도시 개념으로 남촌의 확장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전 뒤 10여 년간 일본인 수는 약 5배가 늘어 1906년 1만 명을 넘어섰다. 한-일 합병이 되던 1910년 일본인은 서울 인구의 14%를 차지했는데 대부분이 남촌에 살고 있었다. 일본 공사관의 지위도 변했다. 정미7조약을 체결한 이듬해(1908년) 일본은 공사관을 통감부의 경성지부인 ‘경성이사청’으로 바꾸었다. 외교기관이던 공사관이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변화한 것이며, 남촌 또한 이방인의 거주지에서 식민지 지배층이 사는 특권적 공간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남촌의 변화는 우선 내부 정비로 나타났다. 한-일 합병 직후 총독부는 1910년 남대문에서 남대문 정거장에 이르는 도로를 개수했고, 1911년에 황금정(현 을지로), 1912년에 태평통(태평로)을 준공했다. 황금정은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을 청계천변까지 확장시키면서 본정통(충무로)과 함께 새로운 중심가로 부상했다.
총독부는 한 걸음 더 나가 경성 도시 개조도 추진했다. 북촌과 남촌의 중심을 안국동과 을지로 3가에 두고, 각 중심의 방사형 도로망을 개설한 뒤, 남촌과 북촌을 파고다공원을 중심으로 통합하는 도시 구조의 개편이 시도되었다. 1908년엔 일본 황태자 방문을 맞아 남대문을 허문 뒤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남북축도 구축했다. 남촌이 서울 밖으로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남촌 내부의 중심부는 충무로에서 명동(조선시대 명례방)으로 넓혀졌다. 일본인들은 충무로 1~3가의 진고개를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본정(本町), 즉 혼마치로 부르며 중심가로 키워갔다. 충무로 1~2가에는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귀금속·잡화류·화장품·서적·문구류·식료품·화장품 등을 취급하는 고급 점포들이 즐비했다. 1910년대에 들어 충무로 상권은 인근의 명동으로 파고들었다. 1912년엔 명동 2가 85번지에 경성어시장이, 1919년엔 25번지에 공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동명도 일제식 메이지마치(明治町)로 바뀌었다. 혼마치와 메이지마치는 남촌을 상징하는 최고의 번화가였다. 이곳은 단순한 고급 소비지만 아니었다. 일본 공사관이 남대문통으로 옮겨오고, 또한 경성이사청으로 승격되는 것을 전후로 충무로·명동 일대엔 식민지 조선을 경제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기관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가령,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건물)은 1907~12년에 남대문로의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현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현 롯데호텔 신관 자리인 남대문로 2가에 세워졌다. 이후 남대문로는 동일은행, 천일은행, 조선상업은행, 조선신탁회사, 삼화은행 등이 들어서면서 조선의 최고 금융거리가 되었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금융기관과 관련된 대기업체와 백화점이 대거 입지했다. 오늘날 증권거래소의 전신인 경성주식현물취급시장이 1920년 명동에 개설되었고, 현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남대문로 2가에 1927넌 준공되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이 된 삼정(미쓰이) 재벌 계열의 삼월(미쓰코시)백화점이 1927~34년 충무로 1가 현 위치에 건립되었고, 삼중백화점도 1932~33년에 충무로 2가 24번지에 문을 열었다. 1939년엔 미도파백화점의 전신인 전가옥(조지아)백화점이 들어왔다. 일제시대의 3대 임대빌딩 중 하나인 천대전 빌딩도 1932년 남대문로에 건립되었다.
남대문로가 금융과 대중소비의 요람으로 탈바꿈하는 것과 아울러 인근의 소공로와 명동 일대도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소공로에는 조선호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공회당, 사우공회의소, 은행집회소, 비전옥여관, 일본항공수송회사 객화취급소, 경성부 도서관, 기독교청년회 등이 들어섰다. 명동 일대에도 전가옥백화점이 들어 선 뒤 명동 입구에서 명동성당까지의 도로가 10m 폭으로 확장되면서 독립적인 상가가 형성됐다. 당시 명동은 충무로에 예속된 유흥오락가로 다방, 카페, 주점 등이 이미 밀집해 있었다. 이때부터 충무로 중심의 남촌은 명동과 남대문로 중심으로 점차 탈바꿈해갔다. 도심 집중이 가속화되자 일제는 예장동 통감부 자리에 있던 총독부를 1926년 경복궁 앞으로 신축해 옮겼고, 경성이사청에서 승격한(1918년) 경성부청(시청·현 서울시청 건물)도 1926년 현재의 위치(당시 경성신문사 터)로 신축해 옮겼다. 부청 자리엔 삼월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조선은행 앞 광장(일본인들은 줄여 ‘선은광장’이라 불렀다)을 중심으로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삼월백화점이 삼각축을 이루는 남대문통 랜드마크가 생겨났다. 1920년대 남대문통 시대가 열리면서, 1910년대까지만 해도 엇비슷하던 북촌과 남촌의 경제력은 현격한 격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 상인들은 식민지 지배자로서 지위를 이용해 급속히 성장했고, 이는 도시 공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성부 내 주요 공공건물 중 북촌에 위치한 것은 조선총독부 하나에 불과했고, 그 밖의 건축물 대부분은 남촌에 있었다. 남촌은 충무로 일대와 명동에서 인현동까지, 퇴계로 남쪽, 즉 남산동·회현동·예장동·필동·묵적동 일대에 걸쳐 있었다. 이들 지역의 주민 중 일본인 비율은 평균 90%에 달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남촌 중심부인 충무로와 명동은 마치 일본을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일본을 거쳐 온 서양의 신문화가 조선에 등장하는 무대가 이곳이었다. 여기서도 특히 백화점이 꽃이었다. 삼월백화점을 중심으로 밀집된 고급 상가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충무로, 즉 혼마치는 경성 사람이면 누구나 가서 맘껏 소비하고 즐기고 싶어 한 욕망의 해방구였다. 그러나 동시에 ‘내지인’으로 불린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층으로서 특권적 삶을 누리는 ‘선망과 배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충무로·명동 일대의 백화점 등을 배회하며 옮겨 다니는 무리를 ‘혼부라당’이라 불렀다. ‘혼마치를 방황하는 무리’란 뜻의 일본어 속어다. 모던보이나 모던걸의 겉모습을 한 이들은 제국주의를 통해 번진 자본주의적 소비욕망의 포로였지만, 동시에 탈권력화 된 식민지 국민이기도 했다. 북촌에서 강(청계천)을 건너 혼마치로 몰려간 이들은 백화점을 배회하면서 고히(커피)와 칼피스를 마시고 재즈를 듣고 찰스턴을 추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북촌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꿈같은 남촌의 화려함을 뒤로한 채 돌아온 북촌은 더욱 깜깜하고 궁핍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예장동 4-5번지(구 총독부청사내)
1857년 영국의 사우스켄싱턴박물관이 최초의 과학관이다. 독일에서는 뮌헨박물관이 1903년에 설립됐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1년 국립과학박물관이 설립됐고 2001년 첨단기술 중심의 과학미래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1927년 서울시 중구 예장동에 은사기념과학관이 처음 만들어져 일본인이 운영하다 광복과 함께 국립과학박물관으로 개명됐다. 1948년 정부수립 후 '국립과학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한국전쟁 때 불에 타 명맥만 유지돼왔다. 1962년 창경궁 옆 국립서울과학관 터로 과학관을 이전하고 1990년 대전에 국립중앙과학관이 문을 열 때까지 중앙과학관 역할을 했다. 선진국에서는 국민 12만∼14만 명당 1개의 과학관이 있지만 국내 과학관은 2007년 4월 현재 59개로 인구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선진국의 8분의1 수준에 머물고 있다. 미국은 1,950여개, 일본은 8,000여개의 과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도 오는 2012년까지 지방 테마과학관을 포함해 과학관 100개를 개관할 계획이다. 1927년 건립된 은사기념과학관은 우리 과학관의 시초이나, 일본왕실로부터 받은 은사금 17만원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속뜻은 식민지 조선에 천황의 은덕을 베풀어 과학문명이 전파됐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때문에 박물관보다는 사회교육기관에 더 충실했는데, 각종 강연, 영화, 지방순회강연, 인쇄, 선전 등은 이른바 ‘조선의 문명화’를 시도했다.
▲ 경성이사청-일본영사관(현 신세계백화점)
1906년 1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영사관이 폐지되고 경성이사청이 신설되었다. 1896년 남산기슭에 지은 일본영사관을 사용하다가 1907년 벽돌로 2층 건물을 지었다.
▲ 미스코시 경성점(신세계백화점)-충무로1가 52-5번지
三井財閥은 1906년에 충무로1가 사보이호텔 맞은편에 직영백화점 삼월지점(三越支店)을 설립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영업을 위하여 백화점 건물을 신축키로 하고 1926년 경성부청(京城府廳)이 사용하다가 공터로 남아 있던 충무로1가 52번지에 백화점을 신축하였다. 1929년 3월에 착공하여 1930년 10월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콘크리트조로 지어졌다. 대지는 북변과 동변이 둔각을 이루며 꺾인 형태를 띠고 있다. 건물은 대지의 형태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어졌고 굴곡부에 주현관을 배치하고 북변과 동변에도 출입구를 두었다. 외장은 타일을 이용하였으나 주 출입구에는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며, 4층 굴곡부에는 발코니를 설치한 점이 눈에 띤다. 1층 상부에 수평으로 설치된 띠가 기단부의 이미지와 장식이 간소화돤 양식건축의 과도기적 모습을 갖고 있다. 내부는 백화점으로 사용하면서 전면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으나, 내부의 주계단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조선은행 앞 광장은 구 미쓰코시백화점 이외에 조선은행(1912), 경성우편국(1915), 조선저축은행(1937, 현 제일은행 제일지점)과 함께 경성 제일의 금융 및 상업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해방 후에는 동화백화점으로 사용되다가, 1963년에 삼성그룹으로 흡수되어 상호를 신세계백화점으로 바꾸고 1개 층이 증축되었다. 1967년 국내 최초 바겐세일을 실시하고, 1969년 국내 최초로 신용카드를 발급하였으며,1991년에 삼성그룹에서 독립을 선언하여 1997년에 공식 분리되었다. 2001년 3월에는 (주)신세계백화점에서 (주)신세계로 상호를 변경하고, 현재는 백화점 경영과 함께 대형 할인점 이마트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며 영업하고 있다. 2002년부터 대구백화점과 업무제휴를 하고 있다. 2006년에는 월마트코리아 주식회사를 인수하였고, 그동안 세입자 주체였던 신세계백화점 미아점을 폐점시켰다. 2007년 대한민국의 유통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로부터 A3(안정적) 신용등급을 획득하였다. 이는 아시아에서 일본의 이세탄, 한큐백화점과 함께 최고 수준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 이마트를 비롯한 신세계의 마진율은 29%로, 월마트의 23.1%, 까르푸의 21.4%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신세계는 8개의 백화점 (본점, 강남점, 영등포점, 인천점, 죽전점, 광주신세계, 마산점, 센텀시티점 )과 121개의 이마트를 운영하고 있다. 한편 관계사로는 백화점과 이마트를 모체로 한 신세계를 중심으로, 신세계건설, 신세계아이앤씨, 광주신세계, 신세계푸드가 상장되어 있고 그 외에 신세계첼시, 조선호텔, 조선호텔베이커리, 신세계인터네셔널, 스타벅스코리아가 있다.
▲ 구 조선저축은행 본점(舊 朝鮮貯蓄銀行 本店, 현 제일은행 제일지점)-충무로1가 53-1
조선식산은행의 저축업무가 비대해짐에 따라 서민대상의 본격적인 별도의 은행을 설립하고자 1929년 7월 저축은행령에 따라 저축예금업무를 전담하는 조선저축은행이 설립되었다. 조선저축은행은 三越百貨店 서쪽에 새로이 본점 신축을 추진하여, 1932년에 건물계획안을 현상공모하였다. 이 중에 平林舍吾의 안이 채택되었는데, 당시의 심사평은 조선은행 앞 광장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기존 건물과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은행으로서의 믿음직한 장중함이 있다는 것이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5층의 철골철근콘크리트조로 1933년 10월에 착공되어 1935년 11월에 준공되었다. 전면 중앙에 거대하게 나란히 있는 석조기둥은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이다. 현관은 저축은행의 특성을 살려 일반인에게 친밀감을 주고자 규모를 작게 하고 별도의 계단을 만들지 않았다. 1층은 영업장, 2층은 간부실, 3층은 사무실, 4층은 회의실과 예비실, 5층은 식당과 부속실로 구성된다. 1987년 10월 공평동으로 본점을 신축·이전하여 현재는 제일은행 제일지점으로 쓰이고 있다.
▲ 구 경성부청사(舊 京城府 廳舍)-태평로1가 31-14(경성이사청→현 시청(경성신문사))
구 경성부 청사는 원래 조선은행 맞은편의 2층 건물인 일본영사관이 있던 구청사를 사용하였으나 행정업무가 증가됨에 따라 청사를 현재의 위치에 신축하게 되었다. 경성부 청사의 설계는 총독부 건축과장 岩井長三郞과 技師 笹慶一 등이 담당하였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조로 1925년 3월에 착공하여 1926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외면의 정면은 2층 창까지, 배면은 1층 창까지 하부 징두리에 화강석을 가로로 길게 잘라 붙였고 나머지는 인조석으로 하여 석조 모양을 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프랑스풍의 르네상스 양식으로 절충주의 색채를 띠고 있다. 중앙 탑의 돔이나 창문 구조에서 일본 국회의사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구 경성부 청사는 2003년 6월 20일 ‘서울시청 청사’의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 조선주차사령부-필동2가(1908년 용산이전)
1908년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필동2가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일대는 군사지대로 변모했다. 1910년 일제 강점 후 한국주차군사령부는 조선주차군사령부로 바뀌었다. 그리고 1918년 조선군사령부로 개칭됐다. 1915년 용산과 나남에 2개의 정규사단을 배치한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1개 사단을 추가했다. 1940년대에는 무려 23만명의 일본군이 한반도에 주둔했다.
▲ 남산동본원사터(南山東本願寺址)-
당시 총독부 아래에 위치하며, 현재 남산초교 뒤 한양교회 자리이다. 해방 후 대한민족청년당 본부가 있었으며, 국민대학교 교사로도 이용하였다.
▲ 삼월백화점-신세계백화점
1930년 일본의 삼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경성지점으로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곧 이어 화신백화점 등이 등장하였다.
▲ 노기(내목)신사터
조선총독부 남쪽에 들어섰던 내목신사는 특이하게도 천황이나 상상 속의 신을 숭상하는 신사가 아니다. 실존인물로 러일전쟁(1904~1905) 때 일본 제3군 사령관이었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를 기념하는 신사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함으로써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노기가 바로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제3군사령관으로서 여순전투를 지휘한 인물이다. 세계 육전(陸戰) 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도 기록된 중국 여순전투였다. 노기는 203고지를 점령할 때 산꼭대기까지 시체로 사닥다리를 쌓아 올라갈 정도로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으면서 승리를 이끌었다. 문제는 아들과 남편을 잃은 일본 내 어머니와 아내들의 분노였다. 그 분노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귀국하는 노기에게 항의하기 위해 부두로 몰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노기의 손에 그의 세 자식의 유골함이 들려 있던 것을 보고, 오히려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그는 괴로움에 왕에게 자결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신하가 있었기에 국운이 충천한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는 이후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주자 그의 장삿날에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하는 등 충성심도 남달라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을 정도의 인물이 되었다. 내목신사가 기리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러일전쟁의 영웅’ 노기 마레스케다. 노기신사터에는 남산원이라는 보육시설이 들어섰고, 그 옆에는 리라학원이 자리를 잡았다. 노기신사는 없어졌지만, 돌로 만든 건물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노기신사터에 흩어진 돌들을 모아 나무 밑 휴식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 대선궁신사터-숭의여대
남산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주둔지였으므로 주민들은 '왜장터'라 불렀고 일본인들은 남산을 자신들의 성역처럼 여겨, 1897년 그 일대 3,000여 평을 빌려 '왜성대공원'이라 이름짓고 도로개설과 함께 벚꽃 600그루를 심었으며 이듬해인 지금의 숭의학원 자리에 '대선궁'이라는 신사를 세웠다. 임진왜란 때는 남산이 일본군의 주둔지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일제는 남산에 대선궁이라는 신사를 세우기도 하고, 일본의 상징인 벚꽃을 수백 그루 심기도 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지금의 식물원 자리에 일본의 신사인 조선신궁을 세워놓고, 침략 당한 우리민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전 안기부 자리에 통감부를 세우고, 현재 한옥마을 자리에 헌병대 사령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장충단공원을 조성하여 그 일대에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남산을 무차별 훼손하였다. 이렇듯 침략 당한 한민족의 혼을 없애려는 악랄한 짓을 일제는 서슴지 않고 저질렀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남산 주위에 집단으로 거주하였기에 한때는 해방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군부독재 시대에는 악명 높은 안기부가 남산의 이미지를 또한 어둡게 각인시켜 놓았다. 일제시대에 일본헌병대 사령부 자리였던 현 한옥마을 자리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들어섰고, 일반인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1989년 사령부가 자리를 옮겼고, 이때 서울시가 부지를 인수하여 건물을 헐고 새롭게 조성하게 된 것이 바로 남산골 한옥마을이다
▲ 경선신사터-리라초교
1926년(소화 원) 경내를 확장하고 신전 신축을 기회로 조선 국토개발의 시조 국혼대신을 합사한 경성신사는 그들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씨자조직에 조선인에게도 참여를 강요하였다. 그 후 1931년(소화 6) 가을 10월 15일~17일 3일간의 경성신사 예제를 조선인 주축으로 제사를 모시게 강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