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함이 많음이라
(눅 7:40-4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나라 응원 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운동경기를 응원할 때 우리나라 응원단은 쉬지 않고 응원을 합니다. 외국선수들이 놀라워합니다. 그리고 가수들 팬 문화는 ‘사생팬’이라고 할 만큼 적극적입니다. 팬 문화가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도 가수들을 무척 좋아합니다.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위로받았다고 고마워합니다.
가수들이 공연을 할 때 함께 부르는 ‘떼창’이라는 문화는 우리나라가 최고입니다. 외국 가수들이 와서 공연하고서는 감격합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팬 문화는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어색한 면도 있습니다. ‘저렇게 극성스러워야 하느냐?’라는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의 첫 구절이 떠오릅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다소 냉소적이고 비판적일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처럼 누구를 뜨겁게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 그들의 열정을 함부로 비판하려는 것입니다.
때로 사랑은 맹목적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판단을 의식하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연속극 대사처럼 ‘사랑한 게 잘못은 아니잖아’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과 열정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달궈진 연탄처럼 자신을 태워 남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팬 문화를 비판하기보다는 ‘나는 누구를 뜨겁게 지지하고 응원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연탄은 뜨겁게 사랑하고 자신은 버려지고 부서지고 흩어져 사라집니다. 어쩌면 온전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일일 수도 있고, 공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일 수도 있겠지요. 사랑은 팬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는 부모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부모도 많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언제나 자식 편이 되고, 자식의 팬이 되어 응원합니다. 자식이 부모 편이 되고 부모의 팬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정도가 효도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불완전합니다. 진정한 내 팬, 영원한 나의 팬이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처럼 나를 사랑하는 팬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맹목적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맹목적이고, 변함이 없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연탄처럼 한 번 뜨겁게 사랑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몸이 찢기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아낌없는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말 잘 듣고, 잘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추하고, 교만하기까지 한 죄인을 더 사랑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그런 사랑이 어디 있느냐’며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는 우리가 이해하는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하는 맹목적인 사랑, 진정한 팬심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다면 예수님을 좋아하는 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랑의 초대가 아닌 시험에 들게 하는 위험한 초대도 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 일행을 초대하였지만 전통에 따라서 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환대하는 전통은 먼저 발을 씻을 물을 내어주고, 볼을 맞대며 입맞춤을 하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 중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초대지 사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지만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그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판단하고, 고발하려는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잘 믿고 따르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셨을 때 죄 많은 여인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치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의 눈물이 주님의 발을 적시고 그는 머리카락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발에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시몬이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으리라.’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묻습니다. 44절 ‘이 여자를 보느냐?’ 시몬은 예수님이 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시몬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여인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보고도 보지 못하는 장님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하시려고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오백 데나리온, 오십 데나리온 빚 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빚을 갚을 수 없어 그 빚을 탕감해주었다면 누가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여인의 행동을 ‘사랑’이라고 설명해주십니다. 곧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인이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많은 죄가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시몬처럼, 예수님이 여인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여기고, 여인에 대해서 죄가 많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하려고 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인처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가 많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을 통해 시몬을 가르쳐 자신을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몬은 주님을 초대하였지만,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초대는 가식과 위선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시몬도 사랑하고, 죄 많은 여인도 사랑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나는 율법을 잘 지키고, 헌금을 많이 하고, 죄인들과 같지 않다’며 자신의 행위를 자랑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줄 믿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시몬의 초대에 응하신 것은 그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속마음을 아시면서도 받아들인 것은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려는 것입니다.
여인이 왜 이렇게 주께 감격하고 주님을 사랑하는지 이유는 모릅니다. 사실 이유를 찾으면 오히려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은 받아들이셨습니다. 그의 마음, 그의 정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받아들임은 바다와 같습니다. 시몬도 받아들이고, 죄 많은 여인도 받아들이십니다. 죄인인 우리도 받아들이고 우리의 허물도 받아들이십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사랑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신 다음에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내 팬이셨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나를 지지해 주시는지 믿고 알게 된 뒤에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적게 사랑한다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 되시고, 나를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날마다 기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