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자기 자신 지키기/ 유다서 1:17-23
우리 교단에서는 오늘, 8월 첫째 주일을 ‘이단 경계 주일’로 드릴 것을 권장합니다. 95회기 총회 때(2010년) 결의됐으니, 이제 15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단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관적인 판단과 요소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 몇 년 새 부정적인 뉴스로 자주 소개되는 어느 목사가 있습니다(집회에서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발언을 한). 우리 교단에서도 이 목사의 이단성을 심의해달라는 요청이 많아, <이단 사이비 대책 위원회>에서 1년간 연구하며 논의했습니다.(2021.9월~2022.9월) 그 결론은 “이단은 아니다.”였습니다. 목회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정제되지 않은 언어적 실수가 자주 나타나기는 하나, 지속성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잘못된 사상이나 교리는 보이지 않는다면서요.
또한, 이단으로 규정받고 희생당하거나 험난한 삶을 산 사람이 상당합니다. 중세 교회 때 교회의 개혁을 외치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며 교회개혁을 외쳤던 이들을 교황청은 이단으로 선고했습니다.(얀 후스는 화형당했으며, 위클리프는 죽은 지 30여 년 됐는데도 묘를 파헤쳐 화형에 처했고, 루터는 독일 제후의 위장 납치로 신변을 지킬 수 있었으나 이를 위해 강제적으로 칩거해야 했습니다.) 이들 모두 형식적이더라도 공식적인 교단의 절차와 회의를 통해 이단으로 판정받았습니다. 이것은 이단 판별이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주관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지기 쉽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녀사냥’이라는 용어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에 해당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이단이라며 십자가형을 유도했습니다. 죄목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는 것으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 경계 주일>을 맞아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단’이나 ‘사이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른 입장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 사람을 ‘틀렸다’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을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내 편의를 위해 상대방을 매도하는 것만큼은 정말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사람들을 판가름하며 편을 나누는 사람들을 본문 유다서는 반면교사 삼으라고 권합니다.(4-19절)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지키라고 권하는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키라고 권합니다.(21절) 유다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말한 것을 기억하라는 말을(17절) 비추어볼 때 그 당시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고, 이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사랑 안에서 이제는 본능과 욕정대로 살며 그들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기 자신을, 그 정체성을 지키라는 의미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와 내용에는 타인을 향한 자비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22-23절은 난해한 문장이지만, 간추리면 미혹과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21절) 이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래서 유다는 편지 서두에 평화와 사랑과 함께 긍휼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빌며 인사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단을 경계하는 주된 이유는 공동체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남을 찍어내림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김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사랑과 긍휼이 우리의 마음과 삶에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