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주일학교 교사, 지치고 있다
성령 충만해야 지치지 않는다.
교사는 왜 지치는가? 지금까지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개인문제를 다루었다. 지금까지는 사실 지엽적인 문제였다. 교사들이 지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하지 않고 내 종교심과 호기심, 봉사심으로 감당하고 있었기에 내가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얻지 못하면 지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사명감이 넘치는 열정적인 교사가 되려면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도 왜곡된 대접을 받는 분이 성령님이다! 한국교회가 믿음생활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시소게임을 계속하는 것은 성령님과의 관계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님의 다스림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려먹는(?)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교사생활을 지속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면 단거리 달리기의 교사는 되어도 장거리를 달리며 많은 열매를 맺는 교사는 절대로 될 수 없다.
왜냐? 성령을 받지 않으면 신앙 동력(動力)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무엇을 가르칠까, 교육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설령 지식적으로 알았다 해도 내 인간적 지혜와 방법으로는 교육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맡은 어린이들에게서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연히 교사는 맥이 빠지고 지쳐 버린다.
내 안은 성령의 성소(聖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성령을 받는다. 성령세례이다. 성령세례는 거듭나게 하기에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고 우리 몸은 그분을 모신 성전(聖殿)이 된다(고전 6:19, 20).
예수님의 사명이 십자가의 죽으심, 피 흘리심을 통해 인류 구원이라면 성령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요청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된다. 내가 가르치는 성경말씀이 더욱 확신 있게 전달되고 어린이들의 영혼을 열어주어 말씀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게 일반교육에는 없는 교회교육만의 ‘불루오션’이다.
성령님은 교사 자신은 물론 학생들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신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며 이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한다.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그래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간다. 이런 역사가 성화(聖化)이다.
세상적인 성화 주체는 자기이다. 내가 계명을 지키고 도를 닦아가면서 성화를 이루어 간다. 기독교는 성령께서 성화를 만들어 간다. 성화의 근원이 성령에게서 시작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가르침들로 학생들의 성화도 가능하고 기독교교육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사는 찬양대를 비롯한 어떤 직분보다 당연히 성령을 받아야 하지만 받아도 내 하나의 믿음을 유지할 정도의 성령의 분량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느라 내게서 에너지가 너무 많이 빠져 나가 버리기에 내 믿음을 유지할 수 없다. 당연히 기진맥진해 버린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갈수록 더욱 강력하게 사용하신다.
미국교회에서 대형집회 계획을 세우고 강사를 선정하는 작업에 들어가자 모두들 “무디!” 하는 것이다. 무디는 초등학교나 겨우 나온 사람이다. 유식한 목사가 그 모양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모두들 무디! 무디! 하십니까? 무디가 성령님을 독점이라도 했다는 것입니까?”
그때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요! 무디가 성령님을 독점한 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무디를 독점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누구를 독점하기를 원하실까? 성령님을 환영하며 영접하는 교사들을 독점하신다. 그런 교사들과 동역하기를 기뻐하신다. 교사는 내 믿음만이 아니라 타인의 믿음, 그것도 스스로 자립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어린이들의 믿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니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을 공급받으려면
그러면 교사가 성령 충만을 계속적으로 공급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령 충만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성령 충만은 성령에게 충만히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다. 성령님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는 삶이 성령 충만이다. 내 성격이 나타나지 않고 내 지식으로 판단하지 않고 항상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삼손의 생애를 보면 성령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을 보존하고 충만을 계속 유지해서 제대로 된 상품이 되어야지 제대로 간직 못해서 하자제품, 불량제품이 될 수도 있음을 보게 된다.
삼손처럼 인생을 유리하게 출발한 사람도 드물다. 그는 세례요한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출생이 예고되었다(13:3~5). 출생예고는 사사 중에는 삼손이 유일하다. 대단한 출발이다.
삼손은 경건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축복을 받았다. 부모는 하나님의 선물로 삼손을 받았고 “내가 어떻게 우리 아이에게 행할지 알려 달라”(13:8)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자녀를 양육하겠다고 서원했을 정도이다. 결혼 잔치에 하객(賀客)이 많은 것으로 보아(14:10, 11) 재산과 영향력을 갖고 있던 유력한 가정이다.
삼손의 일생 가운데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말은 수시로 나온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13:25)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개역성경에는 “그에게 감동하시니라”라고 나온다. 이는 '강하게 밀다', '몰아넣다'란 의미이다. 성령께서 삼손에게 강하게 ‘카리스마’로 임한 것이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14: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19절)
구약(舊約)에서 이 정도의 성령 충만은 드물다. 성령의 감동은 지혜, 예언…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삼손에게는 영웅적인 완력(腕力), 육체의 카리스마로 나타났다. 그런데 삼손은 자신을 세운 목적대로 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조건으로 보내주신 계획대로 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하자인생 하자제품이 된다.
왜 그렇게 인생을 살았을까? 성령 충만의 목적을 오해하고 자기를 위해 그 힘과 은사를 낭비해 버렸던 것이다.
교사들은 성령 충만을 사모한다. 은사로서 사모하고 힘으로서 사모한다. 우리 교사들은 성령 충만을 구하는 목적이 남달라야 한다. 그것은 사람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다. 사람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날마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에게 교사로서의 내 생애를 위임하면 날마다 성령 안에서 충만하게 되고 지치는 일은 없다.
건강한 교회생활을 할 때 성령 충만은 지속된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바른 교리와 교회생활(주일성수, 십일조, 사역), 바른 생활(인간관계, 도덕, 시민의 임무)를 말한다. 이런 기본이 바닥에 깔려있지 않으면 성령 충만은 쉽게 무너지고 육신의 지배를 받게 만든다.
교사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구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나를 지배하시고 통치해 주시기를 갈망해야 한다. 자신을 믿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무슨 일에나 간절히 사모하는 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성령 충만의 단계를 같은 온도로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한다. 계속은 반복해서… 그것은 우리 내면에 워낙 내 기질이 강력하다는 것이다. 만약 성령 충만을 받지 않으면 사도행전의 성령이든 요한복음의 성령이든 에너지가 떨어진다. 그래서 비싼 전기면도기가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멈춰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300원짜리 1회용 면도기만도 못한다.(생략) 4월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