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Class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2014년 03월호>
쏘가리, 호랑이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소(沼)와 여울, 여울과 소(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좌향(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범들이 강물 속을 내달리던 시절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이 시를 2013년도 1월 1일자 한 일간지 지면에서 읽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힘차고 장쾌한 시였다. 거침없이 늠름하고 맑은 시였다. 나는 이 시를 원시 자연에 대한 희구의 노래로 읽었다. 원시 자연이란 인류가 농경문화를 갖기 이전, 곧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가 열리기 이전 태고의 자연이다. 그것은 문명인들이 잃어버린 세계, 과학기술 물신주의가 박멸해버린 유토피아, 그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다. 우리는 ‘사냥’ 대신에 ‘소비’를 하고, 우리 안의 야수적 충동은 문명의 교양으로 순치되고, ‘자연’은 콘크리트 정글의 ‘회색도시’로 대체되었다. 수직으로 자라는 콘크리트 도시란 실은 인간의 외골격에 지나지 않는다. “대홍수 이전 존재들에 대한 유기적 기억들은 콘크리트라는 근대의 미로 속에서 굳어버”린 것(비츠케 마스·맛떼오 파스퀴넬리 〈도시 카니발리즘 선언〉)이라면, 모든 메트로폴리스란 실은 우리 스스로가 으깨고 부숴서 감춰버린, 인류의 계통발생 기억과 무의식의 영구적 대체물인지도 모른다.
자, 다시 이정훈의 시로 돌아가자.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은 큰아버지는 산을 타며 짐승들을 잡는 사냥꾼이고, 아버지는 어두운 골짜기가 싫어 산등성이로만 다니던 사냥꾼이다. 나는 아버지가 밟고 다니는 절벽 아래서 작살을 갈고 물속 범들을 포획하는 사냥꾼이다. 재미있는 것은 물과 뭍이 바뀌고, 그에 따라 물 속 쏘가리는 호랑이로, 뭍의 호랑이는 쏘가리로 변신한다는 점이다.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가장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라는 구절의 전언이 바로 그것이다. 물속에서 우수리 범이 물살을 타고 올라온다. 반면에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에 따르면, 조선표범은 물속 짐승같이 부레를 가졌다. 야생에서 동물들을 잡는 부계 혈통의 자아에 대한 자랑스러운 확신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단하다.
원시 자연에 대한 희구는 결국 인간 본성이 동물혼이라는 암시다. 동물혼이란 문명이 배척해버린 야성적 충동에 지배당하는 혼을 뜻한다. 동물혼은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힘들이 이끌어간다. ‘나’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 먹고 동굴 속 낙엽잠”을 자며 문명의 흔적들을 지우고 야생생활에 길들여지는데, 그 결과 ‘나’의 몸은 원시 자연에 적응하며 변화한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는 구절이 그 사실을 드러낸다. 이 구절에서 집과 아버지는 관습들과 규범들이 지배하는 문명의 표상으로 읽힌다. 더 놀라운 것은 물속의 호랑이인 쏘가리를 사냥하던 ‘내’가 차츰 쏘가리가 되어간다는 사실이다.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라지고, 아가미가 생겨난다는 구절은 실제 인간 신체에서 동물 몸으로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문명 세계에서 원시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호랑이나 쏘가리와 같은 야생동물이 가진 동물혼은 현대 인류가 갖고 있는 병든 본능적 충동과 다르다. 건강한 동물혼으로 살아가는 것들은 자율적이고 생산적인 힘과 에너지로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고 자신을 부양한다. 문명인들은 자신들의 호흡기관, 신경절, 내장 속에 동물성 심연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문명 세계의 구성과 통제에 따라 겨우 그것에 기생하며 삶을 영위할 뿐이다. 사람들은 자율성과 생산성을 잃은 채 호랑이나 멧돼지를 사냥하는 대신에 인터넷에서 정보를 사냥하고, 들판을 경작하는 대신에 금융시장에서 유망한 주식을 사거나 이익을 내는 파생상품을 사들인다. 내가 주식과 금융의 파생상품에서 이익을 거둘 때, 실은 이것이 내 친구의 살이며 뼈에서 나온 것임을 꿈에라도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에서 친구의 살을 뜯어먹고, 친구의 피를 마시며 살아간다. 문명은 우리가 갖고 있던 ‘동물몸’과 ‘동물혼’을 압박했고, 그것들은 우리의 본성과 무의식 안으로 스며들어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한다.
이정훈의 〈쏘가리, 호랑이〉를 읽으며 윌리엄 블레이크(1757~1852)의 “얼마나 강력한 망치로, 얼마나 힘센 사슬로/대체 어느 용광로에서 너의 뇌를 만들었을까?/어떤 모루로, 얼마나 강한 힘으로/그 무시무시한 공포를 옥죄었을까?”라는 ‘호랑이’라는 시를 떠올린 것은 자연스럽다. 호랑이는 지상의 가장 강한 동물 중의 하나지만 지금은 문명 세계에 참수당해 멸종 위기에 처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 문명의 신진대사 중에 자연을 잃어버리고 디지털 진화를 하며 다른 종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인간 역시 멸종 위기의 종임에 틀림없다. 현생 인류는 전자기술과 디지털 과학기술이 보장하는 안전지대 속에서 겨우 발효 음식들과 삭힌 음식들을 삼키며 살아간다. 이 음식들이란 무엇인가? 이 음식들이란 “죽음에 맞선 안전장치로 출현”한(비츠케 마스·맛떼오 파스퀴넬리, 〈도시 카니발리즘 선언〉) 것들이다. 쏘가리들은 계곡의 물속을 범처럼 내달리고, 호랑이들은 산등성이를 마치 날개 돋친 듯 날아다닌다. 이 태고의 시절에서 떨어져 나온 나는 한밤중 식탁에 앉아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의 시를 읽는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정훈(1967~)은 강원도 평창 출신이다. 20년차 화물 트레일러 운전기사인 그가 난다긴다 하는 문학청년들도 어렵다는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하면서 화제인물로 꼽혔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당연히 그를 알지 못한다.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평창군에서 다섯 번째로 경운기를 살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중·고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공부는 뒷전에 두고 학생운동에 열심을 내는 바람에 학점이 2.0에 미달해서 퇴학 처분을 당했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구치소에도 다녀오며 인생의 쓴맛과 신맛을 다 보았다. 다시 강원대학교에 재입학해서 졸업하고 찾은 직업이 화물 트레일러 기사였다. 동해·삼척과 담양·제천·영월의 공장단지에서 전국 각지 레미콘 공장으로 시멘트를 옮기는 것이 그의 일이라고 했다. 마흔 무렵 민예총 아카데미에서 한 시인의 시창작 강좌를 듣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근육과 뼈를 써서 하는 힘든 노동 틈틈이 트레일러와 밥 먹으러 들르는 식당에 웅크려서 시를 썼다. 그러다가 2013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덜컥 당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