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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51-58>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독일 출신의 미국의 사상가였던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말로 ‘소유냐 존재냐’ 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책 제목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는 소유지향적인 삶이 있고 또 하나는 존재지향적인 삶이 있다고 하지요. 소유지향적인 삶은 돈과 재산, 권력과 사회적인 지위 같은 것을 소유하면서 거기에서 자기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려 하고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외부적인 것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늘 불안정하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풍성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해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가 필요한데도 불안정 현실 때문에 두 개 세 개 열 개를 미리 확보하려고 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달려들게 되면 결국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한 경쟁과 다툼이 있을 수 밖에 없지요. 그런 다툼이 일상화 되어 버리면 결국에는 인간성을 상실해 버리고 짐승 같은 본능만 남게 되고 맙니다.
반면 존재지향적인 삶은 사랑, 창조성, 서로 평화롭게 공유하는 삶의 형태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런 삶은 물질적인 소유나 외부적인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내면에 성숙한 인격과 성품과 바른 가치관을 바탕으로 현재의 순간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데에 더 중점을 둔다고 하지요. 즉 무엇을 소유했고 어떤 단계를 성취했느냐가 삶의 관심이 아니라 오늘 내가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살아가느냐에 관심을 둔다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소유지향적인 삶에서가 아니라 존재지향적인 삶에서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주장을 예수를 믿는 기독교신앙에 적용해 본다면 신앙의 길을 가는 것에도 소유지향적인 신앙이 있고 존재지향적인 신앙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소유지향적인 신앙은 믿음을 통해 뭔가 외부적으로 얻어지는 것에 집착합니다.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성공의 복, 기도하면 응답을 얻어야 하고, 교회에 다니면 직분을 가져야 하고, 이왕이면 더 높은 직책으로 올라가는 것에 매달리게 되지요. 심지어 성경을 대할 때에도 성경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보다는 성경을 내가 몇 번 읽었다, 성경공부를 어떤 단계 어떤 과정까지 공부했다, 또 기도를 나는 하루에 몇시간씩 한다, 전도를 일년에 몇 명을 한다, 이렇게 믿음을 통해 손에 쥐어지는 소유나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믿는 것 같이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소유지향적인 믿음으로 과연 행복한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반면 존재지향적인 믿음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 집중합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지요. 일이 잘되어서 성공했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런 성공 앞에서 어떻게 하셨으며, 되는 일 없이 실패해서 망했을 때에도, 때로는 심각한 질병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해도 예수님은 이런 실패와 시련 앞에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하고, 그 예수님을 따르려 합니다. 예수 믿어서 어떤 복을 받았는지보다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고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믿음의 의미와 자부심을 느끼지요.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6장은 유명한 오병이어 기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먹을 게 항상 모자랐던 그 시대에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모두를 놀라게 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열광했고,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세우자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였을까요?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앞부분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즉 너희가 나를 찾고 따르는 것은 떡을 얻고자 하는 소유지향적인 태도이지 내가 행한 기적 속에 담긴 생명의 메시지, 즉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기적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를 깨달으려는 존재지향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나눠주셨던 떡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떡을 줄 수 있었던 예수님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즉 떡에 대한 관심에만 머물지 말고 그 떡을 주었던 나 예수에 대해서,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지, 예수께서 무엇을 이루어가시는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고 강조하셨던 거죠.
하지만 불행히도 사람들은 떡에 대한 관심에서 예수님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즉 소유지향적인 믿음에서 존재지향적인 믿음으로 넘어가지 못했다는 거죠. 본문 바로 다음 절인 60절에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그러다가 66절에 이르게 되면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즉 떡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거라면 더 이상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따라다니지도 않겠다는 거죠.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의 소유를 위해 필요할 뿐이지, 예수님과 함께 존재하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 말씀은 이처럼 떡, 즉 소유에 더 관심이 있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시는 여러 내용 중에 끝부분이지요. 예수님은 거침없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51절을 보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8절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은 육신의 떡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나 예수가 진정한 생명의 떡이심을 계속 강조하십니다. 육신의 떡을 먹는 것은 육신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줄 뿐이지만 51절의 말씀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인 나 예수, 55절 말씀처럼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은 일시적인 배고픔이 아니라 참된 생명, 즉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54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58절에서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먹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단지 육신의 예수님의 살과 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살과 피를 지니신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사셨던 예수님의 모든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온전히 받아드리고,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우리도 따른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특히 예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능력, 부활의 생명력을 온전히 믿고 받아드리고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내가 온전히 받아드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예수님의 삶에 온전히 들어가는 거죠. 밥상에 있는 음식들은 나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음식들을 먹으면 그 음식들과 나는 온전히 하나가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예수님과 내가 모든 면에서 더 일치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5:5절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고, 요한계시록 3:20절에서는 ‘내가 그와 더불어,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던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이 예수님을 먹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먹는 것을 의미하는 소중한 예식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즉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로 먹고 마시면서 예수님과 내가 더 온전히 일치되어 가고, 예수님의 모든 삶에 참여하려는 믿음의 의지를 다지는 예식인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내 소유가 많아지거나 내 겉사람이 더 세련되어 보이게 하는 소유지향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셨던 예수님의 삶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지요. 곧 존재론적인 믿음이어야 하는 겁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예수께서 주신 떡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육신의 떡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초점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오직 예수께 초점을 두고, 예수님께 모든 관심을 두고,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배우고 따르려는 신앙입니다. 이 중심이 흔들리면 안되는 거죠.
이 세상의 양식과 모든 소유의 중요성을 어찌 무시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한계성도 분명 인식해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 양식과 소유에만 의지하게 되면 그 한계성이 왔을 때 우리도 무너지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아있는 떡, 즉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하고, 그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거죠. 죄와 비극과 어두움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생명력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참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시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분명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