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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신실하게하시는 지인께서 이렇게 질문을 하셨읍니다.
성경말씀의 ,6,6,6 짐승표 의 경계말씀에 대하여 불경말씀 18 여래장과 비유하시어
소개하시는 것 같은데 이러한 획기적인 이치를 소개한다면.
공개적으로 공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더 안좋겠느냐는 의견을 주셨읍니다.
우선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다면 말입니다.
넌지시 우회적으로 묻는 것 보다, 바로 들이대야 합니다.
우회적으로 질문하신다는 것은 이미 나름대로 당사자의 견해가 섰기 때문에
우회로 돌려 질문할 수 있는 것이니. 어느정도 경지는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읍니다.
견해를 바로 피력하고 저의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 거래가 아니겠읍니까?
그렇다면
이럴수록 바로 들이대고 찌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인께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다가섰기 때문에 이러한 건의를 드리는 것입니다.
좋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바람직한 의견이며 상식적이거나 보편적으로 불특정한 다수의
모든 분들에게 내 놓을 수 있다면 공공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으면 보다 더 빠른 전달력은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헛수고일 것입니다.
왜인가? 그 까닭은 불특정한 다수의 대중들은 아직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도통 모릅니다.
모르는데 무슨 공유력이 주어질 수 있는 그러한 수준의 내용으로 전개될 것은 아직 아니다.. 할 수 있읍니다.
이정도 소견자가 이를 공유하게 할 힘이 있다면 역대조사나 선지자께서 벌써 이해가 되도록 그렇게 펼쳐 놓았을 것입니다.
말로 문자로 군더더기로서 공감되어지는 것이 지혜가(반야) 아닌것입니다.
성인들의 진리의 최고봉 자리는 헤아림으로 드러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돌이켜 스스로 자기 내면을 들어다 보는 자리 입니다.
이를 주역에서는 逆觀(역관: 거스릴 역) 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계시록이나 반야심경 같은 문자로 줄줄 엮어 놓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텐데요
문자로 마땅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최고봉의 봉우리가 있으면 둘째 봉우리 세째 봉우리를 거쳐서 최고의 봉우리이니
성인들께서 표증하시는 진리의 최고봉을 보여주시면서 대중들의 본보기로 삼게 하신 것이
선지식들이나 선각자의 넘버 2 의 최고봉 을 올라갈 수 있는 루트를 소개하는 소식이며
둘째 봉우리 세째봉우리에서 우러나는 소리들을 전부 대중들에게 최고봉을 바라보는 계단이며 전망대
역활을 하여 이를 접할 기회를 , 선지자 선각자 , 조사 들이 열거해놓은 자욱일 뿐입니다.
최고봉을 올라가는 길을 딲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걸어가고 로프를 걸어 빙벽을 타던지간에 올라가는 자는 스스로 당사자 문제입니다.
그런고로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열거해놓은 점을 명백히 하면서 가이드 자리로 표식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며 반야심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객관 주관 뭐 이런것으로 진리를 논하는 자리는 아니다 할 수 있겠읍니다.
요한게시록? 이 말씀 작난이 아닙니다.
대부분 그냥 비슷하게 목회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이야기 하는데 말입니다.
제가 보아서는 개그수준이며 고추먹고 맴맴 하는 장터가서 담배먹으신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특정적인 고향 동기모임카레판에 나름 견해를 소개하는 것은.
진리의 본 면목은 相爲性(상위성) 에 있기때문입니다.
상위성은 무어냐...
내가 있으려면 남이 있어야하고, 내가 없으면 남도 없다는 것을 이름하여 상위성이라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인연법이지요.
본인이 태어난 소이점은 동시에 전자에 죽은 처소에서 비롯하는 면목을 지니고 비롯해서 내가 생겼기 때문에 그 인연법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빛이 그렇게 작용하는 와중이기 때문입니다. 빙둘러 다시 원자리로 가는 귀소본능은 마음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연어의 법칙입니다, 대자연 현상이지요.
산중에 길을 잃고 가며 가며 가다보면 어데로 가는 줄 모릅니다.
이럴때는 나무를 잘라 보면 나이테가 멀리 벌어지는 방향이 북쪽입니다.
북족 방향을 쥐고 걸어가면 방향타를 전부 점치고 목적하는 바를 잧을 수 있는 것 처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된다 이 말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전자부터 고향의 빛 덩어리들과 함께 여래작용으로 굴러와서 태어났다라는 것을 지론으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어느누구나 고향인들에게는 이상한 억측, 과대한 포장, 억울함, 이익의 편승점등 모든것이 뒤 범벅이 되어서
바람을 타고 빛 운동을 하는 와중입니다.
가장 예민한 바운다리이지요, 감수해야 합니다, 수용해야 합니다, 이행해야 합니다.
이 소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O 견을 할 것이고 십을 행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읍니다.
그러므로 공공적으로 공감하는 면이 아주 희소한 내용들입니다.
인연에 의한 마찰력 간섭현상 저항력 마져도 함께 굴러가는 것이 6 도 의 우리들이 사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대중들은 아직은 이러한 내용을 소개하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경험치의 영역범위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향계시판으로 한정 할 뿐이고 실력도 없고요..
단지 진정성은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읍니다.
그러므로 모르는데 무슨 공감력을 모을 수 있겠읍니까?
그냥 인연의 줄기따라 인연에 의하여 보는 분은 보게 되어있는 확률의 인연이 지대하게 큰 것이 "고향언덕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무리 수많은 성인들께서 펼친 진리의 이목과 면목을 펼쳐도
공부로, 논리로 이치로 풀어내는 이러한 문자질은 진리의 측면으로서는
전혀 상관없는 글작난에 불과 한 것입니다. 하지만 10 번째 정도로 미약한 봉우리는 될 것입니다.
단지 내가 태어난 고향 의 물가에 깊은 물 하나가 놓여 있음을 인연작용에 의햐여
익숙한 장소로 여기는 것처럼 저수지 에 주어진 그대로의 지형적 삶의 노름을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조금 깊은 물이 있읍니다, 그 깊은물은 그 동네에서 사는 모든 이들이 이용하고
담수하고 낚시도 놓고 수학도 하며 배도 띄운다 이 말입니다.
그것만 알리는 역활만 제공하는것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체갈할 소식이 이 물속에 있다.
이 깊은 강은 "고향의 강" 을 부른 김상진의 노래 가사와 같읍니다.
단지 고향지형에 깊은 강물이 어느지점에 있는데 둔덕에 앉아 낚시줄 하나 던지고 호기심을 가지면 깊고 맑은물 속에 무엇이 있는줄을 헤아릴 수 없지만 , 이를 모르고 보이지도 않지만 같은 물가의 둔덕에 앉은 같은 인연들이 낚시하다보면
큰 월척도 갑자기 엮이여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사람의 인연된 몫입니다.
하지만 큰 사건이지요. 큰 소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되면 같이 공유하겠지요. 고향의 강 은 고향에 있는 익숙함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인연법이라고 합니다.
아! 여기서 누가 월척을 하나 낚았다.. 같은 인연끼리 옹기종기 모인 강가 이므로
가능하고 빠르며 금새 익숙해지는 지형지물의 인연에서 깊은 물이 어느 지점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인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깊은물 하나정도 같은 인연끼리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좋겠읍니까., 부처님 십대제자중 목건련 이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와 같읍니다.
시절인연이 당도하면 금새 그 깊은 물에는 이러한 큰 고기가 많이 있다 라고 알아채릴 것 입니다.
오로지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같은 인연배아줄기에서 형성된 지형에 깊은 물을
지닌 강으로 인연되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니까요.
같이 나누워 먹을 수 도 있고 서로 간에 신나는 일 아닙니까. 단지 인연의 소중한 면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성인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직지신심으로 깨어나는 것을 선지식인들이 표현한 글이 있읍니다.
理解不得(이해부득) 如擊石火(여격석화) 事閃電光(사섬전광)
"깨침의 자리는 마치 돌맹이끼리 부딧쳐서 버쩍 하고 빛이 전개되는 일이니 이해로 얻을 수 없다,"
선지식이신 관응스님의 말씀으로서는 무문관에 6 년을 칩거하고 도를 수행하신 분인데
겨우 한 5 분 그 맛을 보았는데 희한하데?!!... 이게 견성자리이고
현기스님은 그러한 큰 스님 말씀이 맞다 하시면서 자기는 단 1 초만 맛을 보았다고 했읍니다.
찰나를 잡아야 하는 것이 깨어남이며 깨침입니다.
이것을 아무리 주저리 주저리 문자로 논하고 글고 통밥으로 머리에 담아 내 놓은 견해는 전부
작난이고, 사실 말도 아니되는 우수게 소리라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어려운것이고 반야심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깊은 강을 이미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면면의 지형에서 빛이 번쩍하고 섬광처럼 광선 한 줄기가
이루어지지만 번쩍 한번 하고 나면 사라집니다.
번개가 일어남!
번개가 사라짐!
O 아닙니까?
그러므로 O견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찰나지간 아닙니까?
현기스님의 1 초지간에 섬광을 보았다 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게 선지식인들이 40 년간 해발 1,100메타에서 혼자 살아내시면 그 철두철미한 고독과 함게하시면서
일초간의 찰나지견을 경험하시고 보는 그것이 득도 입니다.
40년 독거한 것이 현기스님게 귀의합니다. 바로 이 소식하나인 것입니다.
이를 空(공) 이라 하고 無(무) 라고 할 수 있으며 영 이라고 할 수 있지요.
군대가본사람은 다 알겠지만
종 가늠쇠 가늠자 의 엑스측 와이측 의 교착점을 O 점이라하고 이 O 점 을
확보해서 조준점을 완성하면 목표지점을
겨냥하여 일치될때 방아쇠를 당기면 목표물에 정확하게 관통하지요..
그런데 영점조중하는 당사자의 보는 관점마다 그 영점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렇지요? 보는 관점과 시야의 판단 분별성이 각자 주관적으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단지 유사성의 영점 기준을 맟누는 법이 있겠지요.
하지만 오로지 O 점은 스스로 맞추어야 합니다, 각자 수행해야 O 견의 도리를 안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옮길수도 전할 수 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인연줄에 의해서 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 이라 하고 반야심경이라 하는데 , 한 봉우리 10 번 째도 될까 말까하는
봉우리에서 내 놓는 견해를 제가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있읍니다. 이것뿐입니다.
다른 분들은 대부분 한 9 번째 봉우리에 올라 있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읍니다.
구구절절이니까요? 사는게 구구절절 아닙니까?아혼 아홉고개는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를 9 홉 고개라고 정의해 보았읍니다.
9 에서 한 단계 만 더 가면 10 번째인데 여기까지만 가이드 하겠다는 수준일 뿐이지요.
인연이 되어 이 가이드에 따라 10 번째 봉우리에 넘어서면 그때는 그 각자의 인연 몫일 것입니다.
영, O, 空, 無 전부 말 작난입니다.
반야심경을 소인이 10 번째 봉우리 수준으로 한번 소개 해 보겠읍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과 전혀 한 마디도 틀리지 앦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큰 바다에서 여럿이 그물처럼 엮여 빽빽하게 파도치는것을 돌이켜 O 으로 이르게 되는 것을 보는 마음의 경전
해의) 마음을 큰 바다처럼 광활한 우주공간으로 상징하여 표현한 것이고, 여기에 배 하나를 띄우고
스스로 지닌 지혜로서 일 없음을 유지하며 O 을 향해 항해하는 마음의 경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한자어로 음역한 것이지만 마하(摩訶) 는 "크게 꾸짓는다 " 하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O 의 이치를 모르니 선각자들이 크게 꾸짓어 깨어나게 하려는 경전을 반야심경이라 이름합니다.
성인의 최고봉 진리의 봉우리 보다 약간 낮은 곳에 기거하는 선각자가 내 놓는 소식자리다 이 말입니다.
최고봉 진리에 거하시는 성인들께서는 이따우 말도 전혀 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오로지 선각자들이 눈치를 실실 보면서리 귀 띰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인연되는 사람만이 이를 듣겠지요,
자꾸 조선에 좋은 말로만 갖다 부친다고 진리를 전하는 글이 아닙니다.
파도치는 사바세계를 항해하는 입장으로 중생이지만 언젠가는 파도는 다시 고요해지는 이치가
있는게 우리들이 내장한 이 마음자리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O견하라 이 말입니다.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이:
자재해서 보는 보살이 라는 의미입니다.
관자재보살을 다른 말로 바꾸면 관세음보살 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무엇이냐? 세상소리를 다 보고 관할 줄 아는 보살입니다.
세음(世音: 세상 世, 소리 音) 아닙니까?
쉽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소리를 보는 보살인데 , 소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빛에서 온 것입니다.
빛은 충돌해서 서로부딧혀서 번쩍 하고 번개가 일어나면 그와 같음의 소리는 조금있으면 나게 되어있읍니다.
이 소리가 이세상 공간에 돌아다니면서 머무는데 이를 다 보고 아는 분이 관세음 보살이므로
관세음보살은 결국은 빛을 다 보고 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이처럼 모두 빛이며 빛이 운동한다 이 말입니다.
빛이 운동하는데 인과로서 항상 소리로 변하여 나타나는 것인데 소리를 자세하게 보면
음파 로서 파장 파동력의 빛 싸이클 을 내장하고 있음은 다 아시리라 믿읍니다..
위에 소개했듯이
깨침이라는 것은, 깨어남이라는 것은 O 을 보는 자리인데
"이해부득, 여격석화 사섬전광 이라 했읍니다.
급방 번쩍했다가 한 순간 보이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이 빛입니다.
빛이 생김 그리고 다시 사라짐=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읍니다.
번개치는거 이해할 수 있읍니까?
슬픈것도 소리에서 나옵니다, 소리는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부딧힘으로 나오는데
역시 빛입니다, 그런데 슬프먼 어에라는겁니까?
그냥 슬프면 되요, 조금있으면 슬프지 않음이 반드시 옵니다. O 을 스스로 행하는 영혼이
우리들의 사연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누가 홀짝 홀작 하고 울면 다 그 속에는 목적이 다 있고 추구하는 생각이 다 있는것이지요.
그냥 놔두면 됩니다.
슬픔에 무슨 이유가 있읍니까? 아주 기뻐하는 표정을 보면 웃읍지도 않다니까요, 곧 있으면 안 기쁜게 와서 상계질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늘 평상심을 유지한다 하는 것입니다.
뭐 잠깐 기쁘다고 노바닥 그 여운만 추구하고 살라꼬 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걸어다니는 것도 문제가 되고 사건이 일어납니다. 신발신어야지요 걸어가며 땅을 밟고 이리저리
좋은 길만 가야 하니까요, .. 항상 작용하면 반작용이 따라 같이 동시에 움직이니까 늘 O 이라는 사실을
되새길줄 알아야 합니다.
탓닛함 스님의 걸어가는 행보중에 O 견을 보는 수행법을 세사에 소개한 사실도 있읍니다.
안 그래요?, 슬픈것 기쁜것 이거 전부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다시 O 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O 질 입니다, 공(空)질이고 무(無)질입니다.
그러므로 관자재보살은 빛과 소리를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이렇게 O 질 하는 사물의 이치를 전부 보는 보살을 말하는데 ... (바로 우리들을 대위한 O 견을 본 경험있는 조교가 시범적으로 나와서 하는 말합니다)
行深般若波羅密多時(행심반야바라밀다시)
바다의 깊은 물의 본질을 보듯 여러 중생들이 섞여 얽혀서 그물처럼 이루어진 파도치는 마음작용을 볼때
照見五溫皆空度一切苦厄(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
일체가 고통이고 액란을 조성하는 모든 오온도 공(영) 이되는 것을 비추어 봄이니...
참고) 오온이 무엇인가. 색 수 상 행 식 아닙니까?
색은 사대를 말합니다, 지 수 화 풍 이 네가지가 서로 섞이며 빛을 생기게 하는 것이지요.
이 빛은 오감을 가지는데 쉽게 말하자면 몸의 감각처인 신경줄을 오온이라 합니다.
이 신경줄을 자세하게 해부해서 보면 나무가지처럼 삼각지 형태로 뻗어 균형을 잡으면서
몸의 가장 외부자리인 말초까지 뻗어 옴의 감각을 형성하여 안과 밖을 연결합니다.
이것이 지각을 낸다 이 말입니다.
감각과 지각의 근거를 종합적으로 형성하는 과정을 보면
1,색으로 모습인 빛을 감각하고, 고로 신경줄로서 외부의 감각을받아들이는
2,受(수)가 있고 이로서
3,想(상: 생각할 상) 을 행하며 지각하고
4 行(행) 하고
5,,識(알 식) 으로 앎을 내는데 이게 전부 고통이고 액란의 작난치는 것이니. 이게 전부 진리의 마음자리는 빛운동이라 O 운동으로 반연하여 작용하면서 O 으로 원상회복 하는 것입니다.
오온이 있으면 (작용하면) 바로 번개불처럼 사라지는 O 을 동시에 행하는 것이 빛운동이며 이 빛 운동은
O 으로 돌이켜 상계하여 항상 O 질 하므로 그 본질은 없음과 같음이니 청정하고 텅 비워진 마음상태를
항상 유지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O 은 없는 O 이 아닙니다, 인과율로 소리가 되어 머물고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빛도 생기하면 O 으로 동시에 행하여 보이지 않고, 소리는 머물다가 반연되어 반대 파동으로 거슬러
O 으로 인과율을 성립하게 한다 이 말입니다.
윤회하면 윤회하면서 O 질 하고 , 윤회없음으로 행 하고 아무런 작용도 원래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면 그냥 O 이다 라고 하시면서 O 적으로 고요멸멸 적적 부동 상주한다 이 의미이기도합니다.,이 말을 드러내는 소식을 관자재 보살께서 본 것입니다. (견성: 성품을 본다, 오온이 공함을 보고 O 질 하는 빛 운동을 다 스스로 자유스럽게 본다)
(관자재보살을 모습으로나 형상이나 소리 및 향기로서 보아서는 아니됩니다,무형의 법신보살이십니다, O 이기 때문입니다)
舍利子야 色不異空 空佛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이익을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을 쉬게된 (버린) 부처님 제자야!(舍: 쉴 사, 집 사 , )
색불이공 : 빛은 둥근데 빛이 생기자 마자 금방 없어지는 (찰나) 지간에 다시 O 으로 상계하여 아무일없음이 니. O(공) 과 빛이 다르지 않고.< 빛생김- 빛 사라짐= O(공),無(없기도 있기도 하면서 없는)
공불이색 : 뒤집어 말해도 (도치법) O 과 빛은 다르지 않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러므로 색은O(공)이요 공은색이고.
수상행식 역부여시 :그러이까 오온인 수상행식도 역시 그처럼 다시 O 으로 돌아와게 된다 (역부여시)
<復(복) 은 다시 돌아올 복字를 부字로 표현함>
舍利子야 고로 是諸法空相 이고 不生不滅이며 不垢不淨이고 不增不減이라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야 : 이득을 행하는 마음을 쉰 부처님 제자야.
참고) 이득을 행하거나 바라는 작용을 하면 반대로 돌이겨 이득을 방해하거나 바라는 것을
거슬러 반작용하는 빛의 운동으로 O 이 (공이) 되는 것을 보았으니 이득바라는 행위는
일절하지 않는 부처님의 십대제자로서 공을 터득한 자를 사리자라 합니다.
시제법공상: 모든 물질계의 (빛) 운동의 모습은 전부 O이다, (공이다) <노바닥 시간차이가 나지만 동시에
O질만 하여 공을 유지한다, 본전질만 한다, 이런의미입니다, 이 본전질 하는 O 이 늘 상주한다
이를 부처성품이라 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고 부증불감이라:
불생불멸이라 생겨나면 다시 멸해서 O 으로 계산 해는것을 동시에 함이니 생겨나는것도 멸하 는것도 전부 공이라 O 이니 無(무) 와 같으니 영원히 태어나고 영원히 죽는것이 원래 없다
불구부정이라 더러운 물이 원래 있는것이없음이니 더러븐 작용을 빛이 했으므로 더럽지 않게
끔 다시 거슬러 O 질 하는 것이니 더럽고 깨끗함ㅇ리 원래 없이 무조건 O 질계산해버리는게
생명운동의 이치다.
부증불감이라 : 더 늘어나면 결국은 다시 줄어드는 O 질을 한다. 그러므로 원래 늘고 주는게
없다, 돈을 많이 벌으면 다시 다 내놓아야 하는 O 계산으로 때려 본질 생명성품 으로 회계 처림
하는 차변이 있으면 대변이 있다는 의미)
是告空中無色 無受想行識(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이와같은 고로 공중에 (O 중에) 모습 빛이 따로 없고. 수상행식 오온도 없다 , 공이다 <오온이 없다, 항상 O 의 작난이다 하는 것입니다)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무의식계
: 이 내용에서 無字 를 괄호밖으로 빼 봅시다 :
무(안이비설신의 + 색성향미촉법+ 안계,무의식계) 요렇게 말입니다.
안이비설신의는 6 근이지요, 우리몸에 주어진 감각기간입니다, 6 이요.
색성향미촉법 6식이지요, 우리 몸 밖에있는 것을 보고 만나면 느끼는 감각요인입니다, 이 역시 6 이요
안계 의식계 는 6 경이지요, 눈으로 보는 외부세계
귀로 듣는 소리의 세계
코로 냄새받는 대상이 외부에서 주어진 세계 (고기 썩으면 냄새 맡는 것 처럼)
혀로 맛을 보게 하는 세계
접촉하며 느끼는 감촉세계
이로서 앎을 인식하게 하는 세계 등 6 경을 말합니다.
6근 6식 6경은 요한계시록의 6,6,6 입니다.
6+6+6 은 종합적인 인체의 몸을 형성하고 운동하는 18 을 행하는 것입니다 ( 6 세개를 합하면)
이 18이 십진(십방) 아닙니까? 이를 짊어진 예수가 십자가에 몸을매달고 십방의 생명들을 위하여
자기와 같음으로 18을 행하여 36의 인과율을 증하시고 O 으로 불생불명을 증명하시고자 부활하십니다.
이를 18 여래장이라고 하고 이에 다시같음으로 거슬로 18 을 비추어서 반연하여 온전한 36 여래장용
36 여호아 선을 행하는 것을 O 을 행한다, 온존한 성령의 임하신다 라고 하고 인과율이 자연적으로
동시에 붇는다,우연이 없다, 필연적인 O 운동이 빛 운동이니 이를 행하신다. 라고 관자재 보살이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80 반경만 보는 백성들을 6,6,6 표짐승표를 물고 다닌다 하는 것이고
180도 인과율을 다 보고 알때 나머지 180 의 돌이킴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아는 믿음을 내는 자를
성령의 은총을 입었다 하는 것이고, 견성하여 깨침을 열었다 하는 것이니
돌이킴과 회개 참회를 하게되면 O 견한다 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불경이 무엇이 다릅니까?
성경은 빛 7 로서 심판하고
불경은 7 불로서 일곱걸음으로 빛을 심판하는 부처님을 말씀하시는데
뭐가 다릅니까?
물질계는 12 인연법이고 12 진법이며 삼승을 타니 (성경은 삼위일체를 타니) 12 곱하기 3 은 36 입니다.
O 으로 굴리는 것이 빛 운동입니다. 빛은 생명이고 36 여래장 여래선은 진리입니다.
너무 어렵게 풀 필요가 없읍니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塵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
그러므로 어리석음도 O으로 동시에 계산하니 어리석음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요
역시 어리석음이 다 한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역무무명진) 원래 O 이고 청정함을 유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지 늙고 죽는것도 없고 늙고 죽는것으로 다 하는 것도 없다 이 말씀입니다.
죽으면 다시 와야 한다 이 말인데 이를 반복 리사이클로 리필하는 작용을 윤회라 하고 변화를 탄다 하며
무상하다고 합니다.
무상한 이치를 진정성 있게 알게 되면 다시 윤회하지 않아도 됩니다, 늘 깨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O견)
자면 죽는 것입니다, O 견하면 항상 청정하니 잠이 되지 않읍니다.
이 자리는 이해부득 여격석화 사섬전광이라 하는 자리입니다.
예전에 성철스님께서 방장을 하실대 스님들 앞에 방망이로 후려치고 소리를 꽥 꽥 질렀읍니다.
한방 맞아 불이 번쩍하는 정신 들게 하자는 의미의 수행법입니다.
인생지란도 뒤통수에 한방 무엇인가에 맞으면 정신이 버쩍 들고 불빵이 왔다 갔다 하지않읍니까?
이것을 어떻게 이해로 보는 관점은 아닌것입니다, 빛은 충돌로 생기합니다. 정신줄의 광명입니다.
12 인연 순서에 7 번째가 다시 턴하여 돌아오는 소식을 O 을 탄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 7 은 심판이지요. 거슬러 같음으로 다시 돌려주는 것을 말하며 비추어 준다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항상 받으며 O 질만 하고 살아내고 있는 와중입니다.
요한계시록에 4 얼굴을 지닌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는 전부 4 대 지수화풍을 의미합니다.
날개가 각기 6 개라 함은 4 곱하기 6 은 24 입니다.
장로가 24 명이 보자하지요 2 4는 1년 360으로 공전주기로 친다면 24 절기로서 한바퀴 도는
O 운동을 말 합니다. 12 인연주기를 의미합니다. 24 시간을 음양 으로 짝하며 구성하면 하루는 12 진입니다.
이렇게 쉽게 단순하게 가야만 이해도가 빠릅니다, 그 이후부터는 각자의 수행인 것이고
항상 경전을 봉독하며자신의 마음깜냥을 확장시키고 넓혀 나가는 보현이 되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지면상 여기서 답변을 마치기로 합니다. 잘 이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미진한 저의 소개글이라 그게 늘 불만입니다
그러므로 달리 많으신 선각자나 선지자들의 훌륭하신 말씀을 기준하여 항상 궁리하고 이햐하고 공부하시는
습관을 가지시면 상서로운 좋은 조짐이 있으리라 믿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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