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평야[萬頃平野]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강 하류에 있는 농경지.
개설
만경평야는 김제시와 완주군·익산시·군산시에 걸쳐 있는 만경강(萬頃江) 하류에 형성되어 있으며, 동진강 하류의 김제평야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평야에 속한다. 인접한 김제평야와 더불어 김만경평야·금만평야·호남평야라고 불리며, 한국의 주요 곡창지대를 이룬다.
본래 만경평야는 홍수와 가뭄이 심해 대부분이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만경평야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 일제가 만경강 상류에 대아저수지와 함께 군산까지 60㎞ 이상에 이르는 관개용 수로를 건설하면서부터였다.
또한 해안 일대의 개펄을 간척하여 농경지가 확장되었고 만경강 하류의 김제시 백구면에 제수문(制水門)이 설치되어 바닷물 유입 구간이 축소되었다. 건설 당시 대아저수지의 총 저수량은 약 2,000만 톤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관개용수가 확보됨에 따라 군산시 서쪽의 해안에서는 간척 사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1935년에는 경천저수지가 축조되었다. 하천 개수와 저수지 축조 및 계속적인 치수 관개 사업으로 만경평야 일대는 수리 안전답으로 변화했다. 만경강은 조석(潮汐)의 영향으로 곡류(曲流)가 심했고 밀물이 삼례까지 올라왔다. 만경강의 직강 공사는 1930년경에 마무리되었는데, ‘구강(舊江)’이라 불리는 옛 하도(河道)들이 제방 바깥의 농경지 가운데에 남아 있다. 1970년경에는 호남선 만경강 철도 상류 쪽에 소규모의 하구둑인 제수문을 설치하여 만경강 물을 전부 농업용수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과거 군산은 쌀 수출항구, 이산은 농산물 집산지로 번영할 수 있었다.
자연환경
만경강은 금남정맥의 서쪽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율치마을 남동쪽 밤샘에서 발원하는데, 호남고속국도 동쪽의 완주군 봉동읍에 이르러 넓은 골짜기로 흘러나오면서 만경평야를 이루어 놓았다. 만경평야의 지질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암질 편마암이며, 화강암류가 심층 풍화되어 형성된 적색토가 주로 분포한다. 만경강이 나팔 모양의 하구를 통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 일대의 해안에 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있다. 간척에 의해 바다 쪽에서는 평야가 계속 넓혀져 왔는데, 평야의 해발고도는 5m 내외이다.
현황
만경평야 일대의 충적지에서는 쌀·보리·콩 등이 생산되며, 구릉지에서는 각종 채소와 사과·참외·포도 등의 과수 재배가 활발하다. 2010년 현재 김제시를 포함하여 군산시에서 부안군에 이르는 초대형 간척 사업인 새만금간척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사업 기간은 2008년에서 2018년까지이며, 새만금산업지구 국제업무, 연구개발, 산업생산시설이 들어설 계획이다. 이 사업이 완공되면 동진강 하류의 김제평야와 함께 만경평야의 면적이 더욱 넓어지게 된다. 새만금지구 간척종합개발사업을 통하여 만경평야 지역은 식량 자원 기지로서의 기능, 관광산업 기지로서의 기능 등 새로운 개발 국면이 기대된다.
참고문헌
『한국지명총람』11-전북편 상(한글학회, 19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청(http://www.sgfez.go.kr)이형석,
『한국의 강』(홍익재, 1997)
김정길, 『전북 백대명산을 가다』(신아출판사, 2001)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평산신씨 충효열 정려[平山申氏忠孝烈旌閭]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 있는 조선 후기 평산신씨의 충효열 정려.
개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만경의 하일도 진관포 어부의 딸[신성녀]로 태어나 농촌 출신인 경주이씨(慶州李氏) 이독금(李禿金)의 처가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맹인이었고 시어머니는 앉은뱅이였다. 또한 평산신씨는 팔자가 기구하여 남편마저 일찍 여읜 10대의 청상과부로서 시부모를 봉양하게 되었다.
그 딱한 처지를 보다 못한 친정 부모가 딸이 과부로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음을 불쌍히 여겨 개가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평산신씨는 “내가 본래 빈천한 집 딸로 개가하는 데는 부끄럼이 없지만 시부모가 늙고 병들어 다른 자녀의 봉양도 없는데 어찌 개가하느냐”며 한사코 뿌리치고 평생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여 수절하였다.
그리하여 눈먼 시아버지를 봉양하는데, 날아가는 오리라든지 동절기에 잉어라든지 또 죽순이라든지 시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지성을 다하여 봉양한 후 일생을 마치자 나라에서 효부 열녀비를 세워 주었다. 이러한 내용이 『만경향교지』와 『김제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평산신씨는 장절공 신숭겸(申崇謙)[?~927]의 후손으로 정려를 특명으로 받았다고 한다.
위치
만경읍사무소에서 군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약 3.2㎞쯤 가면 도로 왼쪽에 화포리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3㎞쯤 가면 화포리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 있는데 그 삼각 지대에 평산신씨 충효열 정려가 있다.
변천
평산신씨 충효열 정려는 1863년(철종 14) 겨울에 전라감사의 특명으로 세우게 되었다. 이후 1971년 5월 18일 5세손인 본 마을 이재원 외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중수하였다.
형태
평산신씨 충효열 정려는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집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홍살이 있으며, 바로 주변은 돌로 담장을 낮게 쌓아 놓았다.
참고문헌
『김제·금구·만경향교지』(김제·금구·만경향교지발간추진위원회, 1996)
『벽골의 충효유적』(김제문화원, 1997)
『전북의 정려·충효열비』(전북향토문화연구회, 2000)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7)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4-12-3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