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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생과의 인터뷰
일시:2009년 10월 25일 일요일
장소: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 캠퍼스(수원)
이화여대생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그들이 듣는 학과목의 과제로 현대문화를 창출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배워오라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검색 가능한 문화인을 선택해야 하며 또한 지도교수의 허락을 받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한그룹으로 짜여진 4명이 시인인 나(김윤자)를 찾아내었고, [김윤자 시카페] 홈페이지를 통해 지도교수의 허락동의를 받아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 캠퍼스 정원 야외 테이블에서 오후 3시에 만나 저녁 8시 30분까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의 시창작에 관계되는 모든 용구와 육필로 써두는 시노트와 시가 탄생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습작지, 문학기행 자취록 및 시집 등 모든 자료를 가지고 가서 아낌없이 시인의 시창작과정을 강의했다. 그들이 사전에 이메일로 질문한 4가지는 다음과 같다.
1.예술가들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서 작품을 만든다고 하죠. 김윤자 시인도 시를 쓰실 때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신 적이 있나요? 그 얘기를 자세히 들려주시고, 이것이 시를 쓰는 작업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2.김윤자 시인의 시에는 항상 다 채워지지 않은 무엇인가가 등장하고, 그것은 잎, 플랫 등 다양한 사물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어요. 그 외에도 뭔가 완성되지 않은 것, 꽃봉오리 같은 사물을 시에 많이 등장시키는 것 같아요. 김윤자 시인은 이렇게 뭔가 비워진, 다 채워지지 않은 사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가요?
3.김윤자 시인의 시 중에서 ‘샾보다 플랫이 아름다워요’가 있는데, 그 시를 쓰기 위해 피아노를 직접 치셨다고 했죠. 피아노를 친 후 시를 쓰신 과정이나, 그 과정의 의미를 자세히 들려주세요.
4.현대 예술은 인터랙션 아트(Interaction art)라고 할 만큼 대중의 상상력과 작품의 소통을 요구해요. 그런데 대중 예술과 달리 순수 예술인 시는 대중의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을 수 있는데, 김윤자 시인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시나요? 그리고 김윤자 시인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그것 외에도 이화인들을 위한 즉석 시(인터뷰 자리에서 짧게 지어주세요~)랑, 시를 쓰거나 글을 지으실 때 사용하시는 각종 도구(책, 노트, 펜 등등) 인터뷰 자리에서 보여주시면 되어요:)
참,사진도 몇 장 찍어야 하니까 예쁘게 입고 오시는 거 잊지 마세요^-^
인터뷰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일요일에 뵐게요!
먼저 [나의 문학세계]를 읽으며 수업했고 4가지 질문에 대한 응답을 각 항마다 여러 편의 시, [인동의 꽃],[설원을 걷는 독수리],[천둥 소리],[때론 꽃보다 잎이 아름다워요],[삼월의 눈꽃],[자동차 1-기다림],[자동차 9-미안해],[은행, 그작은 비원],[물길],[고무신],[깊은 소리],[별 하나 꽃불 피우다],[가슴으로 본 독도],[[선운사 동백꽃],[갈대, 존재의 이유],[산은 또하나의 진실을 江心에 묻고],[#(샾)보다 b(플랫)의 음이 아름다운 건],[사랑 4-머리카락],[감은 익으면서 큰다],[징검다리], 등을 예로 들며 답변 해줬다. 열심히 듣고, 열심히 적으며 배우는 학생들이 너무 대견하여서 계획보다 훨씬 많이 가르쳐주고 시인의 창작 세계를 보여주었다. 다 마치고 따끈한 칼국수를 함께 먹으며 오늘 만남의 기쁨을 나누었다. 보람되고 흐뭇한 인터뷰였다.
[나의 문학세계] / 김윤자 - 참여문학 2005년 봄호
1. 맑은 영혼의 결정체
시는 하나의 생명체다. 사람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것들에게 고유한 색깔과 품성이 있듯이 시에게도 독특한 색깔과 품성이 있다.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부모와 환경에 의해 인격과 삶이 결정되듯이, 시 역시 생명이 싹터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그 시인의 생각과 철학으로 빛과 향기가 결정된다. 그런 차원에서 시를 조명해 볼 때, 시 속에 어떤 영혼을 부여할 것인가는 참으로 심오한 문제다. 소멸되지 않는 그 생명은 탄생시킨 시인의 목숨을 놓는 날까지, 아니 목숨을 놓은 후에도 온전히 그 시인의 책임으로 남게 되니 말이다. 시를 쓰다 보면 인격이 다듬어짐을 느낀다. 시 속에 담아야 할 맑은 영혼을 찾다보면 내 영혼이 맑아지는 까닭이다.
봄 햇살에 움돋이한 나의 싹
숙망의 몽우리 맺으려 애끓는데
아직은 여린 나의 몸
짙은 초록빛이 돌 때까지는
사바나 초원
풍성한 식탁 앞 게으른 들짐승보다
포르티스모로 히말라야 산맥
숨가쁘게 차오르는
독수리의 고뇌를 먼저 배우고 싶다.
그 맹금의 탈 속에
나의 몸 몰아 넣고 시베리아 동토로 간다.
미지근한 땅에서 키운 발바닥으로는
철 지나 솟아오른 꽃대 받칠 수 없어
툰드라 설원
칼날 선 눈발 위 펭귄 걸음을 좇는다.
걷기도 전 날으려는 두 날개
언 가슴으로 끌어안고 가는
고행의 길, 나는 지금 행복하다.
북극점 빙벽이
보드라운 솜벽으로 보일 때까지 걸어
여명의 하늘 열리면
나의 속살 여물어
인동의 꽃으로 피어나리
그때 화포 안 꽃자리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들어서련다.
-[인동의 꽃] 전문. 조선문학 2000년 8월호
영혼 구조를 다듬으며 쓴 시다. 숨가쁘게 차오르는 독수리의 고뇌를 먼저 배우려 했고 시베리아 동토로 가서 칼날 선 눈발 위 펭귄 걸음을 좇으며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 걷기도 전 날으려는 두 날개 언 가슴으로 끌어안고 가는 고행의 길,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다 비워낸 사념의 바다에서 맑은 영혼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다듬어낸 속살이 여물면 인동의 꽃으로 피어날 테고, 그 꽃은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꽃자리에 들어서리라는 신념이다. 시는 엄연히 정신세계를 결정짓는 사회의 한 영역이다. 시인은 그보다 우위에서 시를 조정하는 거룩한 개체다. 시 앞에서 절대로 오만해서는 아니 되며,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맑은 울림으로 피워내는 것이 시인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의 시향은 그렇다. 외향의 아름다움보다 내적으로 영롱한 영혼을 부여함으로써 좀 어눌할지라도 맑은 영혼의 결정체로 탄생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리하여 그 한편, 한편의 시들이 세상에 날아가 순수의 빛으로 자기 역할에 충실하길 빈다.
2. 광활한 시세계 구축
김윤자 시인 부부-캐나다 문학기행 록키의 진주라 불리는 루이스 호수에서
한 채의 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터가 마련되어야 하고 건실한 주춧돌과 부속물이 준비되어야 한다. 그런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절대로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없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가 숨쉬고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광활한 시세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나는 여류 시인이지만 때론 남성 시인 못지 않은 강인함으로 시를 쓴다. 시 속에 웅혼을 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넓은 시의 공간을 확보해야 하고 큰 틀의 주제와 소재를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고단한 인내를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북극점 빙벽이 보드라운 솜벽으로 보일 때까지 걸어 여명을 맞이하기도 하고, 날개 달린 꽃으로 하늘을 날기도 하고, 설원을 걷는 독수리로 내려와 사각의 틀에 갇힌 단단한 나의 사고를 하얀 밤에 우수수 쏟아놓곤 한다.
길을 이탈한 건 아냐
하늘 아래엔 땅이 있고
그 사이엔 무한대의 길이 있어.
여기는 설원
보이는 건 순백의 눈뿐
고독한 흰 길에
하늘을 나는 오만을
묻으려 내려온 거야.
설야
때론 밤이 하얀 걸 알았어.
사각의 틀에 갇힌
단단한 나의 사고(思考)
하얀 밤에 우수수 쏟아져 죽고 있어.
깃털, 너마저 죽어
빈 몸일 때 날게 해준다고
저만치서 태양은
링거액(Ringer液) 들고 기다리고 있어.
-[설원을 걷는 독수리] 일부. 한국명시선 〈해뜨는 지평선에서〉
이 시는 역설적인 시다. 나의 시 중에서 가장 활기차고 용감한 시다. 길을 이탈한 건 아니라고 자위하며 독수리의 오만한 발톱을 설원에서 다듬고, 깃털 너마저 죽어 빈 몸일 때 날게 해준다는 태양의 링거액을 기다리고 있다. 다 비워낸 몸으로 우주와 상면하고자 함이다. 드넓은 시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가려는 희생과 노력의 다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 소리를 만난다. 예사롭지 않은 존재, 웅장한 시혼이다.
손 안에 들어온 언어 하나
이목구비가 훤칠하여 나를 사로잡는
천. 둥. 소. 리
그가 살기에 족한 터를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이기에
벽돌로 집을 지어 놓고
그의 등이 시리면 나는 베틀에 앉고
그의 입술이 마르면 나는 우물을 파고
한울에서 길들여진 사랑이
첨탑으로 솟아오를 때
나는 천둥소리와 완전한 하나이길 빈다.
내 필단이 농익어 모나리자를 그리거든
너는 강한 붓의 텃치로
모나리자의 눈썹을 그리려무나
천상의 빛으로, 천상의 소리로
-[천둥 소리] 일부. 한국시인협회 시선집 <풀잎의 말은 아름답다>
이 시에서 시사하는 것은 상당하다. 시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우주의 힘을 만난 것이다. 지금 나는 천둥소리, 그 이목구비 훤칠한 웅혼을 나의 시혼으로 모셔들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둥소리와 나와 완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대목이다. 목숨 같은 시, 천둥소리로 온 시, 하늘에서 내려온 시를 위해 베를 짜고 우물을 파고, 가장 근원적인 시의 터전을 마련하는 나를 보이고 있다. 그렇게 길들여진 사랑이 첨탑으로 솟아오르고 내 필단이 농익어 모나리자를 그리거든, 천상의 빛과 소리로 모나리자의 눈썹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한다. 그것도 강한 붓의 텃치로.
나는 몇 줄의 싯구로 생산하는 시일지라도 넓은 영역을 확보해 주고 싶다. 시밭에서 궁그르는 영혼의 소리가 우주에 이르도록 광활한 시세계 구축을 위해 끊임없는 전진으로 노력할 것이다.
3. 사물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
세상에 쓸모 없이 태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풀 한포기, 작은 벌레 하나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미운 돌멩이도 살짝 돌려보면 아름다움이 있다. 사물의 색깔과 아름다움은 나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숨겨진 내밀의 선한 심성까지 읽을 수 있다.
나는 세상을 밝은 쪽으로,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세상에 공존하는 그 무엇도 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눈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해준다. 그 대상이 내게 좀 불리하거나 힘들게 하는 존재일지라도 그 입장에서 재해석해보면 긍정을 이끌어내게 된다. 꽃에 가려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하는 잎사귀의 신비로움과 삼월에 불청객으로 내려온 폭설을 눈부신 행복을 노래하는 애련의 선녀로 격상시킨 두 편의 시를 제시함으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솔수펑이 사이 산수유
이파리가 꽃보다 늦게 나오는 건
꽃만큼 아름다움 선사할 자신이 없어
꽃등 뒤에 숨었던 거래요
글쎄, 귓속말로….
꽃 으스러져 웅숭깊게 패인 자리
이슬 물고 나와 새살 돋워주는
애순의 가쁜 숨결 들어 보세요.
놀라지 않게 사알짝 다가가
파래진 몸 아랑곳없이
벌써, 염천(炎天) 가리어 주려
쭉쭉 펼치는 저 차양 손바닥
때론 꽃보다 잎이 아름다워요.
-[때론 꽃보다 잎이 아름다워요] 일부. 경향신문 시마을 2001년 9월 4일자
잔치는 다 끝났는데
뒤늦게 오신 손님
드릴 것 없는 애달픈 밤
화롯불도 시들고
따슨 아랫목도 없고
이미 닫아버린
계절의 문 앞에서
조금 서성이다 가시려니 했는데
하얀 고독을
밤 새워 물고 서서
빈 들녘을 밝히시는
삼월의 눈꽃 손님
천상에 고인
백년의 그리움 안고 내려와
한 줌 햇살에 몸을 태우는 아픔으로
하루를 머물지라도
눈부신 행복을 노래하는
애련의 선녀
-[삼월의 눈꽃] 전문. 조선문단 2004년 무크지
두 편의 시에서 모두 가려진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특히 [삼월의 눈꽃]은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임에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삼월에 폭설이 내렸다. 저녁부터 내린 눈으로 밤사이 온 천지가 하얗게 뒤덮이고 계속 쌓인다. 해가 떠오르자 녹아내리는 눈은 질퍽거리고, 교통 흐름까지 방해하고 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삼월에 내려온 눈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닫힌 계절의 문 앞에서 하얀 고독을 물고 밤새 빈 들녘을 밝히다가, 햇살에 타는 목숨 단 하루를 살지라도 눈부신 행복을 노래하는 애련의 선녀로 시선이 모아졌다. 드릴 것이 없는 애달픈 밤, 화롯불도 따슨 아랫목도 없다는 훈훈한 언어가 자칫 천덕꾸러기가 될 삼월의 폭설에 대한 관념을 긍정으로 바꾸고 있다.
사물에 대한 나의 시선은 앞으로도 숨쉬고 사는 날까지 그렇게 긍정적이고 영롱할 것이다. 그런 눈으로 결 고운 시를 탄생시킴으로 어떤 개체의 가려진 신비와 아름다움을 드러내줄 것이며, 사회의 그늘을 지우고 세상을 밝은 빛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시인으로서 이것은 나의 큰 사명이다.
4. 섬세한 감성으로 아우르는 힘
시를 쓴다는 것은 유형과 무형의 그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따뜻한 가슴 없이는 이루지 못하는 작업이다. 그렇다고 너무 늘어진 감성은 자칫 가벼운 동정으로 흐르기 쉽다. 섬세하고 예리한 감성으로 아우르는 힘이야말로 시인의 큰 역할이다. 나는 스케일이 광대한 시세계에서 남성적인 강인함과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병행하고 있다. 양면의 시세계를 넘나들며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호흡을 조절한다.
현대 사회에서 필수품인 자동차, 매일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긁혀진 몸에서 그의 아픔을 보았다.
너는 종, 나는 상전인양
수직선상에서 군림하며, 부려만 먹고
옷 한벌 변변한 것 못해줬구나
삭아가는 몸, 아프다고 삐걱여도
그 흔한 보약 한재 달여주지 못했구나.
네 몸 구석구석 상처 투성이
긁히고, 닳아지고
가는 세월 늙음이야 어찌 막으랴
하지만 미안해
못난 주인 만나 네 꼴이 초라한 것 같아서
내가 널 위해 어떻게 해줄까?
네가 나한테 충성한 만큼
널 내 곁에 오래도록 두고 사랑해 주면
작은 보답이 되겠니?
폐물이 되어 버려야 할 시기가 와도
내가 널 지켜주면 미안함 덜어질까?
-[자동차·9 -미안해] 전문. 참여문학 2004년 가을호
이 시는 자동차 연작시 10부작 중의 한 편이다. 자동차에게 생을 부여시키고 보니 한 주인만 기다리는 요조 숙녀로, 길 위에서 자는 애련함으로, 님이 나가면 텅 빈 집으로 등등 생을 마감하기까지 슬픈 고뇌를 발견했다. 나는 모성애로, 연인의 사랑으로, 애린으로 자동차를 따스하게 보듬고 있다. 널 내 곁에 오래도록 두고 사랑해주면 작은 보답이 되겠느냐고, 폐물이 되어 버려야할 시기가 와도 내가 널 지켜주면 미안함이 덜어지겠느냐고 깊은 약속을 하며 달래는 대목에서는 목이 메인다.
나에게 '눈물의 시인' 이라는 애칭을 어느 기자가 지어 주었다. 시를 낭송하다가 진솔하고 투명한 눈물로 문단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울렸기 때문이다. 시 속의 화자가 약한 대상일 때 나는 같이 울어주고, 대신 아픔을 말해주고, 용기와 힘을 실어주며 궁극적으로는 넓은 품으로 아우른다.
노란 가을 하나
차가운 아스팔트 길 위에
구르고 있다.
떨어지는 아픔보다
깨어지는 슬픔이 더 클 것 같은
파르르 떠는 찬 눈에
마른 입술로 풀어내는 아리아
그대 발길에 채이기보다
그대 손길에 들려가고 싶다고
고요한 향기 속에 흐르는
그 작은 비원, 가슴이 시리다.
-[은행, 그 작은 비원] 일부. 애지 2004년 가을호
가을날 도심의 아스팔트 길 위에 떨어지는 은행, 내 눈에는 동그란 소녀다. 뽀얀 희망이다. 품어가야 할 고향이다. 푸른 연민이다. 역겨운 향기는 농익은 고독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아니 누군가의 손길에 들려만 가도 좋은 은행의 그 작은 비원을 읊고 있다. 떨어지는 아픔보다 깨어지는 슬픔이 더 클 것 같은 아린 예감을 포착하여 섬세한 감성으로 아우르고 있다.
시 속에서 사물을 사랑으로, 부드러운 감성으로 아우르는 힘이야말로 시인 자신의 노력과 수양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더욱 넓은 사랑으로 아름다운 시밭을 가꿀 것이다.
5. 교직에서 빚은 단단한 그릇
김윤자 시인 가족- 중국 문학기행 상해 홍구공원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정'에서
나는 오랜 교직생활을 했다. 교사는 제자에게 깨끗한 지식을 제공해야 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띄고 있다. 이런 직분 앞에서 교사는 자신의 거울을 먼저 닦음이 기본이다. 교사로서 거울 속의 나는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나의 손에서 그어지는 획이 미완의 제자들에게 충실한 생을 엮는 중요한 변수가 되길 항상 염원한다. 그런 연속의 일상에서 정도를 가고자 노력함은 고무적인 일이다.
모난 바위를 만나도
부딪치지 않고
살짝 돌아가는
인내를 배우고 싶다.
산하가 얼었는데도
서슬퍼런 얼음장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숨쉬는
강인함을 배우고 싶다.
험한 길로 들어설 때도
물꼬를 돌려주면
선뜻 알아듣고 선한 길 찾아가는
순종을 배우고 싶다.
한평생 변함없이
높은 곳으로 차오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향해 가는
겸손을 배우고 싶다.
-[물길] 전문. 동인지 <형상 21> 3집
물길을 바라보며 인내와 강인함, 순종, 겸손을 배우고 있다. 모나지 않은 삶으로 다듬는다. 때론 바위를 만나면 돌아서 가는 지혜도 배운다. 그래서 나를 정화시키고, 제자를, 사회를 정화시키려는 다짐이다. 더 나아가 교사는 국가와 연결된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질 기둥을 똑바로 세워야 하기에 올곧은 심지를 돋우며 국가와 민족을 가르친다. '국가가 있고 내가 있다'라는 우리 집의 가훈도 교직에서 체득한 생활관의 표출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벽돌 하나의 심정으로 최소한 나의 몫에 충실하자고 가족 앞에서도 외치곤 한다.
나는 동란 후에 태어났기에 강점기의 고통은 물론 전쟁의 고통을 모른다. 그러나 함께 살고 있는 우리의 부모로부터 수난의 역사에 대한 애환을 들어왔고 또한 눈물겹게 살아온 바로 웃 선대의 삶은 안다.
신발장 속에서
숨도 못 쉬고
웅크리고 앉아 계시다니요.
시류의 물살 가르고
면면히 이어오는 그 푸른 맥 속에
번뜩이는 예지(叡智)가 찬연한 걸요.
백의 민족 하얀 가슴에
몹쓸 터럭 하나 박지 않으셨던
폐허의 잿더미 풀풀 날려 휘감아도
냉혈의 피로 되쏘아 날리시고
꾹꾹 누르며 건너오시느라
살이 녹고 뼈가 휘셨군요.
나가시자구요.
밝은 해 아래 열린 길
고무신은 나가면 안 되나요.
그늘 속에 숨어사는 우리의 혼, 고무신
-[고무신] 일부. 역사와 문학 2004년 여름호
어느 날 신발장 속에서 허물어지는 고무신을 발견했다. 외세의 억압으로, 동란으로 무너진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허리띠 동여매고 살던 내 부모가, 조상이 갇혀서 웅크린 모습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맑은 영혼이 그늘 속에 숨죽이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해 아래 밝은 세상으로 끌어내는 것은 후손의 당연한 몫이다. 나는 시인의 힘찬 언어로 고무신의 자존을 찾아주고 있다.
나의 눈은 아직도 교사의 눈이다. 교직에서 빚은 단단한 그릇에 나를 담고, 사회를, 국가를 담는다. 교사라는 직업에서 온 것이겠지만 보편적으로 나의 시 속에는 윤리 지향적인 의식이 배어 있다. 다소 강하고, 훈시적일지라도 알차고 여문 씨알의 시를 담는 단단한 그릇 하나가 가슴을 지키고 있다.
6. 집념의 고뇌로 피우는 꽃불
시는 나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고고한 성채다. 언어로 탑을 쌓는 백지 위의 길은 고독하다. 그러나 나의 고독은 찬연하여 사막의 신기루로, 밤하늘의 섬광으로 시의 불을 지핀다. 영혼의 꽃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때론 하얗게 밤을 말려야 하고, 무한한 인내의 강을 건너야 하고, 작은 숨결 한줌까지도 다 살라야 한다. 나는 가벼운 고뇌보다 무거운 집념의 고뇌를 더 사랑한다. 절벽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탄탄한 시의 길을 가고자 함이다. 이것이 시에 대하여 투시된 내 본연의 정체다. 나의 문학세계가 이렇게 정립되기까지는 강인하고 끈질긴 집념으로 훈육하신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다림질하여도 펴지지 않는 땅에
거룩한 지도를 그려 놓고
무위로 다가오는 소리에
결코 귀 기울이지 않으셨다.
선뜻 그 누구도 택하지 않는 힘든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사유를
젖은 달빛 소리로 읊으셨다.
앎에 대하여, 미지의 길에 대하여
학의 고뇌로 차오르기를
삭풍은 아비의 등에서 꺾어지리라
그림자도 살아 일어서던 그 깊은 소리
산더러 바다라 하시어도
그리 믿고 살아 왔습니다.
아버지
-[깊은 소리] 일부. 시인과 육필시 2004년 가을호
거룩한 지도를 그려놓고 힘든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사유를 젖은 달빛 소리로 읊으시던 아버지, 학의 고뇌로 꽃불 피우시려는 숭고한 아버지의 깊은 소리에 산더러 바다라 하시어도 나는 그리 믿고 살아왔다. 부모님의 자녀 교육에 대한 투철한 정신은 충남도지사로부터 받은 '장한 어버이상'이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그려 놓으신 거룩한 지도를 동일한 걸음으로 걷고 있다. 시의 꽃불을 흔드는 폭풍을 만나도 나는 아버지의 깊은 소리를 들으며 붉은 집념으로 일어선다. 천둥쳐도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시의 기둥이 가볍지 않은 무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등불없는 길 넘어 세월 날아간 자리
연둣빛 풀떨기 젊음 수혈하는 봄마루
해묵은 씨앗 고즈넉이 나와 앉았다.
책상 서랍 뒤켠 이름없이 숨어
갈꽃 지고 무서리 내리던 날
싹도 틔우기 전 시들까봐
가슴 속 잉걸불 지펴 겨울 사르고
훈기 모아 키워온 파아란 두뇌
청솔에 꽃 피워 봄을 부르니
봄빛은 머리 위에 서렸는데
말라 오그라진 혈관의 여린 맥
씨눈의 빗장 풀지 못함에 애닯다.
애끊는 속살의 몸부림에
천심(天心)은 문 열어 단비 내리시고
물너울 지어 심장까지 스민 봇물
우지끈 등 갈라 발아케 하니
잎눈 벌써 하늘빛 자태다.
암울한 터 겹겹 어둠 헤집고
예까지 나왔음에
찰흙 같은 밤 이제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빛의 연속이다.
오히려 작열한 태양빛 눈이 시리고
고적한 달빛마저 호사스러워
무명실 다리(橋) 늘이는 별 하나면
밤마다 심지(心志) 엮어 꽃불 피우리라.
-[별 하나 꽃불 피우다] 전문. 시집 <별 하나 꽃불 피우다> 2001년 조선문학사
어둠을 빛의 연속으로 수용하며 집념의 고뇌로 피우는 꽃불이다. 태양빛은 눈이 시리고 고적한 달빛마저 호사스러워 무명실 다리 늘이는 별 하나면 밤마다 심지 엮어 꽃불 피우리라는 의지와 신념, 그것은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완전한 사유다.
시인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함은 시 앞에서 다짐한 나와의 약속이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준마처럼 집념의 고뇌로 동그란 꽃불을 피우기 위해, 나는 시에 대하여 더욱 엄한 채찍을 가할 것이다.
[나의 문학세계] - 참여문학 2005년 봄호 글맛 제21호
첫댓글 김윤자 시인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해송 시인님, 읽으셨군요. 참여문학에 게재되었던 글인데, 이화여대생들 인터뷰에서 교재로 강의한 것입니다. 오신 걸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