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회] 베트남전쟁 내막 폭로, 파병군 잔학행위 고발
리영희 평전/[8장] 필화와 강제해직의 수난 2010/06/04 08:00 김삼웅리영희가 굴러온 ‘호박덩굴’을 거부하고, 자신의 밥줄까지 짤리면서 베트남의 ‘위로출장’을 거부한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훨씬 이전부터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인민들의 식민지 해방과 반제국주의 독립투쟁, 사회혁명 등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나라 인민들의 입장에서 전쟁을 보는 시각에서 기사를 썼다.
한국군이 파병될 무렵에 국내 신문이 ‘반공성전’,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의 투쟁’으로 묘사할 때도 그는 전쟁과 파병을 반대하는 세계의 양심적 여론을 소개했다. 리영희는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정책기관의 최고 극비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하여 미국 자본주의의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의도를 폭로했다.
한국이 한국인에게 손가락질을 한 번 해본 일이 없는 베트남인을 죽이기 위해서 연 몇십만명의 군대를 파병하게 된 계기와 배경을 아세요? (주석 12)
리영희의 물음이다.
외신부에 몸담으면서 여러해 동안 베트남문제에 천착해온 리영희는 1985년 <베트남전쟁>이라는 저서를 낼만큼 전문가가 되었다. 먼저 그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몇 부문을 발췌한다.
베트남 전쟁은 그에 앞선 ‘스페인전쟁’(1934~1936)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근대에 들어서 동서양에 허구많은 전쟁이 있었고, 20세기의 현대에서만도 전체 지구를 덮은 처절한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스페인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가르켜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괴로워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동란’은 그 성격과 배경이 복잡하다. 그 전쟁의 한쪽 당사자가 공산주의세력이고 다른 한쪽이 반공주의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 베트남동란을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의 대결’로 획일화했던 단색적 도식화는 진실에서 너무나 먼 것이었다. 바로 그 ‘반공산주의’의 주도자로 그 동란에 뛰어든 미국이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은 베트남 동란의 복잡한 성격과 배경을 지나치게 단색적으로 도식화했던 결과이다.
베트남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연합국의 승리고 일본의 점령에서 해방되었다. 그러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100년 동안 지배하다 일본에 쫓겨나갔던 프랑스는 일본의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호지명(胡志明)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인민은 일단 손에 넣은 독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군과 대결했다. 독립세력과 식민세력, 아시아 후진민족과 유럽 백인세력, 원시적 민병과 현대적 군대 사이의 8년간에 걸친 전쟁은 1954년대엔 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의 결정적 패배로 끝났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또는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 인민은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다지는 강화조약인 제네바협정으로 국토와 인민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 제네바 협정은 “북위 17도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베트남 인민군과 프랑스연합군은 각기 군사분계선의 북쪽과 남쪽으로 철수하여 집결한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은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2년 후인 1956년 7월에 남·북 베트남을 통틀은 총선거를 실시하여 베트남을 통일되도록 한다”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약속된 총선거에서 호지명의 승리가 확실한 것을 예상한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해서 남베트남의 실권을 장악하는 한편, 미국에 망명 중이던 고딘디엠을 들여보내 총선실시의 거부를 선언케 하였다. 이 시점에서부터 제2차 베트남전쟁, 즉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거니와, 베트남전쟁은 그러므로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민족주의·제국주의·독립투쟁·식민주의·혁명·반혁명·통일·분열·독립·의존·인권·종교·자유·억압·반색인·황색인·아시아·서양·현대·낙후·공업·농업·초현대식 폭격기·원시적 소총·전자계산기·주판·선입관·고정관념·사랑·증오‥‥, 그리고 그 밖에도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의 요소가 뒤범벅이 되어서 전개된 전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주석 13)
이같은 베트남전쟁에 파병하여 베트남 인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한국군을 미화하는 글을 지식인으로써, 언론인으로써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리영희의 베트남전쟁의 음습한 내막 폭로는 이어진다.
1964년 8월 2일에 일어난 소위 ‘통킹만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월맹에 대한 무차별 전면공습을 개시한 건 65년에 들어서예요. 그런데 이 ‘통킹만사건’이라는 것은, 미국 군대가 얼마나 치밀하게 허구를 날조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날조사건이야. 쉽게 말하면, 월맹 수도인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조이호가 공해상에서 어느날 순찰을 하고 있는데, 월맹 어뢰정이 야밤에 그 공해상에서 그 구축함에게 어뢰공격을 했다는 거요.
미국은 이것이 공해상에서 일어난 미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전 세계에 발표해요.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미국 군부와 전쟁주의 세력은 의회 상하원에서 월맹에 대한 ‘대통령의 무제한의 전쟁수행전’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어. 말하자면 ‘선전포고’격이지. 이 권한을 거머쥔 전쟁주의 세력과 미국 군부가 월맹에 대한 소위 북폭이라는 무제한의 전면폭격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남베트남에서만 진행되던 미국의 전쟁을 북베트남까지 확대한거야. (주석 14)
미국이 베트남 폭격의 배경으로 삼은 ‘통킹만사건’은 미국 전쟁세력이 날조한 것임이 <워싱턴포스트>에도 폭로되었다.
리영희는 베트남 인민해방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지명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1990년대 중반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여 하노이 소재 ‘호지명박물관’을 비롯하여 전쟁기념관, 호지명 묘소를 두루 둘러봤다.
그가 평생 베트남의 지도자로서 살던 관저, 대통령궁이라는 것이 얼마나 검소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의 대통령 집무실과 침실이라는 것이 야자수 목재를 엮어서 만든 남방 특유의 구조인데, 무슨 자그마한 방갈로 같았어. 베트남 인민들이 호지명을 ‘호지명 대통령’이니 ‘호지명 각하’따위의 경칭으로 부르지 않고, 마치 집안 어른 대하듯 ‘호지명 아저씨’라고 부른 연유를 알 수 있었어요. 정말 감동적이었어. (주석 15)
주석
12) 리영희, <대화>, 344쪽.
13) 리영희, <베트남전쟁>, 5~6~7쪽, 두레, 1985.
14) 리영희, <대화>, 344~345쪽.
15) 앞의 책, 347~348쪽,
한국군이 파병될 무렵에 국내 신문이 ‘반공성전’,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의 투쟁’으로 묘사할 때도 그는 전쟁과 파병을 반대하는 세계의 양심적 여론을 소개했다. 리영희는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정책기관의 최고 극비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하여 미국 자본주의의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의도를 폭로했다.
한국이 한국인에게 손가락질을 한 번 해본 일이 없는 베트남인을 죽이기 위해서 연 몇십만명의 군대를 파병하게 된 계기와 배경을 아세요? (주석 12)
리영희의 물음이다.
외신부에 몸담으면서 여러해 동안 베트남문제에 천착해온 리영희는 1985년 <베트남전쟁>이라는 저서를 낼만큼 전문가가 되었다. 먼저 그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몇 부문을 발췌한다.
베트남 전쟁은 그에 앞선 ‘스페인전쟁’(1934~1936)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근대에 들어서 동서양에 허구많은 전쟁이 있었고, 20세기의 현대에서만도 전체 지구를 덮은 처절한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스페인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가르켜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괴로워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동란’은 그 성격과 배경이 복잡하다. 그 전쟁의 한쪽 당사자가 공산주의세력이고 다른 한쪽이 반공주의세력이라는 사실만으로 베트남동란을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의 대결’로 획일화했던 단색적 도식화는 진실에서 너무나 먼 것이었다. 바로 그 ‘반공산주의’의 주도자로 그 동란에 뛰어든 미국이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은 베트남 동란의 복잡한 성격과 배경을 지나치게 단색적으로 도식화했던 결과이다.
베트남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연합국의 승리고 일본의 점령에서 해방되었다. 그러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100년 동안 지배하다 일본에 쫓겨나갔던 프랑스는 일본의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호지명(胡志明)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인민은 일단 손에 넣은 독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군과 대결했다. 독립세력과 식민세력, 아시아 후진민족과 유럽 백인세력, 원시적 민병과 현대적 군대 사이의 8년간에 걸친 전쟁은 1954년대엔 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의 결정적 패배로 끝났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또는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 인민은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다지는 강화조약인 제네바협정으로 국토와 인민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 제네바 협정은 “북위 17도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베트남 인민군과 프랑스연합군은 각기 군사분계선의 북쪽과 남쪽으로 철수하여 집결한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은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결코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로 해석될 수 없다. 이 협정체결로부터 2년 후인 1956년 7월에 남·북 베트남을 통틀은 총선거를 실시하여 베트남을 통일되도록 한다”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약속된 총선거에서 호지명의 승리가 확실한 것을 예상한 미국은 프랑스를 대신해서 남베트남의 실권을 장악하는 한편, 미국에 망명 중이던 고딘디엠을 들여보내 총선실시의 거부를 선언케 하였다. 이 시점에서부터 제2차 베트남전쟁, 즉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거니와, 베트남전쟁은 그러므로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민족주의·제국주의·독립투쟁·식민주의·혁명·반혁명·통일·분열·독립·의존·인권·종교·자유·억압·반색인·황색인·아시아·서양·현대·낙후·공업·농업·초현대식 폭격기·원시적 소총·전자계산기·주판·선입관·고정관념·사랑·증오‥‥, 그리고 그 밖에도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의 요소가 뒤범벅이 되어서 전개된 전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주석 13)
이같은 베트남전쟁에 파병하여 베트남 인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한국군을 미화하는 글을 지식인으로써, 언론인으로써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리영희의 베트남전쟁의 음습한 내막 폭로는 이어진다.
1964년 8월 2일에 일어난 소위 ‘통킹만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월맹에 대한 무차별 전면공습을 개시한 건 65년에 들어서예요. 그런데 이 ‘통킹만사건’이라는 것은, 미국 군대가 얼마나 치밀하게 허구를 날조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날조사건이야. 쉽게 말하면, 월맹 수도인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조이호가 공해상에서 어느날 순찰을 하고 있는데, 월맹 어뢰정이 야밤에 그 공해상에서 그 구축함에게 어뢰공격을 했다는 거요.
미국은 이것이 공해상에서 일어난 미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전 세계에 발표해요.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미국 군부와 전쟁주의 세력은 의회 상하원에서 월맹에 대한 ‘대통령의 무제한의 전쟁수행전’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어. 말하자면 ‘선전포고’격이지. 이 권한을 거머쥔 전쟁주의 세력과 미국 군부가 월맹에 대한 소위 북폭이라는 무제한의 전면폭격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남베트남에서만 진행되던 미국의 전쟁을 북베트남까지 확대한거야. (주석 14)
미국이 베트남 폭격의 배경으로 삼은 ‘통킹만사건’은 미국 전쟁세력이 날조한 것임이 <워싱턴포스트>에도 폭로되었다.
리영희는 베트남 인민해방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지명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1990년대 중반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여 하노이 소재 ‘호지명박물관’을 비롯하여 전쟁기념관, 호지명 묘소를 두루 둘러봤다.
그가 평생 베트남의 지도자로서 살던 관저, 대통령궁이라는 것이 얼마나 검소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의 대통령 집무실과 침실이라는 것이 야자수 목재를 엮어서 만든 남방 특유의 구조인데, 무슨 자그마한 방갈로 같았어. 베트남 인민들이 호지명을 ‘호지명 대통령’이니 ‘호지명 각하’따위의 경칭으로 부르지 않고, 마치 집안 어른 대하듯 ‘호지명 아저씨’라고 부른 연유를 알 수 있었어요. 정말 감동적이었어. (주석 15)
주석
12) 리영희, <대화>, 344쪽.
13) 리영희, <베트남전쟁>, 5~6~7쪽, 두레, 1985.
14) 리영희, <대화>, 344~345쪽.
15) 앞의 책, 347~3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