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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생각의 전여옥(田麗玉) 대변인이 利敵단체 ‘범청학련 남측본부’ 대변인 출신의 황선 통진당(舊민노당) 비례대표와 날선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田 대변인은 19일 黃 씨를 겨냥해 “2005년 10월 만삭의 몸으로 북한 가 원정출산! 북한평양산원에서10월10일 날 잡아 제왕절개로 딸 출산! 그런데 바로 그날은 조선 노동당 창당60주년 기념일! 황선은 북한 원정출산 이유를 밝혀라!”는 내용의 트윗을 날렸다. 그러면서 “북한 원정 출산이 미국 원정 출산보다 훨씬 더 反국가적”이라며 공격의 날을 세웠다.
이에 대해 黃 씨는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평양에는 산부인과 의사의 동의를 얻어 효도관광 차원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갔던 것”이라며 “아리랑 공연을 보다가 갑자기 진통이 와 몹시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양국의 협조로 순산했다. 아이도 남북 양측으로부터 ‘평화둥이’로 축하받았지 이런 의심이나 비난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黃 씨는 2005년 10월 滿朔(만삭)의 몸을 이끌고 북한의 아리랑 공연에 나섰다가, 조선로동당 창건 60주년인 10월10일 북한의 평양산원에서 제왕절개 수술로 딸을 출산했다. 북한 정권은 이를 소재로 단막극 <옥동녀>를 상영하는 등 체제선전용으로 활용했었다.
黃 씨의 남편 윤기진 씨는 ‘범청학련남측본부’ 의장 출신으로 2008년 7월 법정 최후 진술서에서 “김일성 만세를 주장할 수 있어야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는 내용의 김수영(시인)의 미발표 유작을 언급하며 “이를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주장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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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羨(황선) 前 민노당 부대변인, 25일 본인의 블로그에 ‘내가 방북신청을 한 이유’ 글 올려 (2011년 11월26일자 보도) |
金秀姸(조갑제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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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羨(황선) 前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 25일 본인의 블로그 및 페이스북에 ‘내가 방북신청을 한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북의 노동자 농민이 이 노래를 부를 때 노랫말처럼 ‘큰 소리로 보란 듯이’ 부르던 모습이 역력하다. 남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여대는 말들은 안중에도 없이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지 ‘보란 듯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만 봐도 딱 알겠는 거다.
<‘사람의 무엇을 움직이면 저런 사회적 동원이 가능할 것인가.’ 동원이라고 하기 전에 연극이라고 함부로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그것이다>
시가행진 중에 나타난 김정일에 대해서도 “언론으로만 접했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환한 웃음, 밝은 얼굴”과 북한 주민들의 환호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런 지도자를 잃은 평양은 지금 그 때와 달리 ‘갑작스럽고 커다랗고 긴’ 비탄이 거리마다 가정마다 넘치고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黃 씨는 김정일을 “평양 할아버지-아이가 태어났을 때 참 기뻐하셨던”라고 지칭하며 평양산원에서 출산한 자녀에게 ‘겨레’라는 이름을 붙였을 당시 北측으로부터 받은 팩스 내용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평양 할아버지한테 절하러 안 가?’라고 묻는다고 적었다.
<“애기의 이름을 같은 핏줄을 이은 자손들이나 민족을 뜻하는 '겨레'로 지은 것은 의미 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 축하합니다. 통일옥동녀인 겨레가 무럭무럭 자라나 가정에는 효자동, 이웃에는 화목동, 나라에는 꼭 통일동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아이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이 북에 전해졌는지 어느 날 북에서 ‘대긴급전달바람’이라는 급박한 주문을 달고 남쪽에 팩스가 도착했다. 숱한 돌잔치에 다녀보기도 하고 나 역시 자라면서 많은 덕담을 듣기도 했지만 ‘건강하게 공부 잘 하고 훌륭한 사람이 돼서 돈 많이 벌어라’ 라는 수준이 가장 일반적인 덕담이자 소망이었다.
그런데 북의 동포들이 보내온 덕담은 가정에는 효자동, 이웃에는 화목동, 나라에는 통일동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지 않는가> 黃 씨는 “3천만의 동포가 불시에 상주가 되어 슬퍼하고 있는 곳에 가장 인간적인 마음으로 위무를 주고 응원을 전하는 것으로 우리, 평화의 역사를 다시 써보면 안될까?”라고 쓰며 이것이 본인이 방북을 신청한 이유라며 글을 맺었다.
노래의 가사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노래를 불러도 큰 소리로 보란 듯이
평양 방문 시 처음으로 듣고 접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유독 이 노래가 깊이 남았다. 가무를 중시하는 그 곳에서 이 노래는 특별한 편도 아니었다.
누구나 쉽게 흔하게 부르는 그야말로 대중가요였는데, 이 노래를 그곳의 광산 노동자나 농장의 농부들이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몇 해 간 이 노래를 잊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지난 19일 정오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소식을 듣고 난 후 며칠째, 이 노래를 부르던 십여 년 전 북녘 동포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북의 노동자 농민이 이 노래를 부를 때 노랫말처럼 ‘큰 소리로 보란 듯이’ 부르던 모습이 역력하다. 남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여대는 말들은 안중에도 없이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지 ‘보란 듯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만 봐도 딱 알겠는 거다.
삭막하고 경직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핍박받는 민중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그들은 씩씩하고 당당하다. 명랑하고 발랄하다.
그 이해하기 어려운 자부심의 중심에는 사회주의가 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사회주의를, 다 망했다고 공공연히 선언해온 사회주의를, 그 어려운 속에서도 지켜내고 있다는 자부심.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선언이나 이념이 아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생활이다. 어떤 생활? 조상 대대로 보습대일 한 뙈기의 땅을 가져보지 못하고 소작을 살거나, 지주의 행패를 피해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거나, 외세 침략에 이중 삼중의 겁박을 당하거나... 했던 삶을 비로소 청산하게 해 준 새로운 생활. 나라가 사회주의를 하니 1가구 1주택이 제도가 되고 가진 자의 식솔만 배우는 것에서 전 국민 고등의무교육과 무상교육으로 바뀌고, 무상의료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생활 말이다. 배가 고프고 전력난이 몇 해 더 있다한들 그들은 사회주의를 그 고난과 맞바꿀 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한 애착의 뿌리에 지도자에 대한 존경이 있다. 사회주의를 지킨다는 것이 식자들의 이론논쟁으로 승패가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상과 그에 따른 제도를 만들고 지킨다는 것은 그 사회 성원들이 열망하는 사회상을 깊이 공감하는 정치인과 당의 지도와 결합되는 투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북의 동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것이 자본과 제국주의의 압력 속에서도 조선의 사회주의가 흔들리지 않은 이유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 그들이기에 한 포기 곡식을 가꾸면서도 뿌듯하고 지도자의 영도와 함께 한다는 것에 든든해하는 것이다.
북의 명랑한 노래자락 하나만 들어도 그들이 이 엄동설한에 겪고 있을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된다. 아니 그들이 느끼는 아픔의 1% 쯤 감지하는 것일지 모른다. 신기한 장면인 듯 보도하는 외신들의 카메라 속에서 울부짖는 남녀노소는 하나같이 ‘아버지’를 외치고 있다. 북녘의 동포들은 지금 모두가 상주인 셈이다.
98년 9월9일 북의 건국50주년기념 평양시가행진을 구경하다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시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봤을 당시가 생각난다. 지금 비탄에 빠져있는 동포를 향해 연극이다, 쇼다, 빈정거리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그 때 내가 목격했던 모습들도 모두 쇼라고 주장하겠으나 그 모든 것이 쇼라면 그거야 말로 대단한 일이다. 평양시민들이 저마다 차려입고 나와 건국일을 축하하며 ‘무상의료의 나라’ ‘무상 교육의 나라’ 등의 구호를 펼쳐들고 꽃술을 들고 행진을 하는데 참 대단한 행진이었다. 동원이라면 그 동원력이야말로 모든 나라 정부가 부러워 할 성질의 것이었다. ‘사람의 무엇을 움직이면 저런 사회적 동원이 가능할 것인가.’ 동원이라고 하기 전에 연극이라고 함부로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그것이다.
그 대단한 시가행진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타난 것이다. 행진하는 인민들과 참으로 가까운 자리에서 한참동안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는데, 그 때 사람들의 열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언론으로만 접했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환한 웃음, 밝은 얼굴에 큰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북의 동포들이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야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이토록, 지축이 흔들리도록, 열광하고 흠모할 수 있는지 그 때처럼 ‘갑작스럽고 크고 긴’ 환호성을 평생 다시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지도자를 잃은 평양은 지금 그 때와 달리 ‘갑작스럽고 커다랗고 긴’ 비탄이 거리마다 가정마다 넘치고 있을 터이다.
94년 북에서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고 남쪽의 몇몇 통일인사들이 조문을 주장했다가 이후 조문파동이라 부르는 대대적인 공안탄압으로 흐르고 남북관계는 파탄으로 흐른 일이 있다. 그 때로부터 근 스무 해가 흐른 오늘 각계에선 전과는 다른 따뜻한 조의가 표현되고 있다. 그간 남과 북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숱한 상봉과 협력 사업들을 진행했고, 방북해서 북녘의 사람들과 굳은 포옹을 해 본 인사들만도 헤일 수 없이 많다. 남쪽의 벗이 상주가 된 북의 벗을 찾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배워왔다.
평양의 벗과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나의 기쁨을 열배 백배로 만들어 주신 분들이다. 2005년 10월 오랜 시간 수배자인 아들 덕에 인생의 낙이 없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효도관광 차 떠났던 평양 아리랑 관광 길에 평양산원에서 딸 겨레를 얻었을 때 일이다.
평양의 벗들은 산모인 내가 관광객 명단에 있는 것을 알고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주의 깊게 보살펴주었고 평양산원이 쉬는 날이었음에도 산원의 의료진과 구급차를 공연장에 대기시켰다.
약 15분 만 늦었어도 지난 수술자리가 열려 내출혈이라는 상황이 왔을 수 있다는 의료진의 설명이며, 의사선생님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술을 하더라는 이야기 등은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평양 당국과 산원의 각별한 관심과 조치가 아니었다면 그 해 나의 평양 관광 길은 축복이 아니라 비극으로 남았을 것이다.
“애기의 이름을 같은 핏줄을 이은 자손들이나 민족을 뜻하는 '겨레'로 지은 것은 의미 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 축하합니다. 통일옥동녀인 겨레가 무럭무럭 자라나 가정에는 효자동, 이웃에는 화목동, 나라에는 꼭 통일동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아이의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이 북에 전해졌는지 어느 날 북에서 ‘대긴급전달바람’이라는 급박한 주문을 달고 남쪽에 팩스가 도착했다. 숱한 돌잔치에 다녀보기도 하고 나 역시 자라면서 많은 덕담을 듣기도 했지만 ‘건강하게 공부 잘 하고 훌륭한 사람이 돼서 돈 많이 벌어라’ 라는 수준이 가장 일반적인 덕담이자 소망이었다.
그런데 북의 동포들이 보내온 덕담은 가정에는 효자동, 이웃에는 화목동, 나라에는 통일동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지 않는가.
서울 할아버지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아이는 덕수궁 돌담에 늘어선 사람들 속에서 고집스럽게 절을 하고 가겠다며 버텼다. 왜 그런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은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국화꽃을 바치고 절도 했다.
평양 할아버지-아이가 태어났을 때 참 기뻐하셨던-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며 평화를 먼저배운 아이들이 묻는다.
‘평양 할아버지한테 절하러 안 가?’
평양 할아버지는 갓난아기의 이름이 지어진 것을 듣자 대긴급전문을 통해 북녘동포의 축하를 보내셨고 서울 할아버지의 통일부는 집으로 탄생 축하 꽃바구니를 보내주셨다.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 혼자 부자가 되는 꿈이 아니라 효자동으로 화목동, 통일동으로 크는 꿈을 남과 북의 어른들이 함께 꾸면 얼마나 좋겠는가. 3천만의 동포가 불시에 상주가 되어 슬퍼하고 있는 곳에 가장 인간적인 마음으로 위무를 주고 응원을 전하는 것으로 우리, 평화의 역사를 다시 써보면 안될까?
나와 겨레가 평양 조문을 위해 방북을 신청한 이유다.
평양산원은 1980년 3월 31일 평양에 준공한 종합 산부인과병원으로 출산과 부인병을 치료하는 북한 유일의 여성 종합병원입니다. 이 산원에는 해산실·수술실·애기실·입원실 등 2000여 개의 크고 작은 방과 1500여 개의 병상이 마련돼 있지만 북한 일반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일반 주민들도 이용할 순 있지만 현실에서는 당.군.정 간부들이나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산모일 경우에나 이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김태산(평양출신, 2002년 입국) 씨의 이야깁니다. 인터뷰1)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약도 없어지고 그러다나니까 좀 말하자면 있는 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이 오게 되면 치료라든가 봉사가 잘되고 그렇지 않으면 일반 인민들이 가면 천대하는 그런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은 가기를 꺼려합니다.” 한영진(평양출신, 2002년 입국) 씨는 “평양산원을 둘러본 김일성.김정일이 ‘우리 여성들이 이제 꽃방석에 앉아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북한 당국이 선전” 하기도 했지만 “누구나 평양산원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뷰2) “북한 주민들이 모두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선택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평양시민들 중에서 특수한 계층만 사용하는 것으로 보시면 될 것 같애요.” 이애란(양강도, 97년 입국) 씨도 “사실상 일반사람들은 평양산원에서 애를 낳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이 씨는 특히 “지방 사람들은 평양산원에 갈 수 없다”면서 예외적인 경우로 “삼태자(三胎子, 세쌍둥이)를 가진 산모나 간부 가족들이 평양산원에 가서 출산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평양산원에서는 세 쌍둥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삼태자과'를 두고 세 쌍둥이의 출산과 진료, 산후조리를 전담하고 있습니다. 지방에 있는 일반 주민들이 평양산원을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때는 삼태자를 낳거나 도(道)병원에서 치료하기 힘들 만큼 몸이 아플 때 평양산원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는 평양산원을 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굳이 가지 않더라도 리(里)진료소나 구(區), 시.군(市.郡), 도(道)병원에 산원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곳에서 출산을 하고 있습니다. 평양 시민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평양산원에 갈 수 있는 확률이 높지만 주로 구역병원을 이용하고 구역병원에서 평양산원으로 갈 수 있도록 의뢰서를 써주는 경우에 한해서 평양산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의뢰서는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황선 씨의 출산을 두고 북한 보도기관에서는 “무상치료제의 혜택으로 산후 치료는 물론 종합적인 의료봉사와 함께 모든 산모들이 다 같이 받아 안는 산꿀과 귀중한 보약재들, 영양제를 공급받았다”고 선전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태산 씨는 평양산원에서 “아이 낳은 여자들한테 한 컵씩 꿀을 줄 때가 있고, 없으면 못 준다”면서 황선 씨가 남한 여성이기 때문에 “보약재나 영양재”등 특별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한영진 씨는 “산꿀은 북한에서 최고급 보약으로 치부된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입원한 전체 산모들에게 산꿀을 지급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뷰3) “다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요. 산꿀이나 그런 것들은 북한에서 최고급 보약으로 치부되는데 거기 입원한 북한 산모들한테 줬다는 것은 지금 상황으로선 어렵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반 북한 여성들의 출산 실태는 어떨까요. 1997년 양강도 도병원에서 출산한 경험이 있는 이애란 씨는 “산후 치료”라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인터뷰4) “산후조리가 뭐예요. 거기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집에서 나무 다 갖고 가야 돼요. 땔감 다 갖고 가야되고 몽땅 이부자리니 뭐니 다 갖고 가야 되거든요. 그리고 밥을 계속 해서 날라야 되요. 너무 인력이 많이 필요하고 그래서 저는 애기를 낳자 마자 집으로 왔어요.” 심지어 소독약이 없어 끓인 소금물로 소독을 할 정도로 의료 사정은 열악했습니다. 인터뷰5) “소독약이 없어가지고요 소금물 끓여가지고, 애기 나면 아무래도 상처도 많이 생기고, 거기는 거의 다 자연분만 많이 하니까, 소독 많이 해야 되잖아요. 출혈도 많이 하고 그런데 소독약이 없어서 소금물 끓어 하더라구요. 끔찍했어요.” 주목할 것은 도병원이라고 하면 도에서는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병원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열악한 의료 실태가 지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영진 씨는 경제가 기울어진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평양에 있는 병원들에서도 약품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인터뷰6) “90년대 이전에는 나라에서 그래도 무료시설이나 의약품을 공급했는데 90년대 이후에는 약품도 잘 공급이 안됐어요. 그래 가지고 일단 산모가 입원 한 다음에 진찰은 받습니다. 진찰은 받아가지고 이 환자한테는 어떤 약이 필요하다 처방을 떼주는 데 그친단 말입니다.” 탈북자들의 말처럼 황선 씨는 북한 주민이 아닌 남한 여성이었고 더욱이 평양에서 출산하는 최초의 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평양산원은 일반 주민들이 쉽게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산을 앞둔 많은 북한 여성들은 열악한 의료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애란 씨는 이것이 북한의 현실이라면서 고통 받는 대다수의 북한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인터뷰7) “그 사람은 상당히 기쁘고 행복하겠지요. 그치만 그런 그늘 밑에 깔려서 엄청나게 고통받고 있는 북한 여성들은 볼 수가 없어서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