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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토마스모어사상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반딧불이螢하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의 사상연구
2014年 11月
0914007 김동건
목차
Ⅰ.서론 1
Ⅱ.본론 1
(Ⅰ) 후쿠자와 유키치 전기 사상 3
(Ⅱ) 후쿠자와 유키치 후기 사상 6
(Ⅲ) 후쿠자와 유키치 사상의 변모와 영향 8
Ⅲ.결론 11
참고문헌
Ⅰ.서론
막번(幕藩) 체제였던 일본은 내외적으로 변화를 겪으며 천황 군주제의 근대적 국가로 재편성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 체제만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된다.
이에 따라 호농과 성공한 상공업자가 생기나, 이들에게 다수의 농민들은 수탈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혼란이 가중되었고 이 혼란기의 변혁이 기존 질서를 붕괴시켜 막번제가 통제력을 잃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대외문제도 위기를 가중시켰다. 이국선(異國船)의 출몰은 대외위기를 감지하게 했고 아편전쟁의 발발(1840), 페리제독의 내항(1853)은 일본 스스로가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내외적인 위기상황의 변화가 바로 일본의 근대화 이행과 연결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시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통해 종합적인 변화를 꾀했다. 메이지 유신은 정치적·사회적 변혁이자 문화혁명이었고 일본국가를 막번 체제에서 근대천황제국가로 변형시킨 근대일본의 원점이었다. 또 메이지 유신은 서구인들 사이에서는 비서구사회의 성공적인 개혁모델로 평가받았으며 동아시아인들에게는 개혁과 근대의 표상이자 추구할 목표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동아시아 ‘근대’의 상징이었다.
이 메이지 유신 후 본격적 일본 근대화에 있어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는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본 메이지 유신기 최고의 교육자이며 사상가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 제공자’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일본 학계에서도 “근대 일본 최대의 계몽 사상가”, “일본 근대화의 총체적 스승”, “메이지 정부의 스승”으로 불리며 메이지 유신에서 그의 사상이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이 후쿠자와 유키치는 전기와 후기에 걸쳐 다소 상이한 사상 체계를 보인다. 전기의 사상은 인간 자유권에 기반한 계몽적 성향을 보였다면 후기의 사상은 현실주의에 기반한 패권적 성향을 보였던 것이다.
각 사상들은 실제로 일본의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이 ‘개혁과 근대의 표상’일 정도로 자유주의에 기반한 실질적인 개혁의 성과를 보였다는 점, 또 일본이 근대의 중반기를 넘어가면서 패권주의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후쿠자와의 성향 변화와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일관된 철학에서 등장했다고 보기 힘들다. 후쿠자와기 전기 계몽적 성향을 보일 때는 인간 중심의 개혁을 설파하며, 일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의 인간들에게도 그 민권과 자유가 소중함을 말하고 있으나 후기 패권적 성향을 보일 때는 과거의 언급을 무시하고 오직 일본인만이 인권을 지닌 존재인 것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후쿠자와 유키치가 어떠한 사상을 설파했으며, 그 사상이 어떠한 모순을 지녔는지, 또 이러한 사상들이 메이지 유신 및 유신 후 근대화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정치를 중심으로 서술하기로 한다. 비록 메이지 유신 그 자체와, 또 그로 인한 근대적 변화가 결코 후쿠자와 유키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은 분명하며, 그의 사상 역시 시대와 환경의 영향에 의해 마치 운명과 같이 형성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의 사상은 여타 막번 말의 사상가와 궤를 달리하는 독특한 점이 있었고, 이것이 실제 일본 정치적 사건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본론
(Ⅰ) 후쿠자와 유키치 전기 사상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독특한 점이 있었다. 바로 초기의 사상과 후기의 사상이 상이해졌다는 점이다. 일본인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는 일찍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을 크게 두 단계로 구분했다. 1872년 2월 출간된 <학문을 권함(学問のすすめ)>에서의 초기 계몽기에서는 후쿠자와는 자연법을 전제한 국가평등관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는 노골적인 양육강식의 논리를 좇아 ‘힘이 곧 정의’라는 주장으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마루야마의 주장을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소개하고 있다.
즉 후쿠자와 유키치의 전기 및 후기 사상의 분기는 전인류의 평등을 중심으로 한 계몽사상가에서 일본과 일본인에 한정된 인권을 주장하며 국가의 패권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서구 열강 속에서 대비되는 일본의 약점과 상황을 인식하려 한 1850년대부터 시작하여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을 발표하며 사상 변모를 확실히 보여준 1875년까지라고 설정할 수 있겠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년 간 지속된 메이지 정부의 급진적 국가개혁과 근대화 정책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로 인해 일본은 서구 열강보다 후진적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50년대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 체결 이후 서구의 급속한 경제적 침투와 국가 간 평등성의 훼손으로 인해 국가적 독립성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상태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기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계몽과 혁신에 집중된다. 그의 저작들에는 이를 잘 드러내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국민도서(国民図書)의 후쿠자와전집(福沢全集) 제3권에 수록된 ‘학문을 권함(1872)’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경 이렇게 된 이유는 관리들의 전통적인 전제적 기질과 국민들의 천박한 상인기질 때문에 관리나 일반 국민 모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한 것에 그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 이래 정부가 학술·법률·무역 등을 진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가 없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또한 국민도서(国民図書)의 후쿠자와전집(福沢全集) 제3권에 수록된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은 상고시대 이후 지배와 피지배라는 이원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권력의 편중을 경험해 왔으며 이러한 권력편중현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민들 중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저서에 실린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후쿠자와가 계몽하려 했던 핵심사항은 바로 이와 같이 기존 의식구조의 개혁이었다.
일본은 고대로부터 한자문화권에 속해 중국의 영향을 받아왔다. 비록 일본이 무사[侍]로 대변되는 힘의 가치를 중국이나 조선보다 숭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신분제와 그 신분제 속 무언의 규율 속에서 이탈 없이 살아야 한다는 유학적 정신만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학적 정신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유리함을 지니고 있었다. 역으로 말하면 이러한 기존 제도를 숭상하고 절대시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과 개항 이후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제도들이 들어와도, 봉건적 제도와 생활 속에서 변화를 꾀하기 힘든 상태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판단하였다. 그래서 후쿠자와의 계몽은 무엇보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권을 지닌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제도와 생활 양식 전반의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후쿠자와는 또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는 어떤 구속이나 속박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인간은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로서 모두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자신의 신체를 이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머무르고 싶은 곳에서 머무르고 어떨 때는 놀고 어떨 때는 일하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거나 어떤 일에 힘쓰고 어떨 때에는 밤낮으로 공부하거나 어떨 때에는 하는 일 없이 잠만 자는 것 모두가 타인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는 한 인간이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몽은 결국 봉건적 가치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문명을 활용할 수 있는 자유인을 만들고자 함에 있었던 것이다.
(Ⅱ) 후쿠자와 유키치 후기 사상
그런데 1875년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을 전환기로 하여 후쿠자와 유키치는 노골적인 약육강식의 논리를 좇게 된다. 후쿠자와는 1885년 3월에 발표한 <탈아론(脫亞論)>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이 중국과 조선에 대하는 방법에 따라 일본도 행하면 그만이며 인접국이라고 해서 동정할 필요가 없다. 惡友와 친하게 지내면 함께 악명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는 진심으로 아시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한다.”
“서양인의 동양으로의 세력은 불이 번져오는 것과 같다.; 옆집의 소실을 어찌 두려워 하지 않는가. 우리 일본이 중국의 형세를 걱정하고 조선의 국정에 간섭함은 일을 만들기를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일본에 불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지나(支那)와 조선 이 두 나라는...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망국이 되어 그 국토는 세계 문명제국에게 분할되고 말리라는 것에 한 점의 의심도 없다...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리며 함께 아세아를 흥하게 하고자 유예할 처지가 못 된다. 오직 저 대오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며, 저 지나와 조선을 대하는 법도도 이웃나라라는 이유로 특별히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을 따라서 처분함이 가할 뿐이다.”
후쿠자와의 저서에 실린 이러한 언급을 보면 그의 후기 성향은 중국과 조선을 서구열강에 비해 문명화되지 않은 존재라 여기는 언급부터 중국과 조선의 국정에 간섭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서양이 아프리카 및 아시아 국가에 그러하였듯 식민지배를 해도 괜찮다는 논리는 <문명론의 개략>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생각이었으나 그 이후의 저작에서 드러나기 시작하여 1885년의 탈아론에서 분명히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880년대의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 조약(1976)을 맺는 등 타국을 간섭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 내에서는 ‘자유인권에 기반한 계몽적 단계’에서 더 나아가 타국에 이러한 사상을 주입하는 단계에 달했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 시기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정세 변화를 변호하기 위해선지, 아니면 그것이 대세라 생각하고 종국엔 일본 및 일본국민에게 유익할 것이라 판단했는지, 그 이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나 국권에 기초한 사상적 논리를 펼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일본 내에서 돌던 정한론을 지지하고 조선에 대한 군사개입을 역설하며 패권주의적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게 된다. 즉 개인주의적 자유민권론자로서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초반의 모습을 버리고 현실주의적 국권론자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Ⅲ) 후쿠자와 유키치 사상의 변모와 영향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변화라 할 수 없고, 오히려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기의 후쿠자와가 설파만 모든 국가, 만민의 자유권은 일본으로 축소되며, 이상에 기반한 인간중심의 계몽적 사고는 현실주의에 기반한 국가중심의 패권적 사고로 바뀌기 때문이다. 앞절에 인용된 ‘후쿠자와 전집’ 중의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1875>과 <탈아론(脫亞論),1885>의 문구와 비교하여, 후쿠자와가 전기 계몽기에 쓴 <학문을 권함(学問のすすめ),1872>에 등장한 다음의 문장을 살펴보자.
“국가라는 것은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서 일본은 일본인이, 영국은 영국인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이나 영국인이 모두 천지간의 인간인 이상 상호간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두 사람이 다른 두 사람의 권리 역시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백만·천만의 사람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도리는 사람 수의 다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인간과 국가에 대한 개념이 모순적인 것을 충분히 알게 해 준다. 즉 그가 말하는 평등한 자유민권의 인간이란 바로 일본인, 혹은 서구열강의 인간들에 한정되는 것이며 동아시아 타국의 사람들에게는 극히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인 셈이다. 1894년 <일본 국민의 각오>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전쟁까지도 지지하게 된다.
“우리들의 목적은 오직 전쟁에 승리하는 것뿐,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의 국권을 신장시키고, 우리 동포인 일본 국민이 세계를 떳떳하게 대하는 유쾌함까지 누릴 수 있다면, 내부의 어떠한 불평등과 부조리라도 이를 논할 틈이 없다.”
이러한 지지는 실제로 조선침략과 청일전쟁 등으로 현실화되기도 하였다. 앞서도 말했듯 많은 정계 지도자들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 아래에 존재했기 때문에, 후쿠자와의 이러한 성향은 일본 제국헌법의 성립을 뒷받침하였고 제국건설 작업의 지성사적·사회 사상사적 기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쿠자와의 이러한 두 사상은 공교롭게도 일본 정치의 흐름과 확연하게 맞아떨어져 간다. <학문을 권함(学問のすすめ)>은 1872년 초판부터 1876년 제17판까지 간행될 정도였으며 간행부수 340만 부의 엄청난 보급을 보이게 된다. 이후에 나온 후쿠자와의 각종 책들 역시 상당하게 보급되며, 그것들이 전집으로도 간행되는 등 후쿠자와의 사상은 이미 일본 사회에서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실제 일본의 역사에선 후쿠자와 전기 시기에는 인권 관련 정치적 실현이 두드러지게 되며, 주지의 사실이듯 후쿠자와 후기 사상기에는 일본은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기 때문에 후쿠자와의 변화된 성향이 그대로 일본 정치에 반영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후쿠자와는 대외관계에서도, 또 일본 내에서도 인간의 자유권을 기반으로 한 평등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후쿠자와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공유하는 인물들과 1873년에 명육사(明六社)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이때 활동한 인물 중에는 니시 아마네(西周), 츠다 마미치(津田真道)가 있었다.
한편 니시 아마네(西周), 츠다 마미치(津田真道), 에노모토 타케아키(榎元武揚)는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 비세링으로부터 국제법을 포함한 사회과학 일반에 관해 배우고 와서 만국공법(국제법)의 사상을 토대로 한 일본의 각종 법률 제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 중 니시 아마네(西周), 츠다 마미치(津田真道)가 후쿠자와와 철학과 사상을 명육사에서 공유했던 것이다. 이러한 명육사의 창립자인 후쿠자와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의 사상과 성향이 일본 근대의 법과 제도, 각종 신분제 해체 등 일본의 근대화 정책에서도 간접적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패권주의적 사상은 더욱 직접적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후쿠자와는 1882년 7월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일본 군사 개입에 적극 찬동하였고, <일본 국민의 각오>라는 글을 발표하여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 글은 다음과 같다근대 초기의 일본은 막번제도를 폐지하고 천황제 국가로 변화하여 근대적 주체가 되기 위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은 즉각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 혼란기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등장하여 사상적으로 굉장히 큰 역할을 하였다.
Ⅲ.결론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성향을 보였다. 전기 사상은 인간의 자유권에 기반하여 일본 국민들의 기존 의식구조의 개혁하려 했다. 유교적 전통의 신분제를 비판하고 국민이 평등함 속에서 주인이 되어 활동해야 함을 역설했고, 이러한 일본 국민 개개인의 성장을 통해 일본이 서구 열강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이루려 하였으며, 개선된 문명인의 삶을 누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후기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다소 달라진다. 전기에 주장한 타국의 국민에 대한 인권의 존중 의식은 희석되고 현실적 패권주의에 기반한 사상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후쿠자와의 철학 자체가 달라졌다고 할 만큼 전과 후가 맞지 않는 모순을 보이게 된 것이 한계라 할 수 있다.
한편 후쿠자와의 사상은 일본의 정치 속에 스며들어 퍼지게 되었다. 전기의 사상들은 지속적 계급제 정비 및 실질적 계급제 폐지로, 또 만민공법의 수용을 통한 근대 일본의 법제로 현실화되었다.
후기의 사상은 일본 정치에서 정한론이 재대두되는 데에 일조했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며 최종적으로는 군국주의의 행태를 취하게 된 것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 후 조선침략과 청일전쟁 등 일본의 제국주의적 파행에도 간접적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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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일본 메이지유신기 계몽사상의 정치사상적 특성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을 중심으로-」『한국동북아논총』제10권 4호(2005)
박삼헌, 「천칭폐지령과 메이지 유신」,『일본연구』제21집(2014)
유지아,「쇄국과 개국: 일본 근대화 이행과정에 나타는 모순과 변혁 쇄국과 개국: 일본 근대화 이행과정에 나타는 모순과 변혁」『중앙사론』,제27집(2008)
이덕훈, 「근대일본의 산업화과정과 기업가적 역할:산업자본으로서의 전환과 대기업의 등장을 중심으로」,『일본문화학보』 제33집(2007)
이삼성, 「‘제국’ 개념과 19세기 근대 일본」,『국제정치논총』제51집 1호(2011)
장인성,「유신의 아이덴티티와 문명:메이지유신의 분석틀」『한국정치학회보』33,2(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