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에 나타난 임중형, 임계형 형제 기록
임중형(林仲亨)과 임계형(林季亨)은 고려 말 광정대부(匡靖大夫), 좌복야(左僕射)의 관직에 오른 조양군(兆陽君) 임세미(林世味) 공의 8세손으로 조부(祖父)는 임각(林恪), 부친(父親)은 임사수(林士壽)이다.
두 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1597-1598년)시에 각각 활동하였다. 임중형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탐망군관(探望軍官)으로 활동하였으며, 아우 임계형은 1596년 낙안군수를 지냈다.
이 기록은 충무공 난중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탐망군관 임무는 적정(敵情) 을 정탐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임중형은 장군의 핵심 군관으로서 맏은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한편, 임계형은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장군을 적극 도왔다.
두 분의 활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각각 바다와 육지에서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 바친 충신이며 구국활동의 표상이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임중형의 활약상(현대어 번역)
* 정유(丁酉) 7월 11일 경인 [양력 1597년 8월 23일] 맑음
열(충무공 둘째아들)이 어떻게 갔는지 생각하고 있으니 견딜 수가 없다.
더위가 너무나 심하여 걱정뿐이다.
저녁 나절에 변흥달, 신제운, 임중형(林仲亨)이 와서 봤다.
홀로 빈 대청에 앉아 있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너무나 비통하다.
종 태문과 종이가 순천으로 갔다.
* 9월 7일(음) 을미 [양력 10월 17일] 맑음 바람이 비로소 그침
탐망군관 임중형(林仲亨)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쉰다섯 척 가운데 열세 척이 어란 앞바다에 왔는데 그 뜻이 우리의 수군에 있는 것 같다"라고 했다.
그래서 각 배들에 엄중히 일러 경계하도록 했다. 오후 네 시쯤에 적선 열세 척이 곧장 진치고 있는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서 공격하니 적도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쫓아 먼 바다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흐르므로 항해할 수 없어 복병선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더 쫓아가지 않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며 말하기를 오늘밤에 반드시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것 같아 여러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라고 재삼 타일러 분명히 하고서 헤어졌다.
밤 열시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을 해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 먹은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앞으로 가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진동했다. 그랬더니 적이 당해내지 못하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났다 하면서 포를 쏘아댔다. 밤 한 시가 되니 아주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다.
初七日乙未〭 風始定〭 探望軍官林仲亨來吿〭 賊船五十五隻內〭 十三隻已到於蘭前洋〭 其意在舟師云〭 故嚴飭各船〭 申時〭 賊船十三隻〭 直向我船〭 我船亦爲擧碇〭 出海迎擊〭 則賊回船奔避〭 追至遠海〭 風水俱逆〭 不能行船〭 還到碧波津〭 是夜〭 疑有夜警〭 令各整待〭 二更〭 賊船放砲夜警〭 諸船似有恇㤼之狀〭 更爲嚴令〭 余所騎船〭 直當賊船放砲〭 則賊知不能犯〭 三更〭 退去〭
* 10월 12일(음) 임신 [양력 11월 23일] 종일 바람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종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 여러 장수들이 와서 문안을 하니 얼굴을 들어 어찌 맞으랴.
임홍, 임중형(林仲亨), 박신이 적을 정탐하려고 작은 배를 타고 흥양 순천 등지의 바다로 나갔다.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임계형의 활약상
* 병신(丙申) 5월 5일 신미 [양력 1596년 5월 31일] 맑음
이날 새벽에 여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일찌기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앉아 있고, 회령포 만호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여러 장수들이 와서 모였다. 그대로 들어가 앉아서 위로하고 술을 네 순배를 돌렸다. 경상수사가 술이 거나하게 취했으므로 씨름(角力)을 시켰더니 낙안군수 임계형(林季亨)이 으뜸이다.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마시고 뛰놀게 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한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
* 정유(丁酉) 10월 13일 경오 [양력 1597년11월 21일] 맑음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 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고 했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곧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 금갑도만호 이정표(李廷彪)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 당포만호 안이명(安以命) 조라포만호 정공청(鄭公淸) 및 군관 임계형(林季亨) 정상명(鄭翔溟) 봉좌(逢佐) 태귀생(太貴生) 박수환(朴壽還) 등을 해남으로 보냈다.
* 10월 18일 을해 [양력 11월 26일] 맑음
바람이 자는것 같았으나 우수사는 배를 출항할 수 없어 바깥 바다에서 잤다.
강막지(姜莫只)가 와서 알현했다. 임계형(林季亨) 임준영(任俊英)이 들어왔다.
* 10월 19일 병자 [양력 11월 27일] 맑음
새벽 꿈에 고향집의 종 진(辰)이 내려왔기에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저녁나절에 조방장과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백 진사가 와서 봤다. 임계형(林季亨)은 와서 알현했다.
김신웅(金信雄)의 아내 이인세(李仁世) 정억부(鄭億夫)를 붙잡아 왔다.
거제 안골 녹도 웅천 제포 조라포 당포 우우후가 와서 봤다. 적을 잡은 공문을 와서 바쳤다.
윤건(尹健) 등의 형제가 왜적에게 붙었던 두명을 잡아 왔다.
첫댓글 난중일기에 나타난 임중형, 임계형 형제 기록을 상세히
게시함으로 현황판이 돋 보입니다.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에 기록이 되었으니
명명백백한 왜적 격퇴의 자랑스런 현황판입니다.
후세인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왜놈들의 침략 시 왕(선조)일지라도 저 혼자 살라고 명으로 도망친 놈도 있는데
임중형, 임계형 형제는 일편단심 구국의 충정이 자랑스럽습니다.
이것은 문중 차원에서도 진작에 비라도 세워 기려야 하는데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후손들을 위해 알리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대대적인 현장사업은 다음세대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가문의 긍지이고 영광입니다 난중일기 1597년 8월9일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이 보성의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조달할 때 임중형 계형 형제의 집안에서 크게 조력했다고 하지요
한편 임중형 계형 형제의 이름으로 보아 맏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바 맏형 임백형의 존재가 나타나지요 그 역시 츙무공을 여러 모로 도왔다고 합니다 기록은 조양군지가 유력한데 보성교육지원청 소관 보성도서관에서 조양군지를 열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때는 주로 조양창이 있는 고내마을에서 살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샘도 그분들이 팠다고 하니 조양창과도 관련이 있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