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듣는다 (기도 오쿠무라이치로 바오로딸 p53)
‘듣는다.’는 말은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구약성서에는 ‘듣는다.’ 는 말마디가 약 천백 번이나 나오며, 구약에 비해 그 양이 훨씬 작은 신약성서에도 4백25번이나 되풀이되고 있다. 물론 통계숫자의 빈도로 그 말의 비중을 정하기에는 문제가 있겠으나, ‘듣는다.’ 는 말이 계시종교(啓示宗敎), 즉 인류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핵심이다는 데에는 누구든지 수긍할 것이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쉐마, 이스라엘).’ 라는 말은 구약에 자주 나오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그 첫머리에 사용되곤 한다. 신약에서도 그리스도는 “귀가 있는 사람은 새겨들으시오.”(마태 11, 15)라고 하셨다. 이 경우 엄밀히 말하자면 ‘문(聞)’보다는 ‘청(廳)’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주의깊게 듣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경청(傾聽)’이라고 해도 ‘경문(傾聞)’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사실 듣는다는 말마디는 성서에서도 ‘흘려 듣는다.’ 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제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마태 7,26), “들은 말씀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히브 4, 2) 라든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거울 속에 바라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바라본 다음에 나가서 즉시 그 생김새를 잊어버립니다.”(야고 1, 23-24)라는 경우는 오른쪽 귀로 듣고 왼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하느님께 듣는다.’ 란 이와 달리 주의깊게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에게 듣는다.’ 는 것의 첫째 의미이며, 둘째는 들은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루가 2, 19.51)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그 위에 하느님의 이야기는 항상 말로만이 아니다. 말씀으로 들려주는 것은 오히려 예외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야기하려고 하실 때 무엇보다도 사건을 통해서 하신다.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한 것'은 구유에 누운 갓난아기를 찾아온 목자들의 일(루가 2,8-19 참조)과, 루가 복음사가가 기록한 열두 살의 소년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잃으셨던 사건에 대해서이다. (루가 2, 41-51 참조)
관상 기도는 마리아의 이러한 자세 안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셋째로 ‘듣는다.’는 말은 ‘알아듣는다.’ 는 것을 뜻한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옵니다.”(요한 10, 27 )
이와 같이 듣고 안다 함은 누구의 목소리인가를 앎, 즉 ‘목소리를 아는 것’이며, ‘목소리의 임자를 아는 것’이다. ‘목소리를 들음’이란 말하자면 목소리를 분별하는 것이다. “양들은 그를 따라갑니다.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입니다.”(요한 10, 4), “나는 어진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압니다.”(요한 10, 14)
‘듣는다.’ 는 것은 이와 같이 서로 ‘깊이 안다.’는 의미로까지 더욱 발전되어 간다.
우리들의 마음속이나 머릿속은 언제나 복잡한 소음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욕망이나 오만, 타인에 대한 비판과 비난 등으로 가득차 하느님의 말씀이 감추어져 있을 나날의 사건을 반추할 수도, 소화할 수도 없다. 게다가 거기에 진흙을 개어 붙이거나 독을 넣거나 해서 전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버릇이다. 또한 수치스러운 자신을 변호하려는 소리가 높다란 벽처럼 자신을 막아버려 하느님의 소리가 안 들리게 되고, 자신마저 벙어리가 되어버렸는데도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다.
기도는 이러한 잡음에 마음의 귀를 열고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분별할 줄 알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인도해준다.
그러므로 넷째로 ‘듣는다.란 따른다.’를 의미한다. 앞서 인용한 요한복음에서도 “양들은 그를 따라갑니다.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입니다.”(10, 4)고 했다. 또 “내게는 이 우리에 들어 있지 않은 양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합니다. 그들 역시 내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며 한 목자에 한 양떼가 될 것입니다.”(10, 16)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옵니다.”(요한 10, 27)고도 했다.
* 동아일보|오피니언 삶의 속도와 방향을 생각한다[삶의 재발견/김범석]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입력 2022-08-26 03:00
“정신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덜컥 암에 걸렸어요.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암 환자 진료를 하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암에 잘 걸리는 나이가 70대이다 보니 주로 70대 환자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 세대는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후불제 압축적 근대화를 이룬 세대다. 따라잡을 선진국을 정하고 그들을 맹추격하는 것이 생존 전략이었다. 그 과정에서 편법과 요령은 어느 정도 용인되었고 효율성이라는 이름 속에 원칙은 무시되곤 했다. 과정보다 성과가 중요했으므로 ‘빨리빨리’라는 속도와 효율성은 추종했으나 방향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결국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뻗은 검은 그림자만 사회 곳곳에 깊게 드리워진 것은 아닐까.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공부하고 1등 해야 한다고 해서 공부했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느 쪽에 소질이 있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해본 적도, 스스로 답해본 적도 없다. 속도와 효율성에 대한 집착은 방향에 대한 고민의 부재를 초래한다. 열심히 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기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채찍질하며 속도를 냈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참 열심히, 그리고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열심히 달려온 것뿐인데, 갑자기 암에 걸렸다고 하면, 눈앞에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낭떠러지에 맞닥뜨리면 멈춰야 하지만 속도가 빠를수록 관성이 붙어서 잘 멈춰지지 않는다. 그래서 빠르게 달려온 사람은 위기가 올 때 멈추기가 어렵다. 그냥 추락하기 쉽다. 그래서 열심히 산 사람일수록 암과 같은 위기를 만나면 삶의 속도를 늦추기도, 멈추기도 쉽지 않아서 갑자기 ‘멘붕’에 빠진다. 너무 빨리, 열심히 달려온 대가는 대개 참혹하다.
살면서 암에 걸리는 일은 분명 낭떠러지를 만나는 것 같은 위기다. 위기의 순간에는 살아온 관성을 버리고 속도를 늦춰야 한다.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운전할 때도 안개가 끼면 속도를 줄이지 않는가. 속도를 늦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고민해야 한다.
잘못된 방향일수록 빨리 달리면 나중에 되돌아올 때 더 많이 돌아야 한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제대로 온 것이 맞는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