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의 사상과 내부물 설치의 근거 고찰
문화해설포교팀 제2회 공동학습 자료
편집 : 원경 윤 병구
1. 대웅전의 출현 배경
(1)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들이 거처할 수 있는 조촐한 방과 강당이 있고 주위에 조용한 수풀이 있으면 불전으로서 최적지였다. 대승불교시대가 도래되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님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는 교설에 따라 다양한 불상들이 생기고 이에 따라 부처님을 봉안하는 불전들도 다양하게 조성되었다.
동남아지역으로 전래되어 발전된 대승불교는 각 종파마다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을 갖추게 되었는데, 가령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를 주불로 함으로 이를 모시는 집은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정토종은 아미타불을 모신 미타전이나 무량수전으로, 법상종도 미륵 존을 모시는 미륵 전으로, 그 후 선종에서는 참선하는 선실(선당)이라며 각 종파에 따라 주불전의 건축물의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종파들은 시대에 따라 주불을 바꾸거나 보완하기도 하는데, 일례로 화엄종은 7,8세기 신라시대에 아미타불을 주 존상으로 모시다가 9세기가 되면서 아미타불을 비로자나불로 모시게 되었으며 또한 법상종도 미륵 존만 주불로 해야 되는데 8세기인 신라시대에는 아미타불도 같이 모시는 등 변형되기도 하였다.
(2) 법화종이나 천태종 사상의 사찰들은 주 불전을 법화경에 의거 석가모니를 모시고 그 명칭을 대웅전이라고 하였다. 부처님 생존 당시 인도에서는 “석가모니”와 자이나교의 교주인 “바르다마나”에게 부처님과 대웅이라는 칭호를 모두 사용하다가 그 후 “석가모니”에게는 주로 “부처님”으로 또한 “바르다마나”에게는 “대웅”이라는 명칭으로 분리하여 사용하였기에 불교 전적에서 석가모니를 대웅이라고 기록된 것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대웅이라고 하는 칭호가 있는데, 이는 법화경의 성립과정에서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여겨진다.
“대웅”이라는 용어는 대승불교가 동남아지역으로 전래 되어 법화사상이 크게 발전되면서 중국인들이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웅세존”이라고 명명 한 것을 따다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 된다.
따라서 대웅은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칭”임으로 대웅전은 “위대한 영웅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을 따라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2. 대웅전이 조성된 사상과 내부 설치물의 설치 근거
석가모니가 모셔져있는 대웅전은 어떤 경전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며 또한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가? 대승불교의 법화종이나 천태종의 법화사상은 주요 경전인 법화경을 소이경전으로 함으로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있다. 따라서 석가모니가 계시는 곳은 법화경에 입각한 대웅전이라는 전각 속에,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영산회상도의 탱화 앞이다. 그리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법화경의 “견보탑품”을 형상화한 석가탑과 다보탑이 존재한다.
또한 동시에 화엄사상에 입각하여 수미산 정상을 상징하는 수미단 위에, 정각을 이룬 것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의 모습으로 앉아있고, 또한 주변의 화엄경의 “세주묘엄품”에 등장하는 신중단에 결려있는 화엄성중의 옹호를 받고 있다.
따라서 석가모니가 계신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대승불교의 두 꽃인 법화와 화엄의 사상에 의거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주변에 포진하고 하나로 어우러져서 보다 완전한 가치로 승화되는 불전이라 할 것이다.
3. 대웅전을 통해 본 화엄사상과 법화사상의 관계
가. 화엄과 법화의 이중구조
(1) 불교의 수미산 우주론에서 보면, 화엄사상의 대웅전은 제석천의 정전인 묘승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화엄경에는 부처님이 깨달음의 성취 처인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으면서 도리천으로 와서 제석천의 정전인 “승전”으로 들어가 법을 설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승전은 묘승전(수승전)으로 “제석천의 정전”이 된다. 따라서 화엄경의 이 부분이 부처님을 도리천에 모시는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세는 자칫 중생과 유리된 부처님을 상징하게 한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경전이다. 부처님은 정각이라는 최고의 깨달음을 통해서 진리의 당체와 하나가 된다. 이는 중국문화권에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중시하는 존엄성과 깨달음의 당당함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대웅전의 석가모니 불상은 깨달음을 귀하게 여겨 정각 때에 부처님이 취했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대웅전의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부처님은 정각의 부처님을 상징한다. 정각 이후 최초의 21일간에 설해졌다고 전해지는 것이 바로 ‘화엄경’이다. 그러므로 대웅전 안에 모셔진 항마촉지인인 부처님의 가르침은 화엄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존귀한 것은 그분이 깨달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도문화권에서 중요시하는 깨달은 것 보다는 그러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이를 통해서 인류를 계몽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화엄사상은 완성되어 있지만 2퍼센트 정도가 부족하다. 그래서 자애로운 영원한 구원성실의 법화경이 요청되는 것이다.
(2) 석가모니는 법화사상의 법화경에서는 나약한 중생들을 위해서 온갖 수고로운 방편들을 마다하지 않는 애민의 부처님으로 나타난다. 즉 화엄경에서 깨달음의 존엄성과 당당함이 깃들어 있다면, 법화경에는 중생을 굽어보는 자애로운 미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자애는 중생들의 입장에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칫 부처님의 권위에 흠집을 낼 수 있다. 그래서 법화사상 역시 완전성을 내포한 가운데서 깨달음이 존귀하다고 하는 부분에서 2퍼센트 정도가 부족한 것이다.
(3) 그러므로 이 화엄과 법화 사상을 한데 아우르게 된다면 부처님의 존엄성을 내포하면서도 중생과 유리되지 않은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완결성을 연출해 낼 수가 있다. 동아시아의 사원구조는 바로 이러한 화엄과 법화라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가람배치는 부처님의 존엄성을 내포하면서도 중생과 유리되지 않은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완결성을 연출해 내기 때문에 현실적인 영역에서 창의를 넘어서 위대한 대 조화의 결과임으로 매우 놀라운 것이다.
나. 도리천과 영산정토
(1) 화엄사상의 도리천은 화엄경에 의하여 부처님을 모시는 장소이다. 하지만 여기는 “신들의 세계”로 아무나 갈 수 없기 때문에 중생과 단절된 영역이다. 인간으로서 도리천에 갈 수 있는 존재는 부처님과 성문, 연각, 보살, 전륜성왕뿐이다. 이는 도리천이 매우 존엄하고 신성한 성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이곳에만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은 중생들의 의지처가 될 수 없다.
(2) 그러나 법화사상의 영취산은 극락이나 신들이 사는 천상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성의만 있다면 누구나 가서 볼 수 있는 “현실의 공간”이다. 다만 중생들이 법화경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경계를 인식할 수 없을 뿐이다. 따라서 법화사상은 극락이나 천상세계와 같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실천의 문제가 된다. 법화경을 믿을 때, 영취산정은 곧 그 자체로 극락정토와 같은 영산정토가 된다.
(3) 따라서 화엄사상이 깨달음의 장엄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법화사상은 믿음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실천을 행하면 중생은 석가모니를 언제라도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대웅전 영역은 화엄을 통해서 도리천이 되는 동시에 법화에 입각해서 영취산정이 된다. 즉 화엄과 법화라는 대승의 두 거대한 물줄기는 중생의 구제라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서로 조우하며 협력하고 있다 하겠다.
다. 수미단과 영산회상도
(1) 동북아불교의 가람 배치는 수미산 우주론을 기반으로 하는데, 수미산에서 수미단이 연유한다. 화엄사상의 대웅전은 제석천의 정전인 묘승전에 해당되고 이는 “제석천의 정전”이 된다. 따라서 제석천은 수미산 꼭대기인 도리천에 있고, 여기에서 부처님이 선정에 들었다가 설법을 하고 계시다.
대웅전의 불상이 모셔져있는 수미단은 정방형의 좌대로 형성된다. 수미단은 본래는 부처님이 앉아있는 좌대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외연을 넓혀 전각 안의 모든 단을 통칭해서 말하기도 한다. 마치 불화는 원래 붓다의 그림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외연을 넓혀 불교 그림 전체를 지칭하는 것과도 같다.
불상을 모신 수미단은 일반적으로 3단계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러한 3단 구조의 수미단 중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는 제일 높은 단을 “상단”이라고 한다. 이 상단은 3단으로 구성되어 제일 위단은 불상이 안치되는 단이며, 중간 단은 과일과 같은 공양물이 올라가는 단이고 맨 아래 단은 촛대와 향로와 같은 기본적인 기물들이 안치되는 단이 된다.
그리고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신중단이 설치된다. 이는 “중단”으로 2단으로 구성되어 2단 중 위의 단에는 신중을 그린 신중탱화가 모셔져있으며 아랫단에는 촛대와 향로와 같은 기물이 안치된다.
또한 신중단 반대쪽인 본존불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감로단”과 같은 “영단”이 있는데 이는 하단이라고 하며 전체가 1단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즉 불단과 신중단, 영단은 각각 상단 중단 하단의 위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2) 영산회상도는 대웅전 후불탱화로 모셔져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중인도 마가다국의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를 묘사한 불화이다. 그래서 ‘영취산 법회 모임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불화는 단순히 “법화경”의 내용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석가모니와 관련된 가까운 분들의 모습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흔히 ‘석가모니의 가족사진’이라고도 말한다.
삼신불이나 삼세불을 봉안한 경우에는 영산회상도가 아닌 삼여래 탱화로서 장엄하기도 한다. 영산회상도는 중앙에 석가모니를 배치한 원형구도로 되어 있는데 삼단으로 구분된다. 즉 하단에는 사천왕이 좌우로 각각 두 구씩 배치되고, 중단에는 석가팔대보살과 제석 ‧ 범천 그리고 십대제자와 짝수의 화불이 위치하고, 상단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금강과 용왕 ‧ 용녀 또는 사자 왕과 코끼리 왕이 묘사된다. 이러한 영산회상도의 기본구도는 영산회상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탱화의 일반적인 구성이 되기도 한다.
(3) 수미단과 영산회상도가 상호 조화를 이루는 대웅전 안의 붓다를 모시는 법식은 화엄과 법화의 이중구조를 잘 나타낸다. 즉 화엄과 법화라는 대승의 두 거대한 물줄기는 중생의 구제라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서로 조우하며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본체와 방편이라는 작용에서만 보면 화엄과 법화라는 것은 각기 다르다. 그러나 석가모니라는 같음 안에서 전개되는 체와 용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라. 결론
불교의 연기설은 중국으로 전해져 음양론적인 가치 속에서 보다 잘 융합되는 유연성을 나타낸다. 대승불교의 두 꽃인 법화와 화엄의 사상에 따라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이 출현 되었고, 이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범화와 화엄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보다 완전한 가치로 승화되는 불전이 되었다. 따라서 대웅전은 실제로 화엄과 법화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이상적인 상보관계를 나타내게 짠 위대한 만다라의 세계인 것이라 할 수 있다.
○ 화엄과 법화의 비교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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