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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있는 고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의 본가. 기장군은 박태준 전 회장의 집성촌인 이 일대에 '박태준 기념관(임랑문화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
- 쇠로 만든 배 가지고 놀던 아이
임랑의 뒷산인 장안 달음산에는 아주 오래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철광과 야철장이 있었다.
이 달음산은 남방 철기문화의 본산으로, 변한과 가야의 철 공급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유황제련법으로 쇳물을
녹여 병장기와 농기구를 제작해 조선의 병농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곳이기도 했다.
달음산 주변인 기장과 부산, 울산 일대에 청동기와 철기 유물이 다수 출토돼
이 일대가 쇠부리 문화의 중심지가 아닐까 짐작된다.
더욱이 임랑과 맞붙어 있는 이웃 일광에는 조선 최대의 구리광산이 있었다.
황동석과 반동석으로 구성된 고품위 구리광석이 지표에 노출된 채 채광되어 제련되는 걸
어린 박태준은 보며 자랐다.
어느 날 아버지는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박태준을 임랑리 바닷가로 데려갔다.
"태준아."
"예, 아버지."
"난 이제 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다.
"자, 이걸 받아라."
"이게 뭐예요?"
"달음산의 철과 일광의 구리로 만든 배 모형이다. 난 이런 모양의 철선을 타고 일본으로 간다. 이 배를 타고 반드시 널 데리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고 난 뒤 어린 박태준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철로 만든 배 모형을 만지작거리며 그리움을 달랬다.
#. 일본으로 간 식민지 소년
임랑해수욕장에 조성된 세기로. 박태준 전 회장을 기리는 길이다. |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는 박태준이 여섯 살 때 약속대로
나머지 가족들을 큰 철선에 태워 일본으로 데려갔다.
아버지 박봉관은 일본 건설회사에서 노동자를 관리하는
노무직으로 일해 경제적으로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일본에서 박태준의 삶은 시즈오카현 아타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아타미의 다카심상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해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하쓰시마 원영(遠泳)대회'를 열었다.
마을 앞의 섬까지 헤엄쳐서 왕복하면
흰 모자에 검은 띠를 두를 수 있었다.
박태준은 2학년 여름에 '하쓰시마 원영대회'에 참가했다.
섬을 돌아서 오기란 힘들었지만 일본아이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끝까지 역영(力泳)해 마침내 흰 모자에 검은 띠를 두를 수 있었다.
박태준이 생애 최초로 맛본 성취감이었다.
하쓰시마 원영대회에 참가한 이후
어린 박태준은 처음으로 목표를 세웠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 운동을 잘해야 한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인 학생들을 이겨야 한다.'
아버지가 직장을 나가노현 이야마로 옮기자
박태준은 그곳 명문인 이야마북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박태준이 중학교 2학년일 때 태평양 전쟁이 터졌다.
전선이 확대되자 일본은 철 부족으로 허덕이게 되었는데 박태준은 어느 날 제철(製鐵) 현장에
근로봉사로 불려나가 '소결로'에서 일했다.
소결로는 쇳가루를 높은 온도에서 녹여 엉기게 하여 쇳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가마이다.
어릴 때부터 달음산 야철장과 일광 구리광산 마을에서 이런 작업을 보고 자란 박태준은
이 일이 익숙하고 흥미로웠다.
그는 소결로에서 월간 생산량 우승자로 뽑혔고, 책임자로부터 '소결로에 소질이 많은 학생'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고향마을에 이어 다시 철과의 인연을 생각했다.
태평양 전쟁은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전쟁터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식민지 소년 박태준은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와세다대학 기계공학부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하루 4시간을 자면서 공부에 매진한 끝에 마침내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와세다 대학 이공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 해방, 그리고 박정희와 운명적 만남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되자 박태준은 와세다대학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신생 조국에서 군인의 길을 걷기 위해 당시 2년제였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육사에서 탄도학을 가르치던 박정희 교관은 수학실력이 우수한데다 자기 규율에 엄격한
박태준 생도를 눈여겨보았다.
이후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 된 박정희가
박태준을 참모장으로 부르면서 다시 인연이 시작됐다.
1961년 5·16 거사를 준비하던 박정희는 어느 날 박태준에게 말했다.
"임자는 이번 일에 참여하지 말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내 식구들이나 좀 돌봐줘."
박정희는 만에 하나 거사에 실패할 경우 가족의 안위를 부탁할 정도로 박태준을 신뢰했다.
거사가 성공하자 박정희는 박태준을 경제참모로 발탁했다.
5·16 주체세력 가운데 이공계 출신은 박태준이 유일했다.
소위 '혁명주체세력' 대다수가 군복을 벗고 정계로 진출하였으나 박태준은 경제인으로 변신하였다.
박태준은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어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대한중석을 부임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꿔놓았다.
#. 철의 사나이, 박태준
1967년 9월 박 대통령은 박태준을 불러 말했다.
"한국에 산업을 일으켜야겠어. 그러려면 철강과 도로가 필요해.
임자는 철강을 맡아. 난 고속도로를 맡을 테니까."
포항제철 건설의 특명을 받은 박태준은 포항에 종합 제철소 건설을 시작했다.
다들 무모한 일이라고 했고, 미국, 일본은 이를 박 정권의 '과시용 사업(Prestige Project)'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5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고, 종합 제철소를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자본도 없었다.
정작 문제는 제철소 건설비 마련이었다.
당시 세계은행의 실무자인 영국인 J. 제프 박사가 포항제철이 성공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쓰는 바람에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데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박태준은 하와이에서 휴식을 취하다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른바 '하와이 구상'이다.
당시 남아 있던 대일청구권 자금 8000만 달러는 본래 농업분야에만 쓰도록 돼 있었으나
일본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포항제철 건설에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금은 해결되었으나 첨단기술으로 지어야 하는 제철소 건설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황량한 모래벌판에서 박태준의 현장 브리핑을 받고 난 뒤 탄식하듯 말했다.
"임자, 이거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정말로 되기는 되는 거야?"
그날 브리핑 이후로 박태준은 평소 즐겼던 술을 끊고 골프도 그만두었다.
그날 밤 박태준은 다짐했다.
'목숨을 걸자. 선조들의 피값으로 건설하는 공장인데 실패하면 우리 모두 사무소에서 똑바로 걸어 나와 우향우한 다음 동해바다에 몸을 던지는 거다.'
포항제철의 모토가 된 '우향우 정신'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고로 3기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던 1977년 여름 어느 날, 전기실 앞쪽의 철골조 TC볼트가 잘 맞지 않아
가볼트 몇 개만 채워서 붙여놓은 부실공사 현장을 발견했다.
어이없는 부실공사에 박태준은 격노하며 말했다.
"폭파하고 다시 해!"
"이미 기초공사가 80% 이상 진척된 상황이라 폭파하기는 곤란합니다. 부분적으로 손보면 안 될까요?"
"폭파하고 다시 시작하라는 내 말 못 알아듣겠어?
이렇게 불량 제철소를 지어 놓으면 쇳물이 제대로 나올 것 같아? 당장 폭파해!"
박태준은 포항제철소 내 건설부문 현장소장과 부서장들을 모두 집합시켜 폭파현장을 견학하게 했다.
부실공사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박태준의 단호한 의지가 드러난 장면이었다.
훗날 이 폭파사건은 미국의 하버드, 스탠퍼드, MIT 대학교 교재에 부실공사 방지의 모범 사례로 실렸다.
또한 박태준은 군인 출신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스로 야전사령관이라고 했다.
특유의 지휘봉과 작업모 그리고 작업화로 상징되는 박태준의 현장 리더십으로
포스코 직원들의 자발적 충성과 헌신을 이끌어내었다.
철강생산 100만 톤을 목표량으로 건설되었던 포항제철은 고로 1기가 건설되어 가동된 지
단 일 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빚을 다 갚고 흑자를 기록했다.
고로건설은 계속되어 2기가 완공된 1976년 조강능력은 북한을 추월했고,
2008년에 조강생산량 3313만6000t을 달성했다.
2011년에는 4고로에서 하루 평균 1만5천 톤 이상의 쇳물을 생산하며 연일 세계 기록을 갱신했다.
박태준은 맨땅에서 철강산업을 일궈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로 키워내었고, 산업의 쌀인 철강생산으로 인해
자동차, 조선, 중화학공업 등이 발전해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철의 사나이 박태준은 이런 점을 인정받아 1987년 철강 업계 노벨상인 베서머 메달을 수상해
명실공히 철강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은 과학기술 영재를 키워내기 위해 포스텍 대학을 설립해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교육자로서의 탁월한 면모도 드러냈다.
놀라운 점은 거대한 철강 자본을 만진 그가 평생 포스코의 주식을 한 주도 보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인 명의로 된 집 한 채도 갖지 않을 정도로 청빈했다는 것이다.
1986년 박태준은 영국 런던에서 J.제프 박사를 만났다.
제프 박사는 1969년 세계은행이 한국에 제철소를 짓는 게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내고
차관공여를 거절한 사람이었다.
박태준이 제프 박사를 만나 물었다.
"지금도 그 보고서가 맞다고 생각합니까?"
제프 박사가 대답했다.
"현재도 보고서 내용은 맞다고 생각하지만 당신 존재를 고려하지 않아 결국 틀렸습니다."
제프 박사는 중국의 등소평이 그렇게 부러워했던 철의 사나이 박태준의 존재를 뒤늦게나마 인정했다.
김하기·소설가
◇ 박태준과 '철의 고향'
- 불길 형태 '쇠를 달구는' 달음산 정기에 '철강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난 것인지도…
지난 1970년 4월1일 포항제철 1기 설비 착공식에 나란히 선 박정희 대통령과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사장. |
박태준이 세계 최대의 포항제철을 건설하고 철강왕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운명적 요소가 있었다.
먼저 박정희와의 만남이다.
5·16 거사의 성공으로 박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포항제철 건설의 특명을 내리고
그는 운명적으로 이 일에 뛰어든다.
그가 와세다대학 기계공학부에 다닌 일본통이란 점도 크게 작용했다.
일본의 정재계를 움직일 수 있었던 능력으로 대일청구자금을
포항제철로 돌릴 수 있었고, 특히 일본 철강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인
가와사키 제철소의 니시야마(西山) 사장을 만난 것도 중요한 인연이었다.
그러나 장안읍 임랑 바닷가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방문하고는
고향이야말로 박태준의 가장 큰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1973년 6월9일 포스코 1기 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며 만세부르는 박태준 사장(가운데). |
박태준이 태어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는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다.
임랑은 달이 노는 호수, 즉 '월호(月湖)'라 불리던 곳.
장안의 달음산은 '쇠를 달구는 산'이란 뜻으로 산의 형세가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달음산에는 오래된 철광산과 야철장이 있었으니, 태몽이 달음산인
박태준은 이미 철강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닌가.
달음산 8부 능선에 있는 옥정사에는 한때 박태준의 재종숙인
박한봉 스님이 주지로 있었고, 지금 박태준의 영혼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가(靈駕)를 의탁한 달음산 옥정사에 머무르고 있다.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