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시 창작반의 강의시간에 수강생들에게 설명을 하는 동안 시를 두 편이나 썼습니다. 한 편은 〈동행〉이고, 또 한 편은 〈행복·2〉입니다.
어머니는 언제 죽나?
내가 죽을 때 죽지.
-〈동행〉 전문, 나태주
시의 첫 제목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가장 위대한 이름이고, 성스러운 이름입니다. 비록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자식의 마음속에는 그 어머니가 살아계십니다. 놀라운 일이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정말로 언제 돌아가십니까? 그 자식이 죽을 때 비로소 돌아가십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비밀입니다.
그런데 시에서는 그런 세세한 내막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무뚝뚝하게 투덜거리듯, 그것도 경어체도 아닌 막말로 ‘언제 죽나?’ ‘죽지’라고만 써놓았습니다. 매우 불경스러운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의 내막 속에 자식이 모친을 생각하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1행과 2행 사이 말입니다. 그 사이에 자식이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의 하소연과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고백입니다. 어쩌면 시는 마음속에 숨겨놓은 사실인 비밀을 드러내는 고백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하나의 에어포켓(공기주머니)이 숨겨져 있습니다. 애당초 그 에어포켓은 시인의 마음이 쉬었다 간 자리입니다. 슬픔과 외로움과 한숨이 놓인 자리입니다. 그기에 다시 독자의 마음이 들어가 쉬웠다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의 행을 다 이루어놓고 다시 읽어보니 제목이 ‘어머니’인 것이 너무나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와 함께 오래 사는 것도 하나의 동행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동행’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시가 그럴듯해졌습니다. 시 쓰기는 이렇게 서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말들을 서로 연결하고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분위기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내는 작업입니다. 그다음에 쓴 작품은 〈행복·2〉라는 작품입니다.
어제 거기가 아니고
내일 저기도 아니고
바로 여기, 지금
그리고 당신.
-〈행복·2〉 전문, 나태주
겨우 네 줄이 전부입니다. 동사나 형용사 같은 꾸밈말도 없이 그냥 명사와 조사 몇 개와 접속사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많이 머쓱한 작품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에는 나름대로의 생각이나 느낌이 들어있습니다. 인생의 한 지침이랄지 깨침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지혜롭지 못하여 지나간 날(과거)이나 오지 않은 날(미래)에 소망이나 가치, 행복의 근원을 두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금(시간), 여기(공간)입니다. 그것에 충실하여 살 때 행복이란 것도 온다는 것이 평소 나의 생각입니다. 이걸 이렇게 짧고 간결한 글의 형태로 뭉뚱거려놓았습니다. 한 편의 시가 된 것입니다.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소설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를 답하라 할 때, 첫째가 ‘지금 여기’요, 둘째가 ‘옆에 있는 사람’이요, 셋째가 ‘그 사람에게 잘해주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가슴에 오래 간직하고 살다가 슬쩍 그 가운데에서 ‘지금, 여기’를 빌어다 써먹은 것이 앞의 시입니다.
그렇다면 표절이 아닐까요? 글쎄,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라면 아니겠습니다.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이것은 《성경》 「전도서」의 한 구절입니다. 시는 읽는 사람의 뜻에 맡길 일입니다. < ‘죽기 전에 詩 한 편 쓰고 싶다(나태주, 리오북스, 2016)’에서 옮겨 적음. (2019.03.21.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