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爲輕根 靜爲躁君 중위경근 정위조군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시이성인종일행 불리치중 雖有榮觀 燕處超然 수유영관 연처초연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輕則失本 躁則失君 경즉실본 조즉실군 의역: 빅뱅 이전은 극도로 응축되어 무거웠고 고요하였으나 빅뱅 이후에는 가벼워지고 시끄러워졌다. 빅뱅 이전의 주인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항상 변함없이 그 본성을 지키고 유지하는구나. 언제나 수레의 무거움을 유지하며 비록 화려한 色界의 영화로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주를 창조한 주인이 어찌 함부로 그 존재를 천하(色界)에 드러내겠는가? 비록 우주 어미가 만들어낸 가벼움과 시끄러움(色界)일지라도 色界에 너무 치우치면 본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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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원자구조에서 원자핵이 질량 대부분을 차지한다. 수렴, 응축작용으로 모든 질량이 원자핵 중심에 모이고 전자는 원자핵을 바탕으로 충돌하며 튕겨져 나갔다가 중력으로 다시 원자핵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빛과 전기, 자기가 생겨나고 끊임없이 팽창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빈공간이 있으며 無, 虛, 空, 沖의 개념들과 연결된다. 원자를 빅뱅 이전과 이후에 비유하면 원자핵은 빅뱅 이전, 전자는 빅뱅 이후와 같다. 전자는 튕겨져 반발하며 움직인다. 이런 이치를 상상하면서 26章을 읽어보자.
重爲輕根 靜爲躁君(중위경근 정위조군)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요,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임금이다.
6章에서 谷神은 不死한다고 설명한 후, 26章에서 重爲輕根이라는 이상한 표현이 나오는데 해석은 어렵지 않다.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요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임금이다. 老子는 무슨 말을 하고픈 것일까? 빅뱅 이전의 상태라 상상해보자. 모든 것을 담아서 응축하여 有物混成으로 움직이지만, 원자핵처럼 매우 무겁다. 이 상태가 폭발하면 수소와 헬륨처럼 가벼운 에너지가 공간을 팽창시키기에 우주는 계속 팽창한다. 따라서 빅뱅 이전 상태는 지극히 응축되고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회오리친다. 이런 움직임을 重과 輕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교에도 이런 표현이 있다.
道는 중생 본연의 성품이다. 세계가 있기 전에도 있었고, 세계가 무너질 때도 소멸하지 않음으로 변화의 근거가 되는 성품이다. 불변의 道라서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허공과 같아서 세상의 모습으로 항상 머문다. 진여, 해탈, 보리, 열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老子의 重의 의미와 매우 닮아있다. 빅뱅 이전 상태가 이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有物混成이 낳은 有物混成의 세상을 살고 있다. 有物混成 = 重 = 壬 = 중생 본연의 성품 = 열반으로 달라 보이는 많은 표현들은 모두 동일한 뜻이다. 빅뱅 이전에 무거웠다는 표현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老子는 계속 물처럼 아이처럼 부드럽게 살라고 주장하기에 가벼움이 더욱 중요하다고 상상하기 쉽다. 重과 輕의 의미를 정리해보자.
重 - 壬 무한응축. 빅뱅 이전. 무거움
輕 - 癸 빅뱅. 폭발, 발산, 척력, 수소 헬륨. 가벼움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시이성인종일행 불리치중)
따라서 聖人은 종일 행함에도 항상 무거운 상태를 유지하는 수레를 떠나지 않으며. 이 문장에서 聖人을 “帝王이나 道에 뛰어난 사람”으로 해석하고 終日行을 온종일 길을 간다고 해석하면 老子는 함박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聖人은 우주를 만들어내는 어미, 혹은 어미의 의지를 실행하는 자로 이해하면 된다. 終日行은 有物混成의 끝없는 움직임을 뜻하며 그 상태를 수레로 비유하면서 항상 무거움을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해석에 주의할 점이 있다.
1. 不離重輜(불리중치)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2. 不離輜重(불리치중) 수레가 항상 무거운 상태를 유지한다.
대부분 1처럼 제왕이나 성인이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고 해석하지만, 빅뱅 이전의 상태는 항상 무거우며,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이다, 바로 不死다. 무거운 수레와 항상 무거움을 유지하는 수레는 전혀 다른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불변의 원칙을 항상 무거운 상태로 유지하는 수레이니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는 본성이자 기준이다.
雖有榮觀 燕處超然(수유영관 연처초연)
비록 영화로움을 볼 수는 있지만, 초연함을 유지한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바로 有物混成이다. 어둡고 무거우며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화려한 우주를 창조하고 생명체들에게 색계의 세상을 살도록 해주지만 수레를 항상 무겁게 유지하면서 인간들이 선호하는 色界에 절대로 나가지 않는다. 이해를 돕고자 十干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癸 팽창, 빅뱅 이후 丙 빛, 榮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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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 어둠, 빅뱅 이전. 燕處超然 丁 열, 물질
壬에서 癸를 지나 丙빛을 탐하면 화려한 色界를 만나고 탐욕이 생겨난다. 老子는 이것을 榮觀으로 표현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색계이면서도 절대로 화려한 세상에 나가지 않으며 무거움을 유지한다. 壬은 항상 본질을 유지하며 癸나 丙으로 바뀌지 않는다. 老子는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 본질은 변할 수 없다는 老子의 굳건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문장을 해석할 때, 화려한 세상에 居하면서 라고 해석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우주 주인이 어떻게 화려한 세상에 나가서 머무를 수 있는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어떻게 만물을 싣는 주인으로서 몸을 가벼이 천하에 드러낼 것인가? 세상 만물의 주재자, 조물주가 어찌 가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가? 흔들릴 수 없는 기준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가? 이 문장의 주어를 帝王이나 聖人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老子는 문장 어디에도 왕을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거의 모두 왕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輕則失本 躁則失君(경즉실본 조즉실군)
가벼우면 근본을 잃고 시끄러우면 임금을 잃는다. 本이나 君은 빅뱅 이전의 상태로 重靜이 輕躁를 만들어낸다. 重靜은 근본이기에 변할 수 없으며 반드시 무거움과 조용함을 유지한다. 가벼움과 시끄러움을 失本과 失君으로 표현했지만 輕躁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重靜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미는 항상 어둠 속에서 무겁고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며 자식 輕躁는 色界에 나갔다가 重靜에게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老子는 그 이치를 16章에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