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도 모르고 흔드는 깃발
내 할애비는 창씨가 개명 된 줄도 모르는 일자무식인데 왜놈 순사가 한마을에 사는 면장을 체포하러 오는 것을 알고 피신시켰다는 죄로 뭣도 모르고 지서에 끌려가서는 골병이 들도록 두들겨 맞고는 평생을 지팡이를 짚고 다니다가 내가 열세 살 때 돌아 가셨다. 뭣도 모른 이웃이 고자질을 한 것이다. 정낭에다 솔잎으로 주둥이를 틀어막은 소주병을 담가 똥물을 내려 마시던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올해로 일백 스물두 살이 된다. 내 백부는 남보다 먼저 개화문물에 눈을 떠 만주 가서 회사를 차려 끼니도 못 잇던 고향사람들을 데려가더니만 중일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귀향해서는 까막눈의 청년들을 모아 야학을 열고 발동기를 가져와서 방앗간을 차렸다. 디딜방아로 쌀을 찧던 시절이었으니 발동기는 놀라운 괴물이었다.
6. 25 사변이 터지자 남쪽 세상이 되면 동생이 집안을 보호하고 북쪽 세상이 되면 형이 집안을 보호 하자며 뭣도 모르고 당숙은 경찰이 되었고 막스와 레닌의 이름도 모르는 백부는 남노당원 명부에 도장을 찍었다. 경찰이 된 당숙은 뭣도 모르는 빨갱이가 쏜 총에 맞아 죽었고 복수를 벼르던 백부는 빨갱이로 몰려 경찰관 친구 손에 붙잡혀가서는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그 친구가 백부에게 오줌 누고 오라고 시켰는데 순진하신 어른이 뭣도 모르고 오줌만 누고는 다시 돌아왔다고 하였다. 피란 갔다 돌아오니 방앗간도 뭣도 모르는 자들의 손에 불타고 없어졌다.
진남포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제법 공부도 한 삼종 자형은 뭣도 모르는 자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죽을 뻔하고는 저 혼자 월남하였다가 함께 군복무한 전우를 따라 우리 마을로 흘러와서는 아들 다섯을 낳고 진남포 이야기만 하다가 죽었다. 아들 둘 데리고 피난 온 얼굴이 곱상하던 아주머니는 혼자 살던 막내 종조부와 혼인하여 내 종조모가 되었는데 손(孫)도 하나 이어주지 않고는 종조부가 세상을 뜨자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또 다른 당숙은 전쟁의 물결을 따라 흘러들어온 새 당숙모를 둘이나 얻어 배다른 아들딸을 여덟이나 낳았다. 내 백모는 고아로 떠돌던 딸아이를 하나를 주워 키웠고 또 다른 내 당숙모는 영복이란 고아를 주워서 꼴머슴으로 키웠는데 그는 내 소꿉친구가 되었다. 어릴 때 내 고향은 어느 누군가가 흔든 깃발 때문에 뭣도 모르고 빨갱이가 되고 국군이 되어 세상을 떠난 일가들로 넘쳐 났다. 그 아픈 상처 속을 비집고 집 잃고 가족 잃고 고향 잃은 영혼들이 그것도 안식처라고 끼어 들어와 살을 부비며 살았다.
400년 우리 마을 역사가 결단 난 후, 실낱같은 명맥(命脈)을 할머니가 40이 넘어서 낳은 내 아버지가 이었다. 혁명이 뭔지도 모르고 대구로 분가한 아버지는 배급표를 둘씩이나 들고 쌀을 타러 다녔다. 먹을 것도 없으면서 대가 끊이지 않으려면 자식이라도 많아야 한다며 뭣도 모르고서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다. 내 고향 우리 옆집에는 연호 할매와 작은선(소선)이 아지매가 살았다. 그 아지매의 아들이 전태일이다. 그는 잘살아보자는 운동이 한창일 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다가 죽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였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제 아픔이 더 커서 남의 비명 소리에는 귀를 닫았다. 그가 죽은 후 뭣도 모르는 정보계 형사들이 왜놈 순사들처럼 가끔씩 마을을 들락거렸다. 사람들은 뭣도 모르고 쉬쉬 거렸고 내가 그게 뭔지 알게 된 것은 내 나이 삼십의 중반이 넘었을 때였다.
동네 꼴머슴으로 살던 상호 형이 월남을 갈 때도 나는 깃발이 주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돈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뭣도 모르고 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하여 낙방하고서야 처음으로 연좌제란 말을 알았다. 깃발을 든 자가 자기와 색깔이 다르다고 살아 내려고 발버둥치는 것들을 굴비 엮듯 한 두름으로 엮어서 끌고 가는 게 연좌제였다. 무지한 것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힘을 가진 자들이 흔드는 깃발 아래로 몰려가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듯이 함께 돌을 던졌다. 지난시절 내 고향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죽이고 또 악착 같이 살아남았다. 산업화의 물결이 일자 족보를 숨기고 싶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도회로 하나 둘 떠났다. 도시는 그들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전쟁하듯이 돈을 벌었고 출세를 향해 내 달렸다. 원하는 것을 얻게되자 그들조차도 뭣도 모르고 새로운 깃발을 만들었다. 깃발의 위력만 아는 것이었다. 그들이 만든 깃발이란 깃발은 모조리 염색된 것이었고 순수한 깃발은 어디에도 없었다. 훗날, 아주 훗날이지만 나는 깃발을 만드는 자, 그는 예외 없이 사악한 영혼을 소유한 자라는 것을 알았다.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은 어디에도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 탁류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은 깃발이 하나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헌법 제 1조의 깃발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뭣도 모르고 돌아가는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이 깃발 하나 만큼은 놓치지 않고 줄기차게 흔들고 있었다. 우리가 쥔 이 깃발을 꺾으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뭣도 모르는 것들이 이 깃발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 깃발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출신 성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 땅에서 자식을 낳아 기르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음을 뭣도 모르고 살아왔어도 알게 되는 것이었다. 나를 앞서간 3대, 그리고 내 뒤를 따라오는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3대의 중간에 서서 그렇게 뭣도 모르는 역사가 이어져가는 것을 보고 있는 나는 이 땅에는 오직 이 하나의 깃발만이 영원히 펄럭이길 소망한다.(2011.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