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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호수
김정주
전동차가 온다, 이모를 떠민다, 이모가 철로로 떨어진다, 전동차가 이모를 밟는다, 이모는 죽는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뒷걸음질로 도망친다, 온몸이 후들거린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심장이 터진다.
생각만으로도 살인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배고픔과 같은 본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고 우겨본다.
이모와 나란히 서서 전동차가 오길 기다린다. 머릿속은 살인으로 수많은 컷을 잡고 있는데 이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혹시 기도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모는 종교나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긴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그렇다. 한 줌밖에 안 되는 몸피, 언제나 단정하게 빗은 머리,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 하얀 피부와 온화한 표정, 이러한 외모는 이모를 곱게 늙은, 바람직한 노인의 상으로 시선을 끈다. 그래서인가? 이모는 검은색 가방을 들고 교회나 사찰을 나가야 어울릴 듯이 보인다. 어떤 정갈함, 어떤 숭고함 같은 것이 늘 종교적인 색채로 떠돈다.
이모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런 이모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들지 않았다. 아니, 들었다. 아니, 들지 않았다. 연세에 비해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고, 연세에 비해 깔끔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면 나쁜 년이 되려나. 아니, 죽일 년이 되려나. 이모를 죽이고 싶다.
전동차가 온다. 이모는 두 손을 모아 잡고 내 옆에 조용히 서 있다. 점점 굽어가는 허리를 반듯이 펴고 평온한 얼굴 그대로 저기 어디쯤인가를 바라본다. 이모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이모의 팔을 잡는다. 살보다는 뼈가 잡힌다. 애잔함 비슷한 감정이 짧게 인다. 그리곤 멈춘다. 그리곤 격렬하게 다시 살인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선다. 이모를 죽이고 싶다는 것은 사실인가? 의문은 사절.
전동차가 바람을 몰고 이모와 내 앞을 스쳐간다. 바람이 거칠다. 질긴 생명만큼이나 모질다. 저 바람을 한 손에 움켜잡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나올까. 어찌하여 바람이 됐는지, 무슨 연유로 이 터널의 바람이 됐는지, 어떤 경로로 나와 이모 앞을 지나게 됐는지 볼 수 있을까. 바람은 험악하다. 세상의 온갖 것을 다 훑어가지고 다닌다. 그런 낯짝으로 여기 이곳까지 와서 뻔뻔스레 머리칼이며 옷자락을 날린다. 이모와 나는 저 바람을 비켜갈 수 있을까?
전동차가 선다. 이모의 팔을 잡고 전동차에 오른다. 노약자석부터 살핀다.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이모를 앉힌다. 이모는 얌전하다. 항상 그렇듯 두 손을 무릎 위에서 모아 잡는다. 저렇게 가지런한 모습을 갖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을까. 의식에 의한 것인가 무의식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습관에 의한? 습관, 습관, 습관… 그럴지도 모른다. 이모를 처음 보았을 때도 이모는 저렇게 두 손을 모아 잡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잡는 것은 이모의 습관이다. 습관은 의식으로 시작해 무의식이 된다. 이모의 손은 이미 무의식의 도구가 돼 버렸다. 이모의 정신처럼.
이모 옆에 선다. 자리는 두 자리가 비었지만 남겨둔다. 아직은 노약자석에 앉을 나이가 아니다. 장애인도 아니고 임산부도 아니다. 살인을 생각하는 자는 노약자가 아니므로 보호석에 앉아선 안 된다. 아니, 이모 옆에 앉기가 싫다.
전동차가 서고 사람들이 내린다. 내린 사람들의 수보다 적은 사람의 수가 오른다. 칠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지팡이를 들고 이모 곁에 앉는다. 이모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지만 예의 그 부드러운 표정으로 건너편만 본다. 쓸데없이 사람을 보거나 말을 시키지 않는 게 이모다. 누가 말을 걸기 전에 먼저 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기관리일 수도 있고 몸에 밴 도도함일 수도 있다. 그러한 동기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이모 옆에 앉은 할머니가 백에서 묵주를 꺼내 돌린다. 이모에겐 묵주가 없다. 묵주는 이모에게 종교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장난감도 아니다. 이모는 욕망을 초월했거나 무시하며 산다, 고 말한다면 건방진 얘기가 되려나.
할머니가 나와 이모를 올려다보며 일행이 아니냐는 시선을 던진다. 일행이지만 할머니가 가진 지팡이와 같은 일행이라고 말한다, 면 배배 뒤틀린 심사가 되려나.
기어이, 할머니 입에서 그 말이 나온다. 수없이 들은 바로 그 말이.
“거 서 있지 말고 여 앉아요. 자리도 비었는데. 따님이신가 며느님이신가…… 두 분이 닮은 걸 보니 따님이신가 보네.”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미소를 보낸다. 앉을 수 없다는 뜻으로, 따님도 며느님도 아니라는 뜻으로.
할머니는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앉으라는 말을 다시 한다. 빈자리가 아깝다는 듯이, 이모와 나를 번갈아 보기를 멈추지 않은 채.
사람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것은 잘못일까 아닐까. 아니라고 치고, 그래도 번거롭다. 짜증난다. 귀찮다. 싫다. 싫지만 한다. 지하철 투어라고 해야 할 이 일을, 당하는 게 아니라 한다. 호기심에 찬 눈초리를 기꺼이 받으며, 딸인지 며느리인지 추측하게 하며, 은근슬쩍 지루함을 덜게 해준다. 이래도 할 말이 있는가. 없다. 아니, 있다. 아니, 없다. 아니, 있다.
있다면 이것이다. 말하는 저 입을 찢어버렸으면.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이모는 내 말을 듣지 못한다. 아니, 듣지 않는다. 아니, 듣지 못한다. 아니, 듣지 않는다.
듣든 듣지 않든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그저 이모 옆에 앉아선 안 되고, 이모 옆에 앉기가 싫다는 것뿐이다. 이모가 어떤 생각을 하든 말든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그것은 이모를 산책시키는 것. 이모 옆에 앉아선 안 된다는 것. 이모 옆에 앉기가 싫다는 것. 그보다 더 타당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할머니 휴대폰으로 전화가 온다. 할머니는 딸네 집에 가는지 곧 내릴 거라며 동과 호를 재차 묻는다. 이모에겐 휴대폰이 없다. 딸네 갈 일도 없다. 세상과 단절을 하는 것인지 세상으로부터 격리를 당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모는 소통의 거리에서 점점 멀어진다. 굴절 없는 세계를 타박타박 걸어가며 시간을 통째로 삼킨다. 저런 이모를 나는, 사람들은, 왜 가까이하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할까.
신길역이다. 옆에 앉은 할머니가 묵주와 지팡이, 휴대폰을 챙겨가지고 내린다. 옆자리는 다시 두 자리가 빈다. 이모는 자지 않는다. 졸지도 않는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동자를 부산스레 굴리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목석처럼 앉아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동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이모는 부단히 움직인다. 무엇인지 모를 생각을 잡고 혼자 속살거린다. 저 세계를, 캄캄하지만 무엇인가로 수군대는 저 세계를 볼 수만 있다면.
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결코 기웃대지 않는, 저 고독한 행성을, 마주치기 꺼리는 저 암흑의 세계를, 굳이 열거나 볼 까닭이 어디 있을까. 모르는 것은 때론 선한 이웃이 된다.
전동차가 출발한다. 빈자리가 많다. 빈자리가 많은 데도 나는 서서 간다. 다리가 아프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할 몫이다.
이제 어디서 내릴까. 다음 역에서? 그다음 역에서? 다음 역이든 그다음 역이든 이모와 내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산책이므로. 어쨌든 지하철 여행이므로.
대방역이다. 전동차의 진동음이 멈춘다. 이모를 잡아 일으킨다. 이모는 내 팔에 의지해 전동차에서 내린다. 이모의 팔은 잎 하나 달지 않은 겨울 나뭇가지다. 불쑥, 이모에게 따뜻한 콩나물국물이 떠먹이고 싶어진다. 다행히, 대방역 승차장엔 콩나물국을 파는 데가 없다.
이모의 팔을 잡고 계단을 내려간다. 이모에겐 힘든 길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무리다. 무리는 하지 말자. 그렇다고 업고 내려갈 순 없지 않은가. 다음엔 대방역에서 내리는 짓은 하지 말자. 아니, 갈아타려면 대방역 말고도 계단을 오르내려야 할 곳은 많다. 어차피 산책인데, 어차피 운동인데, 얇은 감상은 접자.
일 분이면 건너편으로 갈 수 있는 계단의 길을 이모와 나는 십 분쯤이나 걸려 도착한다. 이럴 때는 도착한다는 말이 맞다.
조금 전에 내린 맞은편이 꽤나 멀어 보인다. 철로를 사이에 두고 멀리, 멀리, 그렇게 멀리, 이모와 내가 멀어지길 바란다. 이것은 소욕일까 과욕일까 오욕일까. 소욕이든 과욕이든 오욕이든 그것은 나머지에 속한다, 고 생각하기로 한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그러한 나머지로 있는 것, 그것이 이모와 나라고 한들 달라질 그 무엇이 있을까.
바람이 이모의 머리칼을 흩는다. 아, 모자를 잊었구나. 노인에게 모자는 필수인데. 더구나 이렇게 외출할 때에는. 후회하는구나. 아니,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시어머니는 모자를 쓴 적이 없다.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려도 시어머니는 바람을 잡아 길들일 줄 안다. 후회할 기회가 없다.
후회할 기회가 딱 한번 있었다. 땡볕이 내리쪼이던 여름, 시어머니는 양산을 잊고 절에 갔었다. 전화가 왔다. 양산 가져오너라.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산길을 올라 양산을 가져다주었다. 양산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었다. 후회는 아무리 해도 편안해지지 않으며, 아무리 여러 번 해도 물리지 않는다.
다리가 아플 법도 하건만 이모는 쪼그려 앉지 않는다. 벤치를 찾아 두리번거리지도 않는다. 저것은 당당함이 아니라 몸에 밴 자세이다. 허망하다는 느낌이 정신의 어느 귀퉁이를 찌른다. 이제 놔 버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곧추세우기만 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 그렇지. 넘어질 때 넘어지고, 쓰러질 때 쓰러지고, 죽을 때 죽는 것, 그것이 미덕이다, 라고 내게 속삭여본다.
여의도 쪽에서 부는 바람인지 인천 쪽에서 부는 바람인지 모를 바람이 이모의 머리칼을 들춘다. 검은 머리칼보다 흰 머리칼이 더 많은 머리칼이 바람에 날린다. 이모의 세월이 날리는구나. 진회색의 세월이 날리는구나. 바람에 섞여 있을 시간 속에 나와 이모는 들어 있을까 들어 있지 않을까. 들어 있다면 살인은 이미 했었어야 했고, 들어 있지 않다면 해야 할 일에 속한다, 고 고집을 부려본다.
생각을 바꾼다. 여기서 내려 지하도를 건너는 게 아니었다. 갈 데가 있지 않는가. 꼭 가야 할 데가. 이모를 데리고 다시 건너편으로 간다.
*
전동차가 온다, 이모를 떠민다, 이모가 철로로 떨어진다, 전동차가 이모를 밟는다, 이모는 죽는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뒷걸음질로 도망친다, 전처럼 후들거리지 않는다, 식은땀도 나지 않는다, 심장이 터지지도 않는다.
생각이라는 것도 반복하면 이렇게 떨리지 않는다. 이것은 좋은 징조인가 나쁜 징조인가. 살인을 현실화할 가능성인가 포기할 가능성인가.
이모의 팔을 잡고 전동차에 오른다. 노약자석엔 노년으로 접어든 여자와 중년의 여자가 앉아 있다. 노약자석에 이모를 앉힌다. 으레 그렇듯, 두 여자가 이모와 나를 번갈아 본다. 시선이 아프다. 이 정도는 충분히 감내해야 할 숙제다.
이모 옆에 선다. 자리가 비어 있지 않아서 앉아야 할 짐은 던 셈이다.
전동차가 한강다리를 건넌다. 이모는 한강도 한강다리도 보지 않는다. 저것은 무관심인가 기억의 탈색인가. 이모는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 건널 줄 모른다. 항상 같은 말로, 같은 의식으로, 원을 그린다. 다리를 건너는 그 직선이 아닌 돌고 도는 원의 형태만 지속시킨다. 이모를 죽이고 싶다.
안경 낀 중년의 여자가 이모에게 말을 붙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할머니, 어쩜 그렇게 곱고 귀여우세요? 젊어선 엄청 예뻤겠어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이모가 빙긋 웃어가며 대답한다. 여든여덟이라고, 또박또박 발음도 정확하다. 이모는 여든여덟이라는 숫자 안에 들어 있다. 곱고 귀여운 할머니로, 예쁜 할머니로, 평생 어려움 모르고 살아온 할머니로.
이 말은 맞는가 틀리는가. 보지는 않았지만 듣기만 한 것으로도 믿음의 기능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아마도 되는 모양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두 여자도 이모에게 들었던 바로 그 정보를 토대로 이모에게 말한다.
“할머니, 여든여덟이면 팔팔이네요. 할머니는 팔팔한 나이, 참 젊으세요.”
여든여덟이라는 숫자가 칭찬을 받는다. 대단한 수훈을 세운 숫자로, 아무나 다다를 수 없는 숫자로, 희망의 꼭짓점인 숫자로 부상한다.
이모의 젊은 시절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모도 나의 젊은 시절을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몰라도 이모와 나의 관계는 이어질 것이다. 살인에 대한 상상을 지속시키는 것으로. 이것은 세상을 역류하는 것이 되려나. 아무려나, 그러면 어떤가.
다홍색 점퍼를 입은, 노년으로 접어든 여자가 나와 이모를 번갈아 보며 묻는다.
“친정어머니세요 시어머니세요?”
이럴 때 관계는 정립된다. 친정어머니도 시어머니도 아닌 이모와 조카라는 사이로. 이럴 때 관계는 미흡해진다. 이모와 조카 사이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라는 관계보다 한 치 걸러 두 치가 되는 것으로. 이럴 때 관계는 미진해진다. 딸도 며느리도 아닌 조카딸이 여든여덟 살의 이모를 모시고 전동차를 타고 가다니 왜? 하는 의문의 관계로.
다홍색 점퍼의 여자가 안경 낀 여자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럼 이질녀가 되나? 어쩌면! 착하기도 하지. 요즘 세상에 부모도 귀찮아하는데 조카가 이모를 모시고 나들이를 하다니.”
저 소리, 또 저 소리. 저 소리를, 저 소리로 내뱉는 저 입을, 짓이겨놨으면.
나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만 짓는다. 두 여자는 내 대답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지 이번엔 이모의 정신을 저울질한다. 저기 저 여자 분이 누구냐고, 조카딸이 맞느냐고. 이모는 대답한다. 조카딸이라고. 분명한 어조로.
이모의 정신은 탈이 난 게 아니다. 지금처럼 징그러울 정도로 사실을 사실로 말한다. 이것은 이모에겐 불행한 순간이다, 라고 말하면 모순이 되려나.
이모를 처음 만났을 때 이모의 며느리는 이모와 내게 말했다. 앞으로 이모라고 부르고 조카딸로 부르라고. 그게 남 보기에 좋다고.
이모는 지금, 그때를 기억하며 그 기억을 거느린다. 밥줄인 양 명줄인 양. 나도 그때를 결코 잊지 않는다. 밥줄인 양 명줄인 양.
안경 낀 여자가 핸드백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이모에게 건넨다. 받을 리 없다. 이모는 집 밖에선 그 어떤 것도 먹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전동차 안에서 낯선 사람이 준 군것질거리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러한 동기는 어디서 출발했을까.
이모가 사양하는 것으로 알았는지 안경 낀 여자가 막대사탕의 포장을 벗겨 이모 손에 쥐어준다.
“할머니, 이거 빨며 가세요. 왜 안 드세요? 달고 맛있는데.”
이모는 마지못해 막대사탕을 쥘 뿐 먹지 않는다. 안경 낀 여자가 나를 보며 묻는다. 왜 안 드시냐고. 나는 대답한다. 밖에선 아무것도 드시지 않는다고.
안경 낀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모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할머닌 어디 사세요? 자녀분들은 몇이나 되나요? 아들 딸 다 있으시죠? 자녀분들을 잘 키우셨을 거 같아요. 지금은 누구랑 사세요?”
처음 보는 할머니에게 호구조사에 버금가게 묻는다는 것은 궁금함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말이 시키고 싶어서이다. 무료함을 덜기 위한, 혹은 어떤 반응이 나올지에 대한 호기심이다.
나는 호기심 때문에 이모에게 간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내게 호기심이란 사치의 사치의 사치, 그 이상이었다. 절박함이라고 말해도 된다면, 나는 절박함을 안고 간병인 교육기관에 들어갔고, 그래서 간병인이 되었고, 간병인으로 파견 나와 이모를 만났다.
이모는 대답한다. 막대사탕을 얌전히 든 채 늘 하던 그 말 그대로.
“우리 큰아들은 의사야. 둘째아들은 교수고. 막내아들은 저기 저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아. 우리 막내가 지난번 왔을 땐 옷이며 고기며 얼마나 많이 사 주었다고. 일제강점기 땐 어림도 없는 것들을 우리 막내가 턱턱 사주었지. 우리 막내는 미국에서 사업을 해. 사업이 잘된대. 돈이 많아. 지난번 들어왔을 땐 사업이 더 잘된다고 그랬어. 돈이 많아. 집도 여러 채야. 일제강점기 땐 꿈도 꾸지 못할 호강을 해.”
여자들은 놀란다. 내가 처음 이모에게 그 소리를 듣고 놀랐던 것과 똑같이.
“어마나 할머니, 어쩜 그리 총명하세요? 캘리포니아라는 말도 하실 줄 알고. 많이 배우셨나 봐요. 일제시대라 하지 않고 일제강점기라는 말도 하시는 거 보니.”
여자들이 나를 보며 묻는다. 할머니가 유식하다고, 많이 배우신 거 같은데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느냐고.
이러한 질문은 실례다. 아니다, 실례다, 아니다. 실례가 아닌 만큼의 대답을 해준다. 여고를 나왔다고. 피아노도 치실 줄 안다고.
이 말은 이모의 계급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 여고를 나오고 피아노를 칠 정도로 여유롭게 살았다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도 그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고 있다는, 일종의 암시다. 일단은 우리 사회가 그렇게 흘러갔으므로, 지금도 그렇게 흘러가므로.
그런데 나는 왜 묻지도 않은 말을 했을까. 피아노를 칠 줄 안다고. 이모가 피아노 치는 걸 본 적도 없으면서.
다홍색 점퍼의 여자가 신기한 듯 이모에게 묻는다.
“할머닌 큰아드님보다 막내아드님을 더 좋아하시나 봐요. 막내아드님 얘기만 하시네. 막내아드님은 무슨 사업을 하기에 그리 돈을 잘 벌어요?”
이모의 대답은 여자들을 실망시킨다.
“우리 큰아들은 의사야. 둘째아들은 교수고. 막내아들은 저기 저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아. 우리 막내가 지난번 왔을 땐 옷이며 고기며 얼마나 많이 사 주었다고. 일제강점기 땐 어림도 없는 것들을 우리 막내가 턱턱 사주었지. 우리 막내는 미국에서 사업을 해. 사업이 잘된대. 돈이 많아. 지난번 들어왔을 땐 사업이 더 잘된다고 그랬어. 돈이 많아. 집도 여러 채야. 일제강점기 땐 꿈도 꾸지 못할 호강을 해.”
이모의 얘기는 멈춘 시계의 시간이며 반복에 반복을 허용하는 카피이다. 카피가 나쁘기만 한 것일까. 이모와 나의 관계처럼, 아니, 나와 나와의 관계처럼, 그렇게 같은 것을 찍어대는 것을, 재생산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일까.
재생산, 그것을 노리며 나는 간병인을 택했나. 아니, 형벌을 택했다는 게 솔직하다. 형벌도 알고 보면 재생산에 속한다, 고 나를 속여 본다. 속아 넘어가길, 그렇게 약간은 고상한 표현으로 꾸미는 것을 모른 척해주길, 나는 내게 원해본다.
카피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모의 말에 중년의 여자들은 뜨악해하는가 싶더니 이내 같은 말로 묻는다. 이모의 대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질문으로.
이제 호기심이 채워졌으니 놀아보자는 수작이다. 이질 간이 아니라 간병인과 치매 노인의 관계를, 그 분명한 병명을, 분명하게 알았으니 어디까지가 치매 현상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관심이 지나치다. 아니, 지나치지 않다. 이모에겐 말을 붙여줄 상대가 필요하고 많은 접촉이 있을수록 호전의 기회는 많아진다.
선하게 생각하면, 이러한 것을 바라고 이모의 며느리는 간병인을 고용해 지하철 투어를 시킨 것이다. 예전의 기억을 돌이킬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인 양.
예전의 기억으로 돌아간다면 이모는 행복해할까. 이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이모는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 생각하면 욕심일까. 욕심이 아니다, 욕심이다, 욕심이 아니다.
가정파괴범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별처럼 달고 있는 저 치매라는 정신세계는 폭력의 정점을 이룬다. 아내와 남편의 사이를 벌려놓고 부모와 자식 간을 이간질한다. 그러니 예전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멈출 수 없다. 설혹 이모가 원치 않는다 해도, 이모의 뜻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무조건.
종로3가역이다. 여긴 5호선과 3호선으로 환승할 수 있는 역이다. 이모와 나는, 이모와 나는, 환승을, 환승을, 해야 한다. 가정파괴범의 저 파렴치한으로부터 내려, 캘리포니아나 일제강점기가 아닌, 요양원의 치매자가 아닌, 버리고 버림받는 그 환멸의 자리로부터 환승하여야 한다, 고 이를 악문다.
여자들이 내린다. 내게 앉으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앉지 않는다. 곧 꺾어질 듯한 다리로 나는 나를 버틴다. 임산부는 아니지만, 장애인은 아니지만, 살인을 꿈꾸는 장애인이므로, 장애인 신분을 감추기 위해 앉지 않는다.
이 형벌은 마땅한가 마땅하지 않는가. 아니, 똥물을 얼굴에 끼얹어 줄만큼 혐오스럽다. 혐오스러운 내가, 환장하게 마음에 든다, 면 그것 또한 유희에 속하려나.
곧 회기역이다. 이모가 사는 집이 있고 이모의 보호자인 둘째아들이 교수로 재직한다는 대학교가 있는 역이다.
나는 그 아들을 본 적이 없다. 오전 10시에 그 집으로 가 이모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간단히 간식을 먹여드린 후 이모와 함께 11시에 집을 나선다. 그뿐이다. 그 아들을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 그 아들이 교수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은 또 있다. 할머니 앞으로 꽤 큰 집이 있다는 소리 역시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이대로 될까. 되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전동차가 선다. 이모를 부축해 내린다. 역사 계단을 오르고 또 내리고, 마을버스 정류장을 지나고, 커피점과 음식점이 즐비한 길을 지나고, 학생들이 분주히 오가는 길을 지나, 이모와 나는 이모가 살았던 집 앞에 선다.
*
사는 집이 아니라 살았던 집이 돼 버린 이 집 앞에서, 이모는 말간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한다. 막대사탕을 손에 쥔 채 그대로. 멀미가 올라온다. 이럴 때 대신 악을 써 줄 누구 없을까. 대신 퍼질러 앉아 통곡해 줄 누구 없을까. 아니, 아니, 그림처럼 서 있기만 한 저 이모를 후려쳐 줄 누구 없을까.
이모는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변할 줄 모른다. 마치 부아를 부채질하려는 듯이 외골수로 있기만 한다. 말끔한 외양은 오히려 밉살스럽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저 이기심은 소리 없는 구타를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하란 말이냐. 저 이모를, 그리고 나를.
일주일 전만 해도 의심 없이 들어가던 집이 이제는 들어갈 수 없게 된 이 엄청난 변화를, 이모는 모르는 것일까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의사와 교수, 사업가 아들을 둔 이모가 외딴 섬에 버려진 애완견이 된 이 사실을, 나는 이해한다. 아니, 이해하기 싫다. 아니, 이해한다.
이모를 내게 버린 그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테니 이해한다, 고 생각하라면 그것은 무리다. 무리가 아니다, 무리다, 무리가 아니다.
시어머니의 치매가 심해지던 즈음, 나는 요양원에다 시어머니를 버렸다. 그리고 이사를 해버렸다. 한 번이 아닌 네 번씩이나. 그리고 간병인 교육기관에 들어가 간병인이 되었다. 그리고 또, 자청하여 치매 노인의 간병인으로 나섰다.
이러한 나를 이치에 맞는다고 해야 할까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맞든 맞지 않든 상관하지 않겠다. 지금의 내겐 저 요지부동의 이모가 있고, 처치 곤란한 물건보다 더한 존재로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이모는 배가 고플 법도 하건만 막대사탕엔 손도 대지 않고 대문 앞에 오도카니 서 있기만 한다. 들어가자는 소리도 없이, 돌아가자는 소리도 없이, 내 처분만 기다린다. 내 처분만. 지겨운 노인네 같으니라고!
이렇게 할 게 아니라 의사라는 아들에게 연락을 취했어야 했다. 교수라는 아들에게도, 사업을 한다는 아들에게도 연락을 했어야 했다. 이미 버리겠다고 마음먹고, 사라지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심리를 너무 잘 아는 게 탈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연락처는 벌써 여러 번 바꾸었을 것이고, 말로만 듣던 의사는 누구인지 어느 병원에 다니는지도 모르고, 교수며 사업가 아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데 어디서 무엇으로 그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들은 영악하게도 이모와 내가 집을 나서자 이사를 했고, 교활하게도 이모의 거주지를 내 집으로 옮겨놓았다. 이것은 징벌인가 응보인가. 아니, 재난일 뿐이다. 그저 재난일 뿐.
이모를 내 집으로 데려가던 날, 살인하는 꿈을 꾸었다. 살인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며, 최초의 대담함이며, 최초의 짜릿함이며, 최초의 희열이었다.
꿈속에서 시어머니는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적삼을 입고 소나무로 만든 좌탁에 앉아 논어를 읽는다. 뒷모습이 풀 먹인 모시적삼보다 빳빳하다. 머리칼이 당기고 가슴속에서 얼음이 언다.
시어머니에게 식혜를 가져다준다. 살얼음이 살짝 올라앉은 식혜를. 시어머니가 논어를 읽다 말고 이마를 찌푸린다. 이거 치워라. 책을 읽고 있지 않니.
식혜를 도로 내온다. 뒷걸음으로 조용히. 시어머니의 방 창호지로 넘어가는 해가 붉게 번진다. 시어머니가 미닫이문을 연다. 식혜 가져오너라.
시어머니에게 식혜를 가져다준다. 살얼음이 녹은 식혜를. 시어머니가 식혜 그릇을 들다 말고 그대로 놓는다. 이거 치워라. 살얼음이 없지 않니.
시어머니가 풀을 빳빳이 먹인 모시적삼과 모시치마를 입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화단의 봉숭아가 독선의 말보다 더 새빨갛다. 시어머니가 봉숭아를 딴다. 손톱에 물을 들여야겠다. 준비해다오.
봉숭아를 빻는다. 다 빻은 봉숭아에다 염산을 섞는다. 봉숭아가 부글부글 끓으며 녹는다. 벌건 물이 된 봉숭아를 시어머니의 손톱에 바른다. 시어머니는 콩기름으로 윤을 낸 장판에 누워 판소리를 듣는다. 염산이 섞인 봉숭아물을 시어머니의 손등에 바른다, 팔에 바른다, 다리에 바른다, 얼굴에 바른다. 시어머니는 시뻘겋게 타들어가며 뭉그러진다. 시어머니라는 형체를 잃어버리며 그렇게 증발한다. 사라져 없어지는 형체, 오싹 소름이 돋게 어여쁘다.
봉숭아물을 내 손톱에 바른다. 손톱이 탄다. 아픈 게 아니라 시원하다. 봉숭아물을 손등에 바른다. 뜨거운 게 아니라 후련하다. 봉숭아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쓴 게 아니라 만성 소화불량이 쑥 빠져나간다.
염산이 섞인 봉숭아물처럼 나는 그렇게 독을 품으며, 독해지며, 죽어버린 시어머니와 하나가 된다. 깜짝 놀라는 것처럼, 무서운 기쁨이 빠르게 차오른다.
이모를 버린 그들을 용서한다. 용서하기 싫다, 용서한다, 용서하기 싫다.
용서하기 싫으니 이모를 데리고 근처 식당으로 들어간다. 이모는 막대사탕을 어쩌지 못해 두 손을 모아 잡지 못한다. 이모 손에서 막대사탕을 빼 쭉쭉 빤다. 달콤함이 피곤함을 잠시 뒤로 물린다.
계란찜 백반을 시키고 나와 이모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기만 한다. 무료하거나 심심하지는 않다. 어떤 목적을 이루지 못한 자들처럼 이모와 나는 미련이 남은 말을 나눈다. 섞이지 않는 말을, 섞을 수 없는 말을, 말을 하지 않으며 말을 나눈다. 말의 내용이나 주제는 모른다.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한 이모를 용서한다. 그들을 용서하기 싫었으니 용서한다. 이러한 법칙 아닌 법칙은 살인보다 나을 게 없다.
살인,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쭉쭉 빨아먹어 없어진 이 막대사탕처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꿈속에서의 살인은 살인으로, 꿈에서 깨었을 때는 살인이 아닌 것으로, 그렇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으로 있다, 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계란찜이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다. 계란찜을 후후 불어가며 한 숟갈 뜬다. 계란찜 숟갈을 이모의 입에 댄다. 이모가 조심스레 입을 벌린다. 가늘고 주름진 목이 계란찜을 넘긴다. 톡 치면 그대로 부러질 것 같은 가늘고 가는 목으로.
식당 여주인이 카운터에 앉아 이모와 나를 빤히 지켜본다. 이모와 나는 늘 구경거리다. 딸인지 며느리인지, 효도를 하는지 불효를 하는지, 나름의 잣대로 판가름을 설정한다. 위대한 일이다. 타인의 시선이 없었더라면 벌써 살인하고도 남았을 일들이, 이렇게 버젓이 그럴싸한 흉내를 내며 사람들을, 그리고 사회를 안심시킨다.
나는 식당 여주인에게 작은 그릇을 달라고 말한다. 계란찜을 작은 그릇에 덜어 후후 분다. 이모는 계란찜을 좋아한다. 이가 시원치 않아서 좋아하게 되었는지, 젊어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유일하게 아는 게 있다면 이모는 아무 음식이나 덥석덥석 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양원에 있는 시어머니처럼.
요양원의 음식은 시어머니를 적응시킬 수 있을까 없을까. 치매는 길든 식성을 바꿀 수 있을까 없을까. 이모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모는 계란찜을 기억할까 기억하지 못할까. 먹었던 것조차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모는 작은 그릇에 덜어 준 계란찜을 먹는다. 행여 흘릴까 염려하면서 아주 조심스레 먹는다. 저런 행동은 의혹을 던진다. 치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이모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치매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똑똑한 척하는 인간들을 비웃고자 한 반어적 행동이다. 아, 이건 너무 형이상학적인 얘기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자식들에게 눈칫밥 먹는 게 힘들어 위장술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기교적 방법이라고.
그것도 아니라면 이건 또 어떤가. 의사 아들은 이민을 가겠다고 하고, 교수 아들은 교환교수로 나가겠다고 한다. 짐이 될 건 뻔하다. 그러니 멀쩡한 정신으로 버림받기 전에 치매라는 수단을 사용하자는 것.
이모에겐 잔인한 상상일지도 모르겠다. 저토록 어린아이처럼 계란찜에 빠져 있는데 참으로 못된 상상이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모는 계란찜만 먹는 게 아니다. 콩나물도, 고사리나물도, 오이무침도, 김자반도, 고등어조림도 다 먹는다. 음식을 가려가며 먹는 이모가, 먹을 양을 초과하여 싹싹 다 비운다. 먹었다는 사실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도 모른 채 과식을 한다. 이모는 치매다. 전형적인 중증 치매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모는 내 전부를 무섭게 갉아대는데, 돌아설 길도 돌아갈 길도 차단하고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마지막 식사다, 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이모에겐 마지막 식사다. 나와 이모가 함께 하는 식사는 이것으로 끝이며, 두 번 다시 할 일이 없으며,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식당 여주인의 말이 식당이 무너지는 소리보다 더하게 난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며느리인가 봐요? 할머니와 닮지 않은 걸 보니. 요즘 며느리들 다 싸가지인데 저 할머니는 복도 많네. 저런 효부를 두었으니.”
멀미와 체기가 한꺼번에 치민다. 말하는 저 입을 쫙 찢어 짓이겨버렸으면.
나는 고개를 돌려 식당 여주인에게 활짝 웃어 보인다. 웃음으로라도 거짓 증명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이모가 밥 한 그릇을 다 비운다. 나도 밥 한 그릇을 다 비운다. 이모와 나는 사이좋은 고부간으로 밥도 똑같이 다 먹어치운다. 그래야 용서하고 용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죽박죽 든다.
이모를 부축해 식당을 나온다. 이제야말로 헤어져야 할 시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이 길에서 뒤로 슬쩍 빠진다고 눈여겨볼 사람은 없다. 이모의 팔을 놓는다. 이모가 그 자리에 선다. 이모를 두고 앞서 걷는다. 어디선가, 요양원에 들어갈 때 듣던 소리가 난다. 에미냐,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머리가 뜨끔해온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열이 치솟는다. 빠른 걸음으로 근처 구멍가게로 들어간다. 숨자, 숨자, 숨자. 숨는 것이다. 꼭꼭 숨는 것이다. 이모의 시야로부터 멀리, 멀리, 숨는 것이다.
가게 냉장고를 열고 두유 한 팩을 집는다. 손이 허둥댄다. 냉장고를 닫고 계산대로 간다. 계산대 앞에 있는 귤 한 봉지도 집는다. 손이 떨린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온다.
이모가 있는 쪽을, 나도 모르게 돌아본다. 이모는 그 자리 그 모습으로 서 있다. 팔 하나를 잃은 표정으로, 그렇게 무턱대고 서 있기만 한다. 살인에 대한 욕구가 미치도록 치민다.
이모에게 다가간다. 이모는 내가 가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두 손을 모아 잡고 공손히 인사라도 할 자세다. 이모의 팔을 와락 잡는다. 이모는 저항하지 않는다.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서운하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는 이모가 무섭다. 꿈속에서 시어머니를 죽이고 나를 죽이던 때보다 더 무섭다. 이모를 잡아끌고 지하철역으로 간다.
개찰을 한 후 시내로 나가는 쪽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아래엔 등받이가 없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다. 벤치에 앉아 오가는 전동차를 흘려보낸다. 전동차는 이 지지하기만 한 인생을 외면하고 달려가고 또 달려온다. 이모를 돌아본다. 노인이 오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이모가 쓰러지지 않게 이모의 팔을 꽉 잡는다.
*
전동차가 온다, 이모를 떠민다, 이모가 철로로 떨어진다, 전동차가 이모를 밟는다, 이모는 죽는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도망치지 않는다, 사람들 틈에 끼어 이모를 구경한다, 이모의 두개골에선 뇌수가 흘러내리고 터진 배에선 창자가 피를 토해낸다.
생각이라는 것도 연습을 하면 이렇게 태연해진다. 그렇구나, 태연해지는구나. 태연하게 살인을 할 수도 있는 거구나.
전동차가 온다. 이모의 팔을 잡고 전동차에 오른다. 노약자석은 만원이다. 일반석에도 빈자리는 없다. 노약자석에 앉은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거나 다른 데를 본다. 노약자석의 노약자들은 노약자가 아니다. 자신의 약함만을 강하게 주장하니 그만한 강자도 드물다, 고 말한다면 어폐가 있으려나.
일반석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끈다. 저기 저 자리에 앉으시라며 손으로 가리킨다.
이모를 앉히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이모는 언제부터 지하철을 타게 됐는지 알 수 없다. 언제부터 혼자 몸으로는 타지 못하게 됐는지, 언제부터 자리 하나도 뜻대로 찾아 앉지 못하게 됐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시간은 눈치채지 않게 육신을 지배하고 정신마저 장악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라고 생각하는 건 하나마나한 소리다. 하나마나한 소리조차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모는, 이 긴 행로에서 검불만도 못한 존재라는 걸 깨달아야만 한다.
검불만도 못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시어머니는 그 대꼬챙이 같은 기세를 연장하려 했던 것일까. 자막도 없는 허공에 대고 파르르 떨며 그리 말했던가. 필요 없다! 필요 없다! 다 필요 없다!
아들을 잃고 시어머니는 다 필요 없다는 말을 해가며 애지중지하던 난을 뜯어 쌈을 싸 먹었다. 똥을 싸 빳빳한 모시적삼에 둘둘 말아 반닫이에 넣었다. 끓는 찌개그릇에 신던 구두를 넣었다. 신문을 보는 있는 내 뒷머리를 가위로 잘랐다. 시어머니에겐 필요 없는 것들로 넘쳐났다.
필요 없는 것들에 허세를 부리며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던 그 절박함을 나는 안다, 고 말할 수 있을까. 요양원에다 시어머니를 버리고 돌아섰을 때의 그 절박함과 같다, 고 말할 수 있을까. 절박함, 그것은 어떤 형태로 기형을 이루든 자신과 타인에게 이해되고 참작되고 허락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면 멍석말이를 당해야 할까.
이모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사람은 남자다. 이모 옆에 앉은 사람도 앳된 청년이다. 아줌마가 아닌 남자들에게 있어 이모와 나는 관심거리가 아니다. 할머니도 아줌마도 시어머니도 친정어머니도 아닌, 승객일 뿐이다. 이제야 평등해진다. 이제야말로 편안해진다. 말로부터, 시선으로부터, 쓸데없는 관심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게 이렇게 위안이 되다니 참 별스럽기도 하다.
이모 옆 자리가 빈다. 앉지 않는다. 내 또래의 아줌마가 얼른 와서 앉는다. 빈자리란 없다. 자리란 비일 새가 없어서 자리가 되었다는 말은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없을까. 시시한 얘기다. 시시해지고 싶어 시시하게 생각하는 시시한 생각이다.
이모 옆에 앉은 여자가 성경책을 편다. 시시콜콜 말을 붙이지 않겠다는 뜻이니 반가운 일이다. 여자가 요한계시록을 편다. 깨알 같은 글씨엔 주황색과 연두색의 형광펜이 칠해져 있다. 저 줄 친 대목 중엔 치매와 간병인에 관한 얘기가 있을까 없을까. 있다면 이렇게 말해다오. 나는 이모를 죽이고 싶어 하고, 지금 이후 저 이모를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숨 막혀 한다고. 없다면 이렇게 넣어다오. 요양원에 있는 시어머니를 나는 매일 죽이며 매일 살려낸다고. 그렇게라도 만나지 않으면 살인을, 피를 보는 그런 살인을 할지도 모른다고.
지금처럼 이모 앞에서 천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계시의 작용인가 아닌가. 모른다. 몰라야 한다. 그래야 이런 생각도 계속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동대문역이다. 벌써 세 개의 환승역을 지나 네 번째 환승역에 온 셈이다. 환승역은 기회다. 이 역에서 저 역으로, 저 역에서 또 저 역으로,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그렇게 갈아타도 된다는 공식 선언이다. 공식으로 선언한 것엔 도덕의 힘이 약하다. 이 찬스를 잡자, 고 생각하는데 입안이 바짝 마른다.
전동차가 출발한다. 놓친 찬스는 뜻밖에도 기가 꺾이지 않는다. 다음의 찬스를 향해 두근거리며 땀샘을 자극하며 체온을 높인다. 얼굴이 붉어지나? 이마에 땀이 솟나? 다리가 떨리나? 정신을 차리자. 이제 곧 다섯 번째의 환승역이다. 환승역에서 탔으면서도 환승하지 못한 걸 이번에는 반드시 해 버리자.
이모는 환승역이 어떤 데라는 걸 알고 있을까. 이모가 나를 갈아탈 수 있고 내가 이모를 갈아탈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이모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닐까.
이모는 나를 시험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멀쩡한 정신이면서 치매인 양, 간병인을 고용해 진심을 알아내려는 것일 수도 있다. 진심이 보이면 제법 돈이 나간다는 그 집 한 채로, 간병인에게 노후를 의탁해볼까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돈이 많아도 치매 노인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며느리들의 원성을 피해, 어쩌면 치매로 환승할지도 모를 그 길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자식들과 짜고 이런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역전드라마다. 천박하고 비열하며 파렴치한 드라마다, 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한편에선 그 생각이 마음에 든다. 이것은 정당한 보상심리의 일종일까 아닐까. 아니어도 상관하지 않겠다.
종로3가역이다. 이모는 두 손을 모아 잡은 채 눈을 감고 있다. 웬만큼 피곤해선 집이 아닌 밖에서 눈을 감거나 자는 이모가 아니다. 이럴 때 슬며시 내리자, 고 몸을 트는데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나를 치며 출구 쪽으로 간다. 들고 있던 두유와 귤이 든 봉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모가 눈을 뜬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서둘러 봉지를 집는다. 결국은 다시 이모다. 이모를 일으켜 전동차에서 내린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모와 나는 3호선과 5호선으로 환승할 수 있다는 화살표 앞에서 마냥 서 있기만 한다. 3호선으로 갈아타면 시어머니가 있는 요양원이 나오고, 5호선으로 갈아타면 이모가 세를 주었다는, 이모 앞으로 된 집이 나온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긴 마찬가지다.
제대로 환승하지 못한 노인들이 환승하는 길 위에서 서성댄다. 둘 셋이 모여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초점 잃은 눈동자를 굴린다. 버려진 노인들, 저 속에다 이모를 두자.
이모를 음료수 자판기 앞으로 데리고 가 두유와 귤이 든 봉지를 쥐여준다. 이모가 나를 본다. 말갛기만 한 눈으로, 얇은 몸피로, 나이만큼 줄어든 키로. 이모가 이보다 더 무서운 적이 없다.
이모에게서 돌아선다. 무서움을 떨쳐내며, 냉정하게, 참을성 있게, 기억 상실자처럼, 그렇게 돌아선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발걸음을 빨리한다. 전동차의 울림과 지하의 탁한 공기가 나를 집어삼킨다. 좋은 징조다, 라고 떼를 써본다. 아니, 떼를 쓰는 게 아니다. 사람의 소리보다 사물의 소리가 클 때 사람은 소멸한다. 나는 없어진다. 이 복잡한 소음과 이모, 그리고 시어머니로부터 나는 소멸하여 없어진다.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과 부딪치며 왕왕대는 소음 한복판을 걸어간다. 갑자기 귀가 찢어지게 아프다. 에미야,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걸음을 멈춘다. 가슴이 터진다. 숨이 막힌다. 뒤를 돌아본다. 이모는 보이지 않는다. 내 시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 있다. 멈추지 말자. 이때를 놓치면 나는 기어이 살인을 하고야 말 것이다. 걸음을 재촉한다. 3호선이 됐든 5호선이 됐든 무조건 가고 보는 거다. 거기가 어디로 이어지든 여기보다는 나을 게 아닌가.
에스컬레이터 앞이다. 앞으로 앞으로 밀려 나가는 기계의 길 앞에서 뜻하지 않게 현기증이 인다. 순간 발을 헛디디면 나는 에스컬레이터 이 꼭대기에서 저 아래로 구를 것이다. 에스컬레이터가 제시하는 이 길을 제대로 타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고 이모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악착으로 달라붙는 이 악다구니에서 나는 대체 언제쯤 자유로워질 것인가.
뒤를 돌아본다. 방향도 주지 않으면서, 방법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걸음을 붙들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는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디로 가라고, 무얼 어떻게 하라고, 이리 발을 묶어둔단 말인가.
이모가 있던 쪽으로 몸을 튼다.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걸음은 빨라진다. 이모가 눈에 잡힌다. 두유와 귤이 든 까만 비닐봉지를 든 채 그 자리 그 모습으로 서 있다.
노숙자로 보이는 남자가 이모에게 다가간다. 이모는 마주 오는 나를 보는 것인지 노숙자를 보는 것인지 모를 눈으로 앞만 본다. 노숙자는 이모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와락 잡아챈다. 저러다 머리끄덩이라도 잡히는 건 아닐까.
마음이 타들어간다. 뛰다시피 이모에게로 간다. 그렇게 마주치기를 꺼리던 이모의 말간 눈과 마주친다. 저 눈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모에게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이모가 대답한다. 조카라고. 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모를 데리고 좀 전에 내렸던 바로 그 앞으로 간다. 여긴 스크린도어가 있어 선로가 보이지 않는다. 살인에 대한 생각이 막힌다. 저절로 스크린도어로 눈이 간다. 스크린도어에 인쇄된 시가 살인보다 더하게 나를 살해한다.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손세릴리아, 「얼음 호수」 전문
저 시는 끔찍하다. 살인보다 더하다. 나를 까발리고 있지 않은가. 반성을 하라고, 독백으로 다그치고 있지 않는가. 그럴 수 없다. 나는 저 시인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 돌아서지도 않겠다. 나는 저 얼음 호수 복판으로 걸어가겠다. 커다란 망치로 얼음을 깨 얼음보다 찬 물에다 산수유를 심겠다. 망치로 꽃을 피우며 살이 떨리도록 살아남아, 지금의 나를 두고두고 지켜보겠다. 얼마나 잘사는지, 얼마나 저열하게 죽어 가는지, 눈을 부릅뜨겠다. 간병인이 되었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나는 지금의 나를 버리지 않으며 원망하지도 않겠다. 목이 메는 지금의 나를 악취로 풍기며 산수유로 꽃을 피우고야 말겠다.
1호선 전동차가 저쪽에서 온다. 나와 이모를 얼비추던 「얼음 호수」 안으로 전동차가 들어온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사람들이 내린다. 저들 또한 깨지지 않는, 깰 수 없는 얼음 호수 하나쯤은 품고 살 것이다. 추워하며 혹은 열에 들떠 하며, 그만 고발하라고 얼음 호수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꿈을 꿔본다. 이모를 전동차에 넣는 순간 잡고 있던 팔을 놓아버리는 꿈을. 봉하고 염해 영영 녹지 않을 얼음 호수가 되는 꿈을. 죽이거나 죽을 수 없어 살인호수가 되는 꿈을.
1호선 전동차는 나와 이모가 동거를 시작한 바로 그 방향으로 출발한다.
* 제목 「얼음 호수」는 손세실리아의 시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힘.
─『시에』 2011년 여름호
김정주
충남 웅천 출생. 2003년 소설집 『을를에 관한 소묘』로 등단. 소설집 『곁눈질』. 장편소설 『그러나 설레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