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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복음(막 15:21-34)
오늘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예배당을 표시하기 위해서 뾰족탑 위에 십자가를 달아놓습니다. 여성들은 악세사리로 십자가 목걸이를 하여 기독교인임을 나타냅니다. 또 무덤위에도 십자가를 꽂아놓아서 묻힌 사람이 기독교인임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최초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서 모였던 곳이 있는데 바로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입니다.
이곳의 벽면과 천장에 그려진 그림에는 비둘기, 월계관, 물고기 등이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로 바뀌어 정착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십자가가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그리고갈라디아서 6: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말씀은 죽음의 순간에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 자신에 대하여 가장 진실하게 됩니다. 가식과 위선에 가득찬 사람도 본심을 털어놓게 됩니다. 오래 전이지만 죽음을 조롱하듯 자청했던 지존파 일당도 죽음의 순간에는 사악한 모습을 거두고 참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에 하신 말씀중의 한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34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어가시면서 외치는 마지막 절규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간은, 예수님이 인간형벌 중 가장 무서운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고난주간입니다.
키케로는 말하기를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고도 소름끼치는 사형이기 때문에 전율로 몸을 떨지 않고는 그것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사형법은 본래 페르샤의 사형방법입니다. 페르샤인들은 땅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 죄인이나 악인의 시체로 땅을 모독할 수가 없다는 사상으로 높이 달아 죽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죄를 알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일생을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산 분을 가장 악독한 죄인에게나 내려지는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의 집행 방법은 죄인이 재판을 받아 유죄선고를 받으면 재판장은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네 사람의 로마군인들에 이끌리어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사형장으로 가게 됩니다.
십자가에 사형 당하기 전에 채찍으로 맞는 무서운 태형을 당하게 되는데, 로마 채찍은 가죽끈에다가 짐승의 뼈들을 넣으므로 그 채찍에 맞으면 온 몸에 뼈가 박히면서 휘감깁니다. 그리고 잡아 다니면 그 뼈들이 온몸에 살고랑을 내면서 찢기어지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죄수는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갈 때 될수록 많은 거리를 지나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범죄자는 이렇게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경고로 알려주는 전시효과 때문이요, 2)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갈 때에 한 사람이 앞에서 죄상을 적은 죄패를 메고 가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읽고 이의가 있으면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의 판단대로 아무 죄가 없음에도,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고 이 거리, 저 거리로 끌려 지나가십니다.
군중들은 온갖 욕을 퍼붇고 놀리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 시에는 제자들에게 "이 떡은 내 몸이라" "이 잔은 내 피라"고 하시면서 자기가 잡수실 음식을 모두 나누어 주셨기에 굶으신 상태였는 데다가, 감람산에서 체포당하신 다음에 밤새도록 일곱 번이나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당하시느라 전혀 주무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무서운 채찍으로 온몸에 맞으시고, 또 가시관을 쓰셨기에 이마에 피가 흘려 얼굴과 몸을 적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걸어가기도 힘에 겨운 판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오래 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거리가 7-800미터 가량인데, 나중에는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비아돌로로사"라고 부르는데 그냥 걸어가는 데도 다리가 대단히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는 14개의 지점이 있고 그곳마다 기념교회나 기념상이 있었습니다. 그 지점 중 4번째 장소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신 곳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사정없이 채찍질하시면서 일어나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다시 일어나셔서 10미터쯤 가시고 다시 쓰러지십니다. 이번에는 아무리 매질해도 너무 무거워 일어나지 못하십니다.
그러자 옆에 구경하고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게 합니다. 여기가 제5지점입니다. 또한 제9지점은 예수님이 맨몸으로 올라가시다가 쓰러지신 곳입니다. 여기서부터 약 30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해골이라는 언덕, 골고다에 이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십자가 틀에 눕히고 양손과 양발을 묶습니다. 그리고 13센티나 되는 큰못으로 양발과 양손을 잔인하게 못박습니다.
십자가 중간에는 안장으로 불쑥 나온 나무 조각이 있는데 이 안장이 없으면 죄수의 중량에 지탱을 못하여 양손이 찢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마침내 십자가를 세웁니다. 십자가형의 무서움이란 이때부터 가장 심합니다. 죄수는 십자가상에 못박혀 이글거리는 정오의 태양과 밤의 추위 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낮은 뜨거운 태양빛이 비쳐서 덥고 밤은 대단히 춥습니다.
그런 더위와 추위 속에서 거의 벌거벗긴 채 양손과 양발에서 피를 흘리는 고통과 목마름, 그리고 배고픔 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아주 강한 사람은 며칠씩 절규를하다가 죽어간다고 하니 세상에 그런 잔인한 형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오전 9시에 못박히시고 6시간 고통을 당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육신과 정신, 영적인 고통이 극심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끔찍한 십자가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인류의 모든 죄 때문에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과거의 인간들, 현재의 인간들, 미래의 인간들의 엄청난 죄, 그리고 여러분과 여기 서 있는 저의 죄 때문에 대신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명패에는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헬라는 인류에게 철학과 사상을 배워주고, 로마는 법과 정치를 배워주었다면, 히브리 민족은 종교와 신에 대한 예배를 배워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 나라의 말은 당시로서는 세계 3대 언어요, 3대 대표적인 문화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3개국의 말로 예수님을 왕이라고 쓴 것은, 전 인류의 속죄 때문에 죽으신 왕이심을 은연중에 증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십자가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 동참하지 않고는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내 죄를 위해 채칙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 속에 돌아가신 것을 믿고 그를 나의 대속주로 믿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이 저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 처절한 고통을 받으시는 동안 나도 그 십자가 고통 속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순간, 나의 모든 것, 나의 옛사람, 나의 죄된 것, 나의 저주받을 모든 것이 다 죽고 사라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3일 만에 무덤의 문을 여시고 부활하시는 순간, 나도 그안에서 새로 태어난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롬 6:8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고백한 대로 나도 그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 때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의 대속주로 믿느냐, 안 믿느냐는 각자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서 영원한 축복이냐, 영원한 저주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심문한 다음, 분명히 죄가 없음을 깨달았고, 또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살릴 수 있었으나, 정치적인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준 비겁자가 된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그 결과, 그는 몇 년 후에는 총독에서 쫓겨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대신지시고 죽으신 대속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죄인의 죽음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만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속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믿습니까?
2.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는 구원을 받았고 나는 천국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알고나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나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된 몸이 죽지 아니하면 끝없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죄를 짓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피가 우리 속에 뿌려집니다. 우리속에 그 피가 죄를 씻어주시고 예수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으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안에 예수가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 복음은 자신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러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고 할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할 때마다,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의 정욕을 채우고 싶을 때마다, 자신이 자랑하고 할 때마다, 자신이 멸시 받을 때 감정의 충동을 경험할 때마다, 자신이 인정받고 싶을 때마다, 자신이 사랑받고, 존경받고, 높임받고 싶을 때마다, 오해받을 때마다, 변명하고 싶을 때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그런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마다 매번 죽음에 넘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날마다 내가 죽노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내가 예수와 함께 죽을 때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이 나타나서 자신과 자신의 삶의 현장을 다스려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고 그분이 모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십자가 복음에 자신을 온전히 드려 복종할 때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십자가에 자기를 못박고 십자가의 복음에 순종할 때만 나타납니다. 내가 약해질 때 주님이 나타나서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쇠할 때 주님이 흥하시게 됩니다. 내가 낮출 때 주님은 높아지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내가 복종함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마다 그 영광을 함께 누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므로 절대로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찬송과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겸손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십니다. 사람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온유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믿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나타냅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그분의 형상에서 그분의 성품과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질 때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여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의 내가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십자가 복음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으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닌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모습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단순하지만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날마다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은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불순종은 나를 인정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까지 부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죄로 죽을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우리는 죄인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의로운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거룩함을 이루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겜버스’라는 사람은 “모든 일은 십자가 위에 있다. 매일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하고는 생명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그 속에 생명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좌앞에 나와야 할 이유는 내가 죽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고 했습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갈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육체, 죄성을 가진 내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갈등과 고민은 죽어야 할 것이 죽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죽지 못하는 모습은 미완성된 모습입니다. 죽지 못한 모습은 수치와 추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죽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못하면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로 죽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죄인인 나, 옛사람의 품성, 육의 정욕과 탐심과 함께 나쁜 감정의 노예로 있는 나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할 모습을 십자가에 못박는 은혜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죽지 못하지만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능력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때로 실수하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것처럼 서원하거나 행동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만이 유일하게 지실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수난절 때 해외 토픽을 보면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밧줄로 묶여 있거나 혹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잘못하면 하나님의 성역을 범하는 교만 죄가 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졌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여인들이 울면서 따라올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보면 수도생활하면서 스스로 고행을 많이 합니다. 금욕, 금식하면서 성자적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흠모합니다. 그것도 잘못하면 교만 죄를 짓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 십자가란,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 보면 생기는 어려움이나 고난을 말합니다. 때로 반대나 핍박도 당하고 손해를 당하기도 하고, 때로 주님 때문에 자지 못하고 굶주리고 투옥당하기도 하고 순교당하기도 하는 것을 바로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각자 감당할 만한 자기 십자가를 맡기십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바로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들은 주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자기 십자가는 아무 것도 지려고 하지 않고 은혜와 복만 받으려고 합니다. 더 나가서는 주님 때문에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이나 목사를 원망하기에 바쁩니다.
지금도 북한 땅 등, 공산권이나 이교도 지역에는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데, 잔인하게 순교를 당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처럼 자유로운 땅에서 교사나 찬양대, 목장일군이나 기관의 임원의 일을 하다가 누가 조금 싫은 소리나 비판을 했다고 해서 화가 난 나머지 "난 못하겠다고, 다른 교회로 가야되겠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뜻대로 살려하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실 때 무슨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인 줄 아시고 피하지 말고 담대히 지고 주님을 따라 가십시오. 이처럼 십자가에 동참하는 자에게 십자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요, 또한 영육간의 복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막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나는 그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의 고통을 함께 지고 있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평소의 그녀의 신조였습니다. 그녀는 1950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지옥과도 같은 인도 캘커타의 빈민굴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47년 동안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문맹자들을 위하여 여러 학교를 세워 수많은 어린이들을 졸업시켰고, 54개의 나병치료소를 만들고, 20여개 고아원을 지어 1천6백여 명에 이르는 고아들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숙소를 지어 의지할 곳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던 수천 수백의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 가난한 인간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과 십자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1997년 87세 나이로 죽는 날까지 주님과 더불어 자기 십자가를 졌던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주님만 바라보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질수록 점점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새의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새의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으로 날개 짓을 할 때마다 높이 높이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자기 십자가가 무거우나 지면 질수록 점점 신앙적으로 올라가는 삶을 사는 줄 믿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번 고난주간에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나의 육신의 정과 욕심이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자신을 주인하고 각자에게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