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3(수)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인연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는 괴로움도 젊음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병의 괴로움도 건강을 좋아하는데서 오며,
죽음 또한 삶을 좋아함,
즉 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오고,
사랑의 아픔도 사람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
가난의 괴로움도 부유함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이렇듯 모든 괴로움은
좋고 싫은 두 가지 분별로 인해 온다.
좋고 싫은 것만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마음은 고요한 평화에 이른다.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그냥 돌처럼 무감각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마음이 그 곳에 딱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 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 법 정 -
법정
법정(法頂, 속명(본명) 박재철(朴在喆),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 ~ 2010년 3월 11일)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해 왔다. 1954년 승려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지냈다. 2010년 3월 11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입적(入寂)하였다. 기일은 불교식 전통에 따라 매년 음력 1월 26일로 지낸다.
생 애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에 전라남도 해남군 우수영(문내면)에서 태어나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6년제 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하였다. 그는 당시에 일어난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때인 1954년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했던 그는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된다.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년 3월에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년 4월에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대표저서
《개식용반대론》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 빈 충만》
《물 소리 바람 소리》
《버리고 떠나기》
《인도 기행》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지 않는 바람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아름다운 마무리》
《홀로 사는 즐거움》
《일기일회》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내가 사랑한 책들》
《숫타니파타》(번역)
지난밤 유럽성지순례를 다녀온 야고보 형제님 내외분과 안토니오 형제님이 용산으로 찾아왔기에 아주 거하게 한잔을 한 탓으로 귀가는 1711호 시내버스로 했기에 오늘 아침 출근은 늘 매일 같이 출근했던 아들녀석이 지각하지 않토록 더 먼저 여의도에 있는 회사로 보냈습니다.
상기인은 집 앞에서 원효로를 경유하여 마포역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운전을 하지 않았기에 편히 차창 밖의 바쁘게 움직이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도 보고 또 건물 풍경도 보면서 여러가지 상념에 젖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역을 지나 남영역에 이르는 구간의 대형빌딩 앞에 있는 조형물이 아무래도 이상해 보여 여기 스마트폰에 담아보았습니다. 보통 건물 앞의 조형물은 상징성을 나타내는 멋진 미술 조각품인데 비해 이 건물 앞의 조형물은 황금색을 입히긴 했으나 암만봐도 배불떼기 황소인가? 돼지인가? 싶은 동물 형상으로 엉성하게 느껴졌습니다. 허나 이 조형물도 건물주가 원해서 만들었을 것이고 또 관청의 미관심의 등도 분명 거쳤겠으나 ,현대식 으리뻔쩍한 대형 빌딩에 비추어 볼때 '아니올시다' 싶었습니다. 오늘도 회사에서는 늘상 하던 일에 몰두하다보니 금방 해가 저물었습니다.
퇴근시간에는 시내버스로 마포로 향했습니다. 저녁 7시에 옛 용산성당에서 20대 사목회를 함께하던 형제자매님 몇분과 오랫만에 저녁식사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지요.
개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부페식당이었는데, 이 지역에 발이 넓은 토마스 형제가 개발한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우선 모두가 참석하기 전에 무한리플로 제공되는 생맥주부터 시작했습니다.
마포공덕동 소재의 옛날 병원건물을 헐고 으리번쩍한 대형빌딩을 건립했는데, 이 건물 2층이 바로 신라호텔에서와 같은 동급의 음식을 한다는 "신라 스테이(SHILLA STAY)"였습니다. 1인당 2만5천원의 음식값을 받는데 메뉴의 종류는 많지 않으나, 비교적 깔끔한 음식었고 고객이면 누구나 선호하는 음식 품목만 택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식사를 하기전에 생맥주를 몇잔 마신 탓으로 음식은 소량만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흑~흑~흑~ 정말 바보인가 봅니다.
이틀전 청평에서의 사이클 행사로 술이 떡이 된바 있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연짱으로 또 술자리를 가진 것이 몸에 부담스러웠습니다. 옛 사목회분과장을 한 자매님들이 도착하여 함께 식사하며 맥주파티를 열다가 상기인은 집이 멀다는 핑게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들 4명은 모두가 집이 마포근처지만 상기인은 멀리 북악터널 근처가 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 마포전철역 근처에서 1711호 시내버스로 서울역과 남대문, 광화문과 경복궁을 경유하여 집으로 향했지요. 서울의 밤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버스를 탔기에 차창 밖에 펼쳐진 전경들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집앞에 도착한 시각은 어느덧 밤 11시가 가까웠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아직도 헤어지지 않고 한잔 더하고 있을 옛사목회 동료들에게 집에 잘 도착했고 감사했다는 문자 멧세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신라 스테이를 나와서 2차로 치킨집에서 또다시 한잔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소중한 이웃과 하루를 같이 멋지게 마감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