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촌의 3.13반일시위운동후 연변 각지에서는 간도국민회, 대한군정서, 군무도독부, 광복단, 신민단, 의민단, 훈춘한민회 등 허다한 반일무장단체들이 분분히 출현하였다. 이런 단체들은 연변 각지에서 반일근거지를 설립하는 동시에 수시로 조선경내의 일제식민통치기구를 습격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조선족반일부대들이 입조작전한것이 무려 24 차에 달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조선족반일부대는 중국경내에 침입한 일본군에게도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1920년 6월 4일부터 7월까지 두만강북안에서 진행한 삼툰자전투와 봉오동전투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조선족반일무장을 "심복지환"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일본제국주의는 연변조선족반일부대를 "토벌"한다는 명의로 소위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 일제의 사촉하에 토비 400여명은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두갈래로 나뉘여 훈춘현소재지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입성한후 직접 일본령사관에 달려가서 기관총과 양총으로 일본령사관을 지키는 중국 경찰을 진압하고 포탄으로 담벽을 허문후 일본령사관에 진입하여 불을 질렀다. 동시에 동대문을 공격한 토비들은 살인, 방화하면서 미친듯이 발광하였다. 아침 8시에야 토비들은 비로소 동서 두갈래로 나뉘여 로흑산으로 철거하였다. 이번 습격에서 일본령사관과 상점 6개가 타버렸다. 그리고 일본인 11명, 중국조선족이 6명이 피살되고 무고한 주민 200여명이 랍치되였다. "훈춘사건"이 발생한후 일본군은 당일로 경찰수비대를 선봉으로 삼아 연변에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같은 달 9일 일본 륙군대신의 명의로 조선군사령부에 "출병"명령을 하달하였다. 연변에 침입한 동지대는 17일 화룡현 청산리와 이도구일대에 반일부대들이 집결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후로 토벌대를 파견하여 청산리일대의 김좌진부대를 추격하였다. 그후에 동정언은 직접 본부주력을 인솔하여 이도구에서 남완루와 북완루에 주둔한 홍범도련합부대를 포위하였다.이런 상황에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본침략군 동지대와 조선족반일부대지간에 화룡현 삼도구, 이도구일대에서 백운평전투, 약수동전투, 완루구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곡전투, 맹가구전투, 서구전투, 천보산전투 등 격렬한 싸움을 10여차 벌리였다. 이번 전역에서 일본침략군은 조선족반일부대의 매복과 기습에 걸려 참패를 당하였다.청산리전역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야수성이 발작하여 무고한 로백성들에게 보복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간 일본군이 간 곳이면 즉시 력사상 보기 드문 참혹한 학살과 피비린 폭행이 감행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이번 토벌가운데서 무고한 백성이 3664명이 피살되고 155명이 체포되였으며 민가가 3520채가 불탔고 학교 59개소, 교회당 19개소, 곡물 5만 9970석이 손실당하였다.총적으로 청산리전역의 위대한 승리는 조선족반일무장운동사상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하였다. 강대한 일본군의 무력침략앞에서 조선족반일부대의 장병들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약소한 병력으로 기동령활한 "운동전"과 "매복전"으로 일본침략자들을 호되게 타격하였다. 이로 하여 청산리전역의 승리는 동북지역의 조선족인민들의 반일투지를 고무한 동시에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의 반일열정도 지대하게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국 각지의 신문들은 청산리대첩소식을 륙속 보도하였으며 민중과 청년학생들은 각종 집회와 반일시위를 련속 거행하여 일본제국주의를 성토하고 일본침략군의 철군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