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장도(笑裏藏刀)의 본뜻을 왜곡하면서 좌우명이 소리장도(笑裏藏刀)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걸 보니 상당히 전략적인 사판승(事判僧)으로 비쳐지는군요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
팔공산 선본사 갓바위 주지 초암 덕문(草岩 德門)스님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정신으로 출가승의 본분을 다하고자 합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속에 칼을 품다
소리장도의 계책으로 고속승진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에서
선방에서는 최연소 수좌
중앙종회에서는 최연소 종회의원
감찰역인 호법부장도 최연소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인 팔공산 선본사(禪本寺)는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587에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 관봉 아래에 자리한 사찰이다.
성보문화재로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보물 431호인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갓바위부처님’으로도 불리는 이 불상은 일심으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지며, 영험이 많다는 소문에 의해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가 찾아간 22일에도 ‘갓바위부처님’을 찾는 신도들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갓바위부처님’을 참배하려면 앞길과 뒷길이 있는데, 선본사는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팔공산 뒤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선본사 주지 덕문스님(48세)은 강진읍 송덕리 솔치 출신이다. 강진북초등학교와 강진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광주석산고등학교(11기)를 졸업한 후 출가했다.
“제 고향은 절골로 유명했죠.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친을 따라 고성암을 곧잘 따라다니곤 했지요. 당시 모친은 고성암이 낡을 대로 낡은 절이었지만 나와 전짓불을 앞세워 매달 초삼일이면 반드시 찾아가곤 했는데, 모친의 불심은 여간 깊었습니다”
덕문스님은 함양 행복마을 이사장인 용타스님과는 이웃마을이기도 하다.
용타스님은 봉덕이 고향마을이고 덕문스님은 솔치가 고향인데, 솔치 출신으로 강진여중을 졸업한 후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를 다니다가 출가한 비구니 스님도 있다.
그 비구니 스님은 서울대를 졸업한 후 미국 하버드대학까지 다녔다고 전하면서 용타스님과는 출가 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잿빛 장삼을 입은 스님의 모습이 좋아 보였고, 걸망 메고 자유롭게 만행하는 스님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지만 불심이 깊은 모친에게 효도를 하고 싶은 생각에 스님이 되기를 결심한 덕문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떠났다.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광주 친구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자고난 덕문스님은 차표 끊고 단돈 500원만 남겨놓은 후 호주머니를 털어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송광사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이미 조계총림 초대방장이신 구산 큰스님이 입적한 후인데다가 때마침 화엄사로 가는 버스가 있어 몸을 실었다.
“어머니의 불심이 여간 깊었다고 하지만 젊은 나이에 선뜻 출가를 결심한 것은 뭔가 배경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필자의 질문에 덕문스님은 “어려서부터 강진군립도서관을 자주 다녔습니다. 여러 책을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교리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당시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던 김우영 친사촌형이 있었는데 그 분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지금은 모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지요.”
라고 말했다.
결국 그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에는 동서양의 철학서적을 많이 읽었고, 금강경 오가해까지 읽었다. 하지만 학구열에 비해 대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유학한 것만도 살림두량에 비하면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이래저래 입산출가 결심만 굳어지고 있던 덕문스님은 합천 해인사는 멀고 해남 대흥사는 고향이 가까워서 때마침 출발하는 구례 화엄사행 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화엄사에 도착했을 때 절간에서는 저녁공양을 들고 있었다. 지나가는 스님을 붙들고 “출가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스님의 안내로 종원 주지스님을 뵐 수 있었다.
“덕이 많게 생겼구나.”
종원 주지스님은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바로 깎아 주었다.
그렇게 행자생활을 시작하고 있을 때 모친과 누나가 물어물어 찾아왔다. 덕문스님은 대학을 보내주겠다며 하산을 설득하는 모친과 누나를 법당으로 모시고 들어가 “제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그 길로 돌려보낸 덕문스님은 행자생활을 마치고 예비스님이 될 수 있었다.
85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수계
화엄사에서 강원을 다니다가 여수 한산사 주지로 있는 30대 초반의 종열 스님과 잘 맞겠다는 말에 그 스님을 은사스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 무렵 종열 스님은 여수 한산사에 계셔서 85년 9월 15일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수계를 받았다.
덕문 스님은 사미수계를 받은 후 강원이냐, 승과대학이냐, 동국대학교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염불수업을 했는데, 86년 여름 군대를 가게 되었다.
15사단에서 군종병으로 복무를 하면서 계율을 지키기 위해 일체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당시 이기백 장군은 전두환 대통령의 시주로 화천에 천불사란 절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복무를 하였다.
복무를 마친 덕문 스님은 당시 화엄사의 가풍이 참선수행이어서 걸망을 메고 선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통도사, 천왕사, 봉암사 등 여러 선방을 다니며 무(無)자 화두에 매달렸다.
그리고 용인 백련사 나한전이 흙집으로 조그맣게 생겼는데, 그곳에서 하루 8시간씩 천일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났더니 한산사 종열 스님이 화엄사 주지로 부임했다. 맏상좌이다 보니 자연히 시봉을 해야만 했는데, 재무스님으로 절 행정을 배울 수 있었다.
종열 스님이 화엄사 주지 임기를 끝낸 후 함평 해보면 각궁암이란 암자를 벽돌로 짓게 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천일기도를 하게 되었다.
화엄사 재무스님을 맡을 때 가난한 보살들이 신심을 내서 땅을 구하라고 보시한 700만원을 보태 해보면 대강리에 3천평의 땅을 구입한 후 법당을 완성, 종단에 바쳤다.
덕문 스님은 불사를 마친 후 선방을 다시 다니며 화두를 참구하다가 1999년도 정화작업으로 쌍계사 고산 큰스님이 총무원장을 하게 되었다.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의 일로 스님들의 비위와 비리를 척결하는 호법부장에 화엄사 종고 스님이 임명되었다. 그 인연으로 덕문 스님은 호법과장이 되어 총무원으로 올라가 종단 일을 시작했다.
덕문 스님은 선방에서 화두에 매달릴 때면 장좌불와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허리를 눕히는 일이 없이 매일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했다. 천일기도를 드릴 때면 산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으니 그 또한 지극정성의 기도였다.
조계종 종회의원, 호법부장, 조계종 직영사찰 주지로 활동
호법과장이 되어 일을 시작한 덕문 스님은 용주사 말사인 안양 용화사가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전 주지 스님인 상덕 스님이 열반하면서 종단 몰래 매매를 해버린 거였다. 그 사건을 맡게 된 덕문 스님은 주지직을 맡으면서 6년 소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법적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결국 땅을 잃고 부처님만 업고 나와서 의왕시에 용화사를 짓기 시작했다.
덕문 스님은 거기에서 포교활동을 역동적으로 했는데, 불교단체가 13개나 되었다. 그러면서 조사어록이며 불교경전, 대장경 등을 독파했다. 강원에 가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는 대신 선(禪)을 먼저 가까이 했고, 나중에서야 부처님 말씀을 문자로 익힌 셈이었다. 특이한 이력을 지닌 스님의 발자취였다. 은사 스님 역시 “어디에 있든지 공부하는 자세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늘 채근했다.
하긴 스님으로서, 사판승으로서 행정을 배워 종단에 이바지해온 세월이기도 했다.
덕문 스님은 호법과장과 상임감찰직을 수행하다가 최연소 종회의원이 되어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2003년도의 일로 3선까지 했는데, 그같이 되기까지는 큰스님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여러 스님들 또한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고 해야 옳은 일이었다.
성철 큰스님을 비롯해서 법전 큰스님, 일타 큰스님 등을 가까이 해왔는데, 해인사에서 성철 큰스님으로부터 한 철 공부를 할 때면 홀로 일어나 당돌하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강원 출신이 아니다 보니 큰스님에게 당당하게 질문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안양으로 옮긴 덕문 스님은 불자들을 위해 기초강좌를 11기까지 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세상사를 비유해서 강의를 했는데, 인기가 좋았다. 불교를 손에 쥐어주듯 강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종회 의정활동은 종법을 개정하거나 종단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종단이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이었다.
의정활동을 하면서 현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종회의장이기도 한 자승스님의 맏상좌인 탐문 스님과 친교가 있었던 탓으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거였다.
덕문 스님은 총무원장에게 한국 불교가 어떻게 가야할지 그 종책에 대한 대안을 많이 내놨다. 그런 덕문 스님의 제안을 총무원장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참모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총무원장은 덕문 스님을 호법부장으로 임명했다.
조계종은 현재 2만 명의 스님과 2천만 명의 불자가 있다. 그러다 보니 날마다 사고가 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였다.
덕문 스님은 계율을 어긴 스님들을 징계하기에 앞서 계도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불교의 재산에 관한 비리는 한 점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2009년 11월에 임용 받아 2010년 11월까지 1년간 호법부장의 일을 수행했다.
“송천 은사스님의 첫 글자 송자와 제 호가 초암이어서 뒤 글자 암자를 보태서 12명이 송암장학회를 만든 것입니다. 스님이 되기 전까지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만든 장학회인데 보시의 절반은 장학회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총무원장의 특별보좌관의 역할을 하다보니 총무원장은 덕문 스님에게 중책을 다시 맡겼다. 조계종 직영사찰인 강화도 보문사 주지를 맡긴 것이다. 2011년 3월부터 12월 초까지 보문사 주지로 일하다가 이번엔 팔공산 선본사 갓바위 주지의 소임을 맡겼다. 덕문 스님은 1년 동안의 수입과 지출을 제대로 정리하다 보니 수입의 50%가 늘어났다고 밝혔다. 지금은 종회의원의 모임인 ‘법화회’의 위원장을 오랫동안 맡아왔다. 매달 만나서 주제발표를 하고 토론을 통해 종책에 반영하는 모임이었다.
“그동안 종회의원과 직영사찰 주지를 병행해서 소임을 맡아오다가 작년에 종회의원을 그만 두었습니다. 아마도 행정 경험이 많고 오지랖이 넓다보니 맡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사표를 쓰고 걸망을 짊어질 각오는 돼 있습니다”
덕문 스님은 그 동안 절 재산을 지키기 위해 10년 간 송사에 휘말렸고, 또 불사를 해왔다.
“공부하기 위해 출가를 한 것인데, 그동안 주지직을 맡아 많은 봉사를 해온 세월이었습니다. 이젠 복지관 같은 데서 봉사하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소원입니다. 결국 사판승이 일을 잘해야 불교가 발전하겠지요,
그렇다고 중 벼슬 닭 벼슬만도 못하는데 종회의원이고 호법부장이고 주지직을 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사판승으로 일이 많지만 종단과 불교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지금은 송암장학회를 발기해 장학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송천 은사스님의 첫 글자 송자와 제 호가 초암이어서 뒷 글자 암자를 보태서 12명이 송암장학회를 만든 것입니다. 스님이 되기 전까지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만든 장학회인데 보시의 절반은 장학회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덕문 스님은 대화를 나누면서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좌우명을 물었더니 “소리장도(笑裏藏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어록에 나온 말로 얼른 들으면 웃음으로 칼을 품는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반대이다. 남을 위해서는 자비를 베풀고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한다는 뜻이다.
“광주사태 때 많은 광주시민이 죽어나갔고, 그 때 법난을 겪었지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고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으므로 맑고 향기로운 세상이 되길 기원합니다. 스님은 중생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따를 뿐입니다. 이것이 제 인생이기도 합니다”
덕문 스님의 속명은 김태영 님이다. 지금도 강진읍 솔치에 일가친척이 살고 있다. 도강 김씨 자자일촌이기 때문이다.
덕문 스님은 고향 강진 얘기가 나오자 탐진강의 아름다움과 탐진바다의 넉넉함, 그리고 백련사와 다찬초당 천일각 등을 일일이 나열하고 나서 “문화와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강진이야말로 삶의 요람이지요”하고 대담을 마쳤다.
경산시 송하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