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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11강
세상의 빛
말씀/요9:1-41
요절/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여러분,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가스펠 앨범이 무엇일까요?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부른 ‘Amazing Grace’ 앨범입니다. 존 뉴턴이 작사한 이 노래의 가사 중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Was blind, but now I see(한 때는 눈이 멀었지만 이젠 볼 수 있게 되었네).” 이 고백은 꼭 존 뉴턴만의 고백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눈이 멀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요? 영적인 세계를.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발견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 갑자기 멈추셨습니다. 거기에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푸르른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도 못했고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삶은 온통 어두컴컴한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맹인에게 무슨 희망이나 미래가 있었겠습니까? 그의 앞에서 제자들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맹인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목격한 제자들은 심각한 신학적 고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에게 질병이나 장애가 생긴 것은 모두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아가 자궁 속에서도 심각한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25장 22절의 야곱과 에서가 리브가의 태에서 싸우는 것을 해석하기를, 그들이 단순히 다툰 것이 아니고 서로를 죽이고자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보면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살인미수라는 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제자들도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장 5절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연좌제를 믿습니다.
죄가 고난과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유대인들만의 사고방식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무슨 고난이 닥치거나 좋지 않은 일이 특별한 이유 없이 생기게 될 때 자동적으로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이런 불행이 닥쳤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성경도 고난이 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찾아온 것이라는 대전제에는 긍정적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어떤 질병도 장애도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질병과 장애와 죽음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우리 몸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병들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세상에서 삶의 불행과 고통은 죄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무섭고 파괴적인가, 우리 인간이 죄 때문에 낙원을 잃은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합니다. 질병이나 죽음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죄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반적인 원리를 성경은 각 개인의 삶에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구약성경의 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인과론적인 생각으로 욥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욥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말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욥42:7). 하나님이 욥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욥의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욥이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깊이 깨닫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죄와 그 심판의 결과로서 주어진 고난이라는 인과론적인 생각을 모든 경우에 보편적으로 적용해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던 아내가 심각한 정신질환에 걸리고 맙니다. 그 이후로 그는 날마다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갑니다. 학자로서 연구하면서 동시에 아내를 간호하고 아들을 거의 혼자서 키우다시피 합니다. 24년 동안 아내의 온갖 폭언과 기이한 행동들을 다 참아주었지만 결국 아내는 집을 나가고 맙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내는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는 미국의 풀러 신학교의 한 강연에서 이런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제 인생에 왜 이 같은 일이 생겼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학자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전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모릅니다. 제가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 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저의 주장이 최소한 제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제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겪는 모든 불행을 죄와 연관 지어 생각하면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안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우리의 죄를 벌하시고 때로는 심판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 할지라도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기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모든 불행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오직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내 죄를 끝까지 추적하시고 벌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으로만 여기게 됩니다.
또 하나는, 지금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를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이 사람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 묻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기에 사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벌하셨는데 우리가 끼어든다면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도 제자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계속 맹인으로 잘 살도록 놔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와 고통과의 관계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형적인 생각의 틀을 깨십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 원인과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확실한 답을 모르면 너무 답답합니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문에 매몰되어 한 걸음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과 이유를 전부 파악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꼭 답을 알아야만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답을 알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죄 없는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묻고 싶은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네가 어떻게 창조주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려 하느냐?” 우리는 창조주가 하시는 일을 다 헤아릴 수 없는, 한계를 지닌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답을 주시는 대신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 뭔가를 하려고 하신다는 것, 즉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난 것이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가지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은 없다’라는 말에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말이냐며 반발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에서 생긴 오해와 불신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는 말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을 겪거나 불행한 사건을 만나게 되면 이게 다 누군가의 죄 때문이거나 또는 재수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 단정하곤 합니다. 나는 왜 이런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혀 벗어날 수 없는가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모습, 어떤 환경 속에서 태어났든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내던져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고귀한 목적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약 어떤 일이 누군가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 명백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죄를 회개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선한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된 중풍병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설령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일어난 병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 병을 통해 예수님에게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병이 나아야만 선한 일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경우 육체의 가시라고 부른 질병을 치유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바울은 자신의 고질적인 질병을 통해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이어도 나의 죄 때문이 아니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사라진다 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던져야할 질문은 “누구 때문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하시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입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일들 속에 휘말려 어둠과 혼돈 속에 빠질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고난도 우리 마음에서 평강을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 두신 선하신 뜻과 내 인생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We must do the work of God).” 예수님은 ‘must’라는 강한 표현을 쓰심으로 지금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임을 말씀합니다. 또한 ‘우리가’라는 표현을 통해 제자들도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다 완수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그 날은 우리가 살아서 주님의 재림의 때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죽음을 맞아 하나님께 가게 될 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 곁에 가기 전까지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낮일 때 왕성하게 일하듯 지금은 낮의 때로서 왕성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이르게 될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빛은 어떻습니까? 어둠을 몰아냅니다. 새벽녘에 태양이 떠오르면 금새 칠흑 같던 어둠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게 될 때 죄로 인해 어둡고 고통하던 내면이 밝아집니다. 열등감, 자의식, 운명주의와 같은 어둠의 요소가 사라지고 빛으로 충만한 건강한 내면세계가 이루어집니다. 또 빛이 있을 때 어떻습니까? 빛은 올바르게 길을 갈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통해 영적인 세계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께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빛은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1장 4절은 말씀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서의 일을 감당하실 때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맹인을 눈 뜨게 하시는 과정이 어떠합니까?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반죽을 만들어 수제비 떼듯 한 움큼씩 떼어 그것을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비위생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예수님이 참 엉뚱한 것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장애인 인권 침해로 바로 인권위에 고소당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지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성경도 왜 이런 방법으로 하셨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알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셨는지는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 속에는 맹인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맹인은 대개 감수성이 예민해 자의식이 많고 자존심이 강합니다. 맹인은 예수님의 침 뱉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를 때 거지라고 우습게 여기시는 게 아닐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침이라니! 이러다 혹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어떻습니까? 맹인은 믿음으로 자의식과 자존심을 극복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원한 것은 바로 믿음의 순종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침으로 이긴 흙 반죽을 아픈 부위에 발라준다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또 이 맹인이 보이지 않는데 실로암 못까지 더듬으면서 가서 씻기까지는 얼마나 고충이 심했겠습니까? 이런 의미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일을 시키는 예수님에게 버럭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지 이유는 다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신뢰하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때 그의 눈이 밝히 떠졌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므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밝고 환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실로암 못에 비친 잘 생긴 자기 얼굴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푸르고 자연의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였습니다. 그의 밝은 눈과 함께 내면도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어둡고 운명적이던 모든 요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운명은 치료되었고 이제 빛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맹인이 눈을 뜬 장소가 실로암 못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못의 이름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쉴로아’에서 왔습니다. 인공적으로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왔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습니다. 실로암은 베데스다와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중 하나입니다. 실로암은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포위 공격에 대비해 예루살렘 성에 충분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이 실로암은 이름의 의미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사실 실로암 물이 이 사람의 눈을 밝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로암 물에서 씻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치료함 받지 못했습니다. 실로암 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라고 하신 예수님이 중요하고 그 말씀에 순종한 사실이 중요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밝은 세상 속에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이 여섯 번째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세상의 빛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지금도 그가 왜 맹인이 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세상의 빛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만났음을 압니다. 또 그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았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 그를 통해 선한 일, 즉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빛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심령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맹인이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고 미남이 되어 돌아오자, 이웃 사람들이 전에 구걸하던 맹인인지 아닌지 갑론을박을 벌였습니다. 이때 그는 “내가 그라” 분명히 말합니다. 자신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바리새인 중 어떤 사람은 안식일에 고쳤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안식일 규정을 어긴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갇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입니다. 고침 받은 맹인은 그들 앞에서도 담대히 예수님이 선지자이심을 증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부모를 불러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부모는 출교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 되었던 자를 다시 소환하여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그는 눈은 떴지만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부인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조금도 겁먹지 않고 담대히 말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또 많은 말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과거에는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본다는 fact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fact입니다. 이것은 부인하려야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는 이 한 가지 아는 은혜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이때 그는 핍박과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물리치고 믿음의 중심을 굳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 빛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빛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맹인이었던 나의 눈을 뜨게 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 예수는 분명 하나님이 보내신 자입니다(32,33).” 바리새인들은 맹인 되었던 자의 말을 듣고 화가 나 그를 출교시켜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찾아와 인격적으로 만나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35)?” 그는 “주님, 제가 믿습니다” 신앙고백하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합니다.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뜨고 구원받게 됩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입니다(39-41).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금 삶에 대해 다 이해하고 왜 지금처럼 살고 있는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다 아십니까? 우리가 원인은 다 알지 못하지만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둠과 혼돈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곁에는 우릴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의 모든 어둠과 운명을 극복하고 빛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밝고 생명력 넘치는 삶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