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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아냐?
최기동: (비로소 밝아진) 하하하……. 그거……. 철규: (슬슬 눈치를 보며 따라 웃는다) 하하하…….
최기동: (웃음을 멈추며) 25만원. 그 이상은 안 돼.
철규: (웃다가, 뚝!)
씬 62. 영준의 아파트 안/새벽 1시.
어두운 실내.
영준은 달게 자고 있고,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이 불국사 사진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정각 한 시.
뻐꾸기 한 마리가 나와 삐걱.
삐걱.
거린다.
딩동!
초인종 소리.
딩동!
딩동!
여러 번 울린다.
그러나 영준은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꿈을 꾸고 있나보다.
쾅!
쾅!
쾅!
이제는 문을 두드린다.
영준,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삐걱거리던 뻐꾸기도 놀랐는지 안으로 쏙 들어간다.
쾅!
쾅!
쾅!
영준, 힘들게 몸을 일으켜 문으로 나간다.
영준: 누구세요?
현관 밖: (대답 없다)
영준, 시계를 본다.
‘새벽 한 시?’
빼꼼. 조금 문을 연다.
시뻘건 진흙이 뚝 뚝 떨어지는 삽이 보인다.
영준,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고.
문이 활짝 열리면, 덩치가 삽을 들고 서 있다.
덩치 뒤에 있던.
최기동: 야, 삽 잘 썼다!
영준, 인상이 확 구겨진다.
최기동: (영준 표정 살핀다) 어……. 잤구나? 미안하다. 자는 거 깨워서.
최기동, 손바닥으로 영준 뺨을 툭.
툭.
건드리더니 영준 목덜미를 잡고 얼굴을 빤히 본다.
영준, 당혹스럽다.
최기동: (굵은 저음) 그럼, 계속 자라. 간다.
덩치, 영준에게 삽을 떠안긴다.
얼결에 삽을 받아드는 영준.
멀어지는 최기동과 덩치의 뒷모습.
영준 잠옷에 온통 진흙이 묻었다.
씬 63. 권투도장/밤/영준의 악몽.
링 주변은 어둡고, 텅 빈 권투도장 실내.
적막감.
홍코너: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끼고 앉은, 영준.
청코너: 역시 같은 복장으로 앉은, 최기동.
곧 경기가 시작될 것 같은…….
긴장감이 맴돈다.
영준, 링 아래에 앉아있는 주란을 본다.
띵!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영준, 이를 악물고 최기동을 향해 돌진한다.
이윽고 서로 펀치가 오가기 시작한다.
퍽!
퍽!
퍽!
마침내, 영준의 승부수.
최기동을 향한 어퍼커트!
쿵!
최기동,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헉…….
헉…….
주란을 보는 영준, 씨익.
미소.
영준, 저벅저벅 걸어가 최기동의 헤드기어를 벗긴다.
내려다보는 영준의 표정 변화.
보면, KO된 사람은 최기동이 아닌, 바로 영준 자신이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야유소리가 메아리친다.
씬 64. 영준의 아파트/아침.
탁.
눈을 뜨는 영준.
헉…….
헉…….
식은땀…….
아직도 야유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40분!
늦었다!
벌떡 일어나 허둥대는 영준.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다.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씬 65. 아파트 단지 입구 경비실/아침.
군용모포를 덮고 TV를 보고 있는 관리인.
미닫이 유리문으로 조선일보와 옥편 하나가 들이밀어 진다.
창밖을 내다보니, 허겁지겁 뛰어가는 영준이 보인다.
관리인, 고개를 갸우뚱…….
씬 66. 학교 교정/오전.
황급히 들어서는 영준.
건물로 들어가려다가 선생들이 우르르 뒷마당으로 몰려가는 모습을 본다.
잠깐 망설이다가 그 뒤를 쫓아가 본다.
한 쪽 구석 꽃밭에 베트콩, 미친개 등 선생들이 몰려있다.
보면, 최기동과 부하들, 마대자루에 큼직한 돌멩이들을 주워 담고 있다.
선생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다.
미친개, 옆에서 코딱지가 쿡쿡 찌르자 겨우 입을 뗀다.
미친개: 거기는 돌멩이가 좀 있어야 합니다.
최기동: (돌아본다) 아, 걱정 말아요, 많이 가져갈건 아니니까.
미친개: 예…….
다들 미친개를 원망스런 눈으로 본다.
이때 고개를 빼꼼 내미는 영준.
영준: (짜증) 야, 뭐 하는 거야?
순간 영준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베트콩, 영준의 이런 모습에 무척 놀란 눈치다.
최기동: 어, 영준이 왔구나? 뭐하긴 인마, 삽으로 팠으니까 돌로 쌓아야지. 연못 만든다고 안 그랬냐?
영준: 내려놔. 그거 학교 재산이야.
최기동: 얌마, 좀만 가져가자.
영준: 내려놔.
최기동: 허허……. 자식, 알았어. 조금만 가져간다고.
영준: (주먹을 불끈!) 내려놔.
실실 웃던 최기동도 이쯤 되면 ‘장난이 아니다’ 라는 걸 깨닫는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
이때 수위와 함께 나타나는 교감.
교감: 어이구, 다 고르셨습니까? 최 사장.
영준: ?
교감: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최기동: 아뇨, 일은 무슨……. 하하하…….
교감: (선생들을 향해) 아, 저기……. 우리 최 사장께서 돌 좀 필요하시다고……. 별일들 아니니, 들어가 일들 보세요.
선생들, 주삣거리며 흩어지지만, 영준은 어리벙벙.
교감: (수위에게) 이봐요, 김씨. 뭐해요, 어서 들어 드리지 않고…….
최기동: 하하……. 됐습니다. 여기 애들이 하면 됩니다. (부하들에게) 그만 가자.
영준: …….
최기동: (영준에게, 씩. 웃어 보이며) 또 보자!
최기동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영준.
씬 67. 교실 안/낮.
무표정하게 ‘기온과 강수량’에 대해 읊조리는 영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기어 들어가는 소리다.
뒷자리에서 누군가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영준, 뒤쪽을 한 번 쳐다보고.
성의 없게 칠판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린다.
이번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영준, 뒤를 돌아 버럭 소리친다.
영준: 야, 거기 조용히 안 해!
도시락을 까먹던, 졸던, 도색잡지를 보던 학생들, 캡짱과 부캡짱,
모두 깜짝 놀라 영준을 쳐다본다.
씬 68. 교사 화장실/오후/석양.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창 아래를 내려다본다.
보면, (씬 24의)공터에서 거친 숨소리를 내며 혼자 쇄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영준.
해가 지는 오렌지 빛 하늘, 기일다란 영준의 그림자.
씬 69. 권투도장 안/저녁.
퍽…….
퍽…….
퍽…….
점점 속도를 빨리 하며 샌드백을 두드리는 손 영준.
이미 오랜 시간 연습을 했는지, 온통 땀으로 절었다.
옆에서 샌드백을 두드려 보는 사람은 베트콩.
베트콩, 주절대며 스스로의 펀치에 도취되어 간다.
베트콩: 많이 맞았지, 그럼. 한 너 댓 번은 쓰러졌을 거야. 근데 또 일어나! 쓰러지고, 쓰러져도 또 일어나는 거야! (아무렇게나, 그러나 나름대로는 빠르게 두드리며) 죽을 각오로 버틴 거지!
영준: (고삘을 발견한다. 동작을 멈춘다)
베트콩: 그 쯤 되니까, 때리던 맨시니도 지치더라구. (턱! 샌드백을 끌어안으며) 아, 대단했지. 김득구.
임 관장: (빤히 본다) 아저씨, 누구요?
베트콩: 예? 저……. 요? 저는 이……. 박 선생의……. (옆을 본다. 영준은 없다) 여기……. 한 달에 얼마예요?
라커룸, 옷을 갈아입고 있는 고삘.
영준이 다가간다.
영준: 어……. 경철이라고 했지?
고삘: ?
영준: 저기……. 관장님이 그러는데, 신발 끈만 꽉 매면 지금보다 훨씬 늘겠대.
미소.
고삘: 아저씨, 아저씨나 잘해요. 예?
프레임 아웃.
영준: (무안하다)
씬 70. 오거리 이발관 안/저녁.
주란, 바닥의 머리카락 등을 쓸어 담고 있다.
철규, 들어오며.
철규: 야, 도시락 아직도 안 왔냐? (소파에 앉으며) 에이, 씨. 디립다 뚱뚱한 게 느리긴 또 엄청 느려요. 아,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신문 펼쳐보며) 허이구, 벌써 이렇게 됐네. 너, 내일 누구 좀 만나야겠다.
주란: ?
철규: 내일 저녁 6시에 기동이랑 데이트 좀 해라.
주란: 무슨 소리야?
철규: (신문에 집중하는 척) 허이구……. 이거, 주식 값이 이렇게 떨어졌네…….
주란: 오빠!
씬 71. 권투도장 안/저녁.
재빠른 줄넘기 솜씨.
눈에 띄게 빨라진 펀치와 몸놀림.
거칠게 쏟아지는 샤워 물줄기.
영준, 물줄기에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다.
뽀득.
뽀득.
거울을 닦는 영준.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손에 밴드를 감고.
락카의 글러브를 움켜쥐는 영준의 손.
씬 72. 최기동의 사무실 앞/저녁.
턱.
버티고 선 영준.
영준의 목에 걸려있는 글러브.
입구를 응시하는 영준의 눈동자는 불타고 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이를 꽉 악문다.
문을 탕!
박차고 들어간다.
씬 73. 오거리 이발관 앞/저녁.
(자동차 안 시점) 유리창이 내려가면, 주란의 얼굴이 보인다.
주란: 내려요.
최기동: (자동차 안에서) 어딜 갈 건데?
주란: 데이트 하자면서요? 빨리 내려요.
씬 74. 최기동의 사무실 안/저녁.
힘차게 사무실로 들어온 영준.
그러나 사무실엔 미스 정밖에 없다.
미스 정: (손톱소제를 하다가) 어머. 사장님 조금 전에 나가셨는데.
영준: ?
미스 정: 잠깐 앉아서 기다리세요.
영준: (망설이다가 앉는다)
미스 정: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영준: ……. 네.
미스 정: (나가려는데)
영준: (힘찬 목소리) 냉커피루요!
떡하니 소파에 앉은 영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씩 씩 대는 그의 얼굴 위로,
캡짱: (소리) 바로 여기서 얘기는 끝나는 거야.
씬 75. 최기동의 사무실 마당/저녁.
캡짱은 거만하게 담배를 피우고, 부캡짱은 열심히 구두를 닦는다.
부캡짱: (구두약에 불을 붙이며) 저번에 형님이 학교 왔을 때 아무 일도 없었잖아?
캡짱: 그러니까. 울 형님이 그런 분이세요. 막봐주는 거야, 마지막까지 그렇게 관대하신거야……. 동창이니까. 근데도 저렇게 글러브 끼고 지 발로 찾아와 까분다는 건…….
‘형님! 저 좀 죽여주십쇼!’
하는 거지, 그렇다면? 죽어야지 뭐!
부캡짱: 글쿠나…….
구두를 열심히 문지른다.
씬 76. 재래식 시장/저녁.
주란, 생선 가격을 흥정하고 있고, 최기동은 파, 마늘, 간장 통.
등이 가득한 분홍색 장바구니를 들고 서있다.
주란, 끊임없이 물건을 고르고, 깎고, 바구니에 담는다.
최기동이 들고 있는 짐들도 덩달아 많아진다.
지나가던 사람이 최기동을 아는 척 한다.
최기동,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받지만, 속으로는 쪽팔려 죽을 맛이다.
좌판에 서서 순대를 먹는 두 사람.
주란은 순대 아줌마와 마냥 수다를 떨고 있다.
최기동,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찬물만 들이킨다.
문득 앞에 놓인 순대에 시선이 간다.
아무 생각 없이 순대 하나를 입에 넣어 보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다?”
또 하나, 또 하나…….
주란, 순대 아줌마 넉살에 깔깔거리며 이쑤시개로 순대를 집으려는데, 마지막 순대가 최기동 입으로 들어가고 있다.
최기동: (주란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야, 순대 오랜만에 먹는다!
씬 77. 최기동의 사무실 안/저녁.
다 비워진 냉커피 잔.
소파에 내려놓은 글러브.
영준, 시계를 쳐다본다.
미스 정: (핸드백을 매며) 전 퇴근할게요, 놀다 가세요.
영준: 예…….
미스 정, 밖으로 나간다.
영준, 이젠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더욱 썰렁해졌다.
컵을 기울여 얼음을 꺼내려고 한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이리저리 컵을 돌려 얼음을 입에 무는 찰나,
들어오는 최기동과 주란.
영준과 주란, 서로 눈이 마주친다.
최기동: (반가워서) 얌마, 언제 왔냐?
말없이 서로 보고만 있는 영준과 주란.
최기동,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최기동: (주란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하하하……. 같이 장 좀 보고 오는 길이다.
주란: (스르르……. 최기동의 손을 치운다)
영준: (입안의 얼음을 깨문다. 와드득!)
최기동: (들고 있던 검정 비닐봉지를 내보인다. 묵직하다) 순대 먹어라.
영준: (주란을 본다)
주란: (어색한 웃음)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
최기동: (글러브를 보더니) 야, 그건 뭐냐? 너 권투 하냐?
영준: (벌떡 일어선다)
최기동: 왜, 가게?
주란: (아무 말도 못한다)
영준, 허겁지겁 글러브를 챙겨 밖으로 나가고 그 뒷모습을 보는 최기동과 주란의 각기 다른 표정.
씬 78. 영준의 아파트 안/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영준.
권투 글러브를 옷걸이에 건다.
글러브를 잠시 바라본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쾅!
옷장 문을 닫아버린다.
책상 위, 그 동안 수북이 쌓여있던 우편물들.
영준, 다시금 우표들을 물에 담그기 시작한다.
씬 79. 교무실 안/낮.
곳곳에서 진학상담을 하는 교사들과 학부형의 모습.
영준, 방금 어느 학부형의 상담을 끝냈다.
다음 차례가 누구더라…….
이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캡짱.
영준, 고개를 들어 캡짱의 보호자를 본다.
캡짱의 보호자는 최기동이다.
최기동, 씨익 웃는다.
영준의 표정이 변한다.
사이.
학생 기록부 및 성적표들을 사이에 두고 앉은 영준과 최기동.
최기동 뒤에는 덩치가 버티고 서 있다.
영준: 성적이 들쑥날쑥해. 2학년 기말고사만 보면 내신 8등급은 되는데, 지금은 10등급이야. 이대로 가면 지방 전문대학도 힘들거든.
최기동: 이 녀석은 적성상 컴퓨터 쪽으로 보내고 싶은데.
영준: (최기동을 힐끔 쳐다보며) 그럼, 이과 쪽으로 가야하는데……. 어렵겠는데.
최기동: 그렇지? 이 놈, 워낙에 수학이 약해서.
영준: (성적 기록부를 들추며) 수학도 약하고……. 또…….
최기동: 날 닮아서 수학을 싫어해, 자식이. 수학만 몇 달 들고파면 되겠지?
영준: 물론, 수학도 열심히 해야지…….
최기동: 워낙에 이 자식이 수학에 약해서 말야.
시간경과.
최기동, 상담을 끝내고 일어선다.
옆에서 상담을 하고 있는 미친개를 툭 툭 건드리며.
최기동: 어이, 정 선생님. 수고하십쇼.
미친개, 학부형 눈치를 본다.
최기동,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쿡쿡 찌르며 나간다.
그런 최기동을 보는 영준.
보면, 최기동은 거의 모든 선생들을 부하직원 대하듯 하고, 선생들은 아무 소리도 못 하는 게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
씬 80. 교사 화장실 안/오후.
베트콩, 지퍼를 올리다가 겨드랑이에 낀 큐대를 떨어뜨린다.
큐대를 집어 드는데, 버티고 서있는 영준.
베트콩: ?
영준: 뭔가 있죠?
베트콩: 무슨 소리야?
영준: 기동이 하고 다들 무슨 관계예요?
베트콩: 관계는 무슨 관계. 그냥 돈이나 좀 꾼 거지.
영준: 돈……. 요?
베트콩: 그러게 박 선생은 주변 일에 너무 무관심한 거야. 최기동 그 친구, 돈놀이하잖아. 거 왜, 일전에도 돈 안 갚는 놈 하나 팼다가 깜빵 들어갔다 왔다더라. 교감도 그러는 거 보면, 학교 재정에도 관계돼 있는 모양이던데.
영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베트콩: 아마, 이 동네사람 치고 그 치 돈 안 써본 사람 없을 걸?
영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번뜩 든다)
씬 81. 오거리 이발관 안/오후.
닭 모이를 주고 있는 주란.
영준, 급히 들어온다.
주란, 영준을 보니 반갑다.
헉…….
헉…….
헉…….
두 사람, 서로 마주보며 말이 없다.
밝던 주란의 표정이 서서히 변한다.
사이.
낡은 소파에 나란히 앉은 영준과 주란.
서로를 보지는 못하고 앞만 보고 앉아있다.
꼬…….
꼬…….
꼬…….
두 사람 앞을 닭이 한가롭게 오간다.
주란: (자조적) 몇 번만 만나주면 되잖아요.
영준: (거울을 통해 주란을 본다)
주란: 그렇게 보지 마세요. (털고 일어선다) 이렇게 사는 것도 방법 중에 하나니까.
주란, 면도거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마치 거품 만드는 일에 집착하듯.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없이 나가는 영준.
끝내 시선을 돌리지 않는 주란.
탁.
탁.
탁…….
서서히 거품이 만들어진다.
씬 82. 영준의 아파트 안/오후.
예금통장, 적금통장…….
저금통…….
등이 바닥에 펼쳐져 있다.
영준,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려보지만,
액정화면의 숫자는 ‘육백만원’에 턱없이 부족하다.
씬 83. 새마을 금고/낮.
은행직원: (서류를 훑어보며) 뭐, 이 정도면 대출엔 별 문제없겠네요. (대출 신청서를 건네며) 일단 여기 파란색 부분 채우시구요.
영준, 대출 창구 앞에 앉아있다.
오늘 양복은 특별히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대출 신청서를 받아 또박또박 작성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써 내려가는데 은행직원, 화면 밖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누군가에게 아는 척을 한다.
은행직원이 뒤쪽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면, 프레임 인 하는 사람은 007 가방을 든 덩치.
서로 막역한 사이인 듯, 밝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
문득 그들을 보는 영준의 표정 변화.
잡고 있던 볼펜을 힘없이 놓는다.
의자 등받이에 턱.
등을 기대는 영준.
촤르르…….
뒤로 밀리는 의자.
멀찌감치 떨어져 대출서류를 바라보는 영준.
씬 84. 권투 도장 안/저녁.
쿵!
영준, 링에 大자로 뻗는다.
촤악!
얼굴 위로 물이 끼얹어 진다.
영준, 스르르 눈을 뜬다.
베트콩: 박 선생, 괜찮아?
용팔: (헤드기어를 벗으며) 그러게, 되도 않는 스파링을 우예 하겠다고 그래 설쳤는교. 내한테도 한 주먹에 나가 떨어 지믄서.
베트콩: 그래도 일 라운드는 버텼잖아요.
용팔: 그런 식으로 해선 막걸리 값도 못 법니더. 선수들이 와 돈 들여가며 스파링을 하겠슴니꺼? (링에서 내려가며) 내 밥줄 끊지 말고, 관두이소.
영준, 상반신을 힘겹게 일으켜 앉는다.
임 관장, 링 아래에서 영준에게 수건을 던져주며.
임 관장: 그거 아나? 펀치 한 번 제대루 맞으면 말야……. 이 뇌가 흔들려서 두개골에 천 오백 번이나 부딪치게 돼. (강조) 자그마치 천 오백 번. 그래도 하겠나?
영준: (끄떡끄떡) 어차피 가만있어도 머리가 폭발해 버릴 겁니다.
임 관장: (안쓰러운 듯)
씬 85. 학교/오전.
계단을 내려와 교무실로 향하는 영준.
한쪽 눈이 시커먼 멍으로 늘어져 있다.
그 뒷모습을 빤히 보던 교감, 지나가던 베트콩에게.
교감: 박 선생 얼굴 왜 저래요?
베트콩: 버스에서 내리다가 넘어졌답니다.
오른발로 왼쪽 바짓자락을 밟았다나…….
어쨌다나…….
프레임 아웃.
교감: (갸우뚱거리며 베트콩 말대로 해본다. 이해가 안 간다?)
영준, 교무실로 들어온다.
그러나 왠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보면, 최기동 주위에 선생들이 몰렸다.
최기동은 졸업앨범과 사진들을 자랑하고 있고, 선생들은 사진을 돌려본다.
코딱지: 박 선생이랑 동창이었다면서 왜 수학여행 사진에선 안보여요?
최기동: 아, 영준인 그 때 수학여행 안 갔어요.
코딱지: 왜요?
최기동: (잠시 생각) 그러고 보니까 아직 안 물어봤네?
영준,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뒤로 선생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씬 86. 동네 놀이터/오후.
시소에 혼자 앉아있는 주란.
저 멀리 어딘가를 향해있는 시선.
살며시 부는 바람에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겨보는데.
갑자기 주란의 몸이 허공으로 휙!
올라간다.
깜짝 놀라서 보면, 반대편에 최기동이 앉아있다.
주란, 시소에서 뛰어내린다.
말없이 프레임 아웃.
최기동: 어디가?
소리: (주란) 차에 가 있을게요.
최기동: (앉은 채로) 아, 가시내. 그럴 거면 왜 놀이터에서 만나자 그랬냐?
이때, 덜컹!
하며 최기동의 몸이 허공으로 휙!
올라간다.
보면, 반대편엔 덩치가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허공에 뜬 최기동, 잠시 덩치를 바라본다. 그리고 힘을 주어 아래로 내려온다.
이번엔 덩치가 공중으로 오른다.
그제서야 최기동의 얼굴에 피식!
미소가 번진다.
끽…….
끼익…….
서서히 움직이는 최기동과 덩치의 시소.
주위에서 뛰노는 아이들 속, 그렇게 이상하게도 어울리는 둘.
씬 87. 권투도장 안 영준의 첫 스파링/오후.
스파링 복장의 영준, 링에 오르기 직전이다.
옆에 있는 베트콩, 영준 보다 더 흥분돼 있다.
임 관장, 영준 양어깨를 움켜쥐며.
임 관장: 최소한 3라운드까지는 버텨야 돼. 자신 있지?
영준: (고개를 끄덕인다)
임 관장: (마우스피스를 물리고) 싸우러 올라가는 거 아니니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펀치를 받아. 받아서 칠 수 있으면 받아치고.
무리가 가면 그냥 주저앉아도 돼. 최선만 다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영준: (고개 끄덕)
베트콩: 박 선생, 확 패버려!
임 관장, 영준의 등을 툭!
쳐주고.
영준, 글러브를 두 번 탁! 탁!
부딪는다.
띵! 링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영준, 프레임 아웃.
카메라를 바라보는 임 관장과 베트콩의 표정…….
이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말을 잃은 두 사람의 표정 위로 퍽!
퍽!
퍼억!
몇 번의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쿵!
급기야는 임 관장과 베트콩 앞으로 쓰러지는 영준.
그 짧은 사이 동안 영준의 얼굴은 뭉개질 대로 뭉개져 있다.
사이.
링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영준.
임 관장, 영준의 양어깨를 잡고 흔들며.
임 관장: 나를 봐!
영준: (쳐다보지 못한다)
임 관장: 나를 보라구!
영준: (힘겹게 임 관장을 본다. 만신창이가 된 얼굴.)
임 관장: 그게 다야? 자네 그것 밖에 안 돼? 뭐가 무서워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거야! 자넨 오기도 없나? 맞으면 분하지도 않아?
영준: (시선을 피한다)
임 관장: 관둬!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스파링은커녕 아예 권투를 관둬! 알겠어?
영준: …….
씬 88. 권투도장 안, 라커룸/오후.
풀이 죽어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영준.
라커 하나가 열려있고, 누군가가 그 문짝 뒤에 서있다.
손톱으로 무언가를 긁는 소리가 들린다.
영준,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간다.
보면, 고삘이 자신의 라커 문짝에서 여자 친구 사진을 떼어내고 있다.
고삘의 짐은 모두 정리가 되어있다.
고삘, 인기척을 느끼고 영준을 힐끔 쳐다본다.
만신창이가 된 영준의 얼굴에 조금 놀라는 기색이지만, 별 반응 없이 다시 사진 떼는 데 열중한다.
고삘: 나, 권투 많이 늘었어요.
영준: ?
고삘: 그 자식 열라 패줬거든요. 옛날에는 쪽도 못 섰는데……. 속 시원히 패줬죠.
영준: …….
고삘: 근데, 정작 여자 친구한텐 차였어요. 지하나 보고 죽어라고 권투했더니…….
고삘, 떼어낸 사진을 구겨 버리며
고삘: 계집애들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사진을 쓰레기통으로 던진다.
골인되지는 않고, 튕겨서 바닥에 떨어진다.
고삘, 가방을 집어 들고 휙.
나가버린다.
텅. 세차게 닫히는 문.
라커룸 구석, 그렇게 내동댕이쳐진 사진을 물끄러미 보는 영준의 모습.
씬 89. 최기동 사무실 앞/밤.
끽!
사무실 앞에 멈춰서는 최기동의 그렌져.
대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누군가의 그림자.
최기동: 누구야? 영준이 아니야!
영준: 술 한 잔 하자 그랬지?
씬 90. 포장마차/밤.
이미 상당히 취한 영준과 최기동.
포장마차 한 쪽 구석에서는 덩치가 혼자 라면을 먹고 있다.
횡설수설하는 최기동, 눈만 껌뻑 껌뻑…….
듣기만 하는 영준.
최기동: 그래서 짜식아……. 그깟 말 한마디 들었다고 그렇게 쉽게 포기해? 사내 시끼가? 에라, 빙신 새끼야……. 너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남잔 자고로……. 칼을 뽑았음……. 거 뭐냐……. (식탁 위 단무지) 하다못해 이 단무지라도 베야 할 거 아냐! 밀고 나가! 누군 뭐 태어날 때부터 글러브 끼고 났대냐? 밀고 나가면 다 되게 돼있다 이거야!
최기동의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잔뜩 풀린 눈으로 멀뚱하게 앉아 있는 영준.
최기동: 아, 기분 좋다! 이렇게 술 묵고……. 마음에 있는 얘기 터놓고……. 그게 진짜 친구지! 잘 왔다 짜식! 자, 한 잔 마셔라!
소주를 들이붓는 최기동.
영준도 힘겹게 소주잔을 든다.
최기동, 탁!
거칠게 소주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곤 잠시 침묵.
최기동: 살면서……. 뭔가 이……. 자꾸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데? 넌 안 그냐? 이……. 돈을 말이야……. 좆나게 벌어도 벌어도……. 자꾸만 자꾸만 잃어 가는 거야……. 머리카락도 그렇구……. 극장 같은 데서 줄 서 본지도 오래됐고……. 난 마, 요새 버스 요금이 얼만지도 모른다……. 허 허…….
영준: 500원.
최기동: (영준을 빤히 보다가) 사람이 말야……. 사람으로 안보여. 돈으루 보여! 돈! (피식!) 근데, 그 돈두 재미없다……. 개 쉬키들.
최기동, 손으로 고추장을 찍어먹는다.
최기동: 참. (뭔가 생각난 듯, 미소) 며칠 전에 나, 시소 타봤다? 하하하……. 요즘 주란이 덕에 별 짓 다 해본다. 하하하…….
최기동, 웃으며 건배를 권하는데 영준, 눈만 껌뻑…….
껌뻑…….
소주 한 잔을 입에 탁.
털어 넣는 최기동.
최기동: (캬) 너…….
영준: (눈만 껌뻑……. 껌뻑…….)
최기동: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 주란이 건드리지 마라.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
최기동, 금세 표정 변화.
히죽거리며 노래를 불러 제낀다.
탕!
탕!
테이블을 두드리며.
‘친구야……. 친구……. 내 친구야…….’
하는데, 무슨 노랜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깜빡깜빡 초점 잃은 영준의 시선.
영준: (슬쩍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시…….소…….
씬 91. 권투도장 안/낮.
띵!
다시금 이를 악물고 링에 오른 영준.
상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비장하다.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영준의 모습.
사이.
영준, 코너에 몰려 무차별 난타를 당하고 있다.
잔뜩 가드를 올리고 몸을 움츠린 영준, 눈을 꼭 감고 있다.
임 관장: 눈 감지 마! 상대를 보라구!
영준, 눈을 뜨려 하는데 잘 떠지지 않는다.
샌드백처럼 터지는 영준, 악착같이 버티는데, 띵!
1라운드가 끝난다.
씬 92. 오거리 이발관/오후/저녁.
다 짜인 스웨터를 들어보는 주란.
겨우 4살짜리 꼬마들이나 입을 정도로 작고 귀엽다.
뜨개질 교본 속, 시소에 앉은 꼬마가 입은 스웨터와 거의 똑같다.
주란, 흐뭇하다.
시간경과.
어두워진 골목.
빙글빙글 돌아가던 이발소 표시등이 탁.
멈춘다.
윙.
오늘따라 소리가 요란한 형광등.
주란, 다 짜인 스웨터를 다시 풀고 있다.
무표정하게 스웨터를 풀던 주란, 천천히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 한줄기가 흐른다.
스웨터를 내려놓는다.
소매로 쓰윽.
문질러 닦는다.
길게 심호흡.
스웨터를 다시 푼다.
씬 93. 최기동의 자동차 안/오후/석양.
한강 고수부지에 서있는 최기동의 구형 그랜저.
저 멀리 해가 지고 있고, 한강은 너무나 조용하다.
최기동과 주란, 말없이 차에 앉아있다.
라디오에서는 천박스런 개그맨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주란: 우리, 몇 번 만났죠?
최기동: 글쎄…….
주란: 이제 한 사백 오십만 원 남았어요?
최기동: (주란을 본다)
주란: (창 밖에 시선) 이런 거, 너무 웃기는 거 같아…….
최기동: (말이 없다)
주란: 이렇게 날 만나면 좋아요? 아저씬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무슨 심청이가 변사도 수청 드는 것도 아니고…….
최기동: (얼굴이 심각해진다)
아름답게 술렁이는 오렌지 빛 강물. 그 위로.
소리: (최기동) 춘향이야. 심청이가 아니라.
씬 94. 최기동의 사무실 안/낮.
‘김복순 재떨이’에 금붕어 밥을 주고 있는 최기동.
생각에 잠긴 듯.
인터폰이 울린다.
필 터: (미스 정) 사장님, 이철규씨 찾아오셨는데요.
사이.
철규가 궁색한 웃음을 보이며 앉아있다.
철규: 하하……. 많인 필요 없고, 한 백오십만 있음 좋겠는데……. 하하…….
최기동: (철규를 빤히 본다)
철규: (최기동 눈치를 보며) 그게 많음, 다만 백만 원이라도, 어떻게…….
최기동: 이것 봐, 이형.
철규: 응? 왜, 기동이?
최기동: 아니다. 아니야. 됐어, 돈 없어. 그냥 가.
철규: 어? 왜……. 그래? 기동이?
최기동: 돈 없다니까. 그리고 다음달부턴 3할로 쳐서 제대로 갚어.
철규: 왜 그러는 거야? 주란이가 너 안 만나 주겠대?
최기동: (웃음) 이형, 유치하게 우리 이러지 맙시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사람 치사하게…….
철규: …….
씬 95. 학교 교무실 안/오후.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영준의 얼굴.
교감: (비아냥) 또 넘어졌어요? (버럭) 학부모들 항의에 내가 낯을 못 들고 다니겠어! 아니, 박 선생이 무슨 깡패야?
교무실 모든 시선 집중!
대꾸도 못하는 영준의 난감한 표정에서
부캡짱: (소리) 얘기가 아직도 안 끝나네?
씬 96. 학교 화장실 안/오후.
계속되는 캡짱의 해설?
캡짱: 원래 라스트가 길수록 재밌는 법이지. 불쌍한 꼰대……. 너도 얼굴 봤지?
부캡짱: (끄떡끄떡)
캡짱: 그게 어디 사람의 얼굴이냐? 울 형님이 그런 분이시다. 관대하실 땐 한없이 관대하시지만……. 일단 칼을 뽑았다 하면!
부캡짱: (초롱한 눈망울?)
캡짱: 처절한 응징뿐이지.
부캡짱: (감탄) 야아! 가자, 캡짱. 내가 라면 살게.
캡짱: (잔뜩 거들먹) 밤낮 라면이냐? 떡라면 먹자.
씬 97. 최기동의 사무실 안/초저녁.
최기동 앞에 내밀어지는 카탈로그 온양온천 안내서다.
최기동, 고개를 든다.
철규의 음흉한 미소.
철규: 어때?
최기동: (잠시 생각)
철규: 딱 일박 이일. 둘이 가서 목욕하고 와.
최기동: (웃음) 하하……. 이거……. 사람 참 치사하게……. 하하하…….
씬 98. 오거리 이발관/초저녁.
주란, 입구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다.
골목 저편을 주시하며,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꼬…….
꼬…….
닭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고.
초저녁,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등은 썰렁해 보인다.
도시락 아줌마가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며 목례한다.
주란도 따라 목례.
아줌마, 프레임 아웃.
주란, 그만 들어가려는데 탈 탈 탈 탈…….
되돌아오는 스쿠터 소리.
도시락 아줌마 다시 프레임 인, 주란 앞에 멈춰 선다.
도시락 아줌마: 저기……. 비밀 지키기로 했는데……. 그냥 두면 큰일 날 거 같아서…….
주란: ?
씬 99. 권투도장 화장실 안/저녁.
(방금 스파링을 끝낸 듯) 영준, 거울을 들여다본다. 사람의 형상이 아니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손에 쥐어진 지폐를 본다.
힘겹게 돈을 세어보는데, 그 위로 핏방울이 뚝.
떨어진다.
보면, 코피가 쏟아지고 있다.
휴지를 풀어 콧구멍에 쑤셔 박는다.
거울을 본다.
참담하다.
자조적인 미소가 입가에 떠오르지만,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씬 100. 권투도장 아래, 현주약국 앞/저녁.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영준.
길 건너편, 면도사 흰 가운을 입은 채 뛰어오는 주란.
영준, 멈칫한다.
좁다란 차도를 사이로 두 사람, 마주보고 서있다.
파란불.
서로에게 다가가는 두 사람.
중앙선에서 만난다.
주란, 망가진 영준의 얼굴을 본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주란: 왜 그러고 다녀요?
영준: (알아듣기 힘든 발음) 주……. 란……. 씨…….
주란: 바보같이 대체 왜 맞고 다니는 거예요!
영준: …….
주란: 내가……. 고작 그 돈 때문에 몸이라도 파는 줄 아세요? 누가 대신 갚아달라고 했냐구요! 다 갚으면. 그 땐 선생님하고 데이트를 해야 되나요? 그래요? 그걸 원해요?
영준: (뭐라고 웅얼거리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
주란: 이러지마! 안 고마워요! 이러는 거, 하나도 안 고마워! 그냥 바보같애!
헉…….
헉…….
두 사람, 이젠 서로 할 말이 없다.
서로의 눈을 가만히 보기만 할 뿐.
둘 다 정지된 듯이 그렇게…….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좌우로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편도 1차선 좁은 도로라서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꽤 위태로워 보인다.
씬 101. 마을버스 안/저녁.
마을버스 뒷자리, 영준과 주란이 나란히 앉아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몇 몇 아줌마와 젊은이들이 오르내리지만, 버스 안은 무척이나 조용하다.
주란, 문득 자신의 차림새를 의식한다.
실내에서 신던 낡은 슬리퍼…….
하얀 면도사 가운…….
발을 영준 반대편으로 약간 치운다.
주머니에 약간 삐져나온 빗 꼭지를 손으로 가린다.
그리고…….
덜컹…….
덜컹…….
달리는 버스.
두 사람의 무거운 침묵.
씬 102. 돼지슈퍼 안/밤.
딸랑…….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며 들어오는 주란.
쪽방에서 슈퍼아저씨가 뭔가 오물거리며 나온다.
슈퍼아저씨: (입 속의 내용물을 다 보이며) 인제 들어가는 겨? 헤헤……. 난 인제 밥 먹는 참인데.
주란: (힘없는 미소) 북어 한 마리만 주세요.
슈퍼아저씨: 헤헤……. 또 술 먹었는 감네……. (북어 가지러 가며) 몸 좀 생각하라 그랴……. 허구헌 날…….
궁시렁…….
궁시렁…….
주란, 계산대 앞에 멍하니 서있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다.
씬 103. 영준의 아파트 안/밤/아침.
영준, 세면대에서 자신의 코피가 묻은 지폐 한두 장을 닦는다.
수건에 물을 묻혀 꼼꼼히, 정성스럽게…….
시간경과.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실내.
영준, 지폐들을 정성스레 추슬러 흰 봉투에 넣는다.
씬 104. 오거리 이발관/낮.
영준, 옷매무새를 한 번 고치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안에는 철규와 배달 온 도시락 아줌마 밖에는 없다.
오늘따라 유난히 단무지가 많은 것이 보이지만,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철규와 아줌마, 영준을 쳐다본다.
영준: (두리번거리며) 주란 씨는……. 어디 갔어요?
씬 105. 영준의 아파트 안/낮.
우당탕!
뛰어 들어오는 영준.
어찌할 바를 몰라 두리번대다가 일단은 권투 글러브를 찾아 목에 건다.
화장실로 달려가 수건, 치약, 칫솔을 챙긴다.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산만하기 짝이 없다.
양말 따위를 대충 챙기고는 정신없이 현관을 나선다.
잠시 후.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 영준, 황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영준: 여보세요……. 배 선생님?
씬 106. 택시 안/낮.
이자연의 ‘당신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택시.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영준과 베트콩.
글러브를 목에 건 영준 옆에는 수건…….
칫솔…….
등이 아무렇게나 놓여있고, 베트콩은 여전히 큐대를 들고 있다.
영준: (창밖을 응시하며…….)
베트콩: 그러게 그런 사정이 있음,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그런 자식은 그냥…….
영준: (혼잣말처럼) 찾을 수……. 있을까요?
베트콩: 걱정 마. 금방 찾는다. 알잖아, 내가 온양밥 먹은 게 몇 년인데. 온양 쪼그매. 딱 내 손바닥이야.
영준: 죄송해요……. 찾기만 하면 바로 올라가세요.
베트콩: 허……. 쓸데없는 소리! 든든하게 뒤에 버티고 있을 테니까, 맘 푹 놔.
귀 뒤의 키미테를 꾹.
눌러 확인한다.
창밖을 바라보는 영준의 눈빛.
‘……. 당신 없는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
씬 107. 온양온천 시내/오후.
온양 시내를 헤매고 다니는 영준과 베트콩.
온천탕이 주욱 늘어선 곳, 저 끝에서부터 제일 앞집까지, 모두 들어가 본다.
그러나 계속 헛걸음이다.
영준, 여관 앞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는 중년남자와 젊은 여자를 힐끔 본다.
마음이 더더욱 급해졌다!
영준, 사람들을 밀치며 마구 뛰어간다.
베트콩도 따라 뛰지만 영준만큼 빠를 리 없다.
뛰어가는 영준의 주머니에서 동그랗게 말린 양말이 툭.
떨어져 굴러간다.
저만치 멀어져 인파 속에 묻히는 영준의 뒷모습.
씬 108. 온양온천 먹자골목/오후.
파라솔 아래, 빈대떡 한 접시를 사이에 두고 앉은 주란과 최기동.
주란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성냥 탑을 쌓고.
최기동은 속이 답답해 맥주만 들이켜고 있다.
영준, 드디어!
저 만치에 있는 주란과 최기동을 발견한다.
부드득.
이가 갈린다.
권투 글러브를 낀다.
당장이라도 최기동을 죽일 기세로 저벅저벅 다가가 그들 앞에 턱!
버티고 선다.
그런데. 보니, 할 말이 없다!
고작 빈대떡 한 접시에 성냥탑?
주란과 최기동, 느닷없이 나타난 영준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주란: 선……. 생님…….
뒤늦게 달려온 베트콩: 헉……. 헉…….
사이.
유리 글라스에 맥주가 따라진다.
영준은 이전에 비해 표정이 다소 어정쩡해졌다.
오히려 베트콩 표정이 더 심각하다.
최기동: 얌마, 숨부터 돌려라! 나까지 숨 넘어 가겠다. (맥주 글라스를 건네며) 배 선생님도 한 잔 하시죠?
베트콩, 잔을 받는 대신 맥주병을 잡는다.
단숨에 꿀꺽…….
꿀꺽…….
모두 비운다.
주란, 영준을 보다가는 이내 고개를 떨군다.
최기동: 야, 암튼 잘 왔다. 볼 일 있는 건 아니지? (권투 글러브를 보더니) 여기, 시합 있냐?
영준: 아……. 아니……. 뭐…….
베트콩, 영준이 답답한 듯, 영준 잔까지 모두 비운다.
영준, 주란을 본다.
고개 숙인 주란을.
최기동: (영준의 수건, 칫솔 따위를 보곤) 목욕하러 왔구만! 잘됐네! 같이 목욕하고 낼 관광이나 하고 가자.
영준: …….
최기동: 가만, 너 지리 가르친다고 그랬지? 거 제대로네! 요 근처 어디가 가볼만 하냐?
베트콩: (약간 취기가 오른 듯 얼굴이 불그스레하다)
영준: (조용히 입을 연다) 싸우자.
최기동: 어디?
영준: 싸우자구.
최기동, 기가 찬 듯 영준을 잠시 본다.
뭔가 말하려 하는데, 프레임 인 하는.
덩치: (자리에 앉으며) 307홉니다.
순간, 복잡한 시선 교차!
영준, 주란을 보고, 주란, 영준을 봤다가는 덩치를 한 번 보고, 베트콩, 덩치를 보다가는 최기동, 영준을 번갈아 보고, 최기동은 무신경하게 먼 곳에 시선을 두며 맥주를 들이키고…….
영준: (할 말이 있는데……. 주란에게, 아니, 덩치……. 아니, 최기동에게……. 그러나 결국 못하고)
주란: (할 말이 있는데……. 영준에게, 아니, 덩치……. 아니, 최기동에게……. 그러나 결국 못하고)
복잡한 시선이 오가며 무거운 침묵이 계속된다.
답답해서 못 참겠는 듯, 침묵을 깨는.
베트콩: 붙어!
영준, 주란, 최기동, 덩치 모두 베트콩을 쳐다본다.
베트콩: (영준에게) 못 붙어?
영준: (대답이 없다)
베트콩: 싸우자면서!
최기동: 허허……. 배 선생, 그거 먹고 취한거야?
베트콩: 일어나라니까! 일어나서 덤벼!
베트콩, 벌떡 일어서는데, 몸에 걸려 테이블이 덩달아 엎어진다.
와장창! 순간적으로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덩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트콩 앞에 버티고 선다.
베트콩, 큐대를 움켜쥔다.
둘이 마주 서니 고목나무에 매미다.
베트콩, 순간적으로 약간 당황하는데…….
퍽!
덩치의 주먹이 날아온다.
큐대가 저만치 날아간다.
베트콩, 오기가 발동한다.
덩치를 향해 퍽! 주먹을 날린다.
곧, 대판 싸움이 붙는다.
당혹스러운 영준, 주란, 최기동.
영준과 주란, 달려가 둘을 뜯어말린다. 쉽지 않다.
최기동,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영준은 베트콩을 잡고, 최기동은 덩치를 잡고…….
역시 쉽지 않다.
사람들이 몰려든다. 최기동, 이거 ‘완전히 스타일 구겨지는 날’이다.
씬 109. 달리는 최기동의 자동차 안/늦은 오후.
조수석에는 코피를 흘리고 있는 덩치가 앉아 있다.
뒷좌석 가운데, 시퍼렇게 멍이 든 베트콩이 거의 쓰러져 있다.
양옆으로는 주란과 영준이 서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할 말이 있는데…….’ ‘뭔가 얘길 해야 하는데…….’
운전석의 최기동, 룸미러를 통해 떨어져 앉은 영준을, 주란을 본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두 사람…….
씬 110. 권투도장 안/저녁.
어둑한 도장.
라커룸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 영준.
영준, 말없이 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임 관장: 왜? 그만두려구?
영준: (멈춘다)
임 관장: 목적을 이룬 건가?
영준: (힘없는 웃음) 권투가 별 도움이 안됐어요.
임 관장: (영준을 보다가) 이리 앉게. 내 얘기 하나 해주지……. 재밌어, 들어보라구.
임 관장과 영준, 링에 걸터앉는다.
담배를 꺼내 무는 임 관장.
임 관장: 옛날에 어떤 권투 선수 하나가 있었어. 그 선수한텐 라이벌이 하나 있었는데 말야, 말이 라이벌이지, 다섯 번 붙어서 모두 KO 당했어. 다섯 번 모두……. 도저히 게임이 안됐지. 그 선수 소원이 뭐였는지 알아? 따악 한번! 딱 한번만이라도 그 자식을 보기 좋게 눕혀보자!
영준: (희미한 미소)
임 관장: 근데, 여섯 번째 시합도 마찬가지 였어. 신나게 두들겨 맞다가……. 거의 KO 직전까지 갔지. 그 와중에도 그 선수는 딱 하나만 생각했어. 딱 한번만이라도 저 자식을? (영준을 본다)
영준: 눕힐 수만 있다면.
웃음.
임 관장: 결국엔 어떻게 했는 줄 아나? (박치기 시늉) 빡! 있는 힘을 다해 버팅을 해버렸어. 허허허……. 그야말로 보기 좋게 눕혀 버린 거지……. 허허허…….
영준: (웃음)
임 관장: 그 선수는 그날로 선수자격을 박탈당했어.
지금은 먹고살려고 작은 도장 하나 운영하면서 늙어가고 있고…….
영준: (임 관장을 본다)
임 관장: 그 선수가 후회하고 있을 거 같나? (고개를 저으며) (털고 일어선다) 어쨌건 소원은 이뤘잖아? 그러면 된 거지, 허허허…….
나가는 임 관장.
휑하니 텅 빈 도장.
링에 혼자 걸터앉은 영준.
씬 111. 오거리 이발관 안/저녁.
불 꺼진 이발관 안으로 들어오는 주란.
닭 모이를 주고 돌아보니, 닭이 알을 낳았다.
주란, 모른 척 지푸라기로 살짝 덮어준다.
나가려는데 테이블에 흰 봉투 하나가 놓여있다?
봉투를 열어보니, 약간 색이 바란 듯한, 그러나 매우 깨끗한 지폐들이 들어있다.
지폐를 보는 주란의 표정.
씬 112. 영준의 아파트 앞/밤.
노란 가로등만 희미하게 켜져 있는 아파트 단지.
터벅터벅…….
걸어오던 영준, 무언가 발견하고는 멈춰 선다.
보면, 아파트 입구 돌계단에 걸터앉은 주란.
작은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무언가 끄적거리고 있다.
주란, 영준을 본다. 천천히 일어선다.
말없이 잠시 보는 두 사람.
씬 113. 영준의 아파트 안/밤.
앉은뱅이 탁자를 사이로 마주앉은 두 사람.
서로 아무런 말이 없다.
뻐꾸기시계의 뻐꾸기가 삐걱.
삐걱.
거린다.
뻐꾸기가 들어간 뒤, 또다시 침묵.
주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는다.
약봉지.
사이.
주란, 영준의 눈언저리에 약을 발라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기는 처음이다…….
영준의 눈 주위를 맴도는 주란의 하얀 손가락…….
영준, 애써 주란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영 어색하기만 하다.
침묵을 깨는.
주란: 권투……. 할 만해요?
영준: 예…….
또다시 무거운 침묵.
영준: 그만 뒀어요.
주란: …….
영준: 권투는……. 맞으면서도 눈을 뜨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펀치를 피할 수 있거든요……. (웃음) 난 겁나서 눈을 감아 버리죠. 그러니까 만날 맞는 거예요…….
영준, 주란을 본다.
잠시 눈빛이 마주친다.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는 듯싶더니…….
이번에는 주란이 시선을 돌린다.
실내를 두리번거리다가 영준의 달력을 본다.
색 바랜 불국사 사진…….
주란: 올해는 2000년이에요.
영준: (주란 시선을 따라 달력을 본다)
주란: (웃음) 바꿀 때가 지난 것 같은데요.
주란, 약을 집어넣는다.
영준: 수학여행……. 기억나요?
주란: ?
영준: 잘 기억 못하겠죠……. 난……. 아주 잘 기억해요…….
영준을 바라보는 주란의 눈빛.
씬 114. 82년 수학여행/불국사 가는 길.
‘영성 고등학교 수학여행’
현수막이 붙은 고속버스 한대가 달리고 있다.
버스 안엔 까만 교복에 까까머리 학생들로 가득하다.
출발한 지 한참 지난 듯, 몇몇 녀석들은 이미 골아 떨어졌다.
버스 한구석 새근새근 자고 있는 검정뿔테의 고교생 영준.
이때, 싸인 펜을 든 손 하나가 프레임 인 한다.
보면, 한눈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불량학생 최기동’, 영준의 얼굴에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잔뜩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뒤에서 킥킥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범생…….
영준.
끼익!
버스가 멈춰서는 곳은 고속도로 휴게소.
카메라,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 속, 영준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소변을 보고 있는 영준, 뒷모습.
볼일을 마치고 세면대 앞에 서는 순간, 굳어버리는…….
보면, 영준의 이마엔 “나는 겁쟁이다!”라는 잔인한 낙서와 함께 두 눈 밑에는 뚝뚝 떨어지고 있는 눈물이 진한 사인펜으로 그려져 있다.
영준, 한참동안 꼼짝 않고 서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다.
어디선가 낄낄대는 아이들의 조소가 메아리치는 듯 하다.
이제, 영준의 두 눈엔 ‘진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눈물에 천천히 번져 가는 사인펜.
전교생을 태운 버스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한다.
화장실 벽에 반쯤 가려진 영준의 모습.
멀어져 가는 버스를 보는 영준의 휑한 시선.
씬 115. 영준의 아파트 안/밤/새벽.
영준: 다시 돌아갔을 땐 이미 버스가 떠난 뒤였어요. 전교생 버스가 모두 말예요. 아무도 제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주란: …….
영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밤새 고속도로를 걷기만 했어요. 그냥……. 밤새……. (웃음) 바보같이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던지…….
달력 속의 불국사.
영준: 그 뒤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겠죠……. 저도 나이를 먹고……. 시간은 그만큼 흘러갔고……. 그런데……. 결국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더군요. 모두 옛날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모든 게 그대로였어요.
주란: (영준을 본다)
불국사 사진 속, 나뭇잎이 잠시 바람에 흔들린 듯하다.
사이.
가스레인지에서 커피 물이 데워지고 있다.
커피가루가 든 빈 컵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앉은 두 사람.
주란: 저…….
주란, 흰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영준: 주란씨! 이건요…….
주란: 알아요. 아니까 돌려 드리는 거예요……. 고맙다는 말…….
영준: …….
주란: 저는……. 고맙다는 말도 잘 할 줄 몰라요……. 그 날……. 제가 너무 심했죠? 그럴 땐……. 고맙다고 했어야 맞는 건데…….
영준: (무슨 말을 하려다 만다)
주란: 버스에서……. (웃음) 창피했어요.
영준: (주란을 본다)
주란: 평소엔 가운입고 시장도 잘 갔는데……. (웃음) 그 날, 저 구질구질해 보였죠……. (사이.) 이제 그만 주무세요. 너무 늦었네…….
일어서려는데.
영준: 그런 말……. 아세요?
주란: (멈칫.)
영준: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
주란: (영준을 본다)
영준: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겠죠. 용기가 없어 항상 눈을 감아버리는……. 이런 겁쟁이한테는……. 그 사람을 놓칠까봐 두려운데……. 용기 내서 다가가지 않으면 놓쳐버릴 것 같은데……. (웃음) 그게 그렇게 어렵네요. 단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지금이었으면 좋겠어요.
영준, 주란을 본다.
주란, 영준의 눈빛을 들여다본다.
머뭇머뭇…….
천천히 입을 맞춘다.
삐이.
물주전자가 끓고 있다.
두 사람, 침대에 걸터앉는다.
다시 입맞춤.
숨이 차오르지만, 몸동작은 둔하고 서툴기 그지없다.
서로 단추를 풀어주려 하지만, 쉽지 않다.
자신의 옷도 제대로 벗기 힘들다.
곧.
침대 위로 쓰러지는 두 사람…….
시간경과.
새벽 햇살이 들어오고 있다.
서로 꼬옥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영준과 주란.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모습.
씬 116. 학교 달라진 영준/오전.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영준의 표정.
복도에서 휙!
휙! 공중으로 펀치도 날려보고.
씬 117. 교사화장실 안/오전.
나란히 소변을 보고 있는 영준과 베트콩.
영준, 절로 휘파람이 나온다.
옆에서 지켜보던 베트콩, 씨익 미소 지으며.
베트콩: 박 선생……. 잤지?
영준: 아뇨. (미소) 한 숨도 못 잤는데요.
베트콩: 이야! 드디어! 맞지? 주란씨?
손을 씻고 나갈 때까지도 ‘어땠어? 응?’
집요하게 캐묻는 베트콩.
영준, 그저 미소만 짓는다.
둘이 나간 텅 빈 화장실.
갑자기, 텅!
변기 칸을 박차고 나오는 캡짱.
캡짱: (담배를 탁! 튕기며) 씨발! 얘기가 여기서 반전되는구만!
후다닥 어디론가 달려 나간다.
씬 118. 오거리 이발관/낮.
여느 때와 같이 늘어지게 낮잠 자는 철규.
주란은 보이지 않는다.
팡!
문을 박차고 들이닥치는 최기동.
다짜고짜 철규의 멱살을 움켜쥔다.
철규가 화들짝 놀라 깬다.
최기동: 주란이 어디 있어?
철규: (캑캑!) 이봐, 기……. 기동이 왜 이래?
최기동: 주란이 어딨냐구, 새꺄!
철규: 나……. 나도 몰라…….
최기동: 영준 이한텐 얼마 받았어?
철규: 기……. 기동이 그게 무슨…….
퍽!
느닷없이 날아오는 최기동의 펀치.
콰당탕!
나가떨어지는 철규.
최기동, 쓰러져 있는 철규를 밟고 때리고…….
무자비하게 패주고 있다.
와장창! 의자로 거울을 부수는 최기동,
손에 잡히는 대로 빠개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이발관.
씬 119. 영준의 아파트 안/낮.
눈부신 햇살에 혼자 눈을 뜨는 주란.
갑자기 수줍은 웃음이 나온다.
이불로 얼굴을 덮는다.
사이.
식탁엔 아침상이 차려져 있다.
주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때,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
삐걱.
열리는 문으로 보이는 최기동.
주란, 흠칫 놀란다.
아무 말도 못하고 주란을 바라보는 최기동.
씬 120. 학교 안/늦은 오후.
수업시간의 조용한 복도.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오고 있다.
그 소리를 쫓아 가보면, 영준이 수업중인 교실.
영준: 그밖에 오대산에는 우통수라고 불리는……. 말하자면 한강의 근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샘이 있어. 설악산이 바위가 많아 남성에 비유된다면, 이 오대산은 흙으로 이루어져…….
따뜻한 여성의 품으로 비유되지.
휙휙!
휘파람 부는 아이들.
영준: 사실, 오대산에 가보진 못했지만, 여성의 품이란 게 어떤 건진 아니까 안 가봐도 알겠지?
아이들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영준도 따라 웃는데.
스르르…….
뒷문을 열고 나타나는 최기동.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최기동에게 집중된다.
최기동, 맨 뒷자리에 거만하고 요란하게 앉는다.
예상과는 달리 무척 침착한 최기동.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놀란 영준, 곧 태연한 척 수업을 계속 진행한다.
영준: (태연한 척) 이렇게 관광 산업은 흔히 굴뚝 없는 공장으로 불리는데…….
아이들 다시, 일제히 영준에게로 시선을 모은다.
최기동 옆자리에 앉은 녀석만 멍하니 최기동을 빤히 보고 있다.
최기동: 뭘 봐, 임마? 공부해.
영준: 관광자원은 크게 자연적, 문화적, 사회적, 산업적 자원으로 구분되는데, 먼저 자연적 자원은 지형, 기후, 식생…….
따르르릉!
수업종료를 알리는 종소리.
영준: (최기동 의식한 듯) 아, 오늘 종례 생략한다.
아이들의 함성.
‘차렷! 경례!’가 끝나고 아이들 일제히 일어난다.
갑자기 최기동, 아이들을 향해 소리친다.
최기동: 아그들아, 책걸상 앞으로 쭈욱 밀고 나가라!
아이들, 동작을 멈추고 영준을 쳐다본다.
영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책걸상을 모두 앞으로 미는 아이들.
다들 나가는데, 쭈삣거리며 서있는 학생 두 명.
최기동: 너넨 뭐냐?
학생 둘: 주……. 번 인데요.
최기동: 아, 됐다. 오늘은 청소 없다.
씬 121. 교실 안/늦은 오후 영준과 최기동의 한판 승부!
늦은 오후의 햇살로 창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는 복도.
덩치, 교실 문 밖에 서있다.
학생 한 둘이 덩치를 경계하며 지나가지만, 덩치는 심각하지 않은, 무표정.
책걸상이 밀려진, 텅 빈 교실.
마주보고 서있는 최기동과 영준.
최기동: 나하고 한 판 붙자고 그랬지? 붙자. 어디 한 번 실컷 붙어보자.
영준: 너하고 싸울 이유 없어.
최기동: (피식!) 내가 그렇게 쉽게 놔줄 것 같애?
영준: 그러지마. 우린 서로…….
최기동: 닥쳐! (윗통을 벗으며) 벗어, 새꺄.
윗통을 벗는 최기동. 우람한 근육이 나타난다.
영준도 피할 수 없다는 듯 웃옷을 벗는다.
영준의 꾀죄죄한 난닝구.
영준, 가드를 올리고 조금씩 스텝을 움직인다.
두 사람,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동안 탐색전에 들어간다.
긴장된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휙!
선제공격은 영준부터.
그러나 가볍게 피하는 최기동.
이어서…….
퍽!
최기동의 무시무시한 주먹이 영준의 턱을 가격한다.
휘청하는 영준, 다시 정신을 차려 보지만
퍽!
다시 날아오는 최기동의 펀치.
계속 헛 주먹질만 하는 영준.
최기동: 새꺄, 그거밖에 안 돼? 그 정도로 주란일 갖겠다고?
순간, 영준의 눈동자가 불타오른다.
턱!
영준의 펀치가 최기동의 안면을 가격한다.
주춤하는 최기동, 곧 씨익 웃으며
최기동: 그렇지! 그렇게 하는 거야.
영준 또다시 펀치를 날려 보지만…….
퍼억!
최기동의 펀치가 더 빨랐다.
영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최기동: 일어나, 새꺄! 아직 멀었어!
괴로워하는 영준.
최기동, 영준을 잡아 일으키며 펀치!
우당탕!
책걸상으로 날아가는 영준.
또다시 일으켜 주먹을 날리는 최기동.
영준의 얼굴은 이미 망가져 있다.
벽에 세워두고 무차별 펀치를 날리는 최기동.
피가 사방으로 튄다.
거의 정신을 잃은 듯, 맞는 것도 무감각해 진 듯.
때리는 최기동도 점점 지쳐간다.
교실 밖.
베트콩, 코딱지, 뾸녀, 교감…….
등, 몇몇 선생들이 몰려왔다.
아무도 말릴 생각은 못하고, 창문으로 힐끔거리며 훔쳐보기만 한다.
베트콩, 옆에 끼고 있는 큐대가 예전보다 훨씬 길어지고 굵어졌다.
베트콩, 덩치를 의식하며 큐대를 손에 쥐어보지만, 덩치는 미동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다.
뭉개진 영준의 얼굴을 향해 마지막 펀치를 날리려는 최기동.
최기동: 헉헉……. 네가 진거야…….
영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뜬다.
최기동, 사력을 다해 주먹을 지르려는 순간
빠악!
최기동의 안면을 향해 박치기를 가하는 영준!
코를 움켜쥐고 움직일 줄 모르는 최기동.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한 잠시 동안의 정적.
헉헉대는 영준의 눈빛이 달라져 있다.
최기동, 간신히 눈을 떠보니 손에 가득한 피. 쌍코피!
최기동: (휘둥그레 한) 피……. 피!
영준: 지금부터야, 새꺄! 이야!
최기동에게 달려드는 영준.
바닥에 쓰러지는 두 사람.
엎치락뒤치락, 이제부턴 막싸움이 시작된다.
꼬집고…….
할퀴고…….
물고…….
머리끄덩이 잡고…….
목 조르고…….
온갖 추잡한 짓도 가리지 않고…….
초등학교 애들 쌈박질처럼…….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베트콩과 모여든 선생들, 슬그머니 프레임 아웃.
늦은 오후, 텅 빈 교실에서 그렇게 교감? 하는 두 사람.
씬 122. 오거리 이발관 안/늦은 오후.
주란, 뛰어 들어온다.
보면, 온통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발관.
철규는 만신창이가 되어 뻗어있고, 도시락 아줌마가 정성스레 치료를 해주고 있다.
이런…….
주란,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씬 123. 교실/늦은 오후/석양.
석양이 교실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텅 빈 교실, 창가에 걸터앉은 영준과 최기동.
지칠 대로 지친 두 사람.
이제 싸움은 끝났다.
둘 다 망가진 모양새가 귀엽기까지 하다.
한참을 헉헉대기만 하는 두 사람.
최기동: 씨빨! 8년 만이다. 8년 전에 맥주병으로 대갈통 깨지고 처음 맞아 봤다! 허허……. 나, 참……. (웃음이 커진다) 하하하…….
영준: (따라 웃는다)
최기동: 웃지 마, 새끼야.
웃음을 뚝 멈추는 영준.
최기동, 영준을 바라보더니 담배를 꺼내 보인다.
최기동: 한 대 펴라.
최기동을 바라보는 영준.
최기동, 자신도 하나 빼문다.
영준, 담배 한 모금 빠는데, 당연히 그는 한 번도 담배란 걸 피워본 적이 없다.
콜록…….
콜록…….
최기동: 들이 마쉰 담에 내뱉는 거다. 첨엔 다 그렇지만 맛들이면 이거 이상 없어.
최기동, 딸깍!
큼지막한 도너츠를 만들어 띄운다.
허공에 넓게 퍼져 가는 담배연기 도너츠.
한동안 그 모습을 올려다보는 둘.
영준: (참았던 말을 터뜨리듯) 난 이제 겁쟁이가 아니야.
최기동: (영준을 쳐다본다. ‘이 자식이 무슨 소리야?’하는 표정.) 누가 그냐? 너같이 간땡이 부은 새끼는 내 첨 봤다.
영준: (최기동을 본다)
최기동: 주란이…….
말을 잇지 않고 생각에 잠긴 최기동.
일체의 미동도 없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영준의 표정.
최기동, 마치 장고에 들어가는 바둑기사처럼 아주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하려던 말을 떨쳐낸 듯.
최기동: 삼계탕은 사주지 마라. 닭을 엄청 싫어하더라.
영준: (최기동을 바라본다)
최기동: 남자는 말이다, 자고로 자기 대가는 치르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주란일 얻었음, 대가는 치뤄야지?
영준: …….
최기동: 일주일에 한 번씩 술 묵자, 나랑……. 그리구……. 어, 축구도 같이 하구……. 목욕탕도 같이 가구……. 술 묵구……. 에……. 또…….
영준: 친구는 벌써 된 거 아냐?
최기동: 웃기지마, 새꺄. 누가 너하고 친구 한대?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 어디 가서 소문 내지마. 그땐 진짜 죽는다.
영준, 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빠는데…….
콜록!
최기동: 그나저나, 우리 업동이 수학점수는 어떻게 올리지?
영준: 자기가 열심히 하는 수밖에 더 있겠어?
최기동: 대학은 몰라도 과는 적성 살려 가야 되는데…….
창밖, 기일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진 운동장은 저녁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난다.
씬 124. 오거리 이발관/며칠 후.
아직 수습되지 않은 난장판.
문이 삐걱.
열리며 들어오는 덩치.
보면, 목장갑에 연장통을 들고 들어온다.
뒤따라 들어오는 최기동, 약간 머쓱한 듯.
최기동: 뭐, 생각보다 별로 안 망가졌구만!
이발관 내부를 고치는 사람들의 모습 속
영준, 이젠 사람들과 썩 잘 어울린다.
잠시 일손을 놓고 배달된 짜장면을 먹는 사람들.
여기저기 걸터앉고 바닥에 앉고…….
짜장면을 먹으려는데.
철규: 나……. 날짜 잡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철규를 바라보는 시선들.
철규: (머쓱) 앞으로 평생 구박 주려고, 이 아줌마하고 결혼한다고…….
도시락 아줌마 얼굴이 붉어진다.
입에 짜장면을 가득 넣은 채 다들 놀라는 표정.
꼬. 꼬. 꼬. 꼬…….
닭이 병아리들을 이끌고 지나간다.
씬 125. 오거리 이발관 앞/오후.
영준, 주란, 최기동, 철규와 도시락 아줌마, 덩치, 베트콩 등 동네 사람들.
위를 올려다보면, 이빨 빠졌던 간판이 깔끔하게 다시 고쳐졌다.
(한 글자도 빼지 않고) - [오․거․리․이․발․관]
반짝!
빛나는 간판에 햇살이 반사되어 영준의 얼굴을 밝힌다.
이발관 앞에 줄을 맞춰 서있는 사람들.
주란 정도가 웃고 있을 뿐, 모두 ‘엉성한 차려 자세처럼’ 어색한. 무표정한.
하나……. 둘……. ‘셋’ 소리에 맞춰 영준, 가드를 올려 포즈를 취한다.
(소리): 찰칵!
씬 126. 학교 도서관/며칠 후.
캡짱, 도서관 구석에서 수학 참고서를 열심히 풀고 있다.
옆에서 유심히 쳐다보던
부캡짱: 캡짱, 근데 캡짱은 왜 그렇게 수학만 열심히 해?
캡짱: 얌마, 요즘은 세탁소에서도 컴퓨터를 쓴다잖냐. 뭘 해도 컴퓨터다, 우리 세대엔.
부캡짱: (감탄) 오!
씬 127. 최기동의 사무실, 마당/오후.
꽃도 심고…….
분수도 나오고…….
제법 아담하게 꾸며진 최기동의 그 연못.
최기동, 그 동안 재떨이에서 고생한 금붕어들을 풀어준다.
금붕어 두 마리, 연못 속으로 자유롭게 헤엄쳐 들어간다.
금붕어들을 바라보는 최기동의 시선.
씬 128. 불국사 신라의 달밤/밤.
달빛아래, 절정을 이룬 가을 단풍.
그 속을 뚫고 지나가면 천천히 드러나는 불국사의 밤.
영준의 오래된 달력 속, 바로 그 불국사.
탐스러운 달이 단아하게 떠있다.
돌계단에 걸터앉은 두 사람.
주란, 어렴풋이 뭔가 생각이 난 듯.
주란: 수학여행 기억 나냐고 물었죠? 잊고 있었는데……. 하나 생각나는 게 있어요.
영준: (주란을 본다)
주란: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 하는데, 제 머리 위로 별똥별이 휙! 하고 지나갔었어요.
영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주란: (침묵)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빠지며, 두 사람의 모습과 목소리는 차차 멀어진다.
영준: 그래서요?
주란: (영준을 보며) 그게……. 다예요……. (쑥스러운 미소) 시시……. 하죠?
영준: (입가에 엷은 미소)
주란: 그 때 소원이라도 빌어뒀어야 했는데……. 너무 아쉬운 거 있죠.
영준: 소원이 뭔데요?
더 이상 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주란, 작게 ‘소원’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 키득키득…….
웃는다.
두 사람의 얘기는 계속되고…….
천천히 드러나는 하늘.
불국사의 달밤에 어우러진 두 사람과 드넓은 밤하늘 저 멀리, 옅은 별똥별 하나가 반짝!
짧은 선을 몰래 긋는다.
아름다운 신라의 달밤.
어디선가, 불국사의 종소리가 정말로 ‘들리어 온다’.
‘아--- 신라의 바---암---이---여……. 정인: 안 돼 이거마저 해야 해. 방학하면 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