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기록한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당대 사관들의 역사인식까지 담겨져 있다.
자료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만전을 기하였다.
다음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사관의 철저함이 나타나 있다.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正草의 세 단계 수정작업을 거쳐 완성하였다.
물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사초를 주로 세척하던 장소가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말려진 종이는 조지서造紙署에서 새로운 종이로 재활용되었다.
세초를 했던 개천과 조지서의 모습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선명히 표시되어 있다.
세초를 마치면 이를 축하하는 행사인 세초연洗草宴이 베풀어졌다.
조선후기 실록이 산으로 간 까닭?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을 치룬 후에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1부씩 보관하였다.
사고는 실록 등 주요한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전주·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의 위험이 제기되었으며,
실제 중종대에는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사고가 화재를 당한 적도 있다.
급기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에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한 읍치에 소재한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왜적들의 주요 침입루트가 된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를 입고 그 존재가 사라졌다.
다행히 전주사고본의 책들은 사고 참봉參奉인 오희길(吳希吉, 1556~1623)과
전주 지역 유생인 손홍록(孫弘綠, ?~?), 안의(安義, 1529~1596)와 같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까지 옮겨지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고가 지역 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올라간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함으로써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사고들이 산으로 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대인들이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이 들지만
후대에까지 길이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험준한 산지만을 골라 사고를 설치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대 이후 조선의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사고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춘추관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를 지역별 안배를 한 후에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그 후 묘향산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의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1653년(효종 4) 화재가 일어나면서
1660년(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사고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리고 사고 주변에는 수호사찰을 배치하여 보다 안전하게 사고를 지키게 했는데
전등사(정족산사고), 안국사(적상산사고), 각화사(태백산사고), 월정사(오대산사고)가 이러한 기능을 하였다.
실록의 관리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3년을 주기로 하는 정기적인 포쇄 작업이었다.
포쇄는 책을 바람에 말려 습기를 제거하여 부식 및 충해를 방지시킴으로써
서적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쇄 작업은 사관들의 주요 업무이기도 했다.
왕명을 받은 전임 사관들은 사고에 가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으며, 포쇄를 한 정황을 모두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실록형지안’과 ‘실록포쇄 제명기’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포쇄는 지방의 4대 사고를 거친 현존 『조선왕조실록』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실록 중에서 정족산본 실록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의 원본 실록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조선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뛰어나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현재까지도 실록의 실물을 접할 수 있는 것에는
조선후기에 사고를 가장 안전한 곳에 배치한 선인들의 지혜가 큰 몫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책임의식으로 무장한 사관들이 철저히 사초를 작성하고, 실록을 관리, 점검한 모습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글·사진.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진. 문화재청,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