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참에 소크라테스에 관한 공부를 했죠
내용은 펌 한 것이고요
^^*그리스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의감옥
필로파포스 언덕 필로파포스 기념유적 근처에 위치하며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은 후 이곳에 억류되어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죄명은 젊은이들을 신에 불복종하고
젊은이들을 잘못 이끈죄로 감옥에 투옥되는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에도 결국 독배가 내려지게된다.
친구인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도망갈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데 법도 법이니까 지켜야하고
법을 지키기로 약속했기에
법이 도덕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죽음 을 맞이하는데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고 싸우는
자신의 철저한 신념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전해지는듯하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한 말은
델포이 신전 7인의 명언중 한 귀절인데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문구이다.
소크라테스가 재판 받을 당시 배심원들의 숫자는 501명이었는데
재판결과 221:280으로 사형 언도를 받게 된다.그때 나이가 69세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내용중에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소문이 나있지만
소크라테스가 쓴 글중에 집에 잘 들어가지 않는 이유중에 시쳇말로 '우리 여편네'라고 하는 글귀를보고
크세노폰이라고 하는 사람이 미리 짐작하고 악처일것이다라고 이야기한것에서 유래되었다고하니
요즘의 악플을 단 결과나 마찬가지일것이다.
그야말로 남 이야기하는것을 재미로 알고 있는 사람때문이랄까~
그러한 일화가 있는 반면에 크산티페의 일화중엔
세 아들을 둔그녀는 까다롭고 화를 잘 내는 성격으로 악처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소크라테스처럼 사물의 원리에 관심이 없는 그녀는 소크라테스에게 쓸 데 없는 일이나 하면서
하루 종일 다닌다고 바가지를 긁기도 했는데
한번은 소크라테스 머리에 물 한 바가지를 부어버리자
소크라테스는 “그래 천둥이 치면 그 다음에는 비가 오는 법이지” 하면서 태연하였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소크라테스(So?krat?s BC 470?∼BC 399)는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와 산파였던 피이나레테의 장남으로 태어나
펠로폰네소스전쟁 때에는 중장보병(重裝步兵)으로 북 그리스로 2회, 보이오티아로 1회 종군했으며
그밖에는 아테네를 떠난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자연에 대한 연구도 했으나 그 뒤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 아테네의 거리와 시장·체육관 등에서 대화와 문답을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BC 5세기 후반에 활동했으며 서구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세 인물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가운데서 첫째 인물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그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 즉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와 이탈리아 우주론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변에서 인간생활의 성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로 철학의 초점을 옮겼다. 그는 도덕적 가치가 침식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기에 살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충고와 도덕적 용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윤리생활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아테네 제국을 세운 델로스 동맹의 창설자 아리스티데스(Aristides the Just) 가문의 친구였다. 신비의 조각가 다이달로스가 소크라테스의 선조였거나 조각이 가업이었다는 플라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아버지가 조각가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회고록 작가인 키오스의 이온은 전쟁중이던 BC 441~ 439년에 소크라테스가 사모스에서 아낙사고라스의 제자 아르켈라오스와 사귀고 있었다고 전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 테오프라스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르켈라오스의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BC 423년 아리스토파네스와 아메이프시아스 등이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아테네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크세노폰은 그녀의 기질이 불 같았다고 전하지만 그녀가 바가지 긁는 여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의 참을성은 대단했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직이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06~405년에는 500인회(불레) 회원으로 있었으며, 아르기누사이의 승전자들을 재판할 때 처음에는 동료 회원들과 함께, 나중에는 혼자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참주들의 위헌적인 유죄판결을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자는 권력자 아니토스로서, BC 403년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주의자의 두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기소자는 별 볼일 없는 멜레토스였다. 기소 이유는 2가지, 즉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당시 30인 참주의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민주정을 시행하고 있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반민주주의적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의 우두머리였던 크리티아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혐의였다. 그는 배심원 투표에서 약 280 대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기소자는 사형을 요구했다. 항소가 받아들여져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변론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도리어 국가 공헌자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법정의 배심원들을 흥분시켜 501명 가운데 361명의 요구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테네 규칙에 따르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24시간 이내에 '독배를 마셔야' 했는데, 델로스로 신성한 배를 보내는 기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형집행이 1개월간 미루어졌다. 그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면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크리톤이 탈출계획을 꾸몄으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판결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판결은 법정의 판결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파이돈 phaedon〉에 잘 기술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성격과 생활방식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기이한 편이었다. 뚱뚱하고 키가 작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들창코이고 입은 컸다. 마치 주신(酒神) 실레노스 같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가 "내면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당대에 가장 곧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테네 국민의 심성도 개선·발전시키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또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인격이나 이론은 주로 플라톤의 대화편과 크세노폰의 〈회고록 Memorabilia〉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모든 시간을 길거리와 시장, 특히 김나시온(고대 그리스의 단련장)에서 보낸 듯하다.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의 모임에 종종 참여하기도 했지만, 정치가·시인·예술가의 본분, 옳음과 그름에 대한 생각, 관심거리 등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이러한 대화의 목표는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한 아폴론의 델포이 신전의 유명한 신탁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소크라테스가 동료들에 대한 사명을 의식하기 전에 나온 것으로 지혜에 관심을 가진 집단에서 그가 최고의 명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무지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자처했다. 그는 델포이의 신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동료들로 하여금 무지를 깨닫게 하고 영혼의 선(善)을 위한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임무를 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등한시하기보다는 차라리 당장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스스로의 선언을 통해 그 믿음을 증명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그의 옷은 항상 같았다. 그는 신도 신지 않았고 웃옷도 걸치지 않았다. 소피스트인 안티폰은 "그처럼 살아야 한다면 노예조차도 도망가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주제넘게 간섭 잘 하는 인물로 생각했다. 한편 자기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이 되려고 그와 사귀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소크라테스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고 그 원칙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브리테니커 참조인용)
첫댓글 소녀 2명? 여행복장이 동화속에 나오는 분위기입니다.^^
그렇잖아도 함께가신분들이 십년 젊어 보인다길레 ㅋㅋㅋ
덕분에 소크라테스와 가족사, 지조를 다시금 새깁니다.!
모녀 덕분에 귀한 렐릭(relics)을 호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넘 감사해요
소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데에서, 그렇게 즐거워하셔도 되남유? ㅋㅋㅋㅋㅋㅋ
그르게요 제부가 요래 포즈를 잡으래서 아무 생각 없음이 오류 같아요 ㅋㅋㅋ
유치장 크기와 환경은 어떻습니까?
협소하고 바위를 뚫어 만들어서
그때는 어땠는지
따님과 화사한 기억에 오래갈 여행이였군요. 행복한 가족애를 느낍니다 감옥앞에서
아주 좋았어요
한 번쯤 가볼만 한 곳 같아요
사물의 원리에 관심없는 여자같구먼...그런 여자가 매력이 더 있다니까 ㅎㅎㅎ
ㅎㅎㅎ
아..저분이 ..........너자신을알라 ...........그양반이시구나.아 그치? ㅎㅎ 동생하고간겨?.......엄마나 딸이나 차이가없네
우리 김조교는 늙은 엄마땜에 늘 마음이 .....ㅉㅉ.....여튼 잘갔다왔네....너 자신을알라....................
동생네랑 ㅎㅎ 신나게 놀고 먹고 집에와서 아프고 ㅋㅋㅋ